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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주 단대공정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5)훙산·량주문화 중원을 향해 달리다

입력: 2008년 01월 11일 17:16:48

 

 

 

 

“헌원(황제)의 시대에 신농씨의 세력이 쇠약해지는 시기였다. ~헌원이 곰(熊), 큰 곰, 비·휴·범과 비슷한 동물. 비는 수컷, 휴는 암컷), 추(·큰 살쾡이), 호랑이(虎) 등 사나운 짐승들을 길들여 판천(阪泉)의 들에서 염제와 싸웠는데 여러 번 싸운 끝에 뜻을 이뤘다.”

“치우가 또다시 난을 일으켜 헌원의 명을 듣지 않아 헌원이 제후들로부터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의 들판에서 싸워 결국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천자로 삼아 신농씨(염제)를 대신하였으니 그가 바로 황제다.”

중국 역사서 사기 오제본기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 담긴 함의와 선후관계를 떠올리면서 이 글을 풀어야 할 것 같다.



#깨지는 중화사상

량주 문화의 본산인 량주 판산 무덤. 한 개의 무덤에서 수많은 옥벽(둥근 옥)이 쏟아졌다. 훙산 옥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중국 역사계는 중원중심, 한족(漢族)중심, 왕조중심의 중화사상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왜 춘추전국 시대부터 만리장성을 쌓았겠습니까. 그것은 장성이북, 옌산(연산·燕山)이북은 본래 오랑캐의 소굴이고 단지 중원문화의 수혜를 받은 문화열등지역이라고 폄훼했기 때문입니다.”(이형구 선문대 교수)

중국은 예로부터 사방의 오랑캐들을 사이(四夷)라 했는데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했다. 얼마나 천대하고 괄시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1970년대 말부터 중국학계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 BC 4500~BC 3000년) 유적의 출현 때문이었다. 물론 1930~40년대에도 장성이북과 이남의 문화가 융합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당시 발해유역에서 동북문화 특징인 지(之)자문 빗살무늬 토기(통형관)와 중원 양사오(앙소·仰韶)문화의 특징인 홍도 및 채도가 공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우월한 중원의 양사오 문화가 열등한 훙산문화에 영향을 준 결과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러나 그 오랑캐의 소굴인 동북방 뉴허량(우하량·牛河梁)과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에서 제단(壇)과 신전(廟), 그리고 무덤(塚) 등 엄청난 제사유적이 3위 일체로 확인된 것이다. 이뿐인가.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유역인 차하이(사해·査海)에서 중국 용신앙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용형 돌무더기가, 차하이-싱룽와(흥륭와·興隆窪·BC 6000년)에서 옥기의 원형과 빗살무늬 토기, 덧무늬 토기 등이 쏟아졌다. 중국학계는 기절초풍했다.



#휘황찬란한 량주문화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다. 역시 남만(南蠻)의 소굴이었던 장강(양쯔강) 유역에서 탄생한 이른바 량주(양저·良渚)문화도 난공불락의 중화주의에 결정타를 안겨주었다. 훙산문화보다 약간 늦은 량주문화의 찬란한 옥기와, 흙으로 쌓은 엄청난 규모의 고분군, 그리고 궁전터와 제사유적 등.

예컨대 량주문화의 대표격인 량주 유적은 30㎢의 면적에 50곳이 넘는 건축지와 거주지, 고분군을 자랑한다. 특히 판산(반산·反山) 12호는 중심대표인데, 그곳에서 나온 옥월(玉鉞·옥으로 만든 도끼)과 옥종(玉琮·구멍 뚫린 팔각형 모양의 옥그릇) 등 옥문화는 휘황찬란 그 자체다.

“훙산문화의 옥과 비교하면 약간 차이가 있죠. 량주보다는 이른 시기인 훙산옥은 사실적이고 조형적인 반면 량주의 옥문화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정교합니다. 옥에 세밀화를 그린 듯한 1㎜의 세공기술은 지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죠.”(이교수)

량주 유적에서 확인된 옥종(예기). 훙산옥이 조형적인 반면 량주 옥문화는 세밀화를 그린듯 정교함을 뽐낸다.

옥월과 옥종은 예기이자 위세품이다. 옥종이 의식에 사용됐다면 옥월을 포함한 각종 부월(도끼)은 군권을 뜻한다. 이 판산 고분의 주인공은 바로 신권과 군권을 한꺼번에 차지했다는 뜻이다.

또한 판산 인근의 모자오산(막각산·莫角山) 유적군은 량주문화 유적군의 중심점이다. 동서 길이 670m, 남북 폭 450m로 전체면적이 30만㎡에 달한다. 높이 10m의 인공토축을 쌓았고, 그 위에 작은 좌대를 3개 조성했다. 유적에는 좌우로 나란히 배열된 직경 50㎝가 넘는 나무기둥들이 있고, 20m가 넘는 초목탄층과 홍토 퇴적층이 보인다. 이것들은 모두 이곳이 궁전터이자 제사를 지낸 곳임을 방증해준다. 야오산(요산·瑤山) 유적에서는 홍색, 회색, 황색 등 3색으로 조성된 대형제단과 묘지가 확인되었다. 량주 유적 조사단은 한마디로 “이곳에는 궁전과 제사기능을 갖춘 대형건축물 혹은 도성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 古國(훙산)과 方國(량주)

문제는 훙산문화와 량주문화의 관계였다.

“량주문화 초기의 옥기를 보면 규범화한 짐승얼굴 도안이 대량 활용되었는데, 이는 훙산문화 옥기 가운데 용형 옥기의 원형을 연상시키거든. 이는 량주문화가 훙산문화의 영향을 또 받았다는 거지.”(이교수)

오랑캐의 본거지에서 잇달아 중원을 능가하는 문화가 터지자 중국학계는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의 표현대로 “통고적(痛苦的), 즉 쓰라린 아픔을 겪으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황하 중류(중원)는 중국문명의 중원(中原)이 아니었음을….

중국고고학의 태두 쑤빙치(蘇秉琦)는 “훙산문화와 량주문화는 차례로 중원으로 몰려와 중화대지에서 4000~5000년 문명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인정했다. 후에 들어서는 중국 최초의 나라인 하나라와 상나라를 형성·발전시키는데 초석을 놓았다고 덧붙였다.

“쑤빙치는 그러면서 중화문명론이라는 것을 개진했지. 즉 3부곡(部曲)이라 해서 고국(古國)-방국(方國)-제국(帝國)의 3단계론을…. 그러면서 훙산문화를 중국 최초의 원시국가단계인 고국, 량주문화를 그 다음 단계, 즉 제후국의 형태인 방국으로 규정한 것이지.”

쑤빙치는 두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최고위층, 즉 왕의 신분임을 입증해주는 유적이 확인된 점에 주목했다.

“취락이 있다해서 다 국가단계가 되는 건 아니지. 일반취락과 중심취락, 그리고 중심취락을 초월하는 최고위층의 공간을 갖춰야 국가단계라고 할 수 있거든.”

이미 살펴봤듯 뉴허량은 단·묘·총 등 3위일체의 조합이 엄격하게 구분된 훙산인들의 성지이며, 특수신분인 제정일치시대의 왕이 하늘과 소통하는 곳이었다. 또한 종교제사 중심인 이곳은 1개 씨족이 아니라 여러 씨족의 문화공동체가 모셨던 곳이었다.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보다 시기가 다소 늦은 량주문화(BC 3200~BC 2200년)는 훙산문화에 비해 취락분화의 층위가 더욱 뚜렷하다. 모든 유적이 정남북의 정교한 배열을 이루고 있으며, 옥기문화 또한 훨씬 정교했다. 쑤빙치는 이런 량주문화를 ‘방국’의 전형으로 표현했다.



#중원을 향해 달려라

그러면서 ‘량주훙산 축록중원(良渚紅山 逐鹿中原)’이란 말로 정리했다. 사슴을 쫓는다는 뜻의 ‘축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유방과 항우가 중원을 향해 다투어 진출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사기에서 딴 이 ‘량주훙산 축록중원’이란 말은 량주문화와 훙산문화가 중원으로 중원으로 질주했다는 뜻이다.

그럼 ‘축록’의 증거들을 살펴보자.

중원 양사오 문화의 본거지인 타오쓰 유적에서 확인된 반용문 토기. 용(龍)의 본향인 훙산문화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우선 동북의 훙산문화와 중원의 양사오 문화의 접촉. ‘오랑캐의 문화’를 ‘통고’의 과정 끝에 ‘중국문명의 시원’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학계가 주목한 곳은 허베이성(河北省) 서북부였다. 1970년대 말, 쌍간허(桑幹河) 유역인 위센(蔚縣) 싼관(三關) 유적에서 훙산문화의 대표적인 문양인 용무늬 채도관과, 양사오 문화의 대표선수인 장미문양의 채도(이른바 묘저구·廟底溝 유형이라 한다)가 나란히 나온 것이다.

최근에는 쌍간허 인근 신석기 유적에서 훙산문화 말기에 해당되는 옥조룡(용 조각 옥기)이 출토되었다. 중원인 진남(晋南) 타오쓰(도사·陶寺)유적에서 출토된 주칠을 한 반용문(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 토기그릇과 외방내원(外方內圓)의 옥벽은 훙산문화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쑤빙치의 결론은 이랬다.

“관중 분지(중원)에서 자생한 장미문양의 채도(양사오 문화)와, 옌산 이북·다링허 유역에서 자란 용인문(龍鱗紋·용과 비늘모양 무늬) 채도 및 빗금토기 옹관(훙산문화)이 북으로, 남으로 향했다. 두 문화는 결국 허베이성 서북부에서 조우했다. 이곳에서 융합된 두 문화는 다시 동북으로 건너가 훙산문화의 꽃인 제단(단)과 신전(묘), 무덤(총)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학계는 이른바 그렇게 창조된 중국문명의 질긴 끈을 베이징 천단(天壇)에서 찾는다. 뉴허량 제단의 앞부분 형태는 천단의 환구이고, 뒷부분은 베이징 천단의 기년전(祈年殿·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낸 곳)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한 무덤의 구조와 후대 제왕릉의 구조가 흡사하다는 점을 꼽는다.

그런데 훙산문화만이 이렇게 중원으로, 남으로 퍼진 것은 아니다.

훙산보다 늦은 량주문화의 ‘축록중원’을 살펴보자. 요순시대 유적으로 꼽히는 진남(晋南)의 타오쓰 유적에는 량주식 토기와 옥기들이 즐비하게 나온다.

또한 산둥반도 남쪽인 쑤베이(蘇北) 화팅(花廳) 유적은 이른바 다원커우(대문구·大汶口) 문화 유적으로 꼽히는데, 이곳에서도 량주문화의 전형적인 정(鼎·솥)과 호(壺·항아리), 옥(玉) 등이 나왔다. 이는 량주문화가 중원은 물론 산둥반도까지 진출했다는 소리다. 저명한 고고학자인 옌원밍(嚴文明)은 이를 두고 “량주문화가 다원커우 문화를 정복했다”고까지 선언했다.

“중국학계는 수레바퀴통으로 문화의 접변과 교류를 설명했어요. 5000년전 중국문명은 여러 부족들의 문화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아 중원으로 모였다고…. 먼저 북(훙산문화)이 중원(양사오 문화)과 교류를 시작하였고, 이어 동남(량주문화·다원커우 문화)과 중원이 교류하고, 북과 동남이 관계를 맺고…. 뭐 이런 식으로 정리했죠.”

중국학계는 모든 문명은 중원에서 나왔다는 ‘일원일체’의 역사관이 훙산·량주 등 여러 문명이 모여 지금의 중화문명을 이뤘다는 ‘다원일체’의 역사관으로 바꾸었다. 그러면서 고대 전설을 이 고고학적인 성과에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즉 사기 등 역사서에서 전설로 등장하는 황제와 염제, 황제와 치우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아전인수로 끌어들인다. 절로 혀를 내두르게 하는 중국학계의 견강부회를 한번 풀어보자.

〈뉴허량·선양|이기환 선임기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6)중국인의 조상 ‘황제’는 동이족었나

입력: 2008년 01월 18일 17:30:35

 

 

 

 

‘황제(黃帝)집단=훙산(紅山)문화 대표. 옌산(연산·燕山) 남북지구가 주요 활동범위. 어렵이 주요 경제활동.’

‘신농씨(염제) 화족(華族)집단=양사오(앙소·仰韶)문화 대표. 중원 속작(粟作)농업이 주요 활동범위.’

지난해 7월30일, 이른바 랴오허(遼河)문명전이 열리던 랴오닝성 박물관 전시실. ‘훙산문화와 오제전설’이라는 제목의 전시공간은 기자의 눈과 귀를 멎게 했다. 훙산문화 시대를 오제전설과 연결시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중국인의 조상이라는 황제를 훙산문화 대표로 ‘등록’한 것이었다.


 

훙산문화와 오제전설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랴오닝성 박물관 전시공간. 황제와 치우의 전쟁이 벌어진 쌍간허 유역 쭤루의 인근 위센에서 훙산문화와 양사오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 공반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 중국인의 조상이라던 황제(黃帝)를 동북의 훙산문화 대표로, ‘염제 신농씨’를 중원의 양사오 문화 대표로 둔갑시켜 놓았다. <선양/김문석 기자>


 

-마오쩌둥도 찾은 황제릉-

참 이상한 일이었다. 황제가 누구인가. 중국인의 조상이 아닌가. 그런 황제가 동이(東夷)의 땅을 대표한다는 것이니…. 그렇다면 치우는? 단군은?

굳이 옛날 기록을 들출 필요도 없다. 1912년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이 된 쑨원(孫文)이 서둘러 한 일은 황제(헌원)에게 제사지내는 것이었다. 훗날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나 공산당의 마오쩌둥(毛澤東)도 1937년 국·공합작 뒤 다투어 찾아간 곳도 바로 황제릉이었다.


 


 


“황제께서 천명으로 나라를 세우시고~. 추악한 치우를 주살하시어 화(華)와 이(夷)를 구분지었네.”(국민당의 제문)

“(황제가) 위대한 창업을 이루시니~. 그러나 그 후예들은 황제만큼 용맹스럽지 못해 큰 나라를 망가지게 했네.”(마오쩌둥의 제문)

이렇듯 너나 없이 ‘축록(逐鹿) 황제릉!’을 외치며 다투어 황제릉을 향해 달려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황제가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국통의 상징이자, 민족정체성의 상징”이었으며 “공산당과 국민당도 비록 정치적인 목표가 달랐지만 권력의 정통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황제를 끌어들이려 한 것”(김선자의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책세상)이다. 중국인들은 왜 자존심을 버리고 그들의 조상으로 추앙해온 황제를 오랑캐의 땅으로 폄훼하던 훙산문화를 창조한 주인공으로 바꿔 부르는 것일까. 누누이 강조하듯 1970년대 이후 발해연안에서 무수히 발견된 문명의 흔적 때문이었다.

 



-황제는 훙산 고국의 초대왕?-

중국의 용 사상이 잉태한 곳이 바로 이곳(차하이·査海·BC 6000년전)이었다. 제단과 신전, 무덤(적석총) 등 3위 일체의 제사유적을 핵심으로 하는 훙산문화가 창조된 곳(뉴허량)도 바로 이곳이다. 즉 제정일치 사회의 왕이 존재한 고국(古國)이 탄생한 곳이다.

그러니 중국인의 입장에서 황제는 ‘훙산 고국’의 초대 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처음엔 크게 당황했던 중국학계는 정신을 차린다. 바로 전설과 고고학 자료들을 교묘하게 끼워 맞춘다. 우선 뉴허량 출토 곰의 뼈를 두고는 “사마천의 사기에 ‘황제는 유웅씨(有熊氏)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곰과 황제를 연결시킨다.

그리고 1970년대 말 허베이성(河北省) 장자커우(張家口) 지구 쌍간허(상건하·桑乾河) 유역인 위센(蔚縣) 싼관(三關) 유적에서 함께 발견된 유물 2점에 주목한다. 동북 훙산문화의 대표 문양인 용무늬 채도관(항아리)과 중원의 양사오 문화를 대표하는 꽃무늬 채도가 한 곳에서 나온 바로 그 곳. 이는 훙산문화와 양사오 문화가 접변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중국학계는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역사기록을 떠올린다.

“이 장자커우 인근에 황제와 염제, 황제와 치우가 싸웠다는 반취안(판천·阪泉)과 줘루(탁록·탁鹿)란 곳이 있어요. 중국학계는 바로 이 인근에서 동북 훙산문화 유형과 중원 양사오 문화가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해석하기에 이르렀지요.”(이형구 선문대 교수)

 



-“피가 백리나 흘렀다”-

사서에 따르면 훙산문화 시기에 즈음해서 문명의 충돌이 두 번 있었다. ‘염제(신농씨) vs 황제’의 ‘반취안(판천) 전쟁’과 ‘황제 vs 치우’의 ‘줘루(탁록) 전쟁’이었다.

“염제(신농씨)가 제후들을 침범하려 했다. 헌원(황제)은 곰과 범, 살쾡이 같은 사나운 짐승들을 훈련시켜 판천(阪泉)의 들에서 여러 번 싸운 뒤에야 뜻을 이루었다. 치우가 또다시 난을 일으켰다. 헌원은 제후들과 함께 나서 탁록(탁鹿)의 들에서 싸워 결국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천자로 삼았으니 그가 바로 황제다.”(사기 오제본기)

‘장자(莊子)’에는 “들판에 피가 백리나 흘렀다”고 했다. 병장기가 핏물에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 고대 동양문명의 맹주를 놓고 벌인 ‘1·2차 대전’의 치열함과 처절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인들에게 황제(헌원)는 이민족의 도전을 뿌리치고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한, 동양문명의 창시자였다. 그야말로 “황제는 중국인의 자존심이자 정체성 그 자체”(정재서 교수의 ‘동양신화’·황금부엉이)였던 것이다.

 



-염제 vs 황제의 1차대전-

그러나 훙산문화 발견 이후 중국학계는 황제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꿔놓기 시작한다.

쑤빙치는 ‘통고(痛苦)의 연구’ 끝에 황제의 고향을 중국 동북방, 즉 훙산문화의 본거지인 발해연안에서 찾은 것이다. ‘훙산시대=황제시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고고학 성과와 역사서의 오제전설 기록을 토대로 지금부터 5000년 전후의 문화구를 3대 고고문화구로 나누었다.

즉 훙산문화의 동북문화구, 양사오 문화의 중원문화구, 그리고 다원커우(대문구·大汶口) 문화의 동남연해문화구 등이다. 그리고 고대 전설상의 오제시대를 다시 전·후기로 나누었다. BC 3500~BC 3000년전 시기를 전기, BC 3000년전~하나라 건국(BC 2070년) 이전을 후기로 각각 구분했다.

훙산문화는 바로 오제시대 전기, 즉 양사오 문화와 상응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훙산문화는 중국문명 기원 과정에서 한걸음 먼저 나갔으며(先走一步) 양사오 문화와 기북(冀北·허베이성 서북부)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바로 제1차 대전인 ‘황제 vs 염제 전쟁’이며, 시대는 오제시대 전기(BC 3500~BC 3000년)에 일어난 일로 보았다.

즉 훙산문화의 용무늬 토기와 양사오 문화의 꽃무늬 채도가 싼간허 유역 싼관 유적에서 공반되어 나온 것은 바로 이 ‘황제 vs 염제 전쟁’을 의미한다.

이것은 쉬즈펑(徐子峰) 츠펑대교수의 말처럼 “두 문화가 충돌한 동시에 교류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는다. 쑤빙치는 “이렇게 충돌·교류한 문화는 다시 발해연안으로 올라가 그 유명한 훙산문화의 단(제단)·묘(신전)·무덤(총·적석총)으로 발전하여 전성기를 이뤘다”고 결론을 내렸다.

“중국학계는 동북방과 중원문화의 충돌·교류 이후 훙산 고국(古國)이 탄생했다고 보았지. 훙산 고국의 초대 왕은 ‘황제’라는 것이고….”(이형구 교수)

쑤빙치 등은 황제의 고향을 동북방으로 연결했다. 황제가 염제와 싸울 때 함께 전쟁터에 나선 곰과 범, 살쾡이 등은 이런 짐승들을 토템으로 삼은 부족들의 명칭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또한 사기 오제본기는 “황제는 일정한 거처없이 옮겨 다녔다”고 했다. 중국학계는 이를 ‘황제족’의 성향을 일컫는 것으로 동북방 민족과 관련이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라고 보았다.


 

 

-황제 vs 치우의 2차대전-

그렇다면 동이족의 신으로 알려진 치우는 무엇인가. 중국학계는 바로 ‘황제 vs 치우 대전’ 역시 오제전설과 역사서를 고고학 성과와 끼워맞춘다.

즉 ‘황제 vs 치우’전을 오제시대 후기(BC 3000~BC 2070년)에 일어난 ‘사실’로 본 것이다. 훙산문화의 전통을 이은 황제족과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치우족의 문화, 즉 다원커우 문화가 역시 충돌·교류한 증거라는 것이다.

BC 3000년 무렵 다링허(大凌河)와 시랴오허(西遼河)에서는 훙산문화의 전통을 이은 이른바 훙산후(紅山後) 문화라 하는 샤오옌(소하연·小河沿)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는 다시 조기 청동기-샤자뎬(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로 성장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누공두(鏤孔豆·구멍뚫은 굽달린 접시)와 주전자(壺), 고족배(高足杯·다리가 높은 그릇) 등 다원커우 문화의 특징을 보이는 유물들이 속출한다. 바로 이것이 동북방(훙산문화 계열)과 동방(산둥반도)의 충돌 및 교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사기 오제본기는 황제·염제 싸움을 먼저, 황제·치우 싸움을 나중에 기록했다”면서 “고고학 성과를 검토하면 역사서가 딱 들어맞는다”고 자화자찬한다.



-치우는? 단군은?-

그런데 여기서 의문 하나. 이 해석대로라면 훙산문화의 창조자와 치우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훙산문화의 주인공은 황제이고, 산둥반도 다원커우 문화의 주인공이 치우라는 이야기이니…. 어찌된 일인가. 그리고 또 하나.

중국학계는 황제를 비롯한 오제전설(황제·전욱·제곡·요·순) 주인공들의 고향을 대체로 동북방으로 본다는 것이다. 훙산문화를 꽃피운 것은 바로 황제라는 것이다. 후계자 전욱(전頊)도 “북방의 대제(大帝)”라는 칭호를 얻는다. 뉴허량 신전에서 끊어진 하늘과 땅의 관계를 혼자 독점하며 제정일치 시대를 이끈 이가 전욱이라는 것이다. 또한 제곡(帝곡·3대왕)은 훗날 상나라의 선조라고 했다.

모골이 송연하다. 이미 ‘하상주 단대(斷代)공정’을 단행, 전설상의 하나라 건국연대를 BC 2070년이라 확정한 중국이다.

그렇게 올려놓은 중국역사가 4000년이다. 그런 중국학계가 이젠 더 나아가 발해문명, 즉 훙산문화를 창조한 이가 바로 황제이며, 그 황제가 중국인의 조상이라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다시 전설의 1000년 역사가 ‘사실(史實)’로 회복된다. 이른바 중국문명 5000년이 확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문명 탐원공정’의 핵심이다.

우리 학계는 중국으로부터 헤어나고 싶은 망령과, ‘실증할 수 없다’는 지나친 결벽증(?) 탓에 제대로 된 연구조차 ‘재야사학’이라며 무시하고 있다. 그런 사이 중국학계는 이미 ‘중국문명 5000년’의 틀을 짜놓고 있는 것이다. 발해연안에서 무수히 발견되는 적석총과 빗살무늬 토기, 그리고 곰 숭배의 원형들…. 중국학계의 견강부회로 그 역사가 황제의 역사라면, 치우와 단군, 그리고 웅녀 등 우리 민족의 흔적은 깡그리 무시되는 셈이다.

전설과 고고학 성과를 완벽하게 끼워 맞추는 중국학계의 움직임과 우리 학계의 무력함에 기자는 가슴이 탁 막혔다.

〈뉴허량·선양|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경향닷컴|이다일 기자 crodail@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