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에 대한 신문칼럼 두 개

2011. 3. 22. 08:38책 · 펌글 · 자료/인문 · 철학 · 과학

 

 

1.

 

일본인들에게 세계가 놀라워하며 경외심에 찬 격려를 보내고 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어릴 때부터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이른바 ‘메이와쿠’ 교육을 철저히 받아왔기 때문이라든가,

평소 재난대책 훈련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라는 등의 설명도 가능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벼랑 끝의 위기 앞에서조차 침착성과 차분함을 잃지 않는 일본인들의 행동양식과 관련하여

그 배경으로서 일본문화의 특징에 궁금증을 품게 된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상과 체념의 문화’이다.

 

일본문학사와 사상사는 무상을 무상 그대로 살아가면서,

덧없고 모순에 찬 세상 속에서 그 덧없음과 모순을 음미하는

일본인의 불가사의한 체념관을 잘 보여준다.

이때의 체념이란 불의의 재난과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그 슬픈 감정을 미학적으로 승화시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인과는 달리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죽음 앞에서 발작적으로 통곡하는 대신

눈물을 안으로 삼키면서 차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이런 체념에 익숙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은 체념관은 일본의 전통종교라 말해지는 신도(神道)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재난의 슬픔 또한 평온한 일상과 마찬가지로 ‘가미(神)’의 길을 따라 걷는 것이며,

그런 슬픔 자체 안에 안심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많은 일본인들은 생사의 고통과 모순 앞에서 슬픔으로 인해 통곡하고 오열하기보다는

체념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고 ‘다음’을 생각하려 애쓴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인들은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인 위기대응 방식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일본인의 미의식을 대표하는 개념 중에 ‘모노노아와레(物哀)’라는 것이 있다.

이는 일종의 일본적 애상감으로 슬픔 앞에서

“타자와의 공감을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자신의 마음을 갖다 놓는 감정이입의 미학적 감수성”

이라는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모노노아와레의 공동체’라 할 만한 일본사회 내부에서는

“논리보다 감성이 더 일차적인 현실을 구성한다”.

위기 앞에서도 자신만큼이나 남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일본인들의 행동양식은

바로 이런 미학적 감성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폐허 속에서 물과 기름을 비롯한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광경을 보았던
많은 이들은

일본인들의 침착하고도 성숙한 시민의식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시민성’은 서구적 의미의 ‘시빌리티’와는 다소 뉘앙스에 차이가 있다.

일본인들의 ‘시민성’은 특히 근세 도쿠가와 사회에 뿌리를 내린 미학적 연대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근세일본에서는 렌가(連歌)나 하이쿠(俳句) 같은 시가라든가 다도 등의 미적 전통에서

자발적이고 수평적인 동우회 소집단들이 수없이 많이 생겨났다.

이와 같은 소집단의 활성화를 통해

일반인들 사이에 대중화된 미적 교양과 모노노아와레적 공통감각이 널리 확산되었고,

그것이 낳은 자발적이고 수평적인 연대의식의 토대 위에

오늘날 일본인들의 성숙하고 역동적인 시민의식이 형성된 것이다. (全文 아님.)

 

경향신문. 2011.03.19 박규태 (한양대. 일본언어문학)

 

 

 

 

 

 

 

2.

 

무사가 골동품 가게에서 접시 하나를 만지며 묻는다.

“값이 얼마인가?” “네, 스무냥입니다.”

“스무냥? 아니 이 사람아. 이게 무슨 스무냥이란 말인가? 자네는 주인이 아닌 게로군.”

“제가 바로 주인인데요.”

“주인이라? 주인이면서 접시 하나 값도 모른다? 딴소리 말고 주인을 부르게.”

주인이라던 사람이 그 말을 듣더니 접시를 도로 뺏어 땅바닥에 탕탕 때려 부순 뒤 말한다.

“자, 이래도 내가 주인이 아니란 말이오?”

김소운의 수필 ‘목근통신’에서 옮겼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이처럼 ‘앗사리(시원, 담백)’한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구질구질하게 사느니 목숨을 초개처럼 던질 수 있어야 진짜 사무라이라는 것이다.

김소운은 ‘하가쿠레(葉隱)의 일화’라는 제목의 글에서 사무라이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한다.

<하가쿠레>는 무사도에 관한 책으로 일본의 대표적 고전 중 하나로 꼽힌다.

‘나뭇잎 그늘’이라는 말처럼 초야에 은둔한 무사 야마모토 쓰네토모가 구술한 것을 정리한 책이다.

떡집 이웃에 무사와 어린 아들이 살았다.

어느 날 아이가 가게에서 놀고 간 뒤 떡 한 접시가 없어졌다.

떡집 주인이 아이를 의심하자 무사가 말했다.

“아무리 가난해도 내 자식은 사무라이의 아들이다. 남의 가게에서 떡을 훔쳐 먹을 리 만무하다.”

그래도 떡집 주인이 계속 의심하자 무사는 그 자리에서 아들의 배를 갈라 결백함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 칼로 떡집 주인을 베어 죽인 뒤 자신도 할복한다.

 

“죽을까 살까 고민할 때에는 죽는 편이 낫다.” <하가쿠레>에 나오는 말이다.

일본의 무사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책은 “무사도란 죽음을 깨닫는 것”이라며

“반드시 죽는다는 생각을 날마다 되새겨야 한다”고 가르친다.

“창과 칼에 찢기거나, 거센 파도와 타오르는 불길에 내던져지거나,

번개에 맞고 지진으로 죽게 될 때”의 심경을 상상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죽어 두라”는 것이다.

핵 재앙을 막기 위한 일본의 사투가 처절하다.

죽음을 각오하고 원자로에 접근한 일본인들을 현대판 ‘사무라이’라며 세계가 응원을 보내고 있다.

김소운은 ‘하가쿠레의 일화’를 “소인의 성정”이라며 부정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의인의 살신은 또 다른 이야기다.

“이웃을 위해 죽어 두는” 것은 절망을 베어내는 현대판 ‘하가쿠레’라 할 만하다.

 

경향신문 2011.03.19. '여적' 김태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