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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펌글 · 자료/역사

처칠과 유머

  

 

"다변은 사고를 합리적으로 압축하지 않는

  나태한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

 

 

 

 

 

 
 당시 2차 세계대전의 주요한 키로 생각됐던
윈스턴 처칠의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
사진작가 요셉프 카쉬 [Yousuf Karsh]는
처칠이 항상 물고 있던 시가를 뺏어 재빨리 찍은

사진이다.  

좋아하던 시가를 뺏어간 작가에 대한 불만 어린 표정이 그대로 남아있어 굉장히
유명한 사진이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이 처음 하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그의 라이벌들은 정견회장에서 그에 대한 인신공격을 시작했다.


“내가 듣기에 상대방 후보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그런 게으른 사람은 의회에 앉을 자격이
습니다.”

그러자 이어 등단한 처칠이 이에 대해 멋지게 응수했다.
“아마도 나처럼 예쁜 마누라를 데리고 산다면 당신들도 일찍 일어나지 못할

겁니다.”


청중들은 웃었고 처칠은 물론 당선되었다.

 

 

  


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지도자의 자질로 볼 때 상당히 큰 약점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약점은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좋은 공격포인트가 될 수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부지런함의 상징이고 보면
아침에 늦게 일어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게으름의 표본이다.
국민의 존경을 받아야 할 지도자가 게으르다면 이야말로 심각한 일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상대방의 공격을
유머로 받아 넘긴 처칠의 응수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처칠의 말에 담긴 의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의회의 의원으로, 국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서 중요한 것은
그보다 훨씬 많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처칠의 아내가 정말 예쁜지 아닌지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처칠의 말을 달리 해석하면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훌륭한 의원은 아니라는 말이다.


칠이 그러한 상대의 공격에 이렇게 응수했다고 가정해보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과 의원으로서의 역할은 다릅니다.’
저 내용이 말하고자 하는 실질적인 의미였지만 만약 처칠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의미의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말려들게 된다.
그것은 곧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좋은가 나쁜가의 단순 논리로 논쟁이 될 수 있으며,
쟁점이 그런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사람이 훨씬 불리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고 은근 슬쩍 넘기는 한편
의원 선출의 중요한 덕목을 빠뜨리고 그런 미세한 사생활을 헐뜯는
상대방에 대한 은근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는 유머는 처칠 유머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이 곤란한 상황에 빠져있을 때
유머로 벗어나는 일은 유머가 가지는 멋진 매력이다.
그러나 그런 유머들이 유머 감각만 익힌다고 누구에게나 생기는 것은 아니다.
매사에 자신이 있고 여유가 넘칠 때 비로소 입을 통해 표현되어지는 것들이다.
멋진 유머로 어려운 상황을 넘기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여유를 가지는 일이다.
유머는 여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글쓴이 잃어버림.)

  

 

  

 

 

처칠의 유머 모음. 

  

처칠은 뛰어난 말솜씨로 낭랑한 연설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장난꾸러기 같은 유머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처칠은 실제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먼, 재기 넘치는 수많은 표현 -

 심지어 그는 이따금 실제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몰랐다 - 을 하지 않고는 못 배겼다.

생전에 처칠 자신이 결코 하지 않는 말이라고 강력하게 부인한 말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그런 표현을 했다는 사실에 정말 기분이 좋을 수 있다는 말,

그럼에도 그가 하지 않았던 말 역시 그가 했던 말로 남아있다.

따라서 이 책에 나오는 재치 넘치는 말이나 이야기를 하나같이 처칠이 제일 먼저 했다고 100% 보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처칠이 만든 말들도 있을 것이고, 그가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는 말들도 있다.

 

  

   

회에 참석했던 윈스턴 처칠이 급한 볼일로 화장실에 갔습니다.
마침 걸핏하면 그를 물고 늘어지는 노동당 당수가 먼저 와서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처칠은 그를 피해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섰습니다.
노동당 당수가 물었습니다.
“총리, 왜 날 그렇게 피하시오?”
처칠은 대꾸했습니다.
“당신네들은 큰 것만 보면 무조건 국유화해야 한다고 하잖소.”

 

 
 

로히 당선된 처칠이 첫 직무 날.....이 시대의 소명과 영국인의 위상이라는.... 

명 취임 연설을 아주 근엄하게 마쳤다......

모든 정부직원들이 그의 연설에 감동하여...

영국 만세 !

처칠 만세 ! 를 외쳤다... 

처칠이 취임식을 마치고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는데...

만세를 하듯이 두 팔을 들어 벽에 대고 소변을 보았다..

이를 본 정부 직원들이 너무 이상해서 물어 보았다...

'총리님께서는 늘 만세하는 폼으로 일을 보십니까?'하고  물었다..

'아니... 주치의가 절대로 무거운 것은 들지 말라고 해서'

 

  

계에서 은퇴한 후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던 처칠이 어느 날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한 부인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짓궂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총리님, 남대문이 열렸어요! ”
처칠은 짐짓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죽은 새는 새장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법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2차대전 초기, 영국의 처칠 수상이 미국의 원조를 얻기 위해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숙소에서 목욕을 한 뒤 수건만 두르고 있는 처칠의 앞에 돌연 루즈벨트가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습니다.

순간, 몸을 일으키던 처칠의 허리에서 갑자기 수건이 스르르 흘러내렸습니다.

정장의 루즈벨트와 알몸의 처칠. 참으로 기묘한 장면입니다.

"보시다시피 영국의 수상은 미국의 대통령에게 숨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번은 처칠이 어느 식당에서 술 취한 병사를 만났다. 그는 처칠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를 '"뚱보아저씨'라 지칭하며 화장실의 위치를 물었다.

함께 간 일행들은 놀라 그 병사를 제지하려 했지만 처칠은 이렇게 응수했다.

"복도를 따라가다가 왼쪽으로 돌면 나와요. 문에 '신사'라고 써 있는데, 그 말 때문에 지체하지는 말아요."

  

 

칠이 보수당을 떠나 자유당 후보로 입후보했을 때, 보수당 후보로 맞서게 된 힉스 경이 선거전에서 말했다.

 “처칠 경이 당적을 옮긴 모순된 행동을 해명하기 바랍니다.”

 처칠이 말했다.

 “지금까지 본인은 보수당에서 바보 같은 짓만 해왔으나, 이제 바보 같은 짓을 그만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국 노동당의 창시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로 서로 토론하고 있는 것을 보고 처칠 수상이 끼어 들며 말했다.

 “그건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야.”

 “아니 왜 콜럼버스입니까?”

 “콜럼버스는 출발할 때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몰랐고, 도착한 다음에도 자기가 어디에 도착해 있는지 몰랐어.

게다가 그는 이 모든 일을 순전히 남의 돈으로 해냈거든.”

 

   


느 신문기자가 처칠에게 물었다.

 “정치가가 되려는 꿈을 품고 있는 청년에게 요구되는 자격이 있다면 그건 어떤 것일까요?”

 “그건 내일, 내주, 내달, 그리고 내년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할 수 있는 재능일 것이오.”

 그는 일단 말을 끊었다가 곧 다시 말했다.

 “그리고 훗날 그 예언이 맞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재능까지 갖고 있어야 하겠지요.”

 

   


국 사교계에서 입이 거칠기로 소문난 에스더 부인(초선 의원?)이 처칠에게 말했다.

 “당신이 만일 내 남편이었다면 당신의 커피에 독을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처칠이 즉시 대답했다.

 “에스더 부인, 내가 당신의 남편이었다면 기꺼이 그 커피를 마셨을 것입니다.”

 

  

 

 

칠이 방송 시간에 맞춰가기 위해 급히 택시를 잡아 타고 말했다.

 “BBC 방송국으로 갑시다.”

 “손님, 미안하지만 다른 차를 이용해 주십시오. 한 시간 뒤에 처칠 경의 방송이 있는데 그걸 들어야 하거든요.”

 그 말에 흐뭇해진 처칠은 1파운드의 돈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 순간 운전수의 낯빛이 대번에 변했다.

 “타세요! 그까짓 처칠이고 뭐고 우리야 돈이 최고지요.”

 

 

  

 

 칠의 대중 연설 때, 한 여성이 다가와서

 이 군중들 좀 보세요! 당신처럼 연설 잘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어요!"

"칭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만, 전 많은 군중이 모일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일 내가 교수형에 처한다면 이 보다 두배는 많을 것이라고."

 

  


텔 매니저는 처칠이 어떤 음식과 술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워싱턴 주재 영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설명하고 있는 중인데,

 전화에서 "예?"라는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플라자 호텔의 매니저로 처칠 수상의 기호를 물어보고 있습니다."

"처칠은 소박한 기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고에 손쉽게 만족을 하는 편입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프, 아빠가 네 말을 가로채는 동안에는 제발 이 아빠의 말을 가로채지 말아라."

 

   

"신의 피조물들이 발명한 물건들을 보면서 조물주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할지 몹시 궁금하다."

 

   

"국을 여행하던 중에 할리우드에 들러렀을 때였다.

처칠은 찰리 채플린을 만났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처칠은 체플린에게 다음에는 어떤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지 물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은채 채플린은 "예수 그리스도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처칠은 천연덕스럽게 채플린에게 되물었다.

"저작권은 확보해 두셨습니까?"

 

  

 

"는 브랜디를 원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끊을 수 없는 평생의 습관을 방해하는 것처럼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참총장 몽고메리 장군이 "저는 음주와 흡연을 하지않는 100% 괜찮은 사람입니다."라고 잘난 척을 하자,

처칠은 "저는 음주도 하고 흡연도 하는200% 괜찮은 사람입니다."

 

  

 

녁 식사 자리에서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면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돌았다.

마침내 처칠의 차례가 되었는데, 잠시 뜸을 들이더니 아내를 쳐다보면서 힘줘 말했다.

"처칠 부인의 두 번째 남편이 되고 싶습니다."

 

  

 

회장에서 우연히 매우 엄격한 감리교 목사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명랑하고 젊은 웨이트리스가 두 사람 앞으로 칵테일 잔을 가지고 다가왔다.

그녀는 칵테일 잔을 먼저 처칠에게 건넨 다음 다시 목사에게 건넸다.

목사는 대뜸 "아가씨, 술에 취하느니 간통을 저지르는게 낫겠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처칠은 웨이트리스를 다시 불러세우며 "아니 잠깐 아가씨, 그렇게 선택하는 거였수?" 

 

    

 

 

느 날, 버나드 쇼는 'Pygmalion' 첫 공연에 윈스턴 처칠 총리를 초청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습니다.

 TO WINSTON CHURCHILL :

Am reserving two tickets for you for my premiere. Come and bring a friend if you have one.

(처칠 귀하, 귀하를 위해 제 작품 첫 공연 표 두 장을 남겨놓았습니다.

친구가 있으면 함께 오셔서 보시지요.)

  

그러자, 처칠의 답장은 이러했습니다.

 Impossible to be present for the first performance. Will attend the second if there is one.

(첫 번째 공연에는 참석 할 수 없군요. 두 번째 공연이 있으면 그때나 참석하겠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셨나요? 

즉, 버나드 쇼가 if you have one(친구가 있으면) 이라고 sarcastic comment(빈정대는 말)를하자

처칠이 if there is one(두 번째 공연이 있으면) 이라고 맞받아친 것입니다.

두 사람 다 없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one이라는 부정대명사를 썼습니다.

그러므로 버나드 쇼는 처칠에게 친구가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모욕을 주고,

처칠은 쇼의 연극이 1회 공연으로 끝날 것이라고 맞불을 놓은 것이랍니다.

 

 

  

생전에 그에게는 친구뿐만 아니라 적도 매우 많았고, 왕성한 정치 활동과 재기 넘치는 창조성을 발휘했다.

나아가 걸핏하면 논쟁을 벌였고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처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살펴보면 그를 좋아한 사람도 무척 많았고, 증오한 사람도 무척 많았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애증의 감정을 느꼈다는 점이다.

 그는 원기왕성하게 행동했는가 하면 응석받이처럼 행동했고,

유치하면서도 동시에 천진난만하게 행동했으며, 다감하면서도 잔인하게 행동했다.

뿐만 아니라 꼬치꼬치 따지기도 했고 황소 고집이었으며,

근면하면서도 관대하게 생동했고,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단호했고 늘 최고가 되려고 했다.

처칠은 이 모든 특징이 결합된 상당히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그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그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했던 유화 '마라케시(사진)'가

12월 중순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다.

아프리카 북부의 아틀라스산맥을 배경으로 모로코의 고도 마라케시의 이국적 풍경을 그린 이 그림의 낙찰가는

 100만 달러(약 9억원)를 넘어설 것이라고 소더비 경매장 측이 27일 밝혔다.

1951년 처칠이 트루먼에게 우정의 표시로 선물했던 이 그림은

트루먼의 딸인 마거릿 트루먼이 소장해 오다 경매에 내놓았다.

 

 

  

 

 

 

칠은 아마추어 화가로 유명했다. 한번은 마가렛 공주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풍경화만 그리나요?”

 그러자 수상이 말했다.

 “그야 나무나 돌 같으면 인간 모델과는 달라서, 나중에 실물과 다르게 그렸다고 해도 불평 따위는 하지 않으니까 그렇지요.”

 

  

칠이 어떤 미술전의 심사위원이 되자 미술가가 항의하였다.

“아마추어의 실력으로 어떻게 미술가들의 작품을 심사할 수 있습니까?”

처칠이 답변했다.

“나는 한번도 달걀을 낳아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달걀의 품질에 대해 평가할 수는 있습니다.”

  

 

 

 

 

《Paingting as a Pastime》라는 책으로 출간된 그림에 관한 글을 비롯해 엄청나게 많은 글을 발표했으며,

찰스 디킨스와 월터 스코트가 발표한 글보다도 많은 글을 발표했다.

그는 "모세보다도 많은 책(구약의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썼다고 하는 모세와 견주어)을 출간했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화가 존 라베리 경이 "그가 정치인이 아닌 화가의 길을 선택했다면 아마도 걸작을 그렸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할 만큼 처칠은 그림을 잘 그렸다.

루브르 미술관은 그의 작품을 찰스 모린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그는 탱크를 발명해내는 독창성과 아울러 정신적인 응용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p12)

 

  

 

 

카리스마

  

카리스마가 아닌 카리스마적 리더쉽을 지닌 처칠

 

윈스턴 처칠은 한번도 카리스마를 의도적으로 내보이지 않았던 반면

아돌프 히틀러는 카리스마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처칠은 카리스마로 오해할 수 있는 리더쉽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것은 카리스마가 아니었다.

카리스마적인 리더쉽은 추종자들이 모든 것을 지도자의 은혜로 돌릴 정도로 불가사의한 요소가 깔려 있다.

이런 형태의 권력은 전통에 뿌리를 두거나 제도화된 권위에 근거를 두고 있지도 않다.

다시 말해 관습이나 법에 구애받지 않으며, 민주주의 체제에서 투표로 선출된 정치가의 권위와도 다르다.

독일 국민이 히틀러에게 허용했던 것만큼 영국 국민은 처칠에게 독재 권력을 허용하지 않았다.

처칠은 국민에게 영감을 주는 지도자의 원형이었지만 초인적이라느니 비범하다느니 하는 따위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여겨지지는 않았다.

 (누구나 그런 평가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1940년 6월 전시 내각실에 초빙되어 처칠에게 독일 공군의 라디오 빔 유도장치에 관해 설명한

젊은 과학자 R.V.존스는 쾌활한 천성의 처칠에 대해 그는 충만한 생명력의 근원이었다.

나는 전시에 그를 만나고 나면 저절로 충전되는 느낌이 들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미완의 리더쉽으로 카리스마를 연기했던 히틀러

 

히틀러의 마법에 걸린 사람들의 사례는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

도대체 히틀러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히틀러는 정치에 입문하고 얼마 안 있어 눈을 깜빡이지 않고 노려봄으로써 상대방을 겁먹게 하거나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면 결단력과 강한 신념의 소유자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었다.

 아이들이 놀이 삼아 누가누가 오랫동안 눈 깜빡이지 않고 견디나 내기라도 하듯이,

히틀러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싶은 상대를 바라볼 때면 눈을 거의 깜빡이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한 사람들은 안절부절못했다.

알베르트 슈피어의 회고에 의하면

 한번은 히틀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눈 깜빡거리지 않기 내기를 했다고 한다.

히틀러가 먼저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노려보았다.

슈피어도 눈을 깜빡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히틀러는 슈피어가 굴복하기를 기다리면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노려보기 내기를 하면서 유치한 경쟁심이 발동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시선을 피하고 싶은 충동을 이기려고 젖 먹던 힘까지 내야 했다.

슈피어는 이렇게 회고했다.

 때마침 히틀러의 옆에 앉아 있던 여인이 양념통을 집어달라고 했기 때문에 다행히도 내기는 거기에서 끝났다.

히틀러가 상대방을 뚫어지게 응시할 때마다 어머니를 닮은 녹색과 회색이 어우러져

희귀한 옅은 푸른빛을 띠는 눈동자는 더욱 신비함을 발했다.

히틀러의 눈길을 받은 사람들은 그 신비한 매력에 압도되기 일쑤였다.

프랑스 대사였던 로베르 쿨롱드르도 그의 시선에 오금을 피지 못했고,

 작가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191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극작가)도

그의 눈을 쳐다본 순간을 일생일대의 사건으로 표현하였다.

미국 대사의 딸이었던 마샤 도드는 그 눈을 본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증언했다.

또 니체(독일 철학자)의 누이 엘리자베스는 그의 두 눈이 나를 샅샅이 ?고 또 ?었다고 묘사했다.

 툭 튀어나온데다 속눈썹이 거의 없었던 총통의 눈동자는 묘하게도 최면 효과가 있었으며,

 적어도 나치스의 정치 선동에서는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게서 카리스마를 느낄 경우 그것은 상당 부분 자기 암시에서 비롯된다.

만일 쿨롱드르나 하우프트만, 도드가 사전에 히틀러의 위압적인 눈동자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었다면

그의 시선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지 모른다.

물론 사람들이 단순하게 히틀러의 시선만으로 카리스마를 느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카리스마라는 것이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는,

몇몇 사람만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특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카리스마는 습득할 수 있는 것이며,

 마치 내가 전지전능한 것처럼 보이도록 꾸미는 일종의 속임수다.

다시 말해 카리스마를 타고 나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누구나 히틀러를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로 기억하면서도

그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일개 사병으로 참전했다든가 비엔나에서 실패한 화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히틀러는 정치적 성공과 더불어 스스로 숭배의 대상이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카리스마를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 히틀러는 완전무결한 초인의 이미지를 교묘하게 가꾸었고,

 마침내 사람들로부터 그 터무니없는 과대망상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히틀러의 전기 작가 이언 커쇼는

 1936년 무렵 히틀러의 정신 상태를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기 미화상태라고 표현했다.

  

 

카리스마는 환경이 주는 선물이다.

 

우리가 어떤 지도자에게 감히 우리가 도전할 수 없는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는(혹은 그녀는) 자연히 카리스마를 갖게 된다.

 카리스마란 말은 영혼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적어도 추종자들의 눈에는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의 권위가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종의 사이비 종교인 나치즘은 별개의 문제다.

 역사가 마이클 벌레이는 나치 이데올로기가 메시아를 신격화하는 종교와 얼마나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지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총통의 권위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고,

히틀러는 이런 초인적인 위치를 잘 유지해나감으로써 얻은 카리스마를 교묘히 강조했다.

이를테면 그는 대중의 반감을 살 위험이 있거나 자신이 실수할 수 있는 어떤 일에는 연루되기를 꺼렸다.

 또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좀처럼 드물었으며,

 특히 인간의 평범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은 일부러 피했다.

히틀러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앞에서는 긴장을 풀기가 어렵다는 점을 인정했다.

레니 리펜슈탈이 찍은 영화를 보면 히틀러는 사교 장소에서 친절하고 쾌활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생활에서는 인간적인 온기나 매력이 부족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고의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사람들과 진실한 인간 관계를 맺지 못했으며,

그나마 허물없는 친구는 알자스 산 블론디(히틀러의 애견으로 그가 죽기직전 독살됨) 뿐이었다.

 

  

모름지기 지도자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과장된 연기를 하는 성향이 있었지만 그 점을 잘 아는 지도자였다.

초기에 그는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배우려고

바바리아 출신의 코미디언 바이스 페르들의 연기를 연구했다.

뮌헨의 티어슈슈트라세에 있는 누추한 방에서 배우처럼 거울 앞에 서서 몸짓이나 포즈를 끝없이 연습했다.

 심지어 히틀러는 자신이 연설할 장소의 음향 상태를 직접 조사해 목소리의 어조나 높낮이를 조정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대중과의 일체감을 조성하고 흡인력을 높이기 위해 군가나 깃발의 물결, 폭풍 같은

 대규모 군대 행렬, 그리고 무엇보다 극적인 조명 - 이따금 군용 탐조등을 사용하거나 손에 횃불을 들게 했다 -

따위의 영화적 효과를 집회나 연설회에 사용했다.

 현대 정치 집회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선동 기법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처칠을 이런 히틀러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이다.

처칠은 집회를 몇 번 갖지도 않았고 특수 효과는 물론 스핀 닥터(정치전문가, 운동원같은 선동가)를

 동원하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장소는 의회나 라디오 방송국처럼 대중과 직접 마주칠 기회가 적은 곳이었다.

그는 말로써 상대를 설득시키는 토론에 의존했다.

그를 20세기 최고의 웅변가로 만들어준 것은 선동적인 수법이 아니라 탁월한 언어구사 능력이었다.

 처칠은 웅변술은 전적으로 타고나는 것도, 전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피나는 연습과 노력으로 얻어진다고 썼다.

그는 타고난 웅변가라기보다는 완벽주의자였다.

그의 친구 버컨헤드 경이 윈스턴은 한창 시절에 연설 원고를 쓰느라 몇 년을 보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현대의 여느 정치가들처럼 청중의 이해력 수준에 맞춰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듯

거만하게 말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자신의 해박한 역사 지식에 배경을 두고, 국민들이 전쟁의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역사적 자긍심을 깨우칠 수 있도록 진솔하고 호소력있는 이야기를 펼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을 뿐이다.

처칠은 히틀러와는 다르게 국민이 듣고 싶어할 이야기를 했던 것이 아니라,

영국인들의 삶에 위안을 주거나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대신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국가적 위기 속에서 총리가 되고 3일 후 하원 연설에서 했던 말은

아주 유명하다.

내가 드릴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밖에 없습니다.

 

 

 

 

아들을 ‘아기공작새’로 키운 처칠

  

윈스턴 처칠은 세계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위대한 정치가이다.

 가난한 귀족가문에 태어났지만 명문가임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자녀교육에서만은 실패했다.

 아들 랜돌프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어 아들은 아버지 명성에 기대어 사는 가냘픈 생활을 한 것이다.

다시말해서 인생을 아름답고 즐겁게 살려는 노력없이

 아버지 틀 안에서 살아가 영국 사람들은 그를 ‘아기공작새’라는 말을 붙여주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헬리콥더 부모, 밑에서 자란 아들을 ‘마마보이와 걸,이라고 싫어하지 않는가?

스스로 자립할 수 없도록 부모가 기르는 것이다.

부모만 쳐다보고 취직을 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한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의지하고 사는 것이다.

자가용을 비롯한 집도, 용돈도 사주고 대주는 가련한 신세가 된다는 것이다.

 

얼마동안은 아니 부모님이 계시는 동안은 안정을 취하고 행복한 삶을 꾸려갈지 몰라도

 창조적인 삶, 즉 노력한 만큼의 댓가가 주어지는 생활이 참다운 인생사인 것을 모르는 그것이

 불쌍한 사람 아닌가 한다.

  

자녀들은 어머니보다 아버지의 직업 즉 아버지의 가업과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는

 미국의 교육학술 연구에서 나왔듯이

아버지가 자기분야에서 이름을 낸 사람들은 그 영향을 아들이 받도록 꾸준히 가르침을 주게 된다고

 러셀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자녀교육은 관심의 폭을 한 방향으로 좁혀갈 때 아들은 아버지 이상으로 탁월해 진다고 조언하면서

그 예가 한니발, 프레드릭 대왕, 모차르트, 존 스튜어트 밀이라고 한다.

 

뚜렷한 목표와 목표를 이루려는 열정은 자신이 원하는 그 어떤 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지

스스로 찾게 한든 또한 열정은 목표를 이루기까지 부딪히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바로 아버지다.

아버지---- 아들이 행여 빗나가면 옆에서 훈수를 두고 간간이 목표설정이 올바른지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지

점검을 하는 정도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인생에서 2세에서 14세까지 인성을 비롯해서 지식 사고 창조력 등이 발휘되고 확산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이런 시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소홀히 취급해왔다.

 대학교육을 중시하고 투자를 가장 많이 하는 고위 관리자도 이런 점에서 반성해야 한다.

 기본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기본 바로선 나라가 선진국 자격이 있다. 기본이 바로 선 국민이어야 나라가 잘 된다.

기본이 바로선 사람이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

 이렇게 중요한 기본을 정립해주는 사람이 부모이다.

가정이고 ---- 그리고 학교교육이다.

   

 

 

 

'철의 장막'이라는 용어 

  

 "지금 독일 국민이 총을 내려놓는다고 해도  소련의 거대한 영토 앞에는 동유럽의 '철의 장막'이 드리워질 것이다."

- 괴벨스 ,  독일 나치 정권의 선전장관

  

1946년 3월 5일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공산당의 팽창을 경고하였다. 

 "발트해의 스테틴에서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철의 장막'이 대륙을 가로질러 드리워지고 있습니다."

 '평화의 근력'연설이라고도 불리는 이 연설로 인해

 '철의 장막'은 2차 세계대전후 소련 진영에 속하는 국가들의 폐쇄성을 풍자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처칠은 이 연설이 있기 전인 1945년 5월 독일 점령 이후, 미국 대통령 트루먼에게

"소련 쪽 전선에 이미 '철의 장막'이 쳐지고 있으며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 라고 편지를 보낸적이 있다.

당시 처칠이 보낸 보도자료에는 연설 원고에 '철의 장막'이라는 용어는 없었다.

훗날 처칠은 이 용어가 연설을 한 시간 앞두고 떠오른 아이디어라고 했다.

하지만, 철의 장막이라는 용어는 나치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최초로 사용하였다.

 1945년 2월 괴벨스는 처칠보다 한발 앞서 유럽의 '볼세비즘화'를 경고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인 루즈벨트와 처칠, 스탈린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소련의 팽창을 막기 힘들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철의 장막'이라는 용어를 썼다.

그러나, 당시 괴벨스의 이 말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난후 처칠에 의해 더욱 유명해 졌다.

 

 역사의 흐름과 동서 냉전시대의 개막을 괴벨스도 알고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