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1. 16:42ㆍ미술/내 맘대로 그림 읽기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서예에 대한 책을 빌려본 적이 있습니다.
중국은 서법(書法)이라고 한다니까 '서법에 대한 책'이라는 게 맞겠습니다만
임태승이라는 분이 쓴『중국 서예의 역사』라는 책입니다.
말 그대로 동진(東晉)시대 왕희지 때부터 줄줄이 꿰 내려와서 청나라 때까지를 망라한 ─
들어보면 누구나 알만한 그런 명필(名筆)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제 중국화가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던 중에 얼핏 본 게 있었는데,
중국은 역대 유명한 화가만 헤아려도 4만 명이랍니다.
<- 유명 화가가 그 정도라면 글씨로 유명한 사람은 얼마겠습니까?
아무리 "신토불이"라 하더라도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다른 모든 문화나 마찬가지로 서화(書畵)에 있어서도
특히 중국 ‘ 일본과는 더불어서 보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합니다.
얘기한대로, 중국은 서법(書法), 일본은 서도(書道), 우리는 서예(書藝),,
<- 참 절묘한 말입니다. 어찌 그리도 국민성을 잘 표현했는지.
우리 민족은 '끼' ,'멋', '신들림', '정(情)' 같은 것이 많다고들 합니다.
'한류(韓流)라는 것이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죠.
........
........
일반인들은 추사가 세계적으로 압도하는 서예가인 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봐도 추사의 글씨가 멋있긴 합니다.
그런데 꼭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서예(書藝)'라 점에서’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서법'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서도'로 보는 것도 아닌, '서예'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추사의 괴이한 글씨는 그림에 가깝습니다.
<- 즉, '글씨라는 기법으로써'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말 그대로 서화(書畵) 입니다.
추사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를 보면 잘 알 수 있죠.
유명한 <세한도>도 잘 보면 전체적으로 글씨와 그림의 배열이 절묘한 회화적 구도로 되어 있습니다.
<- 그러니까 추사는 '서예(書藝)의 본질'을 최고조로 잘 살린 사람이다.
추사와 교류하였던 중국인들도 그 점에 감탄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붓글씨로 쓰는 것은 대부분 한자(漢字)이지만, 한글도 예쁘게 써놓으면 보기가 좋거든요.
그러나 이 경우에도 '서예'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봐 줄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서법'이라거나 '서도'라는 시각에서도 그렇게 봐줄 수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본 서도가들도 자기네 일본글자를 '서도작품'으로 쓰는지도…….
아래는『중국 서예의 역사』책, 앞머리에서 발췌해 본 것입니다.
왕희지의 《난정서》라는 것인데, 그와 관련한 저간의 사연들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난정서》 전체로 보는 것과 그 속에 낱개 글자로 한 자 한 자씩 뜯어서 보는 것과 차이가 많더군요.
검색을 해보시면 게시물이 많이 올라와 있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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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가 남긴 글씨는 초서, 행서, 해서 등 세 종류가 내려온다.
「한절첩(寒切帖)」등이 초서로 유명하고,
해서로는「황정경(黃庭經)」「악의론(樂毅論)」등이 가작으로 꼽히며,
행서의 명품에는「평안첩(平安帖)」「쾌설시청첩」등이 거론된다.
그의 서체 중 천재적 창조성이 가장 돋보이는 것이라면 역시 행서이다.
필세에 힘이 있고 변화무쌍한 행서의 대표작으로「난정서(蘭亭序)」를 꼽는데 이론이 있을 수 있을까?
동진(東晉) 시기 永和9년(353) 3월 3일에 왕희지와 사안 등 41명이 산음의 난정에 모였다.
물가에서 몸을 깨끗이 하여 제액을 떨어버리는 '불계'라는 행사를 치르기 위해서다.
의식을 치룬 후 굽이굽이 도는 물에 술잔을 띄워놓고,
술잔이 멈추면 그 앞에 앉은 이가 술을 마시며 시를 읊는 여흥을 즐기게 되었다.
술이 얼큰해진 왕희지가 이 자리에서 서문을 지었는데
일필로 써 내려간 것이 바로「난정서」이다.
수미(首尾)호응의 배치를 보라.
반듯함과 기욺에, 곧추 마주서는 뻣뻣함보다는 서로 읍하고 사양하는 듯한 어우러짐에,
엇비슷한 고루함 보다는 대비에 힘을 주었다.
시원한 종횡의 유려함. 점획에 묻어난 그 멋스런 변화의 자연스러움.
이보다 더 눈에 찰 수는 없으리라.
기운생동의 필의가 묻어난 '음(陰)'자를 보라.
다시 상하기복의 리듬이 살아있는 '영(暎)'자를 보라.
행서의 역동성이 맥락처럼 흐르는 '무(茂)'자는 또 어떤가.
게다가 서로 다른 스무개의 형색이 입혀진 '지(之)'자에 이르면,
글자와 행간에 여지없이 배어나오는 그 순간의 신명이 눈에 닿을 듯 선연하다.
이를 두고 '천하제일행서'라는데 어찌 이의를 달 수 있겠는가?
- 임태승, 『중국 서예의 역사』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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