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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8. 20:06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트레킹 열 네 번째 날


날씨 : 눈부시게 맑은 하루.
걸은 구간 : 고쿄(Gokyo)-팡가(Fangka)-마첼모(Machhermo)-루자(Luza)-돌레(Dole)
소요 시간 : 다섯 시간 반
복장 및 위생 상태 : 지저분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음



7시 기상. 날은 오늘도 쾌청하다.

아침 먹고 8시 50분 출발.

얼어붙은 호수를 지나 오리들이 헤엄치는 호수를 오른쪽으로 끼고 걷는다.

1시간 남짓 평지를 걷고 나니 돌계단이 나온다.

이곳으로 올라올 때 꽁꽁 얼어있던 길은 그새 녹아 물이 흐르고 있다.

바위틈에서 나오는 차가운 물을 손에 받아 마셔본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지만 뒷맛이 텁텁해 썩 맛있는 물은 아니다.

이제는 왼쪽으로 빙하 녹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이어진다.

귓전을 가득 채우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리.





▲ 멍라 마을. 왼쪽 뒤로는 아마 다블람이 보인다.  

ⓒ2004 김남희



10시 20분 팡가(Pangka 4485m) 도착.
삼십 분 만에 마첼모(Machhermo 4450m) 도착.
남갈 로지(Namgal Lodge)에서 핫 초콜릿을 마시며 잠시 쉰다.

이곳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깨끗한 숙소다.

고쿄에서 우리가 머물던 고쿄 리조트가 따뜻함의 극치였다면 여긴 깨끗함의 극치.

방은 햇볕이 잘 들지 않지만 이 트레일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침대를 갖추고 있다.

나무로 대충 짜맞춘 침상이 아니라 정말 침대다!

부엌과 식당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결국 차 한 잔 마시러 왔다가 우리는 이른 점심을 먹고 간다.

눈 쌓인 설산을 바라보며 언니와 나눈 대화.

"저 하얀 생크림 좀 봐. 먹고 싶다."
"난 크림이 살짝 덮인 고구마 케잌. 피칸 파이도 먹고 싶다."
"…그만 하자."
우리는 점점 말초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걸까.

12시 45분 출발. 1시 10분 루자(Luza 4360m).
루자로 오는 길에 고쿄 리조트의 요리사를 만났다.

등에는 나무 짐을 가득 지고 있다. 돌레에서 나무를 사서 올라가는 길이란다.

루자에서 내려오는 길은 산의 허리를 둘러 벼랑 사이로 난 길. 눈이 녹아 질척거린다.

2시. 라팔마(Lhabarma 4417m).
2시 30분. 돌레(Dole 4080m) 도착.
예티 인에 들러 써니와 캔에게 인사. 써니는 아빠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서는 길이다.

햇살을 등지고 산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눈부시다.

돌레를 벗어나자마자 나무들이 보인다. 고도가 낮아져 식물생장한계선을 벗어났음을 실감한다.

이 길로 올 때는 온 나무들이 눈꽃을 화려하게 피우고 있었는데, 지금 눈꽃은 흔적도 없이 녹고 길만 미끄럽다.

누군가 위험한 구간마다 얼음을 깨고 흙을 뿌려 놓았다. 그 마음이 몹시 고맙다.

4시 15분. 포르체 드렝카(Phortse Drengka 3680m) 도착.
이곳에 집이라고는 한 눈에 보기에도 작고 초라한 두 집뿐이다.

이곳에서 쿰중까지는 두 시간을 더 가야 한단다.

다음 마을인 멍라까지도 언덕을 한 시간 넘게 올라가야 하고.

해가 지기 전에 머물 곳을 찾아야 하기에 결국 이곳에 머물기로 하고 짐을 푼다.

숙소라고 들어와 보니 부엌과 나무 침상 여러 개가 놓인 작은 방 하나가 전부인 두 칸 짜리 집이다.

지금껏 자 본 곳 중 가장 열악한 시설이다.

식구들은 모두 포르체에 살고 19살 된 주인 여자가 13살 된 여동생을 데리고 이곳에 머물고 있다.

오늘 쿰중에서 우아하게 씻으려 했는데 망했다.

그저께 저녁 때 고쿄에서 뜨거운 물에 씻은 후 내내 물티슈로 닦고 있다.

머리 안 감은 지는 내일 모레면 꼭 2주다. 온 몸에는 하얀 밀가루 같은 살비듬이 가득하고….





▲ 눈덮인 바위산과 길  

ⓒ2004 김남희



우리는 화덕 옆에 불을 쪼이며 앉아 (이 집에는 식당이 따로 없다) 먹고 싶은 음식들을 말해 본다.

나 - 계란찜. 오뎅을 듬뿍 넣은 떡볶이. 보쌈.
언니 - 깻잎향이 물씬 나는 순대 볶음. 날아가지 않는 하얀 쌀밥 위에 얹어 먹는 겉절이 김치.
나 - 엄마가 해준 꽃게찜. 엄마가 비오는 날이면 만들어주는 오징어 넣은 호박전.
언니 - 엄마의 코다리조림.
나 - 자장면과 미역국과 갈치구이.
언니 - 엄마가 해주는 잡채랑 멸치볶음.
나 - 오징어채 볶음이랑 잘 익은 총각김치. 그리고 고등어 신김치 조림과 돌솥 비빔밥.
언니 - 매운 오징어볶음.
나 - 부산 오뎅과 제육볶음.
언니 - 이제 그만 할래. 미칠 것 같아.

마지막 남은 물티슈로 얼굴과 발을 닦고, 잠자리에 든다. 생각보다 춥지는 않다.





▲ ‘동네 꼬마 녀석들. 추운 줄도 모르고...’ 볼과 손등이 발갛게 얼도록 물장난을 하고 있는 어린이들. 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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