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16. 17:07ㆍ미술/미술 이야기 (책)
미켈란젤로 메리시 카라바지오(1571 - 1610. 7. 18) , (39살)
<''의심하는 도마(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 (1602년)
1602년에 제작된 ‘의심하는 도마’ 이 작품에는 두 가지 충격적인 요소가 담겨있다.
첫 번째로는 도마가 예수님의 찢긴 옆구리에 직접 손가락을 넣어보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제자들이 하나같이 평범한 늙은이들이라는 것이다.
당시에 이 작품이 불러일으킨 반향과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이전의 미술은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모두 영웅적이며 신비롭게 그려진데 반하여
극히 적나라한 이미지가 표현되어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심지어 예수님까지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 점이다.
카라바지오 이전의 회화에서는
예수님은 물론 사도들까지도 모두 빛나는 후광이나 천사들의 호위를 받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왔었다.
반면 카라바지오는 ‘의심하는 도마’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모두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에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도마를 표현한 것은 도마가 聖人으로 불리운다 할지라도 그에게 있었던 의심하는 면모를 한층 부각시켜준다.
그림에서 도마의 주름진 이마와 옆구리에 넣은 손가락, 치켜 올린 눈썹은
도마가 믿음이 부족하여 마음으로 의심하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심각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적인 묘사는
‘성 마태오와 천사’에서 카라바지오가 나타내고자 했던 기독교의 의미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인간은 누구나 악하며 부족한 존재이며, 그 누구도 완전하고 죄 없는 인간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는 바로 죄인들의 종교이지 聖人들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로만 힘입어 聖化되어 가는 것이지 결코 신과 같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글쓴이&저작권 by 댄인서울
출처: https://daninseoul.tistory.com/40 [Dan in Seoul]
“그가 없었다면 디에고 리베라, 베르메르, 조르주 드 라 투르, 렘브란트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들라크루아, 쿠르베, 마네의 그림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 연구자로 잘 알려진 미술사가 로베르토 롱기의 말이다.
카라바조는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혁신가로 일컬어진다.
그는 르네상스의 관념적인 화풍에서 벗어나 빛과 그림자의 대비와 극적 구성, 사실주의적 표현 기법으로
르네상스 이후 근대 사실주의 회화 기법을 탄생시켰다고 평가받는다.
동시대를 산 화가 푸생의 말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는 회화를 파괴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
카라바조는 1571년경 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의 카라바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이며, 카라바조는바로 그가 태어난 마을의 이름이다.
아버지는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1세 아래에서 일하는 건축 장식가였는데, 그가 6세 무렵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카라바조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주가 뛰어나 화가로 활동하면서
밑그림도 그리지 않고 바로 그림을 그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스포르차 1세가 죽은 후 밀라노 공이 된 콜론나 공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하면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3세 때(1584년) 어머니가 죽자 그는 콜론나 공의 도움으로 시모네 페테르차노의 도제로 들어갔다.
시모네는 티치아노의 수제자로 당시 밀라노에서 가장 이름을 떨쳤던 화가였다.
시모네의 작업실에서 그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곳에서 르네상스적 회화 기법을 모두 습득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21세때(1592년), 카라바조는 로마로 떠났다.
로마는 당시 전 세계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건축가,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 예술가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이던 시기였다.
일설에 따르면 그가 싸움에 휘말려 경찰을 다치게 하는 바람에 로마로 도망갔다고도 한다.
그는 생전에 위대한 천재 화가로 대접받았지만, 그 명성만큼 난봉꾼으로도 유명했다.
평생 난투, 도박, 살인, 남색 등으로 여러 번 체포되어 감옥을 들락거렸으며,
38세의 젊은 나이에 감옥에서 도망쳐 수배자로 죽었다.
로마에 도착한 젊은 카라바조는
예술적 이상과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당시 유행하던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의 그림을 모사해야만 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그는 매춘굴과 노숙자 소굴을 전전하며 밑바닥 생활을 했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독창적인 작품보다 유행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추기경의 동생이었던 판돌포 푸치가 그의 예술적 재능과 자유분방한 성격에 매료된 것이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몇 년 지나지 않아 그의 후원을 마다하고 다시 부랑자로 되돌아왔다.
이후에도 수차례나 로마 부호들의 후원을 받다가 거리의 부랑자가 되는 생활을 반복했다.
호기롭고 자신만만했던 카라바조는 귀족들의 후원 아래 유행하던 그림이나 모사하는 생활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총기 소지, 경찰 폭행, 음주 등 온갖 사건을 일으키며 감옥을 드나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탄생한 대표작이 바로 〈바쿠스〉와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이다.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시선, 노출된 어깨와 발그레한 볼 등 에로티시즘이 두드러지는 작품으로,
단순한 구성이지만 배경을 어둡게 하고 인물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극적인 대비가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가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것은 〈황홀경에 빠진 성 프란체스코〉를 그리면서부터였다.
돈이 필요했던 카라바조는 종교화를 주문받아 그렸는데,
이 경우에도 그는 기존의 관습적인 종교화가 아닌 잘 알려지지 않은 주제를 택했다.
또한 빛을 이용한 강한 명암 대비와 극적인 장면 연출,
관습적인 묘사가 아닌 사실주의적인 묘사로
완전히 새로운 회화를 그려 냈다.
비평가들은 이 그림에서 ‘바로크 미술’이 탄생되었다고 평한다.
이 관능적인 종교화는 당대에도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으며,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개방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던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 몬테 추기경은
이 그림으로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했다.
카라바조는 델 몬테 가의 후원 아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의 〈성 마태오의 순교〉, 〈성 마태오의 소명〉을,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성 바오로의 개종〉 등을 그렸다.
카라바조는 선구적인 종교화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도발적이고 사실주의적인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종교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거나 철거되는 수모를 겪곤 했다.
종교화뿐만 아니라 〈정복자 큐피드〉, 〈나르키소스〉 등의 그림 역시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파문을 일으켰다.
격렬한 성격의 카라바조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참지 못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방탕하게 생활하며 사고를 치고 다녔다.
그중에는 그의 작품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폭행당했다는 고소도 있었고,
그에게 살해 위협을 받았다고 경찰에 신고한 사람도 있었다.
33세때(1604년),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도망가기로 하고 어린 시절 후원자였던 제노바의 콜론나 공 저택으로 잠시 몸을 피했다.
콜론나 공의 후원으로 그는 로마로 돌아와 다시 활동을 시작했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놓일 성모화를 주문받았다.
그러나 그는 창녀를 모델로 삼고, 성스러운 상징이 되어야 할 종교화를 서민적이고 자연주의적으로 그리는 ‘사고’를 쳤다.
이 〈마부회의 성모〉를 불경스럽고 저속하며 신에 대한 모독으로 가득 찬 그림이라고 비난하며 제단에 놓기를 거부했다.
카라바조는 밤중에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며 싸움질을 계속했고, 그 과정에서 경찰을 죽이기도 했다.
살인죄로 감옥에 갇힌 그를 친구들이 탈옥시켜 주었지만, 도주하면서도 다시 싸움에 휘말리는 등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수배범이 되어 쫓기던 중인 1606년 5월, 그는 내기를 하던 상대가 속임수를 썼다며 싸우다가 단검으로 상대를 찔러 죽였다.
그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죄를 피했지만 이번에는 사형을 피할 수 없었다.
후원자들은 계속 사고만 일으키고 다니는 그를 더는 구제해 주지 않았고,
늘 그를 감쌌던 콜론나 공은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었다.
결국 카라바조는 로마를 떠나 도망쳤다.
이듬해 카라바조는 나폴리로 가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로사리오 기도 중의 성모〉, 〈황홀경에 빠진 막달라 마리아〉, 〈그리스도의 책형〉 등을 그리며 완숙한 기량을 뽐냈다.
나폴리에서 명성을 얻은 것도 잠시, 카라바조는 몰타 섬으로 향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경찰이 체포하러 왔기 때문에 도망쳤다는 설도 있고,
기사단의 공훈 기사가 되어 로마로부터 사면령을 받아내려 했다고도 한다.
그는 몰타 섬에서 예루살렘 기사단 단장인 알로프 드 위냐쿠르의 주문으로 〈세례 요한의 참수〉를 그렸다.
이 그림은 위냐쿠르를 만족시켰고, 그는 공훈 기사 작위를 받았다.
〈로사리오 기도 중의 성모〉
39세(1610년), 카라바조는 도망자 생활에 지쳐 붓을 놓았다.
지극히 쇠약해져 자신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던 그는 로마에 사면령을 청하고, 나폴리를 떠났다.
짐 속에는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을 비롯해 마지막으로 그렸던 작품들이 들어 있었다.
교황령 밖인 포르토 에르콜레 항구에서 사면령을 기다리던 그는 결국 로마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시체는 해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죽음의 원인은 오해 때문에 스페인 군대에 체포된 후 열병에 걸렸다는 설과
부랑자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설, 암살되었다는 설 등 다양하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32년 - 1675년 (43살)
베르메르, 〈우유를 따르는 여인〉, 1658~60년경, 캔버스에 유채, 45.4×41cm,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또는 얀 페르메이르(1632년 8월 31일 - 1675년 12월 15일)는
바로크 시대에 활동했던 네덜란드 화가이다.
네덜란드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네덜란드의 '황금 시대'에
델프트에서 살면서 작품활동을 했기 때문에, ‘델프트의 페르메이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신비로우며 사랑스러운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동명의 소설과 영화로도 유명한 이 작품은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이 그림은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
Jan Vermeer
네덜란드의 화가.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대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주로 실내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그림의 구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알았고 순수하고 개성적인 색채 감각을 갖고 있었다.
다양한 형태와 표면에 작용하는 햇빛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매우 객관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의 대표작에는 자화상인 〈회화의 우의 Allegory of Painting〉(1665경)가 있다.
베르메르는 델프트 시 장터에서 자기 집안이 경영하던 여인숙에서 태어나 평생 동안 그 도시에서 살았다.
델프트에 보관되어 있는 공문서에 따르면 그는 1653년 4월 5일에 결혼했고 같은 해 12월에 화가 길드에 가입했다.
베르메르는 1662~63년, 1670~71년에 화가 길드의 대표로 일했다.
그러나 그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 많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팔기보다는 주로 미술품을 거래하는 일로 가족을 부양한 것 같다.
그의 예술은 그 당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세의 화가들에게도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빈틈없이 짜여진 그의 그림의 구조는 다른 화가들이 모방하기에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베르메르의 그림을 위작한 20세기의 주요화가들조차도 이 거장이 원숙기에 그린 작품은 감히 흉내낼 엄두도 못냈고,
그가 명성을 얻기 전인 젊은시절에 그린 작품들만을 위작했다.
베르메르가 살아 있을 당시 그의 작품들은 실험적인 작품으로 간주되어 널리 인정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43세에 세상을 떠나 델프트의 구교회에 묻힌 뒤
그의 아내 카타리나가 필사적으로 애를 써서 남편의 그림 가운데 29점을 구해냈다.
베르메르는 당시의 정치적 혼란과 잦은 전쟁 때문에 파산 상태였다.
회화의 우의(Allegory of Painting)
1665–1668년경 작품
베르메르의 예술은 그가 사물에 대해 갖고 있는 거의 과학적일 만큼 매우 섬세한 지식을 반영하고 있다.
각 그림은 물체에 대한 현미경적 관찰과 빛으로 실험한 다양한 분석의 총체인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특히 회화적인 연구의 총체인 것처럼 보인다.
이 연구를 통해 그는 색채를 단순히 형태를 표현하는 수단에서 벗어나게 하고,
인간의 존재와 그 환경 사이의 관계를 암시하는 새로운 시각적 수단을 면밀히 조사하고 있으며
대담한 원근법의 탐구는 오늘날의 사진술에서 광각 렌즈와 망원 렌즈의 사용을 예시하고 있다.
유명한 〈델프트 풍경 View of Delft〉에서는 베르메르는 시계에 시간(오전 7시 10분)을 표시하기까지 했다.
신념의 우의(Allegory of the Faith)
1670–72년경 작품
베르메르의 그림에 적힌 제작 연대는 대체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작품들의 제작 연대를 확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미술사가들은 한 화가가 그린 그림들 가운데 구도가 좀더 복잡한 그림이 보다 후기에 그려졌다는 원칙을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신념의 우의〉와 〈회화의 우의〉는 베르메르가 궁극적으로 도달한 경지가 아닐까.
베르메르는 전형적인 네덜란드 풍속화 중에서도 그만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당시의 다른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및 플랑드르의 미술에서 받은 영향을 느낄 수 있지만
베르메르는 이 모든 영향력에 저항했다.
예를 들어 프란스 할스는 이따금 스페인의 벨라스케스와 교류한 듯하고
렘브란트는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인 구에르치노와 교류한 듯하나,
베르메르는 유독 완전히 개인적인 방향에 몰두했다.
그러나 베르메르는 현실에 대한 '설계도를 그리고' 그것을 철저히 분석하는 방식에서 볼 때 전형적인 네덜란드인이다.
네덜란드 수력 공학자들이나 천문학자 호이겐스의 엄밀한 방식을 연상시킨다.
베르메르의 모든 작품들은 그 특유의 농도와 명쾌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재발견한 미술사가인 테오필 토레가 1866년 76점의 그림을 그의 작품으로 인정할 때까지는
모두 다른 화가들의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2년 뒤에 또다른 학자는 76점 가운데 56점만을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인정했다.
1907년에는 이 숫자가 다시 34점으로 줄어들었고, 오늘날 이 숫자는 30~35점에 머물러 있다.
1937년에 베르메르 작품의 제작 연대를 확정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져 권위자들은 서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1945년에 위작자인 한스 반 메헤렌이 나타나 자기가 그린 위작이라고 선언하자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졌다.
베르메르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그 위작 소동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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