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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8. 20:04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트레킹 열 한번 째 날


날씨 : 흐리고 눈발 날림.
걸은 구간 : 숙소 앞마당(돌레에서 휴식)
복장 및 위생 상태 : 상당히 불량



7시 기상.
바깥 세상은 온통 하얗다. 아침에 식당으로 가는데 독일 아줌마가 또 앞을 가로막는다.

“나 너한테 충고 좀 해야겠어.

너 오늘 당장 포터 데리고 남체로 내려가. 그게 책임 있는 행동이야. 넌 책임 있는 행동을 할 줄 알아야 해.”

이 아줌마는 어디서 '주먹 안 쓰고 말만으로 열 받게 하는 법' 이라는 강의라도 들은 것 같다.

나도 아줌마 말을 가르며 “충고 고마워"라고 하고 부엌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말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상대에게 들리기도 하고, 안 들리기도 한다는 걸 이 아줌마는 모르는 걸까.

정말 ‘대화의 기술’ 이라는 책이라도 사주고 싶다.





▲ 탐셀꾸가 저무는 저녁 햇살을 받고 있다. 돌레.  

ⓒ2004 김남희


이제는 나도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칼라파타르는 운이 좋아 운동화로 올랐지만, 지금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안 좋은데 정말 저 운동화로 될까 슬슬 불안해진다.

결국 이곳 주인아저씨께 자문을 구한다.

“솔직히 말하면 내 생각에는 남체로 내려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지금은 눈이 많이 와서 상황이 어떨지 모르니까.

이건 네 책임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렇게 됐으니까

네가 절반 내고, 포터에게 절반 내라고 해서 신발을 하나 새로 사 신고 오르는 게 낫지 않을까?”
“아저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내려가야겠지요. 그렇게 해야겠네요.”

이 얘기를 듣고 있던 독일팀 가이드가 “나한테 여벌의 신발이 하나 있는데 그 신발을 너희 포터에게 줄 게”라며 나선다.

너무 뜻밖이고 고맙다. “신발값은 얼마를 주면 될까?” 물으니 신발값은 필요 없다며 기어코 사양한다.

모든 일이 잘 되었다고 좋아하며 방으로 와 짐을 꾸리는데,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또 독일 아줌마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가이드가 너희 포터한테 자기 신발을 준 거 알아?

우린 남체로 내려가면 바로 우리 가이드에게 새 신발을 사줄 거야. 너희도 좀 배워야 하지 않겠어?”
“이봐요, 아줌마. 그렇지 않아도 우리 역시 남체로 내려갈까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자기 할 말만 계속한다.
“너희 때문에 우린 한국과 한국 사람들에 대해 정말 나쁜 인상을 갖게 됐어.

너희는 정말 서양화되고, 자본주의화 된 물질적인 애들이야. 책임 있는 행동은 전혀 할 줄도 모르고….

넌 포터를 짐승처럼 생각하나 본데 포터는 짐승이 아니야. 동물로 취급해서는 안 돼.”

아니, 이 아줌마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뭐, 포터를 동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열 받아 정신이 없고 할 말을 잃은 나, 여기서부터 막 나가기 시작한다.

“나도 너희처럼 무례하고 잘난 척하는 독일인은 생전 처음 봤어.”
내 목소리는 떨려오고 눈물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이 때, 갑자기 끼어드는 아줌마의 남편.
“여기서 국적이 무슨 상관이야? 그 얘기는 하지 마.”
“이봐. 당신 와이프가 먼저 한국사람 운운했잖아. 당신들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법부터 배워야겠어.

독일인들이 늘 그렇게 매사에 경우 바르고, 남을 생각하고, 올바른 일만 한다면 도대체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 때는 뭘 하고 있었는데?”
(주제와는 상관도 없는 남의 지나간 약점을 끄집어 내 공격하다니 얼마나 치졸하고 비겁한가.

하지만 나의 분노는 이미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하고 통제가능 영역을 벗어났기에 어쩔 수 없다.)

“과거 이야기는 하지 말아. 그건 아무 상관없는 거잖아? 너 어제 나한테 귄터 그라스를 좋아한다고 했지?

너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봐. 귄터 그라스가 어떤 사람인지도.”

이렇게 말하더니 휙 돌아서 나간다. 어쩌면 이럴 땐 영어도 더 안 되는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데,

언니가 “우리, 기얀드라 남체로 내려보내자”그런다.

나는 바로 식당으로 뛰어내려가 기얀드라에게 소리 지른다.

“너, 당장 신발 벗어. 돌려주고 남체 가서 신발 사와.”

옆에 있던 독인 아줌마가 또 나서서 우리가 어떤 류의 인간들인지 다시 한번 설명해준다.

무책임하고, 잘못을 인정할 줄도 모르고, 남의 말을 들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며.


나도 소리 지른다.

“그만해. 당신이랑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만 하라니까.”
아줌마는 굴하지 않고 계속 말한다.
“입 닥쳐!”

마침내는 “Shut Up!"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나오고 만다.

영문을 모르는 기얀드라는 어쩔 줄 모른 채 서 있고,

독일인 부부는 한국인들을 싸잡아 욕하며 숙소를 떠난다.





▲ 토담집과 집을 둘러싼 낮은 돌담이 정겹다.  

ⓒ2004 김남희


너무도 억울하고 화가 난 나는 드디어 참았던 울음이 터진다.

내 인생에 이렇게 모욕적이었던 적이 또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수영언니 품에 기대어 소리 내어 엉엉 울고 만다.

주인아줌마가 “신경 쓰지 마. 잊어버려. 네 잘못도 아닌데…”라며 뜨거운 차를 내온다.

차를 마시며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니 언니가 말한다.
“남희야. 저런 애들이랑 싸울 때 흥분하면 네가 지는 거야. 침착하게 평온한 목소리로 따져야지.”

누가 그걸 모르는가. 알면서도 못 하는 이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할 말은 입 안에서 맴을 돌고, 눈물부터 솟구쳐 눈앞은 흐려지고, 목소리는 떨려오고….

나도 이런 내가 싫지만, 이런 면에서는 어린 날 이후 조금의 진보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아무리 애를 써도 ‘포커 페이스’가 되지 못하는 이의 비애를 언니가 어찌 알리.

기얀드라는 고쿄로 올라가자고 하는데, 언니와 나는 오늘 하루 쉬고 이제 그만 산을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이 기분으로 올라간다면 결코 즐거운 산행을 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얀드라가 얻은 신발이 좀 작은 것 같아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가기보다는 빨리 내려가서 ‘람’을 잡는 데 총력을 기울이기로 한 거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모두에게 화가 난다.

포터의 장비를 철저히 점검하지 못하고 가이드와 포터의 말만 믿은 나에게도 화가 나고,

그런 터무니없는 돈을 받고, 기본 장비조차 없이 4년 째 포터를 하고 있는 기얀드라에게도 화가 나고,

무엇보다 포터의 돈을 떼먹은 사기꾼 람에게 가장 분노가 치민다.

서양인들이 가장 많이 오는 곳이라고 굳이 카트만두 게스트 하우스에서 계약을 맺고, 전액을 선불로 지불한 박사님도 밉고….

그나마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다.

이제 남은 일은 빨리 루클라로 내려가 람을 잡아서 그 사기꾼을 망신 주는 일이다.

이 놈을 어떻게 요리할지가, 지금의 내 최대의 고민거리이자 숙제이다.

하루 종일 난롯가에서 먹고, 책 읽고, 또 먹고, 쉬며 시간을 보냈다.

안개는 종일 몰려왔다 몰려가며 앞산을 희롱한다.

불길이 여위어 갈 때마다 마른 장작을 집어넣고 꺼져가는 불길을 살린다.

타닥타닥 마른 장작 위로 불길이 타오르며 춤추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눈을 들어 창 밖의 앞산을 바라보고,

다시 보던 책으로 정신을 집중하고….

마침내 오후 늦게 간디 자서전을 끝냈다.

지금 내 마음에는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의 ‘사티아그라하’ 정신이 가득 하기는커녕,

람에 대한 처절한 복수심이 불타고 있으니 어찌된 일일까?

쿰중에 갔던 캔도 돌아오고, 마첼모로 산책 갔던 기얀드라도 돌아오고, 다시 저녁 시간도 돌아온다.





▲ 바람에 날리는 탈쵸(경전을 적은 깃발) 너머로 초유(8153m)와 고쿄 마을이 보인다.  

ⓒ2004 김남희


한 일도 없이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든다.

막 잠이 들려는 나를 깨우는 언니의 흥분한 목소리.

“어머, 남희야. 저 별빛 좀 봐.”
사흘 간의 흐린 날씨 끝에 쏟아져 나온 별들이 창가로 바싹 고개를 들이밀고 있다.
“꼭 비박 하는 기분이다. 눈 쌓인 산과 별빛이 다 보이고...”
“침낭 속에 누워 있지, 침낭 바깥 공기는 싸늘하지... 정말 비박할 때 조건이랑 비슷하네.”

잠시 후 잠든 나를 또 깨우는 언니.
“어머, 남희야, 저 달빛 좀 봐.”
겨우 눈을 뜨니 보름달이 방안으로 눈부시게 비쳐들고 있다.
“내 얼굴 달빛 받은 거 보여?”
“응, 언니. 정말 예쁘다. 근데 한 번만 더 나 깨우면 죽어!”

달빛도, 별빛도 무시하고 잠이 드는 무신경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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