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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8. 20:07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 멍라 마을. 왼쪽 뒤로는 아마 다블람이 보인다.  

ⓒ2004 김남희



트레킹 열 다섯 번째 날



날씨 : 맑음
걸은 구간 : 포르체 드렝카(Phortse Drengka 3680m)-멍라(Mong La 3973m)-남체바자(Namche Bazaar 3440m)-팍딩(Phakding 2623m)
소요시간 : 7시간 반
복장 및 위생 상태 : 더 이상 지저분할 수는 없다.



6시 반부터 소변이 마려워 깼지만 결국 7시 반까지 침낭 속에서 버틴다.

화장실 갔다 와서 마지막 남은 미숫가루를 우유에 타 먹고(다시 한 번 미숫가루 소년에게 축복을!) 출발 준비.

9시 출발.

날이 너무도 따뜻하다. 여기서부터 한 시간은 꼬박 오르막.

미숫가루 한 잔 먹고 걸어서 그런지 힘이 하나도 없다.

가파른 오르막 내내 유일한 위안은 포르체 마을과 아마 다블람 봉우리가 건너편으로 보인다는 것.

헉헉거리며 한 시간 만에 멍라(Mong La 3973m) 도착.
아주 작고 예쁜 마을이다.

산꼭대기에 서너 가구가 초르텐(불탑)을 중심으로 모여있다.

주변으로는 아마 다블람과 눈 쌓인 산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어제 여기 와서 잘 걸…'
후회해보지만 이미 늦었다.

너무 더워 바지가 몸에 달라붙어 이곳에서 옷을 하나 벗는다.

 여기부터는 다시 벼랑길.

아래로 로사샤 마을을 내려다보며 걷는다.

햇볕은 따스하고 길은 이제 내리막. 봄바람이 살짝 불어오고… 배고픈 것만 빼고 최고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언니 가방에서 육포 두 조각을 꺼내 씹으면서 걷는다.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 기얀드라가 궁금해 “기얀드라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물으니

언니가 전영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를 흥얼거린다. 나도 따라 부른다.

꽃잎은 바람결에 떨어져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데 떠나간 그 사람은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그렇게 쉽사리 떠날 줄은 떠날 줄 몰랐는데 한마디 말없이 말도 없이 보내긴 싫었는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어디쯤 가고 있을까-

한 번 노래에 탄력이 붙으니 무한 탄력이다.

양희은의 ‘한계령에서’‘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봉우리’까지 메들리로 엮어 부른다.

언니가 돌아보며 한마디 한다.
"저것이 고기를 먹더니 숨도 안 차나? 노래를 다 부르고…."





▲ 남체에서 루클라 가는 길의 철다리와 계곡  

ⓒ2004 김남희



혼자 신이 나 노래를 부르며 걷는데 올라오는 일본인 아저씨와 마주친다.

가이드도 포터도 없이 배낭 하나 메고 혼자다. 수영 언니는 "아저씨 멋져요"하고 인사를 건넨다.

잠시 후 포터 하나 데리고 혼자 여행하는 또 다른 일본인 아저씨.

그 후 자일과 헬멧을 가방에 매단 서양인 남자 하나.

"암벽 하러 가니?"하는 내 물음에 "빙벽 등반하러 가"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갑자기 우리 산악회 사람들이 떠오르면서 그리움이 솟구친다.

말을 걸기 시작하면 길어질 것 같아 좋은 등반하라고 인사만 하고 돌아선다.

산을 돌아 마을로 접어드니 바로 컁주마(Kyangjuma) 마을이다.

 11시 20분.

아마 다블람과 탐셀꾸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아마 다블람 롯지'에서 휴식.

이곳에서 점심으로 언니는 치즈샌드위치, 나는 참치샌드위치와 핫 초콜릿을 순식간에 먹고,

다시 계란 치즈 샌드위치를 시켜서 나눠 먹고,

똑 같은 걸 또 시켜서 "미토챠!(맛있어요)"를 외치며 게눈 감추듯 먹었다.

기얀드라도 놀라고, 주문 받는 주인 아줌마도 놀라고, 우리도 놀라고.

밀크티도 공짜로 한잔 얻어 마셨다.

트레킹 역사상 최초의 공짜 티다. 물도 공짜로 얻어서 채우고, 잘 쉬다가 일어선다.

12시 30분 출발.

한 시간만에 남체 바자(Namche Bazaar 3440m) 도착.

눈이 녹아 파란 지붕의 집들이 온전히 드러난 남체는 우리가 처음 왔을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친구들을 만나 정신이 없는 기얀드라를 닦달해 우선 전화국부터 찾는다.

카트만두의 여행사로 전화를 걸어 매니저에게 람의 사기 행각을 고발한다.

그럴 리가 없다고,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는 매니저에게 우선 람부터 만나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고 다그친다.

사실 확인 후 내일까지 비행기 편에 람이 떼어먹은 돈을 보내라고 요구한 뒤 전화를 끊는다.

전화 통화 중 흥분으로 거품을 물고 쓰러질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차분히 용건을 끝내 뿌듯하다.

전화국을 나와 다시 걷기 시작한다.

시간은 어느새 두 시 반을 넘어서고 있다.

길은 내리막. 비교적 넓은 흙길이 이어진다.

친구들과 수다 떠느라 기얀드라 이놈이 안 나타나 여러 번 길가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한참 후에야 나타나 슬슬 눈치를 보며 다가온 기얀드라에게 한 마디 하라니까, 언니는 고작 "가자" 한마디하고 앞장선다.

내려오는 길이 제법 가팔라 올라올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다시 생각이 난다.

옥빛 계곡이 흐르고 침엽수림이 이어지는 이 길의 풍경은 잔잔한 아름다움이다.

첫 번째 철다리에서 우리 나라 방송국 촬영팀을 만났다.

이번 트레킹 중 처음 만나는 한국인이다.

잠시 다리 위에서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두 번째 철다리를 건너니 곧 조살레(Jorsale)마을이다.

마을을 지나 세 번째 다리를 건너 오르막 돌계단을 15분쯤 오르니 몬주(Monju) 마을.

국립공원 사무실로 가 이제 국립공원 지역을 벗어난다는 서명을 하고 나온다.

다음 마을은 추마와(Chumawa).
꼬꼬댁거리며 종종걸음을 치는 닭들이 여기저기 보이고, 야채를 심은 푸른 논밭들이 펼쳐져 있다.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초록색인가. 눈과 마음이 덩달아 시원해진다.





▲ 팍딩에서 만난 등교길의 어린이들  

ⓒ2004 김남희



네 번째 흔들 다리를 건너니 다시 마을이다. 벤카(Benka).

시간은 이미 다섯 시다.

이곳에서 팍딩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길가는 이들에게 물으니 "두 시간"이란다. 이상하다 싶어 다시 물어도 대답은 같다.

결국 다른 집에 들어가 다시 물으니 꼬마 아이가 또 "두 시간"이란다.

우리 계산으로는 분명히 한 시간 미만이 나와야 하는데 두 시간이라니….

위기감에 지도를 꺼내들고 이 마을 이름과 다음 마을까지의 거리를 확인하고 있자니 달려온 기얀드라가 이제 30분 남았단다.

그러면서 우리가 길을 물었던 사람들이 농담을 했다며 미안하다고 전해 달랬단다.

아니, 이 사람들이… 내, 참 기가 막혀서. 농담할 일이 따로 있지.

해가 뉘엿뉘엿 지는 길을 걸어 팍딩(Phakding 2623m)에 도착하니 6시.

이번엔 흔들다리 한 가운데서 야크들이 멈춰 서는 바람에 교통 대란이 벌어졌다.

다리 양쪽에 사람들이 짐을 세워 두고, 혹은 소들을 세워 두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의 기다림이야 아랑곳 않고, 야크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다리 중간을 타 넘어 소들 사이를 통과해 겨우 다리를 건넌다.

나마스떼 롯지(Namaste Lodge)에 짐을 푼다.

남은 신라면 세 개를 다 끓여서 배부르게 먹고, 식당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

언니는 내가 끝낸 <간디 자서전>을 넘겨받았고, 나는 <인간의 조건>을 읽기 시작했다.

난로 옆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는 내게 누군가 서툰 한국말로 "안녕하세요?"하며 인사를 건넨다.

작년 여름에 서울로 출장을 간 적이 있다는 아일랜드인 톰이다.

일주일간의 짧은 출장이었지만 서울은 그에게 꽤 매력적인 곳으로 다가왔단다.

그 후 한국이라는 나라에 흥미를 느껴 <공동경비구역 JSA>나 김기덕 감독의 <섬> 같은 한국 영화도 찾아서 보고,

한국에 관해 알려고 노력하는 중이란다.

톰의 애인인 수잔나는 영어가 너무도 유창해 생각을 못했는데 독일인이란다.

돌레에서 독일인 커플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 수잔나가 박장대소를 하며 독일인이기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다.

매사에 고지식할 정도로 규칙을 준수하고, 직선적이며 따지기 좋아하는 대신 유머 감각이 부족한 게 독일 민족이라며,

독일에서는 이웃과 사소한 충돌이라도 생기면 바로 경찰이나 변호사를 부르고,

일상의 사소한 부분까지 법규로 정해놓았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서 "네가 운이 나빴네. 젊은 사람들은 그 정도는 아니거든"이라며 위로를 해준다.

문득 내가 좋아했던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의 일화가 생각난다.

인생의 후반부 대부분을 이태리에서 보낸 그녀에게 독일 신문기자가 왜 독일에 거주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녀의 대답은 이러했다.

"지구상에서 격정을 공개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이태리니까."

그 대답 끝에 그녀가 덧붙인 이야기.

독일에서는 주차위반을 하면 이웃집 주민이 바로 경찰을 부르지만,

이태리에서는 주민이 다가와 몇 시에 경찰이 단속을 나오는지를 알려준단다.

이런 이야기들 끝에 톰이 유럽인들의 특징적인 성격을 풍자한 오래된 이야기를 해준다.

천국에 가면 경찰은 독일인이고, 요리사는 프랑스인, 애인은 이태리인이란다.

반면에 지옥은 경찰이 이태리인, 요리사는 영국인, 애인은 독일인이란다.

수잔나, 톰과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10시를 넘어섰다.

작별 인사를 나누고 침실로 올라간다. 지금까지의 트레킹 중 오늘이 가장 늦은 취침 시간이다.





▲ 해바라기 중인 마을 여인들. 루클라  

ⓒ2004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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