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16. 20:34ㆍ미술/미술 이야기 (책)
책소개
박보나는 영상,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미술가다. 주로 전시와 예술 작품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관객들에게 새로운 관람 태도를 제안할 수 있는 퍼포머티브한 작업을 했다.
《태도가 작품이 될 때》는 미술가 박보나의 첫 예술 에세이로, 동시대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을, 특히 그들이 세상과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를 사려 깊게 읽어낸 책이다. 박보나는 세상을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미술가들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면서 그들의 윤리적 상상력, 그것이 작품이 될 때 우리는 그 상상력을 하나의 태도라고 부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의 제목 ‘태도가 작품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Artwork’는 1969년 스위스 쿤스트할레 베른에서 열렸던 전시 ‘태도가 형식이 될 때 When Attitudes Become Form’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전시는 큐레이터 Harald Szeemann이 기획한 것으로 68혁명 직후에 열렸던 만큼 보수적인 기존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이 전시에서 태도는 이전 체제와 규칙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의미하며, 이 태도는 미술의 관습적인 틀을 거부하는 새로운 작품의 형식과 전시의 형태로 구현되었다. 박보나는 이 책에서 소개하는 작가들 또한 하랄트 제만이 기획한 전시 ‘태도가 형식이 될 때’의 정신을 이어받는다고 말한다.
《태도가 작품이 될 때》에는 박보나라는 미술가가 동시대 미술가들의 작업을 통해 세상을 읽으려고 한 시도가 담겨 있다. 책에 나오는 작가들은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작업을 시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작업을 통해, 일반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다. 세상을 비껴보는 태도가 이 작가들 작품의 큰 중심을 이룬다. 박보나는 결국 예술가의 태도가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미술가. 영상,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 등 매체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작업을 한다. 주로 전시와 예술 작품에 대한 전통적 개념에서 벗어나 관객들에게 새로운 관람 태도를 제안할 수 있는 퍼포머티브한 작업이다. 그동안 진행한 퍼포먼스로 〈봉지 속 상자〉(2010?2012), 〈2′ 33″〉(2013),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을 말해드립니다 1〉(2014), 〈태즈메이니아 타이거〉(2018) 등이 있다.
〈봉지 속 상자〉는 전시를 여는 데 기여한 미술작가와 큐레이터 그리고 전시장 스태프들에게 전시 오프닝 전에 저녁 식사 습관과 취향 등을 물어본 후 장을 보게 하고, 전시 오프닝 내내 그 봉지를 들고 다니며 서로 대화를 나눈 뒤 집으로 가져가 저녁을 해먹을 수 있게 한 작품이다.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을 말해드립니다 1〉은 전시장에서 관객을 안내하고 작품을 지키는 갤러리 도우미들에게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나는 탭댄스 슈즈를 신게 하여 점잖고 정적인 전시 공간의 리듬을 깨고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했던 작품이다.
서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전공을 바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조형예술을 공부했으며, 영국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대학 대학원에서 Art Practice 석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이탈리아, 대만 등을 포함한 국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2013년 뉴욕 뉴뮤지엄 트리엔날레, 2016년 광주 비엔날레, 2018년 아시아태평양 트리엔날레 등 국제전에 참가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목차
저자의 말 5
놀고, 떨어지고, 사라지려는 의지 | 바스 얀 아더르 13
더 시끄럽게 서로의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 바이런 킴 13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 | 조이 레너드 29
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 말 | 박이소 36
익숙한 것이 살짝 어긋날 때 | 가브리엘 오로즈코로만 온닥 44
실재는 무한하다 | 오스카 산틸란 52
목소리가 들리도록 | 우창 63
미친년들이 만개할 세상 | 박영숙 68
우리 안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법 |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75
그 어떤 똑똑한 생각보다 훨씬 위로가 될 때 | 윤석남 84
부조리에 대한 응답 | 장영혜중공업 90
이미지는 언제나 불충분하다 | 조은지 96
사소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수록 | 송동프란시스 알리스 104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다른 것이 보인다 | 박찬경 112
시적인 것의 섬뜩함 | 얀 보 119
우리는 꽤 근사한 춤을 함께 출 수 있지 않을까 | 하산 칸 127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고 | 서현석 135
감사의 말 114
작품 저작권자 및 제공처 145
책 속으로
나는 〈제유법〉을 봤을 때, 그 다양한 색이 사람의 피부색이라고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살구색 정도는 그럴 만도 한데, 푸르스름한 회색이나 분홍에 가까운 색들은 피부색이라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타인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다시 한 번 깨달은 순간이었다. 바이런 킴은 이 수백 개의 직사각형 판을 나란히 배치해 하나의 큰 사각형을 만든다. 판의 배열은 모델을 서준 사람들 이름의 알파벳 순서에 따랐다고 한다. 더 밝은 피부색이 먼저 오지도, 더 어두운 피부색이 나중에 오지도 않는다. 완전한 흰색도 없고 완전한 노란색이나 검은색도 없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구도적 구성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중요하고 하나하나가 중심이 된다.
―‘더 시끄럽게 서로의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 바이런 킴’에서(본문 25쪽)
오로즈코와 온닥의 작업은 우리가 잘 아는 익숙한 일상을 미술 작업과 겹쳐놓음으로써 혼란스럽고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항상 그 자리에 있던 것이 조금 바뀌었을 뿐인데 관객들은 낯설고 껄끄럽다고 느낀다. 나의 일상과 가깝게 붙어 있는 이 불안한 감정은 중요한 자각의 순간을 동반한다. 내 주변의 무엇이 바뀌었는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적극적으로 고민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 크고 요란하며 잘 만들어진 스펙터클한 작업들에 홀려서 의심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해준다.
―‘익숙한 것이 살짝 어긋날 때 | 가브리엘 오로즈코?로만 온닥’에서(본문 50-51쪽)
박영숙은 여성을 욕하고 비하하는 말인 ‘미친년’을 새로운 맥락에서 읽는다. 그녀에게 ‘미친년’은 주체적 응시와 실존감을 깨달은 존재다. 남성의 자리를 넘보기 때문에 ‘시건방진년’으로 불리고, 옷을 제멋대로 입고 가부장 질서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잡년’이라 불리는 여자들이다. 따라서 ‘미친년’은 더 이상 욕이 아니다. 중심을 지키려는 남성들이 ‘꼴 보기 싫어(두려워)’하기 때문에 새로운 가능성을 가지는 희망이다. 나는 어지르고, 흐트러뜨리고, 무너뜨리는 박영숙과 ‘미친년’들의 사진이 신난다. ‘미친년’들이 만개할 세상이 설렌다.
―‘미친년들이 만개할 세상 | 박영숙’에서(본문 73-74쪽)
곤잘레스 토레스의 작업은 그렇게 동성애자에게 찍힌 낙인을 지우고, ‘우리 안의 그들’이라는 이상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곤잘레스 토레스의 작업이 단순히 작가와 그가 사랑했던 연인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감상적 표현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낙인찍고, 그들의 사랑을 배척하는 행동을 멈출 것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요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 안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법 |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에서(본문 82쪽)
박찬경은 역사의 엉킨 실타래 속에서 길을 잃고 잊힌 수많은 개인들의 죽음을 위로한다. 이 위로는 작가가 우리의 역사를, 그것이 아무리 더러울지라도 자신의 뿌리로... 받아들이고 아끼는 방식일 것이다. 귀신은 우리의 역사다. 외계인과는 사뭇 다르다. 귀신은 국가 권력과 사회적 폭력으로 죽임을 당하고 밀려난 우리의 조상이며 이웃이다. 따라서 귀신을 자꾸 이야기하고, 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중요하다. 이 보이지 않는 타자들에게 공감하고 이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우리의 지금 상황과 문제를 알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다른 것이 보인다 | 박찬경’에서(본문 118쪽)
출판사서평
떨어지고, 자르고, 춤추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미세한 제스처로 세상을 이야기하는 예술가들
박보나는 이 책에서 소개하는 미술가들을 “매번 새로운 제로 시점에서 미분의 차이를 가지는 ‘분열증형 인간’에 가깝다”고 말하며, 이들이 보여주는 주변, 소수, 야성, 잡종의 성질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데 집중한다.
《태도가 작품이 될 때》에는 총 19명(바스 얀 아더르, 바이런 킴, 조이 레너드, 박이소, 가브리엘 오로즈코, 로만 온닥, 오스카 산틸란, 우창, 박영숙,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윤석남, 장영혜중공업, 조은지, 송동, 프란시스 알리스, 박찬경, 얀 보, 하산 칸, 서현석)의 미술가가 나온다. 회화, 퍼포먼스, 사진, 영상, 조각 등 장르는 다양하다.
네덜란드 작가 바스 얀 아더르는 지붕과 나무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강둑에서 ‘떨어지고 넘어지는’ 퍼포먼스를 하다가 심지어 서른세 살에 작은 돛단배로 혼자 북대서양을 건너는 퍼포먼스를 하던 중에 사라졌다.(본문 13쪽)
한국계 미국 작가 바이런 킴은 1991년부터 지금까지 가로 25.4, 세로 20.3센티미터 크기의 작은 판 수백 개를 각각 한 가지 색으로 칠한 후 나란히 배치해 하나의 큰 사각형을 만들고 있다.(본문 21쪽)
벨기에 작가 프란시스 알리스는 바윗덩어리만 한 얼음을 밀면서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아홉 시간 동안 거리를 돌아다니는 퍼포먼스를 했다.(본문 104쪽)
에콰도르 작가 오스카 산틸란은 영국에서 제일 높은 산에 올라가 대략 3센티미터 크기의 돌을 하나 주워와서는 그걸 전시장에 놓고는 영국을 아주 미세하게 줄였다고 말했다.(본문 52쪽)
이 책의 표지 이미지로도 쓰인 바스 얀 아더르의 작품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1970)는 작가가 자신의 우는 얼굴을 3분 넘게 비디오로 찍고, 그 얼굴을 사진이나 엽서로 구성한 작품이다. 그는 왜 우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그저 서럽게 운다. 박보나는 아더르의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더르의 작업을 자유의지의 관점에서 읽으면, 그의 울음 또한 작가 자신의 실존감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이 누군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왜 예술을 하는지, 어떤 태도로 작품에 임하고 살아갈지 등 자신의 본질을 진심으로 고민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슬프고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고 긍정적인 것이다. 아더르의 흐느낌도 세상의 규칙과 속도와 상관없이 ‘떨어지고 사라지기’로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과 자신의 실존을 표현한 것이리라.”
―‘놀고, 떨어지고, 사라지려는 의지 | 바스 얀 아더르’에서(본문 20쪽)
비생산적이고 효율적이지 않은 지점에서 생기는 의미
쓸모없어 보이는 예술의 효용
박보나는 이 책을 통해 쓸모없어 보이는 예술의 효용에 대해서 말한다. 책에 나오는 예술가들의 작업은 생산성과 효용성, 논리를 추구하는 관점에서 볼 때 쓸데없...는 짓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보나는 이들의 작업은 비생산적이고 효율적이지 않은 지점에서 의미가 생긴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박보나가 2016년 중반부터 일 년 반 가까이 《한겨레》에 연재했던 글들을 선별하여 다시 쓴 것이다. 저자는 당시 한국 사회를 비껴서 바라보려고 노력했고, 자신과 비슷한 태도를 가진 동시대 미술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세상을 읽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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