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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펌글 · 자료/예술.여행.문화...

『런던 하늘 맑음』








런던 하늘 맑음


2009, 2.




  

조양희
1988년 여성동아에 장편소설 <겨울외출>로 등단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작품으로는 ≪훈풍≫ ≪하늘빛 유혹≫ ≪오진≫ 등이 있고, 수필로는 ≪희망으로 짠 조각보≫ ≪조양희가 참 잘하는 요리≫ ≪엄마의 쪽지 편지≫ 등이 있다.
십여 년 동안 세 자녀들에게 보낸 ‘도시락 편지’로 ‘훌륭한 부모상’을 받았으며 프랑스 언론에서 선정한 ‘세계를 움직인 30명의 여성’ 중 환경 부문에서 아시아인으로 유일하게 선정되기도 했다. 이후 ‘도시락 편지’는 초등학교 국어 교과에서 수록되면서 지금까지도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자녀에게 편지 써주기 등 자녀사랑운동과 함께 직접 만든 솜인형을 어린이들에게 나눠주며 글읽기운동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조만간 등단 20주년 기념으로, 니트로 짠 인형과 함께 구성한 동화작품과 장편소설 ≪분홍구두≫를 발표할 예정이다.

박진호 (딸)
16세에 영국 유학을 떠나, 세인트 에드몬드 캔터베리 사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런던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현재는 런던건축협회(Architectural Association School of Architecture)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있으며, 톤킨리우(Tonkin Liu), NTA Project, BCA 런던 등 많은 건축사무실에서 일했다.





목차

Prologue 맑고 푸른 서울 하늘을 기다리며 _ 조양희



런던, 환경도시로 다시 태어나다

환경도시 런던이 탄생하기까지
환경을 지키기 위한 영국 정부의 노력



런던의 친환경 건축을 체험하다

대형 친환경 건축 프로젝트
주택 프로젝트
문화유산 건축 프로젝트



런더너에게 친환경은 생활이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친환경 교실
런더너의 생활 속 실천 그리고 사회의 약속



런던의 거리에서 만난 친환경 이야기

런던의 풍경 속에서 발견한 친환경 아이디어
런더너의 친환경 쇼핑

Epilogue 어머니에게 배운 친환경 생활 _ 박진호

 




책 속으로

친환경 건축을 공부하던 중에 읽게 된 한 문구는 나에게 가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의 50퍼센트가 건물에서 나온다’는 문구로, 켄 데이비스의 ‘콜드 컴포트’라는 논문에서였다. 이것은 건물 안에서 에너지를 사용할 때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를 포함하여 건물을 지을 자재를 옮기는 차량에서 나오는 배기가스까지, 건물과 관련된 모든 이산화탄소를 합해서 나온 수치다. 나에게 이 말은 ‘건물을 짓는 건축가에게 지구 온난화의 50퍼센트 책임이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건물 자체가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지 않도록 디자인된다면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에너지 사용을 많이 줄일 수 있고 이산화탄소 배출 또한 줄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친환경 건축이 아주 중요한 것이고, 런던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 중에서

베드제드는 런던 최초의 친환경 주택 단지로, 권위적인 로얄건축사에서 수여하는 ‘친환경 건물상’을 포함해 크고 작은 건축상 십여 개를 휩쓸면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곳이다. 베드제드는 예산을 대폭 줄이면서도 100퍼센트 친환경으로 건설하여 영국 친환경 주택 단지들의 교과서 같은 존재가 되었다.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한 자재들은 모두 재활용 자재들이다. 예를 들어 철근은 근처 기차역에 버려진 철로를 활용했고, 목재도 버려진 나무들을 재활용했다. 그리고 자재를 운반할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까지 생각하여, 자재는 될 수 있으면 그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사용했다.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재를 구하면 운반 과정에서 이미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가 발생되기 때문이다. 친환경 건물이라면 집을 짓는 과정까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 중에서

테이트 모던은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 미술관이다. 또한 이 건물은 옛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바꾼 친환경 건물로도 유명하다. 우리가 그곳을 방문한 날, 때마침 굴뚝 꼭대기를 망원경으로 보는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바로 화력발전소 굴뚝이었던 그곳에 송골매가 날아와 둥지를 튼 것이었다. 그 새를 살리기 위해 송골매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알리고 자연보호운동과 자선활동을 하는 이벤트를 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작은 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관광상품으로 연결시키고, 동물보호와 자선활동으로 이어가는 런던 시민들의 자세가 놀라웠다.
- 중에서

 


출판사서평

‘도시락 편지’를 쓴 엄마와 건축을 공부하는 딸이 함께 만난
런던의 친환경 건축과 런더너의 친환경 생활 이야기


산업혁명이 태동한 곳이자 그로 인한 각종 오염과 환경파괴로 몸살을 앓았던 도시 런던. 시내를 유유히 흐르는 템스 강은 한때 ‘악취의 강’으로 오명을 떨쳤고, 최악의 런던 스모그는 단숨에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파리에 비라도 내리면 파리지앵들은 런던에서 건너온 산성비 탓에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손상된다며 욕하곤 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제 런던은 아픈 과거를 거울삼아 세계 그 어떤 도시보다 친환경에 앞장서는 대표적인 ‘환경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그리고 그 맑고 푸른 런던의 풍경들을 엄마와 딸이 함께 ≪런던 하늘 맑음≫ 책에 담았다.

‘도시락 편지’로 유명한 엄마 조양희는 프랑스 언론에서 선정한 ‘세계를 움직인 30명의 여성’ 중 환경 부문에 선정될 정도로 환경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리고 건축을 공부하는 딸 박진호는 그런 엄마의 영향으로 친환경 건축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두 사람에게 런던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환경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특별한 곳이다.

두 사람은 환경도시 런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친환경 건축물들을 직접 방문해 하나하나 소개한다. 런던 최초의 친환경 주택 단지 베드제드, 독극물에 오염되어 버려졌던 그리니치 반도에 들어선 밀레니엄 돔과 밀레니엄 빌리지 등 대형 프로젝트를 비롯해, 대문에 뚫어놓은 번지수가 햇빛을 받아 길가에 비치는 모습이 아름다운 케빈의 집, 집 자체를 식물로 둘러싸 시간이 흐를수록 초록으로 변하는 톤킨리우의 그로잉 하우스 등도 인상적이다. 또한 옛 건물들을 허물지 않고 보존하여 친환경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라운드 하우스와 캠든 마켓, 존 소앤 박물관 등도 런던과 런더너들의 친환경 의식을 보여주는 곳이다.

‘런던의 모든 건축가들은 친환경 건축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친환경이 당연시되는 런던의 근간에는 무엇이든 쉽게 버리지 않는 생활습관과 환경의식을 지닌 런더너가 있다고 두 사람은 말한다.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빗물을 모아 정원에 물을 주고, 무엇이든 재활용하며, 채러티숍과 빈티지숍에서 산 빈티지 제품을 멋스럽게 착용하는 런더너들이 있기에, 150년 된 우체통이 여전히 거리를 지키고, 화력발전소에서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재탄생한 테이트 모던이 있는 런던의 풍경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들이 만난 런던의 맑고 푸른 하늘과 친환경 건축, 런더너의 친환경 생활 이야기는 환경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작은 생활습관이 쌓여 큰 변화를 이루어낸 런던의 모습을 바라보며 저자들은 서울의 오늘을 떠올린다. 그리고 서울도 뿌연 하늘의 무게를 덜어내고 맑고 푸른 하늘을 되찾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1


런던 사람을 ‘런더너(Rondoner)’라고 하는구나. 뉴요커처럼.

역시 파리가 최고구만?... 파리지앵, 파리지엔느, 女子까지 있으니...^^;;

도시이름 사람名이 또 있나? .. 로마사람, 로만(Roman)?





2

런던 대화재(Great Fire of London)


                                

공공건물 대부분과 유서 깊은 세인트폴 대성당, 87개의 교구 교회, 1만 3,000여 채의 가옥 등 런던 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1666년 9월 2일 월요일 런던 다리 부근 푸딩레인에 있는 왕실 빵가게에서 우연히 발생한 이 화재는 때마침 불어닥친 거센 동풍으로 하루종일 꺼지지 않았으며 다음날에도 불길이 쉽게 잡히지 않았다. 수요일 들어 약해진 불길은 목요일에 진화된 듯했으나 목요일 저녁에 다시 템플에서 화염이 치솟기 시작했다. 화약으로 여러 채의 집을 폭파한 뒤에야 화재는 완전히 진압되었다.

새뮤얼 페피스의 〈일기 Diary〉는 이 화재에 대해서 상세하고 흥미롭게 기록했다. 화재를 피해 재산을 실어 나르는 사람들로 꽉찬 배들이 강을 가득 메웠으며, 일부 사람들은 햄프스테드와 하이게이트 언덕으로 피신했고, 집을 잃은 대부분의 시민들은 가장 안전한 장소인 모어필드로 모여들었다.

화재가 진화된 지 며칠 뒤 크리스토퍼 , 존 에벌린, 로버트 후크가 각각 구상한 3개의 도시재건 계획서가 왕 찰스 2세에게 보고되었다. 그러나 도로를 재조정하겠다는 이들의 계획은 채택되지 않았고 도로망은 거의 모든 곳에서 이전 상태대로 유지되었다. 대신 세인트폴 대성당을 다시 세우고 주변에 많은 교회를 짓는다는 렌의 방대한 구상이 채택되었으며, 후크는 도시 감독관으로서 가옥을 건립하는 작업을 맡았다. 오늘날 '공원의 도시'라 불리는 런던의 단초가 마련되었다.








위기의 극복 ,런던 대화재(노스트라다무스예언,화재보험의 탄생)



런던이 정의의 피를 요구하리니 
6이 세 번 반복되는 해에 
불벼락이 내리리라.
고대의 여인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그와 같은 많은 전당들이 소실되리라

 

 1555년, 노스트라다무스는 영국 런던에 끔찍한 재앙이 닥칠 것이라 예언하였다.  실제로 6이 세번 반복되던 해 1666년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실현되었다. 1666년 9월 2일 새벽 2시경 영국 런던 다리 근처의 템스가,  토마스 패리너의 제과점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였다.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인 제과점에서 패리너의 가족들과 하인들은 간신히 피신할 수 있었다. 패리너 제과점에서 옮겨 붙기 시작한 불은 템스가 일대로 걷잡을 수 없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좁은 거리와 골목에 목조 주택들이 밀집한 런던에 긴 가뭄에 건조한 바람까지 동반되면서 불이 폭발적으로 번져갔다 5시간 후인 오전 7시경 300채 이상의 주택이 불탔고, 오전 8시경 템스가 근처의 피시 거리 전체가 불탔다 이후 런던의 중요한 교통 요충지인 런던 다리까지 불탔다.

 



가죽물통과 수동식 펌프 같은 열악한 진화도구를 가지고 있던 지역 소방관들은 엄청난 화제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런던은 결국 불지옥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노스트라다무의 예언대로 런던에 대화재가 일어나자 저주를 받은 것이라며 시민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불안이 점점 확산되자 국왕 찰스 2세(1630년 ~ 1685년)는 런던 타워 수비대에게 불길이 번지는 방향의 건물들을 화약으로 파괴하도록 지시하여 더이상 불길이 번지지 못하도록 하였다 다행히도 강한 동풍이 잦아들어 나흘 만에 겨우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얼마후 런던에 대화재를 일으킨 범인이 잡혔는데 프랑스 출신인 로버트 허버트라는 남자였다. 그는 세상이 원망스러워 홧김에 패리너 제과점에 폭탄을 던져 방화를 하였다고 자백을 하였다. 결국 그는 유죄판결을 받아 교수형에 처해졌고 런던의 대화재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4일간의 대화재의 결과로 1만 3200채의 가옥, 87곳의 교회와 공공건물등 런던의 80%가 파괴 되었다. 인구 6분의 1에 해당되는 1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서기 64년에 발생한 도시 로마 전체를 전소시키고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로마 대화재',

 로마 대화재


 1657년에 발생한 일본도쿄 4분의 3을 파괴하고 1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도쿄 대화재'.

 도쿄 대화재


와 함께 세계 3대 대화재로 꼽히게 된다. 


불행중 다행히도 런던 대화재의 놀라운 사실은 단 9명의 사망자만 발생하였다.이후 전화 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화재 발생하기 1년전 페스트로 5만명의 시민을 잃을 만큼 전염병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화재가 발생한 후 페스트를 유발하는 쥐들이 타 죽으면서 전염병이 크게 감소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 1667년 영국황실과 정부는 화재의 참사를 교훈삼아 도시에 세워지는 모든 건물은 돌이나 벽돌로 지어야 한다는 조례를 만들어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비했으며 최초로 소방대를 설립하고 '화재보험'을 만들었다. 

그리고 영국정부는 유럽최고의 도시였지만 빈민도시로 유명했던 런던을 유럽의 다른 도시들처럼 현대적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빠른 복구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반대로 계획이 대폭 수정되면서 결국 남아있는 구식 건물과 새롭게 건설된 신식 건물이 뒤섞인 어정쩡한 모양으로 이뤄지게 됬는데 이러한 차별화가 오늘날 현대와 중세가 공존하는 매력적인 도시라는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렇게 런던 대화재의 기억이 잊혀지게 될 쯤 1986년 1월 10일 토마스 패리너의 후손 기업인 런던 베이커에서 사과문을 발표한다. 그들은 제과점에 일하던 하녀의 실수로 런던 대화재가 일어났다며 320년이 지나 때늦은 사과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방화범으로 지목되어 교수형에 처한 로버트 허버트는 왜 범인으로 지목된 것일까? 그것은 영국이 프랑스에게 가진 좋지 않은 감정에서 비롯됬다.

1665년부터 네덜란드와 전쟁중이던 영국은 1666년 1월 네덜란드의 편을 들어 전쟁에 개입한 프랑스때문에 패하게 됨으로써 프랑스와 감정이 좋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가운데 런던 화재가 발생하자 급히 사건을 종결짓는 과정에서 프랑스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수사 기록을 보면 화재가 발생한지 이틀 후에 해안에서 로버트 허버트를 배에서 내려줬다는 스웨덴 출신 선장의 증언과 제과점에 창문이 있었는지도 몰랐던점과 두다리가 불편해 폭탄을 던질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점에도 불구하고 영국왕실과 정부는 사건을 빨리 정리할려고 프랑스인 로버트 허버트를 진범으로 몰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진범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