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8. 20:05ㆍ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 해발고도 5357m 고쿄 리에서 바라보는 에베레스트와 로체, 마칼루
ⓒ2004 김남희
트레킹 열 세 번째 날
날씨 : 화창
걸은 구간 : 고쿄(Gokyo 4750m)-고쿄리(Gokyo Ri 5357m)-고쿄
소요 시간 : 3시간
복장 및 위생 상태 : 떡진 머리, 일주일째 신는 양말.
날은 화창하다. 창 밖으로 햇살을 받고 깨어나는 산과 호수가 건너다 보인다.
고쿄 리(Gokyo Ri 5357m)에 올라가기 위해 작은 배낭을 꾸린다.
언니는 오후에 올라가겠다며 침낭 속에 누워 있고,
나는 미숫가루 한 잔을 뜨거운 우유에 타 마시고 기얀드라를 기다리는 중이다.
7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이 녀석은 밥 먹고 가겠다며 나더러 기다리란다.
기분이 좀 상하긴 하지만 나도 8시에 나왔으니 할 말이 없어 참을 수밖에….
8시 35분 출발.
어, 이거 만만하게 봤는데 길이 장난이 아니다.
'이보다 더 높은 칼라파타르를 올랐으니 이 정도야'하고 생각했는데 보통 힘이 드는 게 아니다.
숙소에서 빤히 보이는 흙산을 오르는 동안 기침이 터져 가슴을 움켜쥐고 서너 걸음마다 한 번씩 쉬면서 오른다.
가도가도 끝없는 길.
눈 앞에 보이는 봉우리인가 싶어 물으면 그 때마다 기얀드라는 "그 뒤"라고 대답한다.
바로 저 봉우리인가 싶으면 다시 다른 봉우리가 나타나고
이번에야말로 다 왔나 싶으면 뒤로 또 다른 봉우리가 보이고…
칼라파타르보다 훨씬 더 힘들게 오른다.
10시 30분.
거센 숨을 몰아쉬며 두 시간 만에 고쿄리 정상 도착.
정상에서는 8000m를 넘는 산들인 초유와 에베레스트, 로체와 마칼루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무도 없는 고개 위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들을 바라보는 기분은 거침이 없다.
인디언들의 글이 생각난다.
사냥을 나간 인디언은 너무도 아름답고 장엄한 대자연 앞에서 말을 잃을 때가 있었다.
바위산 위에는 검은 먹구름과 함께 무지개가 드리워지고,
푸르른 계곡 심장부에서 하얀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드넓은 평원에서는 석양빛이 하루의 작별을 고했다.
그런 것들과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예배하는 자세를 갖추곤 했다.
그러기에 인디언은 굳이 일주일 중 하루를 신성한 날로 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곧 신이 준 날이기에!
지금 이 산에서 머무는 내게도 하루하루가 신이 준 신성한 날이다.
이 세상에 살아있음이, 살아서 내 튼튼한 두 다리로 이곳까지 올라올 수 있음이,
나 홀로 신들의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허락한 그 누군가를 향한 감사의 마음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 고쿄 리에서 바라보는 고쿄 마을과 촐라체와 따우체
ⓒ2004 김남희
30분 남짓 머물다가 하산을 시작한다.
내려오는 길이 워낙 가팔라 발목과 종아리에 부담이 올 정도다.
하산은 50분 만에 완료.
숙소에 도착하니 그제서야 수영 언니가 식당으로 건너온다.
여태 침낭 속에 누워 있었단다. 어제 저녁 8시 반부터 오늘 오후 12시까지! 정말 대단한 허리의 소유자다.
점심으로 커리를 시켜 먹는다.
요리사가 돌레로 나들이 간 탓에 맛이 어제와 다르다.
밥 먹고 햇볕 따뜻한 창가에 누워서 삼십 분쯤 잤다.
이 집처럼 따뜻한 집은 처음이다.
건물 전체가 이중창에 햇볕이 잘 들도록 위치를 잡아 밤에도 입김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따뜻하다.
한숨 달게 자고 일어나 시간을 보니 3시 40분. 짧은 겨울햇살이 부드러워지는 시간이다.
다시 고쿄리로 출발한다.
"You go. I sightseeing (너희들끼리 가. 난 관광하면서 여기서 놀래)"하며 안 간다는 기얀드라를 설득해 올라간다.
선글라스를 꼈지만 걷기가 힘들 정도로 산 뒤로 넘어가는 빛이 강렬하다.
반면에 해가 없는 곳에서는 추위로 온 몸이 얼어붙는다.
지난 번 칼라파타르에 올라갈 땐 눈사태 나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오늘은 빙하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밑에서 올라오던 언니는 3분의 1쯤 와서 추워서 못 가겠다며 내려간다. 그걸 본 기얀드라.
"언니, go down? why? (언니 왜 내려가는데?)"
"아마 피곤한 가봐."
"Tired? No! She sleep morning, we two climb! We tired. she no tired.
( 피곤하다고? 말도 안 돼. 오늘 오전 내내 잠만 잤잖아. 오늘 두 번째 여길 오르는 우리가 피곤해야지, 왜 언니가 피곤해?)"
영어도 잘 하지.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쉽게 다 표현하다니….
▲ 야크 등에 트레킹 장비를 싣고 전진 중인 트레커들과 포터들
ⓒ2004 김남희
언니가 내려가니 흥도 안 나고, 게다가 해마저 산을 넘어가 몹시 춥다.
결국 에베레스트가 보이는 바위산 중턱까지 올라가서 하산을 결심한다.
정상까지 20분만 더 가면 되는데 그냥 거기서 사진 몇 장 찍고 내려오고 만다.
"야, 내가 무슨 사진가도 아닌 주제에 남들은 한 번 오르기도 어렵다는 곳을 두 번이나 오른담. 내려가자, 내려가."
석양을 받은 산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기얀드라는 "디디(누나), 포토?" 어김없이 묻는다.
그러나 춥고, 지치고 배고픈 나는 사진이고 뭐고 관심 없다. "No photo(사진 안 찍어)!" 외치고는 하산이다.
그저 빨리 따뜻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멀리 숙소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그립고 반갑다.
내려가는 길에 이 녀석이 길은 완전히 무시하고 그 가파른 언덕을 그냥 치고 내려간다.
따라가자니 나는 죽을 맛이다.
그나마 지팡이라도 있어서 그걸로 버팀목을 삼아 무릎에 힘을 팍팍 주며 미끄러지지 않으려 기를 쓰며 내려올 뿐.
숙소로 돌아와 "오늘 두 번 오르느라 고생했다"며 저녁 먹으라고 팁을 주니 너무 좋아한다.
계란 라면으로 저녁을 먹고, 난롯가에서 몸을 녹인다.
잠자리에서 삼겹살 먹고 싶다고 얘기했다가 언니에게 혼났다. "그만하고 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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