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정혜윤
책소개
시공간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며 전하는 런던 여행기 『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 줄게』. 런던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 8곳에 얽힌 이야기들이 예측할 수 없는 흐름으로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여행 에세이가 시작된다. 독서가 정혜윤은 고성과 박물관, 카리브해 출신의 세탁소 주인, 올리버 트위스트, 노르만족 선원, 혼잡한 런던 시장 등 런던 곳곳을 누비며 역사와 현대적 감성이 공존하고 있는 그곳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여행기인지 이야기인지 헷갈리는 책을 쓰고 싶었던 정혜윤이 선택한 첫 번째 도시는 ‘헤리 포터’에서 환성적인 공간으로 나왔던 런던이다. 그녀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대성당’에서 찾아낸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스티븐 버트먼의 ‘낭만과 모험의 고고학 여행’을 따라 가는 대영박물관 탐험,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찾아낸 자연사 박물관, 에즈워드 ‘지옥문’에 등장하는 런던탑 등 다양한 문학 작품에서 찾아낸 런던의 시간을 즐긴다.
문학과 어우러진 그녀만의 독특한 여행은 점점 더 흥미롭고 사색적인 시간들로 채워진다. 박제된 장소에 상상력을 불러 넣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펼치고, 런던 여행지 안에서 꿈과 사랑, 희망과 좌절을 읽어내는 정혜윤의 여행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관광지에 대한 대략의 상식을 갖고 떠나는 여행이 아닌, 문학작품 속에서 키워 온 상상력으로 전하는 런던 이야기를 만나보자.
現 CBS 라디오 프로듀서, <양희은의 정보시대> <정재환의 행복을 찾습니다> <최보은의 서울에서 평양까지> <김어준의 저공비행>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이상벽의 뉴스매거진 오늘> <행복한 책읽기> 등 시사 교양프로그램과 휴먼다큐, 해외 특집 다큐 등을 기획제작. 현재 <매거진 오늘, 장미화입니다>와 <뉴스레이다 스페셜 -책과 문화> 제작중. 앞으론 제발(!) 여행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모든 길 떠나는 자들의 트렁크에 들어가는 <여행자의 라디오>를 만들고 싶은 소원이 있음.
목차
프롤로그
여행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웨스트민스터사원
런던이 궁금하니? 런던 대신 파란색을 들려줄게
세인트 폴 대성당
런던에서 '행복'에 대해 묻다
대영 박물관
당신의 신은 당신의 천국을 닮았다
자연사 박물관
모든 생명체는 단 하나의 이야기를 갖는다
트라팔가르 광장
인간이 없으면 꿈은 존재할 수 없다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희망과 기억 사이에서 벌어진 어떤 일
런던탑
오래된 삶이 들려주는 이야기
그리니치 천문대
지상의 아스팔트 위에서 우리만의 뜨거운 별자리를 만드는 방법
에필로그
런던에서의 나의 메모
출판사서평
지독한 독서가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만난 런더너들,
런던을 사랑하고, 런던을 꿈꿨던 '구식’ 런더너와‘2009년, 지금’ 런더너들의 이야기!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부제가 붙은 《침대와 책》과 ‘당신을 만든 책은 무엇인가’라는 독특한 주제의 인터뷰집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로 독서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정혜윤, 그의 세 번째 에세이 《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줄게》가 푸른숲에서 출간되었다. 런던을 여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소 8곳에 얽힌 이야기들이 종횡무진 예측할 수 없는 흐름으로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중세와 현대를 넘나들면서 기상천외한 모티프로 사람과 사람, 장소와 장소를 연결시키면서 진정한 여행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런던의 고적지를 이야기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독특한 여행기
L. O. N. D. O. N. 고성, 대성당, 대략 150개의 극장과 3백 개의 갤러리, 4백 개의 박물관, 모던록, 세계 4대 컬렉션, 히스패닉 음악, 다양한 커리와 양고기 냄새, 최초의 로마인이 두고 간 미트라 신의 조각, 노르만족이 만들었다는 런던탑 성벽,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성가대석, 크리스토퍼 랜 경의 세인트 폴 돔…… . 수많은 이질적인 광경이 모두 함께 런던의 풍경을 만든다.
가장 예스럽지만 가장 현대적인 이 도시에서 저자가 여행지로 택한 곳은 ‘고리타분한 장소’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세인트 폴 성당, 대영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트라팔가르 광장,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런던탑, 그리니치 천문대. 런던 패키지 여행의 단골 장소이자 런던에 가면 빼놓을 수 없는 의무적인 여행 코스.
하지만 저자에게 이 관광지들은 인간의 아름다운 역사를 담고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인간에 대한 희망과 좌절, 사랑에 대한 헌신과 배신, 우주에 대한 동경……. 저자는 특유의 상상력으로 고적이라는 박제된 장소를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킨다. 고성의 성벽을 쓰다듬으며, 박물관의 전시물을 한없이 바라보며, 강둑을 천천히 산책하며 “전 시대 사람들의 추억과 경험,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 살아본 삶과 살아보지 못한 삶, 성공과 실패, 엄마들의 기도와 자식들의 배신”을 그려낸다.
멋진 여행자가 되는 백만 가지 방법 중 하나, 점퍼
이 책에서 저자가 택한 여행자의 포지션은 ‘시공간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점퍼(jumper)’이다. 여행은 상상의 다른 이름이라고 굳게 믿는 저자는 박물관의 항아리, 고성의 성벽, 시계탑의 초침 앞에서 ‘구식’ 런더너들의 꿈과 사랑, 희망과 좌절을 읽어낸다. “우리가 인생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여행은 내가 당신이 되고, 당신이 내가 되는 여행이라는 것”이라고 말하며 런던을 헤집고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소설과 영화, 그림, 노래의 주인공들을 불러낸다.
카리브 출신의 배불뚝이 세탁소 주인,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 런던탑의 죄수, 로마 군인, 최초로 큰 배를 만들어 안개 낀 섬으로 항해를 떠난 노르만족 선원, 교통 혼잡세를 매기는 런던 시장, 순결한 올리버 크롬웰, 앤 불린, 올리버 트위스트,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을 단 미라…….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그 장소들은 관광지가 아니라 수많은 배우가 등장하는 한바탕 무대로 변신한다.
나에겐 세상 모든 것이 이야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직각삼각형은 피타고라스의 이야기로, 완두콩은 멘델, 조수간만의 차이는 뉴턴, 런던의 켄싱턴 공원은 피터 팬의 이야기로, 풍차는 돈키호테, 코르시카 섬은 나폴레옹의 이야기로……. 그러다가 결국 세상 모든 것이 더 많은 이야기를 숨겨놓고 있다는 걸 눈치 채게 되었다. 어디에나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나에겐 신비였다. 나는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낯선 도시 문간에 걸터앉아 도시의 망루, 종탑, 은색 돔, 9월의 과일, 소나기, 무역풍, 분홍빛으로 해가 지는 분홍 도시, 흰빛으로 해가 지는 흰 도시, 크루아상 같이 생긴 도시, 창문 앞에 서서 부채를 흔드는 부인들을 한도 끝도 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모든 풍경들은 전 시대 사람들의 추억과 경험,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 살아본 삶과 살아보지 못한 삶, 성공과 실패, 엄마들의 기도와 자식들의 배신을 보도블록으로, 다리로, 종탑으로, 성당으로, 거리 이정표로, 성벽으로, 묘지로 깔고 있다는 걸. 풍경은 공공연한 동시에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했다. 이것이 풍경과 사람의 공통점이다.
나는 아직도 한밤에 누군가의 침실에 불려 들어가, 얼굴에 섬세한 장미가 수놓인 베일을 드리우고, 열일곱 개의 발찌를 차고 이런저런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고 싶다. 그게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유일하게 신비한 꿈이다. 마치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 것처럼.
지금 내가 초대받고 싶은 방은 내일이면 여행을 떠날 여행자의 방이다. 여행 가기 전날 밤, 나는 내가 아는 그곳들의 이야기를 소곤소곤 들려주고 싶다. _프롤로그
본문 간략 소개
웨스트민스터 사원
레이먼드 카버, 엘리자베스 1세, 오만과 편견, 올리버 트위스트, 아이작 뉴턴, 레이크 디스트릭트, 워즈워스, 바이런, 소호의 게이들, 찰스 디킨스, 캠던 타운, 파푸아뉴기니, 빅벤
: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 왕족(엘리자베스 1세), 과학자(뉴턴), 작가(워즈워스, 바이런, 키츠, 셸리, 브론테 자매, 찰스 디킨스)들에 관한 이야기. ‘가장 오래된 런더너’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켜켜이 쌓인 시간이 지배하고 있는 런던의 독특한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성모 마리아나 성 베로니카, 성녀들의 상처받은 몸을 감춘 섬세한 조각, 수척한 그리스도의 이마와 연민에 가득찬 시선이 바로 유럽인의 성당이자 사원일 거라고 생각해온 우리에게 영국인의 신앙의 본산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가득 채운 왕들의 무덤들은 분명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곳의 비극은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소박하고 가난한 아낙네들의 비극이 아니라 욕망과 폭력이 폭포처럼 쏟아지던 사람들의 비극이었다. 그래서 이곳의 첨탑은 일개 건축가의 설계대로가 아니라 폐하와 폐하의 신민들의 욕망과 두려움의 깊이대로 수백 년 동안 찌를 듯이 솟아오르다가 어느 순간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은 모양새처럼도 느껴진다. (p. 23)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유달리 인기를 끄는 인물은 뉴턴이다(내가 사원 안에 있을 때도 동유럽 여행팀, 파리 여행팀, 일본 여행팀 등 도합해서 그의 인생과 〈다빈치 코드〉에 대한 설명을 적어도 7개 국어로 들었다. 7개 국어로 ‘자 여러분, 이게 〈다빈치 코드〉의 마지막 장면에 나왔던 뉴턴의 무덤이에요’를 연습해보는 것도 좋겠다). 그의 무덤 주위엔 영화 〈다빈치 코드〉에서처럼 행성이 돌고 있다. 1680년 혜성의 경로가 표시된 천구와 프리즘을 가지고 노는 천사 같은 소년, 태양과 행성의 무게를 다는 소년, 인류를 빛낸 위대한 이가 여기에 존재했었다는 라틴어 비문 등이 그를 에워싸고 있는데 그 옆쪽으로는 찰스 다윈의 묘와 월리스의 기념비도 있다. (p. 27)
세인트 폴 대성당
종의 노래, 런던 대화재, 찰스 1세, 흑사병, 크리스토퍼 랜 경, 실낙원, 새로운 아틀란티스, 조슈아 레이놀즈, 탕아와 꼬마 굴뚝 청소부, 라셀라스, 넬슨과 엠마 해밀턴, 니코스 카잔차키스, 속삭임의 회랑
: 세인트 폴 대성당을 둘러싼 역사적 사건(흑사병, 런던 대화재, 제2차 세계대전)과 이 시대를 온몸으로 겪었던 인물(밀턴, 새뮤얼 존슨 박사, 조슈아 레이놀즈, 윌리엄 호가스, 찰스 램, 넬슨 제독, 터너)에 관한 이야기. 시티 오브 런던의 자존심인 세인트 폴 대성당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의 런던 뒷골목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이 완성된 1710년 이후의 어느 날, 런던을 걷는다고 생각해보면 풍경은 이렇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이 완공되어 우뚝 솟아 있고, 시티의 상인들과 중산층의 부와 자신감을 반영한 듯 거리 여기저기에 금박을 입힌 기둥을 가진 교회들이 나타난다. 런던 대화재 때 금화를 조심스레 땅에 묻었거나 장롱에 재산을 넣고 자물쇠를 채웠던 런더너들, 아니면 금을 아예 허리에 두르거나 가족들에게 들려 시골로 보냈던 런더너들은 그 무렵엔 그런 촌스러운 방법을 그만뒀다. 그들 대부분은 금세공업자 출신인 은행원들에게 금을 맡기기 시작했다. 결국 왕국의 모든 자금이 런던에 예치되었고 잉글랜드 은행이 시티에 생겨났다. (p. 75)
사실 라셀라스 시절의 행복관만 궁금한 건 아니다. 동시대의 지구인들에게 행복에 대해 한꺼번에 물어보기 가장 좋은 곳, 그곳이 바로 런던이다. 그래서 여행 전 내 마음속에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었는데 그 프로젝트 제목은 ‘행복이란 말이 이상하게 들려요’ 또는 ‘이런 행복이란 말을 처음 들어요’ 정도였다. 사우스 뱅크 같은 곳에 앉아서 백 개국 언어(그 나라의 정확한 발음들로만)로 ‘행복’이란 말을 채집하는데 그때 인터뷰에 응한 각 나라 사람들은 자기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혹은 자기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유서 깊은 행복해지는 방법, 혹은 자기만의 행복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줘야 한다. 그러면 나는 서울로 돌아와 백 개의 이상야릇한 발음의 행복이란 말을 확성기로 서울 광장의 밤하늘에 날려 보낸다는 것이 내 프로젝트(백 개의 언어가 밤하늘을 마구 날아다니다가 이 집 저 집 들어가는 상상 포함)였는데 기왕이면 사라지는 알래스카 말까지도 넣어보고 싶다는 나의 야심찬 계획은 내가 백 개 국어를 하지 못하는 관계로 좌절되었다. 그래도 어렵사리 채집한 것 중 눈에 띄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p. 83)
대영 박물관
잉글리쉬 페이션트, 수메르 문명, 아가사 크리스티, 마르크스, 길가메시 서사시, 시누헤 이야기, 글자로 이뤄진 시, 헨리 무어, 미라의 스트립쇼,
파도 소리와 침묵 속의 노동,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
: 대영 박물관에 전시된 전시품을 중심으로 수메르 문명, 길가메시 서사시, 미라 발굴과 미라 열풍, 엘진 마블과 그리스 항아리, 파르테논 신전에 관한 역사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울러 대영 박물관을 사랑했던 런더너(마르크스, 헨리 무어, 니코스 카잔차키스 등)의 꿈과 이상을 들려준다.
이렇듯 대영 박물관이 내게는 초현실주의적인 공간으로 느껴지는 것은 7백만 점 유물들을 그저 박물관에 보관 중인 예술 작품으로만 본다면 대영 박물관은 우리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진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이 유물들 중 어느 하나가 나에게 젖은 담벼락이 되어주길 간절히 원한다. 우리가 매끈한 여인의 다리를 털장갑을 끼고 만지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듯 이 유물들을 감히 질문 없이 대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유물을 통해 유물 너머의 어머어마한 문명과 도시들의 이야기를 듣게 될 텐데 이 유물들이 CG의 테크닉이나 상상으로 가득 찬 문장이 아니고, 어떤 구체적인 존재가 꿈을 안고 믿음으로 땅에 발을 붙인 채 밥을 먹고 고민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떨리게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한 가지 주문을 외면서 대영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당신의 소원을 조심하라, 이루어질지도 모르니. 당신의 소원을 조심하라, 흔적을 남길지도 모르니.” 그리고 〈인디애나 존스 4〉에 나오는 크리스털 해골과 《길가메시 서사시》, 서아프리카 왕국 베닌의 흑인 예술가, 미라, 수메르의 점토판들 사이에서 곧 길을 잃고 말았다. (p. 102)
대영 박물관 최고의 자랑거리인 로제타석에서 칭송한 왕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이다. 그는 투탕카멘보다 더 어린 나이인 여섯 살에 왕이 되었다. 그는 사원에 관대했기 때문에 이집트의 신관들은 그를 칭송하는 송덕문을 잔뜩 작성했다. […]
평범한 사람들이 적어놓은 파피루스의 사연들은 대략 이런 내용들이었다고 한다. “저는 노예로 팔려가게 될까요?”, “제가 부자가 될까요?”, “제가 이혼할 운명입니까?”, “누군가 저를 죽이게 될까요?”, “제 자식들이 저와 화해할까요?” 그들은 이 파피루스를 들고 신탁을 향해 뛰는 가슴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쫑긋거리며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들에게 신탁은 알 듯 모를 듯 은유로 가득 찬 말들을 들려줬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다시 새벽길을 걸어 금성을 바라보면서 도시 속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러한 풍경이 내게는 다시 파피루스 속 한 장의 이집트 그림으로 남는다. 여전히 질문을 간직한 채 자신이 출발했던 곳으로 걸어 돌아가는 모습. 나 역시 비슷한 생각에 빠져 그 옆에서 맨발로 동행하고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걷는 내 눈앞엔 세상에서 가장 긴 강인 나일 강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 강엔 아스완의 채석장에서 캐낸 화강암 오벨리스크를 실어 나르는 배가 떠 있고, 그 강으로 곧 밝아올 새벽의 요란스러운 흥정을 위해 선잠 깬 상인들과 어부들이 모여들고, 그리고 강 옆의 집에선 지상에서 착하게 살면 꼭 다시 살아 돌아온다고 믿는 선량한 사람들이 새벽잠을 자고 있는, 그런 풍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p. 117)
자연사 박물관
하루키와 고양이, 아네모네, 앵무새, 다윈, 월리스, 디플로도쿠스,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도도새, 이탈로 칼비노
: 찰스 다윈과 월리스의 진화론, 공룡 화석과 원시 인류의 꿈과 삶 관한 이야기.
공룡 모형을 빙빙 돌면서 구경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사라진 것은 세상에 없다 하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 하더라도, 딱정벌레와 따개비는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아남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근원적인 공통점이 있고 그 공통점은 나에게 일어난 다른 모든 일들이 똑같은 모습으로 두 번 일어나지는 않는 것처럼 어떤 생명의 역사도 똑같은 모습으로 두 번 전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화석과 모형들의 이야기는 오래되었지만 놀랍게 새로운 이야기이고 유일한 이야기이고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끝없는 이야기들이다. (p. 159)
자연사 박물관을 나오자 빗방울이 떨어졌다. 도킨스 식대로 표현하자면 DNA의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다. 나뭇잎맥을 따라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미끄러져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자 우리는 풍부한 개성으로 남아 획일성을 거부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불완전함에까지 충실하면서. 그 빗속을 뛰어서 우리는 웨스트엔드까지 파스타를 먹으러 갔고, 나는 도도처럼 몸을 말리며 이런 이야기를 종알거려주었다. (p. 163)
트라팔가르 광장
노동당, NO POLL TAX PAY, 네 마리 돌사자, 아웃 오브 아프리카, LIBERTY, 보이지 않는 도시들
: 넬슨 제독과 그의 연인 엠마 해밀턴의 러브 스토리를 중심으로 마거릿 대처와 포클랜드 전쟁,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셔널 갤러리 앞의 트라팔가르 광장은 해마다 노르웨이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지는 곳이고, 게이 퍼레이드가 열릴 때 수많은 게이들이 모이는 곳이고, 축구 선수들의 선전에 환호성을 지르는 곳이고, 그 외에 크고 작은 온갖 행사(우리나라 가수 윤도현의 공연 포함)와 시위(바나나 공정무역 지지 행사에서 티베트 독립 지지 시위까지 스펙트럼은 다양하다)가 벌어지는 곳이고, 세계 3대 해전 중 하나인 트라팔가르 해전을 승리로 이끈 넬슨 동상이 서 있는 곳이다. 덩달아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곳이도 하다. (p. 173)
그는 눈물로 얼룩진 넬슨의 얼굴을 떠올리며 바다를 장악했던 위대한 제독으로서가 아니라 한 여자를 사랑했던 슬픈 남자로서의 넬슨의 내면이 인류사에 편입되는 순간을 슬프게 포착한 건데, 나 역시 광장에 서 있는 넬슨을 보고 있자니 기원후 1세기경의 페니키아 선원들이 배가 침몰하는 찰나에 올린 기도문이 생각났다. “신들이시여, 하나의 신이 아니라 바다가 부수어버린 한 인간으로서 심판하여 주소서.”
해상 민족이었던 페니키아인들은 인생을 노 젓는 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죽기 직전에 또 이런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카르타고의 어머니, 노를 되돌려드립니다.” 노를 되돌려준다는 것은 누군가 그의 일을 계속 이어가길 바란다는 뜻이었다. 넬슨이 만약 이런 기도를 올렸다면 그는 그 노를 누가 이어받길 원했을까? 그런데 넬슨 이후 그만큼 위대한 해군 영웅은 영국 역사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트라팔가르 광장에 서 있으면 영국에 더 이상 위대한 해군 영웅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조셉 콘래드의 예언이 떠오르고 그렇다면 해군 영웅이 아니라면 누가 영국 영웅의 자리를 차지했을까 궁금해진다. (pp. 175~176)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티푸의 호랑이 오르간, 런던 만국 박람회,
필리어스 포그, 존 록스터 경, 윌리엄 모리스, The Day Dream, 컨스터블과 버드나무, 우주 전쟁
: 빅토리아 시대 절정기에 세워진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의 전시품들과 그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들(빅토리아 여왕, 쥘 베른, 코난 도일, 윌리엄 모리슨, 컨스터블, 허버트 조지 웰즈)의 이야기.
당시에 웰즈는 《타임머신》을 써서 ‘만약 세상이 앞으로 계속 이렇게 나간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 것 같소?’라는 질문을 던진 셈이고 그 글을 읽은 당시 사람들은 몹시 심란했을 것이다. 어여쁜 엘로이들이 꽃을 던지며 햇살 아래 웃음을 터트리고 뛰어다니는 행복이란 몰록들이 잠잠한 동안에만 가능한 것이니, 바로 행복한 날의 한 떨기 치명적인 불안함이었다. 그러므로 자본과 제국의 빅토리아 시대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은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이 아니라 ‘우리보다 더 취약한 나라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인간 소외, 실업 등 휘몰아치는 사회의 문제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유산의 아름다움 여부는 이런 질문에 대해 가장 명예로운 답을 찾아내려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p. 213)
나는 사실 이곳의 인기 아이템 중 하나인 엘리자베스 시절의 ‘웨어의 거대한 침대’를 보자 엉뚱한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그것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소개해준 것인데 욕망에 몸이 달뜬 못생기고 불운한 서른 살 노처녀가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베를린 근교에 머물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친구를 찾아갔다. 친구의 방으로 들어선 그녀는 손에 두툼한 칸트의 책을 한 권 들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설명을 좀 들으러 왔어요”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의 무릎이 맞닿았다. 친구가 칸트의 복잡하고 추상적인 의미들을 설명하기 시작하자 노처녀는 상체를 약간 수그리고서 열심히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가 책을 홱 덮어버리고는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난 칸트보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요.” (p. 216)
런던탑
사자왕 리처드, 로빈 후드, 술탄 살라딘, 세상에서 가장 슬픈 방, 반역자의 문, 표트르 1세, 도리스 레싱, 브이 포 벤데타
: 피의 역사로 얼룩진 런던탑의 주인공들(사자왕 리처드, 헨리 6세, 에드워드 4세, 앤 불린, 캐서린 하워드), 그들의 욕망과 사랑으로 재구성한 영국 역사.
이후 런던탑의 처형장 타워 그린과 반역자의 문은 튜더 왕조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을 거치며 비탄의 장소로 확고부동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런던탑 반역자의 문을 통해 끌려온 죄수 대다수는 어쩌면 한밤에 배를 타고 끌려왔을 것이다. 그들은 물살의 소름끼치는 어두운 빛깔과 차가운 느낌, 그리고 그때의 절망적인 기분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이다.
헨리 8세의 두 번째 아내인 천 일의 앤 불린과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아내 캐서린 하워드(그 둘은 사촌 간이었다), 그리고 9일의 여왕 제인 그레이, 어쩌면 그녀들 모두가 묵었을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방’이 런던탑 퀸즈 하우스 1층에 있다. 그 소박한 방에서 그녀들은 무시무시한 처형장 타워 그린에서 누군가 처형되는 것을 봤을 수도, 아니면 다름 아닌 바로 자신들의 처형대를 세우는 인부들의 밤샘 작업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다. (p. 236)
런던탑에 앉아 가이 포크스의 부활을 잠시 생각해본다. 매일 매일 똑같이 사는 것 같지만, 되풀이되는 역사의 한 주기를 끌어올릴 신념 가득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이곳의 오래된 삶의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일지 모른다. 오래된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순간이 우리 모두의 삶 속에 한 번은 들어 있기를.
런던탑을 천천히 걸어 나오면서 나는 런던탑이 이렇게 단장된 모습이 아니라 폐허의 모습이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봤다. 버려진 숲, 지하실의 비명소리, 한숨소리, 신음소리에 관한 이야기나 달 없는 밤에 노를 저어 탈출하는 유령 이야기의 시대는 가버려, 우리는 이젠 폐허의 돌더미에 앉아 지나간 시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을 영영 잊어버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 이상하게도 내 귀에 딸깍, 열쇠 소리가 들렸다. (p. 247)
그리니치 천문대
자오선, 해리슨의 시계, 아인슈타인, 보르헤스, 영원하고도 하루, 옥타곤 룸, 템스 강, 타히티 섬, 뜨거운 별자리
: 자오선의 선택과 시계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해, 시간과 관련된 인물 아인슈타인, 보르헤스까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세계에선 네가 보는 것과 내가 보는 것이 다른 것이고, 우리는 다만 각자의 관점 차이를 서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에게 물리학은 사건이 아니고 관찰이고, 상대성은 세계를 사건이 아니라 관계로서 이해한다.
시간도 그렇게 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면, 확실히 아인슈타인에게는 지구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있었고 유머가 있었다. 그는 “하나하나의 인간은 어느 날 욕망과 목표의 공허함을 분명히 느끼게 될 테고, 그때 개별적인 존재로만 자신을 생각한다면 삶은 일종의 감옥과 같은 인상을 줄 것이므로 인간은 우주를 전체로서 경험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p.257)
그리니치 천문대 아래에는 하늘의 별을 보지 않고 템스 강을 건널 수 있는 보행자용 지하 통로가 있다. 걸어서 템스 강을 건너기 위해서 나도 맥주 한 병을 준비했는데 사실은 두 병, 세 병 늘다가 결국…….
내려오면서 공원과 천문대를 뒤돌아보니 햇빛 때문에 손으로 눈을 살짝 가린 천문대가 실눈으로 날 바라보는 것 같았다. 어서 가라고. 뒤돌아보지 말고. 천문대 마당의 경도 0도선은 영원히 너의 출발지로 남아 있다고. 이 도시는 수세기 전부터, 돌아오는 자식에게가 아니라 떠나는 자식에게만 더 악착같이 자애로운 어미 같은 도시였던 것 같다. (p.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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