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6. 11:40ㆍ미술/미술 이야기 (책)
"암스테르담은 반 고흐 하나로 충분하다"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시내 여행에 나섰다. 호텔에서 중앙역까지는 메트로를 타고 갔다. 그토록 기다리던 반 고흐 미술관부터 갔다. 고흐의 그림을 보면서 정말 행복했다. 이런 그림 앞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200여점이 넘는 그의 그림을 한 자리에서 본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다.
특히 내가 관심을 가졌던 그림은 자포니즘(Japonism)의 영향을 받아 그린 일본풍의 그림이다. 즉 일본 우끼요에(浮世繪)의 대가 히로시게의 그림을 모사한 <기생> <비 내리는 다리> <매화꽃 피는 과수원> 등이다. 이 그림들이 중요한 이유는 150여 년 전에 우키요에라는 그림의 여행을 통해서, 지구 동쪽 끝에 있는 나라의 문화가 서쪽 끝에 있는 나라의 문화에 큰 영행을 미쳤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그림들은 또한 서쪽에서 동쪽으로 유입되던 문화에 역류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1868년에 일본이 메이지유신에 성공하면서 일본 문화가 유럽 문화계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산업혁명 후 처음 일어난 문화 역류현상이다. 이런 현상을 자포니즘(Japonisme)이라고 부른다. 자포니즘이라는 단어는 프랑스 작가이자 수집가인 필립 부르띠(Philippe Burty)에 의해서 1872년에 처음 사용되었다. 그에 의하면, 자포니즘이란 '일본의 예술로부터 배우는 새로운 분야의 예술, 역사, 인종적인 연구'를 의미한다. 이 사조는 처음에는 그림에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공예, 도자기, 건축, 생활양식에까지 광범위하게 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중에서도 일본 채색 목판화가 유럽 문화계에 끼친 영향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188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소개된 일본의 채색 목판화 우끼요에의 신비한 동양적 분위기가 유럽의 예술가들, 특히 인상파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그들의 그림에 일본 문화가 등장하게 된다. 선명한 색채, 뚜렷한 명암 대비, 대담한 시선 및 공간 처리, 평면 분할 기법 등이 새로운 화풍을 모색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던 인상파 화가들을 열광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인들은 그때까지도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된 자신들이 문화가 선진 문화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그런 판화를 도자기 등의 포장지 등으로 사용하는 그 가치를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서양미술사의 대가인 곰브리치도 서양미술사 특히 인상파화가들에 끼친 일본 목판화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서양 미술사가의 입장에서 동양 미술의 하나인 일본 목판화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 ---- 18세기의 일본 화가들은 동양 미술의 전통적인 소재를 포기하고 채색 목판화를 위한 주제로서 하층민의 생활 장면들을 선택했다. 이런 채색 목판화는 최고의 장인이 지닌 기교의 완벽성과 매우 대담한 의도가 결합된 것이었다. 일본인 감식가들은 이런 값싼 작품들을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근엄한 전통적 방법을 더 선호했다. 19세기 중반 일본이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교역 관계를 강요받을 시기에 이러한 판화들은 물건을 싸는 포장지나 빈 곳을 메워주는 종이로 자주 사용되었고, 차(茶) 상점에서 싼 값에 구할 수 있었다.
마네 주변의 화가들은 그 판화들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그것들을 수집한 최초의 부류였다. 이 판화들 속에서 프랑스 화가들이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던 아카데믹한 규칙과 상투적 수법에 의해 훼손당하지 않은 전통을 찾아내었다. 일본 판화는 프랑스 화가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유럽적 인습이 아직도 그들에게 남아 있는지 깨닫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일본인들은 사물의 우연적이고도 파격적인 면을 즐겼다. 일본 판화의 거장인 호쿠사이(北齊: 1760-1849)는 우물의 발판 뒤로 언뜻 보이는 후지산의 정경을 재현했고, 우타마로(歌磨: 1753-1806)는 판화 가장자리나 대나무 발로 인해 잘려나간 인물들을 묘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처럼 유럽회화의 기본적인 규칙을 무시한 인상주의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이러한 규칙에서 시각에 대한 고대의 지배적인 지식이 잔존해 있음을 발견해냈다. 그림이 항상 어느 장면의 모든, 또는 관련되는 부분을 다 보여주어야만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 **
(출처: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2012: 525-526)
곰브리치가 역시 미술사의 대가답게 프랑스 인상파에 대한 일본 목판화의 영향에 대해서 제대로 지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동양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인이다 보니까 몇 가지 잘못 이해하거나 간과한 점도 있다. 곰브리치는 당시 일본 화가들은 하층민의 생활 장면을 주로 그렸다고 말했는데, 그들은 일본의 명산과 바다 호수 등 자연풍경도 많이 그렸다.
호쿠사이는 후지산 36경을 연작으로 그렸으며, 히로시게는 에도 100경을 연작으로 그려 당시 대중들에게 대히트를 쳤다. 그리고 우타마로가 대나무 발로 인해 잘려나간 인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 대나무 발에 비친 인물을 그린 것이다. 대나무 발을 사용한 적이 없는 곰브리치는 대나무 발이 반투명성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창호지나 대나무 발에 비치는 사물의 그 은은한 잔영 효과를 몰랐던 것이다.
곰브리치는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화가로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을 지목하여 예를 들고 있는데, 사실 그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사람은 고흐(Vincent van Gogh)라고 볼 수 있다. 정말 고흐는 뼈속까지 일본 판화에 빠져들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 그림의 기본 컨셉은 일본 그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일본 그림에 빠져 들었고,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중개상을 통해서 구매할 수 있을 만큼 일본 그림을 수집했다. 그래서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에도 100경> 중 <신오하시 다리 위의 소나기> (1857)을 거의 그대로 모사하게 된다. <비 내리는 다리> (히로시게 모사)(1887)가 바로 그 그림이다. 몇 년 후에 미국의 유명한 건축가이자 일본 그림 중개상인 라이트가 고흐의 이 그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혹평을 했다.
고흐가 '히로시게의 그림을 모사'했다고 말한 그림(The Bridge in the Rain)이 있는데, 히로시게의 판화를 유화로 다시 그린 것 이상의 의미는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히로시게보다 더 잘 그렸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고흐가 그린 그림이 너무 형편없이 보일 정도로 히로시게의 그림은 대단히 훌륭하다.
너무도 유명한 '탱기 아저씨 초상(Portrait of Pere Tanguy)'의 배경을 보면 고흐가 얼마나 일본 문화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우끼요에풍의 여러 가지 그림을 배경 화면으로 처리한 것이다. 삐에르 로티의 소설 <국화부인>에 뤼기 로시가 그린 삽화에 나오는 국화부인의 장례를 치르는 일본 승려들의 민머리에 감명을 받아 머리를 밀어버리고 초상화를 그리기도 한다. 고갱에게 준 초상화가 바로 그 그림이다.
1882년 2월에 프랑스 남부 아를에 도착한 직후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자신은 이제 더 자주 일본 사람의 눈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있으며, 만일 누이가 일본 판화를 공부한다면 밝고 선명한 색채를 사용하는 (일본의) 현대 미술가들을 이해하게 될 거라고 설득한다. 또 고흐는 1887년 9월 말에 일본 미술을 연구하면 얻게 되는 소득을 설명하면서 동생 테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일본 미술을 연구하게 되면 매우 현명하고, 철학적이고, 지혜로운 한 (일본)사람을 알게 된다. 그는 인생을 어떻게 살까? 달과 지구 사의의 거리를 연구할까? 아니다. 그러면 비스마르크 정책을 연구할까? 아니다. 그 사람은 잔디 한 잎을 연구한다. 이 잔디 한 잎이 그이로 하여금 모든 식물을 그리게 하고, 모든 계절을 그리게 하고, 시골의 다양한 풍경을 그리게 하고, 모든 동물을 그리게 하고, 마침내 모든 사람을 그리게 만든다. 그는 그런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물을 다 그리기에는 인생은 너무나 짧다(출처: Lambourne, Japonisme, 2005,).
고흐만 일본 그림에 빠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미술시간에 배운 유명한 화가들은 거의 모두 일본 문화에 흠뻑 빠져 있었다. 마네도 카쯔시카 호쿠사이(Katsushita Hokusai)의 그림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유명한 <에밀 졸라의 초상>의 배경에도 일본 그림이 걸려 있다. 모네는 자기 부인에게 기모노를 입히고 일본 부채를 잔뜩 그려 넣은 그림을 그렸다. 평생 일본 판화를 수집했던 클로드 모네는 1985년 3월 1일 노르웨이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나는 여기에 멋진 모티브를 하나 가지고 있다. 배경에 산이 하나 서있고, 수평선에 떠있는 작은 섬들. 사람들은 일본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산을 하나 그렸는데, 후지산을 연상하면서 그렸다."(출처: Lambourne, Japonisme, 2005, 48페이지).
또한 모네는 정열적으로 이렇게 믿었다. 일본 목판화의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가 새로운 소재와 참신한 색채 구성을 야심적으로 찾고 있던 인상파 화가들에게 얼마나 강렬한 충격을 주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우리가 일본 그림을 보기 전에는 누구도 감히 강둑에 앉아서 캔버스에 밝은 빨간색 지붕과 하얀색 벽, 초록색 포플러, 노란색 길과 푸른 물을 함께 배치하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일본 그림(판화)들에 묘사되어 있는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를 보기 전에는 그런 시도는 불가능했다. 우리 화가들은 항상 거짓말을 했고, 사람들은 색깔 톤이 반으로 죽어 애매한 색으로 그려진 그림만 보았다." (출처: Lambourne, Japonisme, 2005,)
그 외에 드가, 고갱, 로트렉, 피사로, 르노와르, 클림트, 티소, 휘슬러, 호들러 등이 일본 그림의 영향을 받은 그림을 그렸다. 거기서 더 나아가 로버트 블럼, 조셉 크롤, 챨스 워그만 같은 서양 화가들은 아예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문화를 직접 경험하면서 일본인의 일상 생활을 소재로 하는 그림을 유화로 그리기도 했다.
건축에서는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 1861-1947)가 일본의 건축 양식을 응용하여 굽이치는 곡선의 효과를 현대인의 요구에 잘 맞는 철제 구조물에 옮겨 놓았다. 유럽의 건축가들은 브루넬리스키 이래 완전히 새로운 양식을 보게 되었다. 이 새로운 창안은 매우 자연스럽게 아르누보와 동일시 되었고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일본 미술은 유럽의 광고 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로트랙은 이처럼 절제된 회화 기법을 포스터라는 새로운 미술에 활용했으며, 젊은 천재 작가인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Beardsley: 1872-1898)는 일본 판화에서 영향을 받은 흑백 삽화로 유럽 전역에서 순식간에 큰 명성을 얻었다.
일본 문화는 미술 뿐 아니라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풋치니는 오페라 <나비부인>의 토대가 되었던 삐에르 로티(Pierre Loti)의 소설 <국화부인(菊花婦人)>을 각색한 연극 <나비부인>을 보고 감명을 받아 오페라 <나비부인>을 작곡했다. 연극 <나비부인>은 2차대전 후 일본 게이셔와 미군 장교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통속적인 내용이다.
1900년 1월에 로마에서 오페라 토스카를 성공리에 마친 풋치니는 새로운 작품을 찾고 있었다. 1900년 6월에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토스카> 영국 초연을 하러 갔다가 The Duke of York Theater에서 우연히 연극 <나비부인>의 일본적인 드라마틱한 스토리에 엄청난 감동과 충격을 받게 된다. 영어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연극 초연이 끝나자마자 무대 뒤로 달려가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오페라 제작 및 공연권을 따게 된다. 이렇게 해서 <나비부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의 바람둥이 풋치니라서, 즉 연애 경험이 많아서 비극적인 연애스토리인 <나비부인>을 성공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 판화는 오페라뿐 아니라 클래식 교향곡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을 사랑했던 드뷔시는 바다를 자주 방문했다. 바다를 좋아했고, 바다가 자신에게 작곡에 필요한 새로운 분위기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가쯔시타 호쿠사이(Katsushita Hokusai 葛飾北斎 1760~1849)의 판화 <후지산 36경> 중 <큰 파도>에 반한 드뷔시는 이 그림을 1905년에 발간된 그의 피아노 악보집 표지로 사용하게 된다. 나중에 드뷔시는 영국 이스트번(Eastbourne)에 있는 그랜드호텔 방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교향시 <바다>를 작곡하게 된다.
9세기 중반에 일본 유학승인 엔닌(圓仁 794-864) 일행이 당시 선진국이었던 당나라의 절에 가서 불화를 모사하느라고 비싼 비용을 들인 적이 있는데, 천 년이 지나서는 서양화가들이 일본 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일본은 적어도 문화적으로 이미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채색 목판화로 수백 수천 장씩 그림을 찍어내려면 우수한 종이 제조 기술과 인쇄술, 그림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전문가별 분업 제도, 유통 제도, 춘화(春畵)까지도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어우러져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13세기 말에 서구 기독교 사회가 마르코폴로가 소개한 동양 문명의 종주국인 중국의 위대한 문명에 충격을 받고, 16세기 말에는 유명한 허풍쟁이 핀투가 소개한 중국 문명에 충격을 받고, 19세기 말에는 파리만국박람회가 소개한 일본 문명에 큰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문화 충격(culture shock)이라고 한다. 암스테르담은 고흐 하나로 충분하다. 국립박물관, 안네의 집, 섹스박물관, 홍등가 등 나머지는 모두 덤이다.
출처. 고태규의 유럽 자동차 집시여행 (오마이뉴스)
'미술 > 미술 이야기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품설명 (11) - 카라바조 & 베르메르 (0) | 2019.06.16 |
---|---|
『최하림의 러시아 예술 기행』 (0) | 2019.06.09 |
『단숨에 읽는 現代美術史』 (0) | 2019.05.31 |
'피그말리온 효과' (펌) (0) | 2019.05.26 |
『스토리가 있는 세계그림여행』 (0) | 2019.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