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왕실의 백제 기원설

2019. 5. 4. 11:51책 · 펌글 · 자료/역사





<주제글>

" 최근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왕묘가 발굴이 되었는데, 고대 일본왕실 혈통이 원래 한국에서 기원 되었다는 설에 대해 일본 정부에서 이 무덤에 대해 더이상 연구 하지 않을 것을 발표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 떄문일까?"  

이 출처는  베네딕트 앤더슨 < 상상의 고대국가 > 에서 나온것이고, 어떤 한 개인 논문이 아닌, " 일본의 역사 학자들"로 부터 나온 공통적인 지적 인데.. 이 정보가 믿을만 한것이고, 향후 이런 연구를 계속할 계획이 있는 건지? 
니들 생각은 어때?



<댓글>


SteveGladstone
나는 천황이 자신의 혈통이 백제혈통 임을 밝혔기 때문에 더이상 논쟁거리가 아니라는 " ted5298" 견해에 동의 하지 않아. 천황이 백제혈통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 분명한 일본특색을 보인 왕조와 노선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면 백제 기원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 된것이야
 

짧게 요약 하면 :

일본 왕조에서 백제계 는 여러 일본왕 계보들 중에 하나에 불과해. 백제계는 카무천왕 어머니 부터 일수 있겠지만 일본왕 계보에서만 보여진다는 게지. 이말은 , 마치 내 혈통이 슬라브 출신이지만 내 선조들중에 한 할아버지가 프랑스 여인과 결혼을 했고, 그외 다른 프랑스 인이 우리혈통에 합류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프랑스인 이라고 불러지는 것과 같은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논쟁이 자꾸 일어나는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야.나는 아키도 천황의 고백은 좀 외교적 수사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이야.



자세하게 거론 하자면,

우리는 먼저, 고대왕조 연대기 부터 정해 놓고 시작해야 한다는 거야. 일본의 왕권과 국가형성(일본제국을 포함하여) 기원은 기원전 1세기, 아요이 시대 부터 이지. 그 이전은 히미코 시대 이고, 역사적 기록이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그냥 "부족동맹"과 "초기국가"정도로 한정 시켰지. 그러나 최근 큐슈 사가현 요시소 가리에서 발견된 이번 고고학적 발굴은 그냥 작은 마을 형태로 이뤄어 졌고, 그 근처에서 큰 무덤이 발굴이 되었고 그 무덤지 보다 두배 정도의 정착지가 발굴이 된것이야. 여기에서 한국 무덤지에서 발굴되는 것과 같은 청동검과 중국남부지역에 나타나는 유리세공 구슬 , 바구니 ,도자기 및 기타 유물들이 출토 되었지. 이것이 중요한 발굴이란 점은 이 주변지역에서 그시대 것으로 보여지는 금속도구가 발굴 되었기 때문이지. 이것은 요시노가리-쿠니(쿠니국 또는 쿠니 지역/마을로 불려졌다)에서 사용했던 것이지


이 발견은 야마타이 와 본토 사이에 물물교역이 BC 1세기부터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 이야. 이것으로 인접한 섬국가들 사이에서 교류가 있었고 사회계급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거지. 이러한 것은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지도자가 출현했고, 이들은 통치하기 위한 "제도적인 법"을 만들 필요성이 대두 되었다는 뜻이기도 해.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나의 족장으로 통합하여 국가형태로 발전시켜서, 다른 혈족들을 통제하고자 하는 '큐니족' 들 목적이었지. 


요시노 가리 발굴은 화살촉 및 기타 전쟁무기( 군사 목적의 타워)들 발굴로 세력의 확장은 평화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쿠니족들은 힘과 권위에 대한 생각들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이것은 친족기반 공동체의 지도자는 종교적 기능까지 요구 되었다는 걸 말하고 있어


두번째로 중요한것은 '통치력' 에 대한것이였어. 밑에있는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해, 자원을 확보하고 보호해야 하는, 종교적 지도력이 필요해 졌기 때문이지. 이것은 위로 부터 아래까지 공물을 수거 하는 작업과 사람들을 관리해야 하는 목적으로 계층적구조 의 사회구성이 필요 해졌고, 하나의 추장을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한 공동체로서  " 의식행위의 중심지" 형성 했던 것이지. 그런 것을 통해 자신들 집단속에 그런것을 포함 시켰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 부족과 족장을 위해서 농업부터 , 군사력 까지 동원 할수 있게 된것이지. 


이제 '히미코 여왕' 시대로 돌아보면,  한반도로 부터 문물을 받아들여 제일 먼저 한 행위는 중국 위나라 황제에게 공물을 보낸 거였어. 위나라  황제는 그녀에게 " 왜국 여왕" 또 "위나라 수교국( * 일본인 관점에서 동등한 의미로서 친구로 적었지만 사실상 조공을 바치는 신하 국가 임)"이라는 칭호와 예복을 비롯한 화려한 선물을 하사했다. 이것은 극동에서 가장 진보된 문명국가로서 승인을 받은것이고..이것은 동북아 국가 와 교역허가증 으로서 ,기술과 문물교역 권리보장을 받은 것이었지.


히미코 여왕이 처음부터 중국에 사자를 보낸것은 아니였다. 후한서 와 기타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57세 나이로 "나"땅 에서 아요이 사자를 만났으며( 이시대 일본은 "왜"로 불려졌습니다). 그런 교역의 결과로.. 철기류를 획득할수 있었으며, 언급했던 요시노가리에서 그런 철기류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나중에 혼슈까지 넓히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철기는 가장 중요한 물자중에 하나였습니다.  철기는 힘의 원천 이었는데 , 수입된 철기는 군사력을 강화 시켰고, 중국과 한국와 교류 덕분에 2세기 말엽에, 쿠니 통치자들은 혼슈 북동부까지 진출 할수 있게 되었지. 


그 당시, 고조선과 다른 한반도 국가들이 일본정복의 고고학적 증거로 내세우고 있는 ,일본 왕족혈통들이 한국혈통 이란 것만으로 전체 일본을 통치했다는 증거가 될수 없다. 이는 야요이 시대와 조몬시대에서 한국기원을 증명할 그어떤 유물도 일본에서 발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거지.


야요이 시대로 집중하면, 히미코 통치 이전이거나 그후 시대에서 ,후에 일본에 야마타 족장을 세운  백제에 파견하여 한반도와 접촉해서 무역 관계를 유지했다.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와 인접하고 있었고, 4세기 중반까지 고구려를 빈번하게 군사적으로 공격을 했던 국가였다.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 에게 여러차례 공격을 당했다. 야마타는 백제와 긴밀한 교류를 했는데 , 철광석 수입때문이었고, 그 무역항구(* 영산강 유역을 뜻한 듯.. 영산강을 가야로 보는 일본관점 )가 가야에 있었기 때문이었어.  군대까지 주둔 시켰다.


 이는 5세기 초반까지 유지 되었다. 왜는 신라와 백제와 동등한 국가로 간주 되었다. 장기 교류의 목적으로 왜와 백제는 서로의 왕자들을 교환 했어.


이 지역은 한반도와 일본에서 분리된 하나의 부족국가 로 생각 해봐야 한다고 봐

유라아쿠 는 중국에서 받은 서신을 고려 해본다면, '최초의 왜왕' 이었다. 실제 송 왕조가 5세기에 외교적 접촉을 한 5명의 집정관 중에 하나였다. 70년대 학자들은 이 시대를 중앙 통치자와 제후국 을 통치하는 국가로 보았다. 유라쿠 는 다른 지역 통치자들과 결혼관계로 교류하고자 했던 통치자 였고, 많은 갈등을 겪었다. 


ㄴSteveGladstone
유라아쿠가 사망한 후,권력공백이 되었고, 이변화가 일본에서 진정한 국가형성을 가져왔지. 이것은 일본왕조 기원이 된다는 걸 뜻하는 거야. 니혼쇼키 와 후도키(평판이 더좋은)에 대한 여러가지 얘기도 있지만,  케이타이가 군사력으로 궁전을 짓고 이와이 의 집정권을 강화 했음을 알수있지. 케이타이는 후궁과 왕실 장남을 이용해서 후계자 진출을 모색 했지. 

이것은 나중에 케이타이 아들이 첫번째 위대한 왕, 킴메이 가 등극하게 만들었어. 킴메이는 나중에 토지개혁과 법을 정리해서 강력한 왕국을 재건했던 왕이었어 


첫번쨰의 진짜 '텐노' : 일본 천왕 은 슈이코 이지. 그녀가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면,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이지만 어쩄던 텐노를 최초로 사용한 여왕이었어. 그녀는 유메야도 왕자, 일명 쇼토쿠 카이시 와 통합 했고, 그녀의 통치아래 국가로서 일본이란 명칭이 최초로 나오게 했고, 17개 조항을 만들고 법제정을 해서.. 불교를 도입했어.  난 슈이코가 일본제국 의 기초를 형성한 최초의 여왕으로 생각해


아키히토 의 의견( 자신의 혈통은 백제혈통 이다 주장한)은 백제의 몰락과 일본으로 유입한 백제계 엘리트 정착과 관련이 있어. 이론 논란은 코친 황제가 ,백제 무령왕 후손이라는, 타카노 와 아오모 나이가사 와 결혼 하고 나서 몇세대가 지난 이후 의 이야기 란 거지. 현시점에서 천왕의 백제 기원설은 코닌에 이르기 까지 수세기 동안 일어났던 모두를 무시한것 이어서 , 좀 뜬금이 없어. 이러면 연관이 없는것이 없는게지.


출처:
피고,조안 ---  일본 왕 출현
반네스 , 기나 -- 차이나 , 한국과 일본 : 동아시아 문명부상
프랭크포트,앙리 - 왕과 신들
코헨 , 호날드  - 계급적 계층 발전
나이지라아 비루족 사례연구
와다 아츰 - 이세 신궁의 기원
킬리 CJ- 고고학 야마토 국가의 왕조
조나단 - 6세기 초 백제의 불교와 정치
요시다 카즈히코 - 고대 일본의 종교개혁



최종 결론 :

근원이 어디 있어? 나는 한국인이 항상 일본인 ,만주족(일부 몽골인)이 거의 같은 사람들이란 것을 배워 왔습니다. 더 알고싶어?

음... 나는 왕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잘모른다.  그러나 일본왕실의 외국기원에 대한 것은  여러 논쟁이 있어 왔지.

참고로,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황제가 발언에 근거로 두고, 이 발언은  20년 동안 봉인이  되었던 것이였어.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키히토가 말한 내용을 알아야 해, 

어쩄던, 역사적 관점에서 일본은 내 분야가 아니지만, 이 논쟁에 보다 전문가가 나오면 좋겠지만 없어도 상관은 없어. 짧게 답한다면, 일본왕족은 백제계 라는 것은 맞아. 아키히토가 2001년에 68년 생일에 다음을 말했지.

" (한국)은 일본의 발전에 크게 기여을 했다. 나는 카누천황의 어머니가 "일본의 역사에 기록한 " 사실을 감안하면 한국과 일본은 혈연적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백제 무령왕 을 언급한, "일본연대기"는 동아시아 학자들 사이에 잘 알려진 역사서 이다. 8세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일본국가와 역사와 혈통과 민요와 창조신들에 대한것 까지 포함하고 있는...일본역사와 문화에 아주 중요한 겁니다.


두번째 작품은 - "일본서기" 입니다. 이것은 720년에 완성이 되었고, 이 책에서 백제 무령왕이 505년에 일본에 공물과 둘째아들 인 '순다'를 보낸 내용이 있다. 백제는 일본와 중국과 광범위한 무역을 하는 일본에게 아주 중요한 국가였으며, 군사적으로 매우 가까운 나라였다. 무령왕은 이미 일본왕조와 혈족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그의 삼촌은 유랴쿠 황제의 신하였고 무령은 일본의 한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 되 있습니다. 513년에 그의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떠났다고 되어 있어.



------ 이하 축약한 내용( * 내용이 너무 길어서 다음으로 축약함) -------


일본 황실은 부분적으로 한국 벡제계 란 사실은 분명 하지만 이 발언을 한 아키히토 왕은 현재 페위가 된 상황임을 알아야 한다 는 말로 마무리 함.




ㄴ0ttr
아주 읽기 좋았고 유익했어


ㄴXenophanesMagnet
아주 유익한 정보를 줘서 고마워, 니가 주장한 내용의 출처에서 보면,  'Imagined Communities'에서 주장한 내용 보다 훨씬 많은 증거를 제시 했어. 앤더슨 입장은 일본왕실은 아예 한국인들이란 것을 주장했고.... 원즈가 독창적으로, 마치 영국왕관이 옮겨진 것 처럼 일본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인용한 반면에, 니혼 쇼키는 일본 한왕조 혈통만  한국계로 주장하고 있는게 다른 부분이야 



ted5298
이건 더이상 논쟁거리도 아니야. 뒷받침 하는 서적들이 모두 좀 고루한 것들이지..  베네딕트 앤더슨이 주장 한것은  '상상의 공동체' 와 함께 주로 민족주의 개념을 비판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해( 사실,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그의 논점은 민족주의 본질이 여전히 중요한 본질임을 보여주고 있지.) 민족주의 사고방식이 좋거나 나쁘거나 상관없이 앤더슨은 그들을 주 공격대상으로 삼고있기 때문에 각주로 일본 군주주의가 일본의 핵심 민족주의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는 게지. 특히, 일본군의 깃발아래 1890년대 와 1940년대 에서 저질러진 다양한 타민족들에게 보여진 공포를 비판하고 있는거야


내가 보유하고 있는 출간물은 1991년 두번째 에디션이기 때문에 니들이 가지고 있는것과 약간 차이가 날수있어.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니들이 말하는 각주 또한 나에게 있다는 거야 
큐슈와 혼슈에서 사용되는 일본어가 차이가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지만 통일된 독해 시스템은 학교와 인쇄물에서 통일이 되었기에 문제가 없어. 두번재로 일본황실에서 일본의 특성(일본은 역사를 통해 독점권을 얻는 유일한 국가임)와 상징적인 일본와는 차이가 있다는것이지.특이하지만 일본은 착취적인 목적으로 황실을  이용해 왔다는 뜻이야. 세번째로, 이민족의 유입은 자신들 왕조를 유지 하는데 상당한 위협적이란 점이지.


각주 29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 있어.

...   그러나 일본학자들이 최근에 발굴한 왕실묘를 보고 충격과 공포에 쌓였다고 생각했어.  왜냐면, 일본왕실이 한국계임이 드러났으니까..그결과 일본 정부는 더이상 발굴을 하지않겠다고 선언하게 되었지만    .. 
 

그래서 개인적으로 확인까지 못해 봤지만, 첫판이 같은 구절에 대해 같은 해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할수 있다는 거지. 책을 처음 출판 했을 당시, 1983년 까지 대일 청구일 로 거슬러 올라가지.이것은 이 책이 쇼와시대 통치였던 쇼와시대에 쓰여졌다는 걸 의미하기에 아주 중요 한것이야. 히로히토는 2차세 계대전에서 일본을 대표한 것과 아주 비숫해. 


비록, 히로히토가 일본 군주주의에 적극적인 동의를 하지 않았지만, 한국은 일본과 중국 두나라 사이에 희생양이 된 상황이었고 그런 시대적 환경과 역사적 관점에서 적혀진 책이기에 우리가 알고있는 군주제 보다 휠씬 보수적이고 반동적 이었다는 거야( 이런것을 지적하는 것은 아키히토가 그의 아들에게 양위를 시점에서 거론할수 있다는 뜻이겠지)


히로히토 아들, 아키히토가 황제로 취임한 것은 1989년 이었다. 그는 일본 군구주의 와 한국의 유대관계 임을 아는 사람이었기에 저런말을  할수 있다는 거겠지

내 개인적 느낌이지만 ...나는 카무천왕 어머니가 무령왕가족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일본연대기' 기록에서 봤을때 한국과 연관 되었음 을 느꼈다.

-- 아키히토 , 2001년 12월 뉴욕타임즈 와 회견에서 ---


그래서, 여기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정보를 가지고 판단하는 잘못된 사례 인거야. 앤더슨이 처음 책을 썼을 당시엔 일본의 역사에는 한국와 연관성도 용납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결점이 많았던 히로히토 보단 휠씬 개방적이고 뛰어난 아들인 아키히토가( 지금 , 앞으로 수십년 안에 성격이 보여질 손자을 위한 )작업일수도 있어


아키히토는 1990년에 노태우대통령에게 일제치하 시절에 대해 개인적인 입장뿐 아니라 일본인으로서 공식적 사과를 했으며, 자신 혈통이 백제계라는 것을 밝힘으로서 양국가간 악의를 누그뜨리는데 노력 했다. 


그래서 더이상 이런 연구할 필요가 없는거야. 일본황제는 한국인 혈통, 벡제계 란 사실이란 뜻이지.


ㄴhahaha01357
네 말은 다음을 뜻하는 건가?
한국은 큰나라인 일본과 중국간 권력행사와 경쟁에서 피해자가 되기 쉬웠다 는 뜻이야?


내가 이해 한 바로는 중국황제들은 일본을 19세기 와 20세기 이전엔  멀리 떨어진 섬나라 라는 생각을 바꾼적이 없다는 거야. 사실 일본이 청나라에서 한국을 병합 한것은 최초 중일전쟁에서 승리를 했기 때문이야


ㄴWMConey
솔직히 이 질문은 원래의 질문 방향에서 벗어난것 이야. 백제계에 기원을 둔 일본황실과 최근 발굴된 유적지 조사연구를 중단한 이유와 어떻게 연관이 되지?


백제공주가 일본황제를 낳았다는 것은 듣기좋지만,  최초 일본왕 묘지를 묻는 질문에 " 고대 일본황실은 백제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는 것으로 대답을 하는 것은 일본정부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란 거지 



ㄴㄴted5298
내가 문제를 회피 하는 이유는 앤더슨이 각주에서 밝힌 출토물 근거와 학자들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기 때문이야. 원래는 각주 전체를 다 인용을 해야 하는것여서,  내키지 않았지. 일본왕족혈통에 대한 한국의 영향에 대한 우리의 지식으로 판단하는데 한계가 있고, 내 지식능력을 초과 하는것이라서 그랬던 것이야


ㄴmatts2
그래서, 고고학 조사결과 와 연관이 있다는거야? 지금 그 연구가 진행 중이야?


ㄴAleksanderpwnz
이런 것은 이제 더이상 논쟁거리가 못되
더이상 연구가 필요하지 않은거야. 네 의견을 바탕으로, (1시간동안 , 그 이전에 논의한) 아키히토 의 공개적 성명서에 기초로 한것으로 보여져. 이건 네 생각 결론이야? 아님 다른 사람들 의견도 포함되 있는거야? 


ㄴrkiga
난 결론이 내리는  방식에 혼란 스럽네. 원래의 질문에 정확하게 답한것으로 보여지지 않았어.다시말해서 , 가능한한 고대황실에 대한 발굴된 묘지에서 발견된 증거의 범위가 무엇인지? 앤더슨은 일본 군구주의 는 깨어지지 않은 왕조이며,  그 혈통은... 한국에서 기원 된것이다 ... 공포스러웠어.


그리고 너는 다음의 말로 정리를 해버렸지. 이 이상 논쟁은 의미가 없으며 인용한 책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를 연구는 불필요 한것이고.. 일본황실은 한국게 임을 인정해야 한다 라는거야 
뭐라고?
나는 더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생각해.  아키히토 황제가 카무황제의 할머니가 백제계 라고 밝혔고 카무황제는 서기 78년부터 50대 황제 라는것을 주장 했고, 그져 "순수한 일본황실 혈통"보다는 관계개선이 더 중요하고, 그런 관점에서 한국혈통을 받아들이자 라는 소리잖아. .앤더슨과 아키히토 말은 정확한 대답이 못되 
앤더슨은 "일본 정부가 더많은 연구를 강력하게 방해 했다" 라고 기록 했을때, 일본황실은 1976년 약 900개 황실매장지에 대한 학술연구를 완전히 중단했으며, 뭔가를 감출려고 했다는 의미지?
학자들에게 개방된 가장 초기의 왕 무덤은 3세기 또는 그시대 보다 앞선것이였어.예를 들어 서기 201년에 통치하던 진고황후 와 관련된 고사시 무덤은 2008년에 연구원에 공개 되었지만 25시간 동안만 공개되었고 , 정부가 통제한  그런 유적지가 한둘이 아니란 거지.



ㄴㄴted5298
앤더슨이 주장한  굴착을 하자고 한 것을 거절 당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려워. 나는 그가 생각하는 지난 10년간 이란것이 무슨말인지 또 역사학자들과  발굴장소를 잘 알지 못해. 그것은 그냥 비공식적인 발언 이었어.



ㄴㄴmeridiacreative
누구를  가르키고 있는 것이지? 그리고 왜? 이런 무덤을 발굴 해야 하는 것인지? 



ㄴㄴㄴrkiga
그 무덤지를 연구허가를 요청한 많은 연구자들에 의하면, 그들은 거부 당했다는 거고, 수백만명이 관심을 가졌고..그런 기사를 읽었다는 거지. 그런데 왜 연구를 해야 하지? 1600년 일본제국에 관련된 유적지로 한번도 연구된 적이 없는 것야. 연구 해볼만 하다고 생각들지 않아? 겉으로만 극히 적은 부분만 연구했고, 무덤을 덮고 있는 토양 밑에 무엇이 있는지 사진이나 보고서가 없어/


근처 타카즈카 무덤에서 멋진벽화가 발견 되었어
https://en.wikipedia.org/wiki/Takamatsuzuka_Tomb

곰팡이 때문에 훼손이 많이 되었고 악화중에 있어.이때문에 정부에선 무덤전체를 아예 해체 할려고 하는 중이야. 그런걸 통해서 무덤을 보존하고 다른장소에서 재조립 할려고 하는듯 해


http://archaeology.jp/sites/2008/takamatsu.htm
고사시 무덤은 다카마쓰즈카  무덤에서 겨우21마일 떨어져 있어. 고사시 무덤이 공개 되었나? 곰팡이( 또는 다른원인으로)로인해  부식상태가 심한가?
고사지 무덤은 조사되지 않은 약 900개 황실 매장지중에 하나에 불과해

ㄴvanderZwan
이것은 논란중인 부분에 대해선 대답이 되는 것이지만  두번째 질문 " 한일 연관성에 대해 실제로 알려진것" 에 대한것은 무엇인가 하는거야 
니가 언급한 마지막 문장에 질문 한다. 자신의 혈통에 한국계가 있다는 고백을 한 아키히토는 역사적 사실관계를 밝힐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지
아마 정치적 장벽이 없기에 역사학자와 고고학자 가 이 주제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수 있었기에 우리들이 1980년 시절에 비해선 휠씬 많이 알게 되었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너는 우리가 알고있는것을 언급하지 않았어.


ㄴㄴted5298
그 질문의 초기에 답한것은 아니지만 앤더슨에 대한 회상부분에서 발견한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 해. 앤더슨이 말한 사건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어려워
그리고, 일본 군주유산에 대한 전체 고고학 지식으로 연결 시키는 문제는 어떤 이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  본래의 의문들에 대해서 집중하는게 낫다는 생각이야 


ㄴDieRunning
공유 해줘서 고마워
나는 카무천황의 어머니가 백제무령왕 계보에 연결 되 있다는 사실이 일본연대기에 기록되 있다는 사실에 한국에 대해 친밀감을 느꼈어


선조들에 대해 계속 팔러워를 했지만 내가 액세스 한 자료들을 전부다 이해는 못했어.
그녀는 타카노 아소미 니가사 였을까? 실제 한국인 이었을까? 아님 일본에 있는 한국계 였을까?
한 조상이 1200종족의 혈통으로 분화 될수있다는 그런 문화적 영향은 나로선 감당이 안되는 문제야 


ㄴㄴCenodoxus
내가 희망하는 것은 그녀가 육체적으로 한국출신이 아니지만, 505년에 특사로 일본에 온 한국왕자 후손이고... 그녀의 아들은 카무 황제라는 가정 이지... 


ㄴㄴted5298
솔직히 타카노 삶이나 기원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문화적 영향에 대해서는 놀랐습니다.  일본왕족은 문자 그대로 일본 여신으로 부터 이어 받은 것이지.. 비록, 히로히토는 2차대전 후 모든 신성에 대해 포기를  해야 했지만, 제국의 순수혈통은 이데올로기 적으론 변하지 않았어.  2001년 이전까지는 말야.



ㄴㄴㄴilovethosedogs
가족혈통 밖에서 결혼 하지 않음 어떻게 그 혈통을  유지 할수 있었을까? 황제의 어머니가 한국와  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데 2000년이란 기간은 그다지 긴것 같지 않고, 가족혈통 보존에 기여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황실은 가족들끼리만  혼인 했을까?


ㄴmischiffmaker
일본황제는 한국계임을 인정했어
당신이 말했던 것 중에서 일본황제를 한국계로 연결시키는 역사적근거가 있지만 이것은 한국계만 있었던게 아니라 일본황실에겐 아이누 사람들도 포함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또다시 나는 수십년 전에 읽었던 것을 오해 했거나 잘못 기억 한 걸까?



ㄴㄴted5298
내가 한 대답은 주로 원 질의에 영향을 준  책의 각주를 언급했던 것이고...  아이누 와 일본황실 사이에 잠재적 연결고리가 상당히 많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내가 말할수 있는것은 일본황실에서 족보는 전설이 아닌 확인된 부분에서 봤을때..아이누 와 일본인 사이에 오랜 접촉을 보면 아이누족이 일본 지배계급의 조상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확신 하는것에 대해 보다 더 봐야 하겠다는 거지요


ㄴㄴㄴLuguaedos
아이누 역사와 인류학에 대해 알아보란 거야? 


ㄴCarionis
훌륭한 답변이네. 난 진짜 그걸 읽어보는 것을 즐겼어. 앤더슨이 함스부르그 와 부르봉 왕족들을 언급을 했지만, 그건 함스부르크 가계가 독일 과 혹은 스페인 의  최소한 오스트리아 밖에서 '국가적 왕조'로서 분명하지 않는 이유가 뭔지 그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지만 부르봉 왕조는  어뗐을까요? 민족주의적 혁명이 꽤 국가주의적 이었다는 건 민주주의 에 바탕을 둬서 그런겁니까?




번역기자:떠도는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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