2018. 2. 23. 19:53ㆍ이런 저런 내 얘기들/내 얘기.. 하나
입원해 계시던 병원이 우리 집에서 매우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 …… )
제가 모질게도 끝까지 찾아가 뵙지를 않았더랬습니다. 아니, 30년 세월을 온통 그런 ‘관계’로 살았습니다.
허나, 葬禮는 죽은 자의 몫이 아닌 산 자의 몫 ─
2박3일 동안 제게 주어진 喪主의 역할을 다하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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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소를 지키며 앉아서 ─
장차 내 장례 때의 제단(祭壇)은 내가 그린 그림으로 꾸며야겠다는,,
쓸모없이 값비싼 국화로 허황되이 장식할 것이 아니라,,
내 초상화와 더불어 四季의 풍경을 다섯 폭 병풍으로,,
훗날에도 제사며 차례상에 요긴하게 쓸 터인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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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묻히는 일에 대하여
/ 김훈
봄볕이 내리쬐는 남도의 붉은 흙은 유혹적이다. 들어오라 들어오라 한다. 부드럽게 부풀어오른 붉은 흙 속으로 들어가 누워서 백골을 가지런히 하고 쉬고 싶다.
가끔씩 죽는 꿈을 꾼다. 꿈에 내가 죽었다. 죽어서 병풍 뒤로 실려갔다. 병풍 뒤는 어두웠다. 칠성판 위에 누웠다. 병풍 너머에는 나를 문상 온 벗들이 모여서 소주를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나는 죽은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살아서 떠드는 이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취한 벗들은 병풍 너머에서 마구 떠들었다. 내가 살았을 때 저지른 여러 악행이며, 주책이며, 치정을 그들은 아름답게 윤색해서 안주거리로 삼고 있었다. 취한 벗들은 정치며, 문학이며, 영화며, 물가를 이야기했다. 저렴한 가격으로 세련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술집이며, 이발소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내 귀에는 취한 벗들의 떠드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아, 저 한심한 자식들. 아직도 살아서 저런 헛소리들을 나불거리고 있구나. 이 자식들아, 너희들하고 이제는 절교다. 절교인 것이다. 아, 다시는 저것들을 상종 안 해도 되는 이 자리의 적막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나는 그렇게 적막하게 갈란다. 병풍 뒤 칠성판 위에 누워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죽은 자의 위엄과 죽은 자의 우월감으로 처연했고 내 적막한 자리 위에서 아늑했으며, 병풍 너머의 술판에 끼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었다. 나는 미소 지으며 누워 있었다. 그러니 그때 나는 덜 죽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나를 염하러 왔다. 나를 내다버리러 온 것이었다. 내 입을 벌리고 쌀을 퍼넣었다. 나는 이승에서의 밥에 진저리가 났으므로 쌀을 뱉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입이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발가벗겨서 베옷을 입히고 꽃신을 신겼다. 그러더니 내 손발을 꽁꽁 묶었다. 나는 너무 아파서 살려달라고 울면서 빌었다. 저 캄캄한 흙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일을 생각하니, 발버둥이쳐졌다. 그러나 발버둥이는 쳐지지 않았다. 나는 발버둥이쳐지지 않는 발버둥이를 버둥거리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이 등판을 적셨고 아내는 돌아누워 잠들어 있었다. 마당에서 개 짓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개 짖는 소리에 매달려 다시 이승으로 돌아왔다. 써야 할 원고의 마감 시간이며, 글의 방향 같은 것들이 다시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어둠을 쳐다보면서 땀에 젖은 요 위에 누워 있었다. 나는 문상 왔던 병풍 너머의 벗들이 그리워서 어둠 속에서 울었다. 나는 죽지 않았던 것이다.
봄의 무덤들은 평화롭다. 푸른 보리밭 속의 무덤들은 죽음이 갖는 단절과 차단의 슬픔을 넘어선 지 오래다. 그 무덤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죽음은 바람이 불고 날이 저물고 달이 뜨고 밀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편안한 순리로 느껴진다.
30년쯤 전에 아버지를 묻을 때, 내 어린 여동생들은 데굴데굴 구르며 울었다. 나는 내 동생들한테 울지 말라고 소리지르면서 울었다. 지금은 한식 때 아버지 묘지에 성묘 가도 울지 않는다. 내 동생들도 이제는 안 운다. 죽음이, 날이 저물면 밤이 되는 것 같은 순리임을 아는데도 세월이 필요한 모양이다.
전남 여수의 어떤 무덤들은 보리밭 한가운데 들어앉아 있다. 봉분이 두 개다. 마을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그 무덤은, 살아서 한평생 그 밭을 갈아먹던 부부의 무덤이라고 한다. 살아서 갈아먹던 밭 속으로 들어가 눕는 죽음은 편안해 보였다. 어떠한 삶도 하찮은 삶은 아닐 것이었다. 살아 있는 동안의 기쁨과 눈물이, 살아서 갈어먹던 밭 속에서 따스한 젖가슴 같은 봉분을 이루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인 것처럼 보인다.
땅이 없는 가난한 어부들은 죽어서 바닷가의 버려진 땅에 묻힌다. 포항이나 울진의 바닷가를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저어가면 이런 무덤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무덤들은 바닷가 잡초 속에서 봉분이 허물어져 있고, 풀들이 언제나 해풍에 쓸리고 있다. 이런 무덤들은 물에서 먼 쪽이 명당이다. 바다가 사나운 날에 물가에 가까운 봉분들은 파도에 씻겨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농부가 밭에 묻히듯이, 가난한 어부들은 백골을 바다에 준다. 그 아들들이 다시 고기를 잡고, 쓸려나간 봉분의 흔적조차도 이제는 편안해 보인다. 바다가 춥고 땅이 따뜻한 것도 아닐 것이다.
돌산도에는 고인돌 옆에 요즘의 무덤들이 들어서 있다. 구석기 이래로 죽음의 수만 년이 봄볕 속에서 나란히 포개져 있다. 사람들이 죽어서, 수만 년 지층의 켜처럼 가지런히 누워 있다. 놀라운 평등의 풍경이 거기에 펼쳐져 있었다.
영동 민주지산 아래 동네에는 한 집안의 다섯 어른 무덤을 대문 앞에 모신 집도 있다. 성묘가 따로 없고 후손들이 들고나며 무덤에 절한다. 그 무덤들은 죽어서 떠났지만 결국 떠나지 않은 사람들의 무덤이었다. 그 무덤들은 삶의 지속성 속에서 평화로워 보였다. 그래서 모든 무덤들은 강물이 흐르고 달이 뜨는 것처럼 편안하다. 비가 개면 바람이 불듯이, 그 편안함이 순리로 다가올 때까지, 이승에 남아서 밥벌이나 하자. 벗들아, 그대들을 경멸했던 내 꿈속의 적막을 용서해다오. 봄볕 쪼이는 흙 속의 유혹은 아마도 이 순리의 유혹이었을 것이다.
지상의 무덤들 자꾸만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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