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8. 20:08ㆍ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트레킹 열 여섯 번째 날
날씨 : 맑음
걸은 구간 : 팍딩(Phakding 2623m)-루클라(Lukla 2804m)
소요시간 : 세 시간
복장 및 위생 상태 : 인간이기를 깨끗하게 포기한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부활
위층 마루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 반.
‘곧 그치겠지’하고 다시 잠을 청해보지만 삐걱거리는 소리는 이제 옆방들로 번져가며 점점 심해진다.
결국 다시 잠들기를 포기하고 침낭 속을 빠져 나온다.
토스트와 오믈렛으로 아침을 먹는 사이, 기얀드라를 찾지만 보이지 않는다.
어제 다른 팀 가이드, 포터들과 어울려 당구장에 갔다더니 결국 8시가 넘어서야 팅팅 부은 얼굴로 나타났다.
밤새 당구 치고 술 마시고 놀다가 오늘 아침에야 나타나다니…
한 소리 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출발하자는 말만 건넨다.
9시에 팍딩을 출발한 지 삼십 분쯤 지나서였을까. 계단을 내려오던 기얀드라가 다리를 삐끗하며 넘어진다.
급한 대로 근육통 약을 발라주고, 괜찮다는 기얀드라를 억지로 주저앉혀 잠시 쉰다.
우리 눈치를 보며 자꾸 출발하자는 기얀드라를 바라보고 있자니 슬슬 화가 치민다.
‘어제 밤새도록 놀다 왔으니 오늘 걸음인들 제대로 걸리겠어?’ 목까지 올라오는 잔소리를 참아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난 그 나이에 어땠던가.
스무살 적에 나는 저렇게 일을 해서 돈을 벌지도 않았을 뿐더러,
‘조국의 미래’를 핑계 삼아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기나 좋아했지, 저축이나 가족의 생계는 생각도 못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그만 화 내자구!
10시 좀 넘어 타도코시(Thadokoshi)마을에서 휴식.
쿠슘 뷰 로지(Kusum View Lodge) 정원에서 음료수 한 잔과 과자를 시켜 놓고 잠시 쉰다.
날씨는 청명하고, 햇살은 따뜻하고, 눈앞으로는 해발고도 6370m인 쿠슘 캉구루(Kusum Kanguru)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이제 두 시간만 더 걸으면 루클라에 도착한다.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곳.
어느덧 트레킹을 시작한 지도 보름을 넘어섰다. 그 사이 풍경은 너무도 많이 바뀌었다.
겨울은 저만치 물러서고, 봄이 성큼 다가섰다.
여자들의 옷차림이 변하고, 부지런히 물건을 지고 나르는 포터들의 발걸음도 가벼워진 것 같고,
뺨에 와 닿는 햇살과 바람의 느낌도 다르다.
길섶에는 봄을 알리는 아주 작은 꽃들도 피어났다. 이 작은 꽃들이 세상을 얼마나 환하게 밝히는지!
걸음이 절로 느려져 루클라에 도착하니 12시가 넘었다.
▲ 얼어붙은 히말라야에도 봄은 온다. 길섶의 보라색 꽃 한 송이가 여행자의 마음을 환하게 밝힌다.
ⓒ2004 김남희
루클라의 좁은 골목은 사람들로 넘쳐 나고, 돌길 위로, 가게의 창틀로, 사람들의 어깨 위로 봄 햇살이 차별 없이 내려앉아 있다.
에코 파라다이스 로지(Eco-Paradise Lodge)로 오니 먼저 카트만두로 올라간 정 선배님이 우리를 위해 돈을 맡겨놓으셨단다.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하루 저녁 푹 쉬라는 뜻에서.
정작 선배님은 고산병으로 인해 칼라파타르도 오르지 못한 채 하산하셨는데
그 와중에도 우리를 위해 이런 마음을 쓰시다니… 선배님의 배려가 감사할 뿐이다.
짐을 풀자마자 다시 전화국으로 달려간다.
여행사에 전화하니 마침 가이드 람이 자리에 있다.
람은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한다.
매니저는 람이 떼먹은 포터비를 우리 돈으로 기얀드라에게 지불하고 카트만두에서 돈을 돌려 받으란다.
결국 이곳 숙소의 주인 아줌마를 증인으로 세워 기얀드라에게 돈을 주고, 영수증을 썼다.
우리가 카트만두에서 이 돈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시 한 번 믿어볼 수밖에.
우선 기얀드라 일을 처리한 후 우리는 샤워장으로 향한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에 감동한 나는 한동안 어지러울 지경이다.
꼭 14일 만에 머리를 감는다. 뜨거운 물에 세 번이나 비누칠을 하며 몸을 씻지만, 결국 때만 불린 셈이 됐다.
온 몸에 하얗게 살비듬만 잔뜩 일었으니. 그래도 내 몸에서 땀 냄새가 아닌 향기로운 냄새가 나니 너무 좋다.
깨끗이 씻은 후 새 옷을 갈아입고, 장작불이 지펴진 난롯가에 앉아 책을 펴놓고 있자니 슬금슬금 졸음이 기척도 없이 밀려든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 기얀드라가 들어서는 기척에 잠에서 깨어난다.
오늘 저녁은 우리가 맛있는 걸 사겠다고 했는데 기얀드라는 그 사이 배고픔을 참지 못해 모모(만두)를 네 접시나 사먹었단다.
"네 개가 아니라 네 접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번을 확인해도 네 접시란다. 부끄러운 듯 웃으며 손가락 네 개를 쫙 펴든 기얀드라가 참 귀엽다.
그래도 한창 때의 젊음이라 우리가 시켜준 치킨 씨즐러를 살 한 점 남기지 않고 알뜰하게 발라 먹는다.
날이 날인 만큼 비록 통조림이지만 파인애플까지 한 통 시켜 후식으로 마무리를 한다.
이제 모든 일이 끝났으니 집에 가도 된다고 해도 기얀드라는 굳이 이곳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우리를 공항까지 배웅하겠단다.
여기서 공항까지는 걸어서 1분 거리인데. 그 마음을 막지 못하고, 결국 그러라고 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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