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대공분실을 건축가 김수근이 지었다는군.

2018. 11. 10. 20:37책 · 펌글 · 자료/역사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가 경찰의 고문을 받던 중 숨진 옛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의 전경. 좁은 창이 나 있는 5층에 고문이 이뤄졌던 조사실들이 있다. 그래픽에서 경찰 대공 업무를 주도한 박처원 전 대공분실장(오른쪽)과 1987년 1월 박종철의 영정사진을 들고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의 모습(왼쪽)을 마주보고 배치했다.
* 그래픽 이정윤 기자 bbool@hani.co.kr,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과 ‘1988년 보도사진연감’



▶ 옛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 관리를 이관받기에 앞서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는 1976년부터 2005년까지 이곳에서 있었던 고문 피해에 관한 실태 조사를 벌였다. 보존기한 경과를 이유로 경찰이 공식자료를 내놓지 않아, 조사를 진행한 ‘진실의 힘’은 순전히 발로 뛰었다. 전체 고문 피해자 파악에 어려움을 겪으며 제작된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태 조사연구>

그러므로 아직 미완성이다.


“백남은이 날카롭게 소리쳤습니다.


‘정말 버틸 거야? 여기서도 진술 거부가 통할 줄 알고? 어림도 없어.’

이에 대해 끝까지 버틸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오더군요.

그것은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공허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설마 너희들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안 되지라는, 무너져 가는 듯한 자신감이 불러일으키는 안간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백남은은 ‘좋다, 해보자, 우리는 너를 깨부술 것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남영동>, 김근태 지음)


김근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의장은 1985년 9월 4일 새벽

서울 서대문경찰서에서 구류를 마치고 석방돼 나오던 길에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강제 연행됐다.

김근태가 한 일이라고는 1983년 민청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민주화운동을 한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걸핏하면 그를 잡아다가 며칠씩 구류를 살렸다.

떳떳했던 김근태로서는 남영동에 끌려가서도 최대한 당당하게 대처하려 했다.

그러나 남영동은 김근태의 이러한 자존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부터 짓밟았다.

백남은(수사1과 1계장)의 지시로 정현규, 최상남, 김영두가 김근태를 칠성판에 묶고는 물고문을 가했다.

얼굴을 덮은 수건 위로 쏟아지는 물 때문에 “속은 메스꺼워지다가 완전히 뒤집히고 콧속으로는 노린내가 치솟”았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은 1985년 9월 청년 지도자 김근태 민청련 초대 의장(2011년 작고)을 불법 연행했다. 경찰은 23일 동안 김 의장에게 10차례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가했다. 그는 고문한 자들의 이름과 구체적 행동을 기억해 재판정에서 폭로했다. 1988년 6월30일 김천교도소에서 석방된 김 전 의장이 아내(인재근, 현 민주당 의원)와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항복이야”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샤워기와 주전자를 치우고, 얼굴에 덮어씌웠던 수건을 치우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밑이 없는 천길 낭떠러지에서 계속 떨어져 내리다가 아, 이것이 맨 밑바닥이었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구원이었습니다. 말을 하겠다고, 진술 거부를 하지 않겠다고, 정말 서둘러서 외쳤습니다.

이에 대해 백남은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물었으며,

본인은 ‘묻는 말에 뭐든지 대답하겠습니다’라고 기를 써서 대답했습니다.

‘뭐, 묻는 말에 대답하겠다고? 필요 없어. 아직 멀었구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항복이야. 다시 시작해!’”(<남영동>)

이날 첫번째 고문을 시작으로  9월20일까지 김근태에게 총 10차례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가했다.

남영동의 고문 악습은 김근태 사건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다가

1987년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의 사망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 도중 숨진 옛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의 모습. 물고문을 위해 설치한 욕조가 왼쪽에 있으며, 벽과 천장은 방음시설이 돼 있다. 또 탈출을 막기 위해 좁은 창문이 달려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종철 열사의 친형 박종부씨가 지난 1월14일 서울 용산구 경찰청 인권센터(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사망 31주기 추모행사를 마친 후 그가 고문을 당했던 509호에서 헌화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과거 독재 시절 불법 감금과 고문 등 인권 유린의 현장 중 하나인 남영동 대공분실이 드디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 경찰청은 늦어도 다음달까지는 인권센터 등 현재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 입주해 있는 경찰 인력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이 건물의 관리를 행정안전부에 넘길 예정이다.

행안부는 그 직후 옛 남영동 대공분실의 관리 및 운영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민주화사업회, 이사장 지선)에 위탁하게 된다. 이는 지난 6월 6·10항쟁 31주년 기념식 때 문재인 대통령이 시민단체의 요구를 수용해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조성하겠다고 밝힌 데 따른 후속 조처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1991년 남영동 보안분실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2005년 보안(옛 대공) 조직을 홍제동 분실로 합친 뒤 지금까지 경찰청 인권센터가 입주해 있다. 경찰은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공개하라는 시민들의 요구에 2005년부터 5층(조사실)과 4층(박종철 기념전시실, 인권교육·전시관) 등 일부를 일반 시민에게 개방해왔지만, 아픈 역사에 대한 기억 장소가 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오히려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성찰보다는 자기 홍보에 치중하거나 여전히 권위적인 모습이 강했다. 방문객들에게 정문 옆 경비실에서 신상 정보를 기록하도록 해 심리적 위축을 느끼게 하는가 하면, 김근태 고문사건과 관련해 “‘고문 기술자’인 이근안 경감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1층 홍보관 안내자료)고 표현해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는 데도 인색했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과거의 아픔을 기억할 수 있는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완전히 탈바꿈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사업회는 관련 단체와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 민주인권기념관의 내용을 구상한 뒤 설계와 시공을 마치고 정식으로 문을 여는 시기를 2022년으로 잡고 있다.

공사 중에도 5층 고문실 등은 계속 시민에게 개방된다. 남규선 민주화사업회 상임이사는 9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그동안 안기부 남산 조사실과 보안사 서빙고 분실 등 인권 탄압의 현장들이 슬그머니 다 없어졌다. 시민들의 힘으로 그나마 이렇게라도 지켜낸 게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따라서 이 장소를 최대한 원형대로 살려야 한다. 그래서 후세들이 여기 와서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배울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기억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없다”고 말했다.


남영동은 고문하기 쉽게 지은 건물. 물고문 욕조, 전기고문 칠성판 갖춰.
유일하게 남은 독재 시절 고문 장소. 12월부터 경찰 떠나고 시민이 관리.
“민주주의 교육 위한 기억공간으로” 정확한 피해자 규모 파악부터 시급.
‘진실의힘’이 발로 뛰며 조사했으나 경찰의 자료제출 거부로 파악 한계.
“기억 첫걸음은 정확한 사실 아는 것” 피해자 제보 받아 퍼즐 맞추기 시작.



민주인권기념관을 어두웠던 역사의 기억 공간으로 만들려면 우선 과거에 대한 정확한 사실 파악과 진실 규명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누가 어떻게 고문을 받고 불법적인 감금을 당했는지, 가해자는 누구였는지 등을 확인하는 작업이 우선이다. 여기에서 나아가 중앙정보부와 보안사 등 다른 수사기관의 불법행위들도 체계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경찰과 중앙정보부, 보안사 등은 구체적이고 세밀한 자료를 공개한 적이 없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진실화해위원회 등에서 과거사 진상 규명에 나섰지만, 이때도 대부분의 자료를 찾지 못했다.



이에 따라 민주화사업회는 우선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사실 확인 조사를 벌이고 있다. 재단법인 ‘진실의 힘’은 민주화사업회의 의뢰를 받아 지난 몇달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피해 실태 기초조사’(1976~2005년)를 광범위하게 진행해왔다.


진실의 힘은 공문서 등 정부 쪽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약 30년치의 신문 기사를 비롯해 관련 논문과 유인물, 재판 기록, 당사자들의 증언록 등을 뒤져 연구보고서(‘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실태 조사연구’)를 최근 냈다. 진실의 힘이 현재까지 집계한 남영동 대공분실의 피조사자는 모두 384명(전체 명단 보기)이다. 이는 1988년 9월 내무부(행정안전부의 전신)가 국회 ‘제5공화국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에 제출한 ‘5공화국(1980~87년)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구속된 시국 관련자’ 합계 379명(<한겨레> 1988년 9월17일치 기사)과 비슷한 수치다. 5공화국 이후, 1988년에서 2005년까지 기간이 더 있는 것을 고려하면 남영동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한 사람은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실태조사 책임자인 송소연 재단법인 진실의 힘 상임이사는 “과거를 기억하는 첫걸음은 정확한 사실을 아는 것이다. 경찰 등 관련기관에서 보존기한이 지나 자료가 없다면서 남영동 대공분실과 관련된 자료를 하나도 내놓지 않고 있어 어려움이 많다. 시민들의 제보나 신고로 한땀 한땀 빈 곳을 채워나갈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2년차 여기자에게도 물고문


서울 지하철 1호선 남영역 근처에 있는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10월 ‘○○해양연구소’라는 위장 간판으로 문을 열었다. 직제 개편에 따라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 정보과, 대공과, 대공부, 대공수사단, 공안분실, 보안분실 등으로 이름이 여러차례 바뀌었지만, 통칭 ‘남영동 대공분실’으로 불렸다.





고문을 자행했던 남영동 대공분실 5층 조사실의 복도. 좌우 양쪽에 있는 16개 조사실은 서로 마주 보지 않도록 배치했다. 출입문은 밖에서만 열 수 있다. 이 건물을 설계한 이는 대표적인 현대건축가 김수근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남영동 대공분실은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 폐지나 개정이라는 말만 해도 영장 없이 체포해서 처벌하는 내용의 긴급조치 9호를 발령한 이듬해 설립됐다. 즉, 최악의 폭압정치가 시작된 시기와 일치한다.

실제로 남영동 대공분실은 설립 직후부터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 국군보안사사령부(기무사령부,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전신)와 함께 독재정권 유지를 위한 정치탄압 도구로 ‘활약’했다. 겉으로는 대공 업무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반대자를 억압하는 임무가 주였다.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등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책을 써서 청년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비판적 지식인 리영희를 1977년 구속했다. 대공분실 설립 이후 사실상 첫번째 ‘사업’이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조차 책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리영희를 반공법으로 구속하는 것은 공소 유지를 할 수가 없다며 반대했는데도 당시 대공분실장이던 박처원이 “리영희는 이번 기회에 유죄판결 하고 뽄때를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 사상통제를 할 수 없다”(<대화>, 리영희 지음)고 주장해 구속을 관철했다.


1980년대 전두환 독재체제가 들어선 뒤에는 아예 학생운동과 언론운동 등 각계의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앞잡이로 나섰다. 1980년 6월 한국기자협회 간부와 <경향신문> <동아일보> 등 10여명의 기자 구속 사건(5월 광주항쟁에 대한 보도 통제에 항의해 제작 거부 투쟁을 주도), 그해 말의 무림(서울대 학생운동 서클의 한 연합체) 사건, 1981년의 전민노련(전국민주노동자연맹)과 학림(전국민주학생연맹, 군사정권에 대한 강력한 투쟁을 주장한 학생운동권의 한 그룹) 사건, 1985년 민청련과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일명 ‘깃발’)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중앙정보부의 남산청사 지하실, 보안사의 서빙고 분실과 함께 처음부터 고문으로 악명 높았다. 구타와 잠 안 재우기는 이들이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고문이었다. “처음 4일간은 의자에 앉혀두고 잠을 재우지 않았다. … 그렇게 3일 정도 지나니까 요구하는 대로 다 써주고 오로지 빨리 써주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들>, 이수일 지음, 1979년 남민전 사건) “20여일 동안을 책상에 앉아서 계속 밤을 새웠어요. 낮에는 계속 때리고 고문하고 그러고 밤이 되면 거기에 앉혀 놓는 거예요.”(연성수, 2018년 2월10일 제1차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피해자 증언대회, 1985년 민청련 사건)


“간첩으로 실제 활동한 것처럼 자백하라고 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하자 수사관이 사정없이 뺨을 때리기 시작했는데 얼굴에 감각이 없어졌다. 당시 귀 뒤쪽을 몽둥이로 맞아 지금도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양 어깨를 몽둥이로 너무 맞아 팔을 움직이지 못했고, 엎드린 채로 허벅지를 맞아 살갗이 찢어져 피투성이가 되어 대변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김태룡, 2007년 과거사위원회 제출 진술서, 1979년 삼척 간첩단 사건) “주먹으로 때리고, 혁대 풀어 때리고, 구둣발로 정강이를 차대고. 일상이었죠.”(김주언, 2018년 8월14일, 진실의힘 심층인터뷰, 1986년 보도지침 사건)





1990년대 중반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목요집회에 참석한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도주 중인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물고문과 전기고문은 간첩사건이나 정권이 관심을 두는 대형 사건뿐 아니라 일반적인 민주화운동 사건 때도 무차별적으로 이뤄졌다. “나무로 된 판때기가 있고 버클이 죽 달린 거야. 나보고 그 위로 올라가래. 버클을 쫙 채우더니, 육중한 남자가 올라타더라고. … 물이 얼굴로 쏟아지는데 숨을 못 쉬겠더라고. … 물고문 후에 어쩌다 거울을 봤는데 내 얼굴이 해골처럼 보이더라고. 하루 딱 지났을 뿐인데.”(유숙열, 2018년 8월20일 진실의힘 심층인터뷰) <합동통신>

 2년차 기자이던 유숙열은 1980년 제작 거부를 주도했던 회사 선배 김태홍(기자협회장)을 숨겨줬다가 남영동에 끌려갔다. “팬티만을 걸친 채 이른바 칠성판이라고 불리는 판자 위에 몸이 꽁꽁 묶여지고 얼굴에는 큰 수건이 씌워진 나에게 수사관들은 계속 물을 부으면서 발바닥을 몽둥이로 때렸다.”(이경일, 2018년 9월18일, 진실의 힘 심층인터뷰, 1980년 6월 <경향신문> 제작 거부)


“칠성판에서 물고문하다가 중간중간 전기고문도 해요. 발가락에 전선을 꽂아서 전류를 흘려보내는 거예요. 그럼 사람 몸이 뜨게 돼요. 허리가 부러지거나 잘리는 듯한 고통이에요. 그걸 얼마나 반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속의 온갖 오물을 다 쏟아냈어요.”(이선근, 2018년 8월28일, 진실의힘 심층인터뷰, 1980년 학림 사건)


볼펜고문과 관절뽑기 등 희한한 고문 방법도 자주 사용했다. “손바닥을 칠 때와는 달리 방망이를 세워서 절구질하듯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두 다리의 허벅지를 번갈아가며 아주 정성스럽게 구석구석 짓이기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통증이 커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현상은 손바닥을 칠 때와 원리가 비슷하였다. … ‘어디 고가 풀렸나 볼까?’라며 그(고문수사관 이근안)는 조사관에게 보라는 듯이 내 허벅지를 볼펜 끝으로 쿡쿡 찔러 보였다.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를 지경이었다. 볼펜 끝으로 건드리는데도 어젯밤에 그가 그의 보물인 박달나무 방망이로 찍었을 때의 바로 그 통증이 재현되었기 때문이다.”(이수일, 앞의 책)

“내가 연행되자 유도 8단이라는 건장한 남자 대여섯 명이 나를 이리 메치고 저리 메치고 집어던졌다. 심지어는 접골사를 불러 관절을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고문했다.”(이수일 증언, <나의 손발을 묶는다 해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엮음, 1979년 남민전 사건)



1976년 설립된 남영동 대공분실. 겉으로는 ‘대공업무’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민주화운동 탄압 목적.
진보 지식인 리영희 첫 타깃 삼아.

80년대는 아예 학생운동 전담해 85년 청년지도자 김근태 불법 연행.
23일간 10차례 물고문과 전기고문. 초인적 기억으로 고문 생생히 고발.
검찰 등 정권의 고문자 비호 탓에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비극 초래.

칠성판은 박처원의 발명품?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대공분실은 애초부터 고문하기 쉽도록 지은 건물이었다. 5층 맨 꼭대기 층(1983년에 7층으로 증축)은 16개의 조사실로만 꾸며졌으며, 각 조사실에는 물고문을 위한 욕조가 세면대와 변기 옆에 설치됐다. 조사실 창문은 다른 층의 넓은 여닫이창과 달리 너비가 30㎝에 불과한 미닫이창을 달았으며, 출입문은 밖에서만 열렸다. 탈출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벽과 천장에는 방음시설을 해서 소리가 밖으로 새지 않도록 했다.


514, 515호 두 조사실은 다른 조사실보다 갑절가량 큰 ‘특실’이었다. 남민전의 이재문, 민청련의 김근태가 고문받은 방이 515호였다. 이 특실은 고문 장치인 칠성판을 사용하는 데 용이했다. 칠성판은 나무판자를 잇대어 간이침대처럼 만든 것인데, 사람을 눕힌 뒤 가죽끈 5개로 발목부터 가슴까지 묶을 수 있게 했다. 물고문이 수월하도록 칠성판을 세면대에 딱 맞는 높이로 제작했으며, 물고문 직후에는 칠성판 위에서 바로 전기고문을 하기도 했다. 남영동 피해자들은 이근안이 자기가 칠성판을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지만, 이근안은 자신의 책(<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2012년)에서 박처원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했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 내부에 있는 나선형 모양의 철제계단 모습. 1층에서 5층으로만 통하며, 눈이 감긴 피의자들을 이 통로를 통해 끌고 올라감으로써 공포감을 극대화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남영동의 고문은 특정한 인물에게만 자행된 게 아니다. 김근태, 박종철 사건에서 보듯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남영동의 수사관은 누구나 일상적으로 각종 고문을 가했다. 그중 가장 악독한 사람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이었을 뿐이다.


이근안은 1970년 가장 말단인 순경으로 경찰 조직에 들어간 뒤 1972년부터 대공 분야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는 치안국(치안본부의 전신) 대공분실장 박처원의 보디가드를 맡았으나, 얼마 안 돼 스스로 수사 파트를 지원했다. ‘힘이 정의다’라는 생각에서 고교 시절 공부보다 합기도와 유도 등 운동을 더 열심히 했던 그는 손이 곰 발바닥처럼 컸을 뿐 아니라 한 손으로 사과를 반으로 쪼갤 정도로 힘이 셌다. 관절꺾기와 볼펜고문 등 강한 몸을 이용한 고문뿐 아니라 전기고문 등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고문에도 능했다.


1974년 경기도 대공분실로 전근(1980년부터 85년 초까지는 남영동에서 근무)을 갔지만, 1979년 남민전 사건과 1980년 기자협회 사건, 1985년 김근태 사건 등 수시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불려다녔다. 김근태 사건 때는 대공분실장 박처원이 직접 그를 불러들여 브리핑을 해줄 정도로 박처원은 그를 신임했다. 앞서 1980년 무림 사건 때도 수사 실적과 관련해 “박처원 실장에게 극찬을 받았으나 반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실장에게 보고하였다 하여 오래 미움을 받았”(이근안, 1999년 11월12일 검찰 진술서)을 정도로 박처원의 총애를 받았다.





김근태 초대 민청련 의장을 고문한 이근안(가운데)씨가 1999년 11월 검찰에 송치되고 있다. 1988년부터 11년 가까이 도망 다니다 자수한 이씨는 7년의 실형을 살고 나온 뒤 목사로 변신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47년 종로경찰서 사찰계로 대공경찰에 입문한 박처원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옷을 벗을 때까지 대공 분야에서만 일했다. 그는 친일경찰 노덕술이 해방 후 만든 ‘노덕술 사단’의 막내였다.

“17살 때 평양에서 반소(련) 운동을 했고, 남조선에 내려와서 종로경찰서에 들어가 빨갱이를 잡겠다는 일념으로 경찰 대공과를 지망했고, 밑바닥에서부터 30년 동안 일해왔다는 거야. ‘내 손으로 수천명을 잡아넣고 골로 가게 만들었지’라면서 자랑을 해요. 자기 둘째손가락을 보라고 하더군. 보니까 굳은살이 잔뜩 나와 있더라구요. ‘30년 동안 펜대를 잡고 빨갱이 잡는 조서를 밤낮으로 쓴 그 유물이 바로 내 둘째손가락의 뚝살이오’ 하는데 정말 소름이 끼치더군!”(<대화>)


박처원은 이름 없는 고문기술자로만 알려졌던 이근안이 1988년 12월21일 <한겨레>의 단독 보도로 신원이 공개되자, 그를 직접 찾아가 도피를 지시했다.

11년 동안의 도주 생활 동안 박처원은 1500만원을 이근안의 부인에게 생활자금으로 전달하는 등 뒤를 봐줬다. 이 돈은 카지노업자 전낙원이 경찰에 준 돈 10억원의 일부로, 나머지는 전부 박처원이 보관하면서 사용했다. 이근안은 이런 박처원의 행태에 배신감을 느꼈는지 공개적으로 그를 비판했다. 이근안은 “대공(대공경찰)의 우상인 그의 말이라면 죽으라면 죽을 정도로 충성을 다했건만 이젠 토사구팽이라, 옛말이 그른 것이 없다”(<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고 밝혔다.




제보를 기다립니다


민주화사업회와 진실의 힘은 이번 보고서 작성을 시작으로 남영동 대공분실과 중앙정보부, 보안사 고문 피해자들 찾기에 박차를 가한다는 방침이다. 남규선 민주화사업회 상임이사는 “피해자 가운데 이번에 심층인터뷰를 겨우 8명밖에 하지 못했고, 그중에서 함주명씨에 대해서만 영상 녹화를 했다”며 “앞으로 확인된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전원 영상인터뷰를 해서 기록으로 남길 계획”이라고 말했다. 송소연 진실의힘 상임이사는 “진실을 숨기려는 자들을 이기려면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며 “제보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누리집 www.kdemo.or.kr, (031)361-9500. 진실의힘 누리집 www.truthfoundation.or.kr, (02)741-6260)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진실의힘이 집계한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 피해자 384명 명단
https://goo.gl/LnhZ7s

외국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나
원형 보존 최우선…별도 기억공간도 만들어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시절 비밀감옥이었던 해군기술학교 기지 안에 있는 기념관. 바깥에 설치한 유리벽에 희생자들의 얼굴이 기록돼 있다. 조용환 변호사 제공


         

앞으로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 들어설 민주인권기념관의 내용을 어떻게 채울지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된 것이 없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민주화사업회)와 과거사 관련 시민단체 간에도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민주화사업회 쪽에서는 건물 앞에 있는 지금의 테니스장에 ‘민주화운동기념관’을 짓자는 의견인 반면, 박종철기념사업회 등 다른 단체들은 공간 전체에 대한 원형 보존을 요구하고 있다.


독재, 고문 등 부끄러운 과거를 기억하는 외국의 방식은 어떨까. 우리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독재정권의 폭압정치에 시달렸던 남아메리카 주요 국가들은 대부분 원형 보존과 새로운 공간의 조성을 병행하고 있다.


‘더러운 전쟁’(1976년부터 1983년까지 호르헤 비델라 군사정권이 좌파 척결을 명분으로 정치적 반대자와 학생·노동조합원 등을 납치·감금·고문·살해한 일. 최소 9천명에서 최대 3만명이 살해되거나 실종)을 겪은 아르헨티나가 대표적이다.

아르헨티나는 악명 높은 비밀감옥이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해군기술학교(ESMA)를 ‘기억과 인권을 위한 공간’(Espacio Memoria y Derechos Humanos)으로 조성해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해군기술학교 부지 안에 만든 국립기억자료보관소(ANM)는 군부정권의 가해자를 심판한 재판의 영상 기록 등 인권 유린과 관련해 정부가 수집한 모든 자료를 보관·전시하고 있다.

 ‘기억과 인권을 위한 공간’ 안에는 시민단체 연합인 ‘열린 기억’(Memoria Abierta)의 아카이브도 있다. 이들은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록한 영상 기록물 등을 보관하면서 누구나 볼 수 있게 한다. 정치범들을 고문했던 핵심 건물은 기념관으로 보존하고 있다. 기념관 들머리에 커다란 유리벽을 설치해 유리 외벽을 실종자들의 얼굴로 장식했다. 지하의 고문실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 라플라타 강가에 만든 ‘기억공원’의 거대한 벽. 지금까지 확인된 ‘더러운 전쟁’의 희생자 9000여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조용환 변호사 제공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를 조금 벗어난 라플라타강 하구에는 군사정권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억공원’을 만들었다. 이곳은 군사정권 시절 살해된 시신을 버리던 장소였다. 이 공원은 1998년부터 인권단체들이 주도해 만들었으며,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가 적힌 길고 거대한 벽이 있다. 4개의 벽에 사용된 돌 3만개에는 지금까지 확인된 피해자 9000여명이 기록돼 있다.


피노체트 독재정권이 오랫동안 집권했던 칠레도 과거를 두가지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다. 먼저, 원형 보존이다. 수도 산티아고의 국립경기장은 1973년 9월13일 피노체트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당일부터 두달여 동안 2만여명을 가둬 고문한 수용소였다. 감옥으로 사용됐던 선수 대기실과 경기장 안 통로는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경기장 한쪽에는 당시 죽은 사람의 빈자리를 의미하는 ‘존엄의 관람석’이 마련돼 있다. 운동 경기가 열려도 이 자리는 항상 비워둔다. ‘존엄의 관람석’ 상단에는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피노체트 정권의 비밀감옥으로 사용했던 번화한 거리의 평범한 건물인 ‘론드레스 38번지’. 건물 들머리에 ‘기억의 장소’라는 펼침막이 걸려 있다. 조용환 변호사 제공


         

이와 별도로 정치범들을 비밀리에 가둔 채 고문하고 학살했던 산티아고의 비밀감옥(론드레스 38번지)은 ‘기억의 장소’로 명명돼 지하실부터 2층까지 원래 모습 그대로 공개하고 있다. 아울러 산티아고 중심지에는 ‘기억과 인권 박물관’을 새로 만들었다. 이 박물관에서는 1973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날부터 시작해 어떻게 민주주의가 유린돼 갔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시가 이뤄진다. 1층부터 3층까지 연결된 벽 전체에는 군사독재의 희생자들 사진을 한장 한장 붙여놓았다.





피노체트 정권이 저지른 인권 유린을 기억하는 칠레 산티아고의 ‘기억과 인권 박물관’의 내부. 1층에서 3층까지 벽면 전체에 희생자들의 사진을 붙여놓았다. 조용환 변호사 제공


         

1968년 군사 쿠데타 이후 1970년대까지 군사독재 정권 시절을 보낸 페루는 수도 리마에 ‘기억·관용 및 사회적 포용의 장소’를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군사정권의 인권 유린 실상과 민주화 이후 진실 규명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 곳곳에 설치한 스크린에서 피해 생존자의 증언을 들을 수 있도록 해놓았다.





페루 리마의 ‘기억·관용 및 사회적 포용의 장소’의 내부. 사람 눈높이에 설치한 대형 스크린에서 희생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조용환 변호사 제공


         

독일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도 아픈 과거를 기억하는 훌륭한 장소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옛 유대인 박물관 옆에 새로 건물을 지어 옛것과 새것을 지하 통로로 연결했으며, 내부의 한 전시실은 철 조각으로 유대인 피해자들의 얼굴 형상을 만들어 깔아놓은 뒤 관람객들이 그 위를 걷게 한다. 걷는 동안 철 조각에서 나는 소리가 유대인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처럼 들리도록 고안했다.



*참조: <안데스를 걷다>(조용환 지음)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관련 태그
연재토요판 커버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