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2019. 12. 8. 20:03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 눈에 덮인 팡보체 마을  

ⓒ2004 김남희



트레킹 열흘째 날


날씨 : ‘하늘엔 흰 눈이 내리고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 (벗님들-‘사랑의 슬픔’ 중에서)
걸은 구간 : 팡보체(Pangboche 4252m)-포르체(Phortse 3800m)-돌레(Dole 4080m)
소요 시간 : 다섯 시간
복장 및 위생 상태 : 상체-비교적 양호 / 하체-몹시 불량



지난 밤 꿈에 헤어진 친구를 만났다.

꿈속에서도 나는 어딘가로 떠나고 있었는데 항구인지 기차역인지로 그는 나를 마중 나왔다.

하지만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체념 어린 담담한 눈으로 멀리서 나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내가 떠날 때 옷이 든 봉투 하나를 건네고 돌아서 갔다.
그 눈빛이 너무 슬퍼 아침에 잠을 깨고도 한참 마음에 남았다.

꿈속에서 아픔을 참느라 이를 얼마나 악물었는지 양쪽 어금니가 얼얼하다.

모파상이 그랬지.


‘키스는 번개처럼 엄습하고 사랑은 마치 소나기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인생은 또다시 하늘처럼 잠잠해지나니.

그러다 예전처럼 되풀이되고. 우리는 구름을 기억이나 할까?‘


나는 어서 소나기가 지나가고 구름이 걷힌 잠잠한 하늘이 되고 싶다.

어제 저녁 때 약간의 뜨거운 물을 얻어 세수를 했다.
우리가 세수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타쉬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세수를 하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우린 날씨도 너무 춥고 게으르기도 해서 일 주일에 한 번씩도 세수를 안 하는데…”라며 웃는다.

수영언니가 “그 말 듣고 나니 너무 미안하더라”하기에

“우리 그럼 내일 아침은 젖은 휴지로 그냥 닦고 말까?”했다.

그래서 오늘은 젖은 휴지로 닦기만 한다. 벌써 며칠 째 머리를 못 감고 있는지 모르겠다. 양말은 일주일째 같은 걸 신고 있고….

그런데 점점 이 모든 것들이 아무렇지 않아진다.






▲ 팡보체에서 포르체 가는 길. 산 중앙으로 희미하게 길이 보인다.  

ⓒ2004 김남희



부엌 화덕 옆에 쪼그리고 앉아 미숫가루와 오믈렛으로 아침 식사.

가급적 트레킹 중에 부엌 근처는 기웃거리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화덕이 있는 부엌을 찾게 된다.

부엌에서 음식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면 밥 먹기가 몹시 힘들어진다.

우선은 야채를 씻어서 조리하는 모습을 한번도 못 봤다.

감자, 양파, 양배추 종류에 관계없이 전부 껍질만 벗기고 그대로 쓴다.

행주로 쓰고 있는 걸레를 본다거나,

세제를 푼 대야에 한번 담갔다 빼는 게 전부인 설거지,

야채와 고기 및 모든 재료를 닦지도 않은 칼 하나로 요리하는 광경 등등

이런 걸 보고 나면 화기애애한 식사 분위기 조성이 어려워진다.

또 음식의 유통기한이나 신선함, 위생을 따져서도 안 된다.

우리가 먹었던 수프도 유통기한이 6개월 넘게 지났었고,

통조림 과일 역시 캔 껍질이 다 벗겨지고 찌그러들어 도저히 생산년도를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명랑한 식사 문화 건설을 위해 비위가 약한 분들은 절대 부엌에 들어가지 말 것!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 하나는 조리과정을 이토록 간략히 함으로써 조리시간의 엄청난 단축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주문 후 음식이 나오기까지의 평균 대기시간이 한 시간이라는 사실.)

지난 밤 내내 눈이 내려 세상이 온통 하얗다.

이 집 마당에서는 깡대와 탐셀꾸가 바로 앞산처럼 가까이 보인다.

탄성이 절로 터지는 ‘초특급 수퍼 울트라’ 전망이다.

나지막이 엎드린 돌담과 돌집들은 아직 잠들어 있고, 양철지붕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소리만이 마을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전나무 숲에도 하얗게 눈이 내려앉아 제법 무거워 보인다.

숲이 바람을 막아줘서인지 이 마을은 고도에 비해 유난히 따뜻하다.

처음 이곳에 들어설 때 저 나무들을 보는 것만으로 얼마나 마음이 흐뭇하던지….

짐 들고 나와서 마을의 절을 둘러본다.

문이 잠겨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기얀드라가 사람을 불러와 열어준다.

부처님께 절하고, 시주하고 나온다.

티벳식으로 채색한 창문들이 오늘따라 흰 눈빛 속에서 더욱 곱다.





▲ 눈 덮인 고개를 넘고 있는 트레커.  

ⓒ2004 김남희



10시 15분. 출발.
절벽으로 난 길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

한 사람이 겨우 걸어갈 정도로 좁은 길이 산등성이에 위태롭게 걸려있다.

지난 밤 내린 눈이 꽃으로 피어 눈 가는 곳마다 환하다.

한 시간 쯤 절벽 길을 걷고 있자니 산밑에서 구름이 몰려와 길과 길 위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다.

좁은 벼랑길에는 아무도 없다.

눈꽃 핀 나무와 풀을 뜯고 있는 산양(자랄)떼들만이 가끔 고개를 들어 흘깃 우리를 바라볼 뿐이다.

12시 55분. 포르체(Porche) 도착.
눈에 덮인 마을은 제법 크다.

자욱하던 안개가 걷히며 마을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난다.

마치 마법이 풀리듯 안개의 손길을 헤치며 깨어나는 마을들. 문을 연 식당으로 가 점심을 주문한다.

2시 15분. 포르체 출발.
점심 먹는 사이 내리기 시작한 눈이 계속 내리고 있다.

길은 점점 눈에 덮여 가고, 바로 앞 밖에 보이지 않는다.

가방은 허리를 눌러오고, 발은 무거운데, 길까지 미끄러워 온 신경을 집중해 걸어야 한다.

언니와 기얀드라, 나까지 모두 스틱을 꺼내 쓰고 있다. 가쁜 숨소리와 스틱 찍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포르체에서 계곡까지 내려와 다리를 건너 다시 산을 오른다.

 이 오르막 고갯길이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어두워지기 전에, 길이 눈에 덮여 사라지기 전에 돌레에 도착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마음을 짓누른다.

4시 45분. 마침내 돌레(Dole) 도착.
대부분의 집들은 문이 잠겨 있고, 마을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다.

멀리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유일한 집을 찾아간다.

마을을 내려가 냇가를 건너 위치한 예티 인(Yeti Inn).





▲ 풀을 뜯고 있는 야생 산양떼.  

ⓒ2004 김남희



난로가 지펴진 식당으로 가니 중년의 독일인들이 모여 있다.

인사를 나누고, 서로 거쳐온 길을 이야기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잠시.

갑자기 독일인 아줌마가 경직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묻는다.
“너희 포터, 저 운동화 신고 칼라파타르에 갔다 왔니?”

그랬다는 내 대답에 고개를 흔들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너흰 당장 남체로 내려가 포터에게 새 신발부터 사줘야 해.

저런 신발로 등산하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너희 트레킹 시작할 때 포터 장비도 확인 안 했니?”

이건 마치 범인 취조하는 경관의 말투다. 기분이 나빠지지만 그래도 성의 있게 대답을 해준다.

“루클라에서 우리 가이드가 포터를 고용할 때 장비를 충분히 갖췄느냐는 질문을 했었고,

우리가 일행(정 선배님)과 헤어질 때도 다시 한 번 장비가 충분한지 물었어.

그때마다 가이드 대답은 ‘걱정마. 다 준비했으니 문제없어’여서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어.

나중에 우리 포터가 제대로 된 등산화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한참이 지난 후였고.”


전혀 납득을 하지 않는 눈치다.

잠시 후 카메라 건전지가 없어서 큰일이라는 내 중얼거림을 들은 독일인 아줌마가 다시 끼어든다.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큰일은 그게 아니야. 지금 큰일은 너희 포터 신발 문제야” 라고 한다.

두 번째 지적에 기분이 상해 “그건 네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라고 하니

“아니,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야”라며 맞받는다.

기분이 점점 나빠져 나도 말투가 공격적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우린 지금 충분한 시간도 없고….”

말을 가로채며 아줌마가 말한다.
“남체로 내려가야지. 지금이라도 남체로 내려가서 신발부터 사주고 다시 올라와.

 안 그러면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절단하는 사태가 생길 지도 몰라.

트레킹 시작하기 전에 철저히 확인했어야지.

너, 루클라에 Porters' Clothing Bank 있는 거 몰랐니? 거기 가면 무료로 포터들 옷하고 신발 다 빌려줘.

그것도 몰랐단 말이야? 이건 모두 너희 책임이야.

내일 바로 남체로 내려가서 신발을 구입해야 해”라고 못을 박는다.

전후사정을 다시 설명하며 우린 네팔이 처음이어서 잘 몰랐다고 말을 한다.

네팔 가이드들은 다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편을 들어주는데 이 부부는 완강하다.





▲ 포르체 마을의 돌담과 돌집들.  

ⓒ2004 김남희



망신은 계속된다.

독일팀 가이드가 “너희 포터, 하루에 얼마로 생활하는지 알아?” 묻는다.

“우린 가이드한테 포터 비용으로 하루 8불씩 지불했고, 그중 6불(420루피)이 포터에게 가는 걸로 알고 있어”라고 하니

 “아니야. 너희 포터 15일간 계약에 2550루피 받았대.

하루에 170루피씩. 그래서 생활비 아끼려고 하루 100~150루피만 쓰면서 다닌대.”

“뭐라구?” 언니와 나는 둘 다 경악을 금치 못한다.

람, 그 자식이 우리를 가지고 놀았다.

이제서야 그동안의 미심쩍던 일들이 다 이해가 간다.

처음에 팍딩에서 포터 한 명이 갑자기 바뀌었던 일 (일당을 알고 나서 못하겠다고 그만둔 거였다)도 이해가 가고,

정 선배님과 헤어질 때 포터 한 명을 더 고용하겠다는 우리 제안을 회사에서 알면 곤란하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한 이유도 이제서야 뚜렷해진다. 새로 고용한 포터를 통해 가격이 들통나면 안 되니까.

그 나쁜 놈이 기얀드라에게 겨우 2500루피를 주면서 그랬단다. 우리한테 팁을 받으라고.

요 며칠 기얀드라가 힘겨워하고 자주 쉬던 것도 이제야 원인이 드러났다.

그 적은 돈으로 생활하려니 식사를 부실하게 하거나 건너뛰고, 그러다보니 점점 기운을 잃고 비실거린 거였다.

열 받아 쓰러질 것 같다.

우리를 속인 람은 정말 때려죽이고 싶도록 밉고, 그 돈을 받고 일한 기얀드라에게도 화가 나고,

좀 더 철저히 확인하지 못하고 가이드에게 놀아난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나 견딜 수가 없다.

게다가 비용을 미리 완불하는 바람에 일을 더 어렵게 만든 정 선배님께도 화가 나고….





▲ 안개와 구름이 만들어내는 진경산수화 한 폭. 돌레.  

ⓒ2004 김남희



난롯가에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의 화제는 어느새 포터나 가이드들의 횡포와 사고에 관한 이야기로 바뀐다.

이런 일이 아주 비일비재하단다.

손님 짐을 팽개치고 도망 간 포터,

배낭을 들고 사라진 포터,

선불로 준 돈으로 술 먹고 안 돌아온 포터들,

심지어 고객을 버려두고 도망간 가이드 이야기….

오랫동안 포터와 가이드로 일했던 이 집 주인 캔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런 이야기들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카트만두에 돌아가 어떻게 복수혈전을 벌일지 고민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하다.

졸지에 포터 안전은 신경도 안 쓰는 무식하고 이기적인 한국인으로 찍힌 오늘,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다음검색




'산행기 & 국내여행 > 여행정보 & 여행기 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2  (0) 2019.12.08
- 11  (0) 2019.12.08
- 9  (0) 2019.12.08
- 8  (0) 2019.12.08
- 7  (0) 2019.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