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 '만종'의 진실

2011. 2. 25. 11:18미술/내 맘대로 그림 읽기

 

 

 

 

 

                        '만종(The_Angelus)' 1857~1859 캔버스 유채  55.25 x 66.04 cm  루브르 박물관

   - 밀레의 《만종》에 대해서 검색해봤습니다. 3가지 종류의 글이 보이더군요. 출처 생략하고 옮겨봅니다 -

 

 

 

1.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는 평생토록 500여점의 유화작품을 남겼는데, 풍경화가로서 또한 초상화가로서 더욱 이름을 날렸다. 그는 풍경화를 야외에서 그리지 않고, 데상을 하고나서는 아틀리에에서 고전적 방식으로 완성하는 화가였다. 밀레의 대표작으로는 <만종>과 <이삭줍기>를 들 수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벽에 걸린 그림은 바로 밀레의 만종(晩鐘)이다. 만종이란 저녁의 종(소리)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만종으로 번역되어진다. 원래 제목은 삼종기도<삼종기도(The Angelus)>이며 이를 알리는 종소리이다. 당시 유럽에서 아침, 정오, 저녁의 종소리에 맞추어 一日三省을 실천하던 종교적인 문화 속에 살았던 시기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그의 나이 45세이던 1859년에 한 미국인 미술애호가로부터 주문을 받아 그려서 완성한 후 1,000프랑에 팔렸다. 이 그림 작품은 1865년에 최초로 전시되었고 여러 미국 소장가들이 소유하다가 최종적으로 프랑스인에 되팔려 루브르에 기증, 전시되고 있다.

 

만종의 그림구도는 단순하다. 하늘(天)과 땅(地), 그리고 노동 중에 잠시 쉬며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성찰하는 사람(人) 즉 천지인을 켄버스 속에 구성한 것이다. 즉 밀레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융화되어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아름다움을 그린 화가이다. 사실 그의 삶은 19세기 화가들이 대부분 그랬지만 첫째 부인 폴린느 오노(Pauline ono)가 2년만에 결핵으로 죽을 때에도 가난으로 속수무책이듯이 너무나 가난했고 그의 그림속의 내용도 가난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이지적이지도 감각적이지도 않으면서 가슴의 힘”으로 우리에게 와 닿는다.

 

하루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는 어스름 황혼 무렵인데 밀레의 그림 배경은 적멸(寂滅)의 상태를 그린 것이 많다. 그의 화제중에는 도회적인 것은 전혀 없으며 농촌과 농가의 전원에서 명상적인 것 즉 고요함에 몰입해 있는 대상을 그렸다. 이와같이 만종은 저녁 황혼이 퍼지는 들판에서 하루의 일과를 마칠 때 쯤 멀리 저녁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속에 부부가 기도하는 모습이다. 그림 속에서는 자연의 소리와 일상의 소리가 고요히 들려온다. 저녁하늘에 울려 퍼지는 성당의 종소리, 누이의 실 잣는 소리, 집으로 돌아가는 양떼의 발자국 소리,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개짓 소리를 그림속에 빠져들면 들을 수 있고 또한 눈을 감아도 볼 수 있다.

 

 

2.

현재 전해지는 그림에는 농부 부부가 씨감자와 밭일 도구가 담긴 바구니를 발 밑에 놓고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원래 그림에는 바구니 속에는 씨감자가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하던 아기의 시체가 들어 있었다. 그들은 배고픔을 참고 씨감자를 심으며 겨울을 보내면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하는 아기는 봄이 오기 전에 영양실조로 죽은 것이다. 그래서 죽은 아기를 땅에 묻기 전에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만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림속의 아기는 사라졌을까? 이 그림을 보게된 밀레의 친구는 충격을 받고 아기대신 다른 그림을 넣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고심 끝에 밀레는 아기대신 씨감자를 그려 출품했고, 그 이후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채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이 담긴 명화가 된 것이다.

 

 

3.

화가 살바도로 달리는 정말 달랐다. 밀레의 만종을 보면 누구라도 신성한 노동후의 고요한 정적과 평화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 '달리'는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 불안감의 까닭을 알아 내려고 집요하게 노력했고 그에 관한 책까지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밀레의 만종에 그려진 바구니를 어린아이의 관으로 보고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수십년 후, 그렇한 그의 투시력은 실제로 정확한 관찰이였음이 밝혀졌다.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루부르 박물관이 자외선 투사작업을 통해 초벌그림에서는 씨감자 바구니가 실제로 어린아이의 관이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 여기에는 이설이 있더군요. 어린아이 관이 아니라 다만 「상자」에 불과하다는 견해와 밑그림의 흔적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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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논란의 핵심은 저 바구니의 용도입니다.

1) 감자를 수확해서 담아오려는 것인지,

2) 아니면 정말로 죽은 아기를 담아온 것인지.

 

 

1)

전자의 입장에서 반박하는 논거는 '쇠스랑'과 '손수레'더군요.

아기를 묻으려면 삽을 가져와야지 왜 쇠스랑을 가져오냐는 겁니다.

그리고 감자를 싣는 손수레를 가져올 이유가 없다는 거구요.

←  수긍이 가는 주장입니다.

감자를 캐보면 아시겠지만 고랑 따라가며 감자를 캐서는 삼태기로 담아다가 군데군데 모아놓고,

나중에 손수레로 다 거둬 뫄서 운반합니다.

 

아! 지금 다시 보니깐 '씨감자'라는군요. 제가 잘못 봤네요.

그렇다면 감자를 수확하는게 아니라 '씨감자'를 심는다는 거군요.

저 곳은 씨감자 심을때 쇠스랑을 쓰는가 봅니다? (저 어릴 때 보면 호미로 살살 긁고 심던데....)

씨감자를 심고 나서 저렇게 기도할까요?  그게 아니겠죠?

또  저 수레에 실은 마대자루를 보세요. 씨감자가 아니라 그냥 감자 자루입니다. 

씨감자 얘기는 뭔가 착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내외가 함께 나와서 작업한 것치고는 수확한 감자가 너무 적네요.

아, 「이삭줍기 」와 같은 거군요. 추수가 끝난 밭에서 긁어 줘모은.

 

 

2)

자, 이제 후자의 주장을 보십시다.

후자의 입장에서는 그림이 나중에 달라졌다는 것이지요?

바구니 속에는 감자가 아닌 아기가 들어있었는데, 그걸 나중에 감자로 고쳐서 그렸다는 얘깁니다.

당연히 옆에 굴러다니는 감자알도 없었다는 거겠고요.

그러면 '손수레'는 어떻게 됩니까?

전자의 반박에서처럼 '손수레'가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손수레가 없었다고 가정하고 그림을 보십시다.

뭐 그다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다구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저 손수레가 없으면 이 그림은 성립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 한가운데에 좌우대칭으로 '││' 이런 식이 되어서 너무도 단순한 구도입니다.

 

 

3)

저 바구니 속에 죽은 아기가 들어있다고 가정한다면 엄마의 자세가 전혀 납득이 안됩니다.

엄마가 저렇게 침착하게 서서 내려다보며 기도한다?

3일장 지내고, 장례식장에서 온 게 아니예요.

지금이 저녁시간대니까 바로 오늘 죽은 것으로 봐야 합니다.

서양 여자들은 저런가요?

우리 같으면, 애 엄마가 울고불고... 애 아빠는 뜯어말리고…… .

아기가 겨울을 넘겼다니깐 대충 6개월은 됐겠습니다. 한참 이쁜짓 할 때죠.

뭐, 집에서 실컷 울고 나왔기 때문에 진정이 됐다고 칩시다.

그렇더라도, 쭈그리고 앉아서 기도를 해야 맞지요.

또  기도를 하자면, 먼저 매장할 구덩이부터 파놓고서 해얄 거 아닙니까?

기도부터 하고 구덩일 파요?

 

 

4) 자, 결론 짓겠습니다.

만일에 바구니 속에 아기가 들어있었다면 전혀 다른 그림이되어야 합니다.

이 작품은 감자를 수확하고 나서 기도하는 그림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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