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스트라우스,『살라미스 해전』(2006)

2018. 8. 19. 11:57책 · 펌글 · 자료/역사

 

 

세계의 역사를 바꾼 전쟁 '살라미스 해전'을 새롭게 살펴보는 책.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인 살라미스 해전은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대왕이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그리스 세계를 세 번째로 침공하여 벌어진 전투로, 세계사를 유럽 중심으로 돌려놓은 문명사적 대전환점이 되었다.
이 책은 동ㆍ서양의 유례없는 대격돌인 살라미스 해전을 생생하게 재현해내었다. 저자는 그리스 해역에서 벌어진 동서 간의 흥미진진한 전쟁담을 통해, 고대 전투를 새롭게 분석하고 있다. 또한 고고학, 기상학, 법 과학에 대한 최근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역사의 중심축이 된 전쟁이자 헤로도토스 고전의 바탕이 된 살라미스 해전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뒤바꿔놓고자 했다.

 

 

저자

  코넬 대학교에서 역사학과 고전문학을 가르치는 배리 스트라우스 교수는 저명한 고대 군사사 전문가이다. 코넬 대학교 평화연구 프로그램 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자유와 자유사회 프로그램 소장을 맡고 있다. 국내에도 소개된 전작 『살라미스 해전』(2004)과 최근작 『스파르타쿠스 전쟁』(2009)이 많은 찬사를 받았다. 「워싱턴 포스트」, 「로스엔젤레스 타임스」등 유수 언론에 칼럼을 발표했고, 히스토리 채널,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BBC 방송 등에서 역사 해설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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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살라미스 해전의 전개 상황
살라미스 해전에 쓰인 함선들
프롤로그 피레우스


진격

[제1장] 아르테미시움


그리스 사령관, 테미스토클레스
그리스 정복을 향한 야망
페르시아 함대를 강타한 몬스터 폭풍
죽음의 춤, 디에크플루스 전술
3일간의 아르테미시움 전투
아테네 군의 철군

[제2장] 테르모필라이


스파르타 왕, 레오디다스의 최후
테르모필라이 협로가 뚫리다
'영웅들의 지배자' 크세르크세스
다리우스의 유산
크세르크세스의 외교술과 심리전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폭풍우의 죄를 묻다
크세르크세스의 눈물

[제3장] 아테네


환관 헤르모티모스의 복수
아테네에 입성하는 페르시아 군대
테미스토클레스 포고령
자유를 위한 결의
유랑을 떠나는 아테네 시민들
야만에 짓밟히는 아크로폴리스

[제4장] 살라미스


스파르타 전사, 에우리비아데스
피란민으로 북적이는 섬, 살라미스
자유를 위한 동맹 도시들
최후의 결전장, 코린트냐 살라미스냐


함 정

[제5장] 팔레론


전투하는 여왕, 아르테미시아
페르시아 참모회의
크세르크세스, 해전에 운명을 걸다

[제6장]


거짓 정보
테미스토클레스의 위험한 승부수
'정의로운 자' 아리스티데스

[제7장] 팔레론에서 살라미스로


시돈 왕, 테트람네스토스
인종도 계급도 다양한 페르시아 해군
살라미스로 대집결
페르시아 함대로 에워싸인 바다

[제8장] 살라미스


시인 아이스킬로스의 참전
이름없는 민중들의 전투
승리를 기원하는 희생 제물
어둠 속의 회합


전투

[제9장] 살라미스 해협: 오전


함정
그리스의 선제공격
충각 공격과 육탄전의 아수라장
그리스를 향한 승리의 미소
해상 민족 페니키아인 부대를 격파하다
페르시아 총사령관 아리아비그네스의 죽음

[제10장] 살라미스 해협: 오후


아미니아스의 추격
해전의 주역, 가난한 노잡이들
패주하는 페르시아 군
아르테미시아의 속임수

[제11장] 살라미스 해협: 저녁


아이기나의 킬러 함선
아이기나인의 설욕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들
코린트, 변절이었나? 작전이었나?
피로 물든 바다의 재앙
페르시아는 왜 패했나?


퇴각

[제12장] 팔레론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크세르크세스의 세가지 실책
퇴각하는 페르시아 군

[제13장] 안드로스 섬


불안전한 승리
새로운 국면
테미스토클레스, 승리의 권리를 요구하다
신들에게도 전리품 분배
영광의 그늘

에필로그 수사

 

 

 

 

 

 

 

 

 

 

 

 

 

서평 1

 

                                                                                            

살라미스 해전

작가
배리 스트라우스
출판
갈라파고스
발매
2006.01.03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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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배리 스트라우스

 

<시대적 배경 및 줄거리>

 

기원전 5세기 말, 동방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이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제국의 관심을 유럽으로 쏟기 시작했다. 

기원전 492년 그리스 본토 침입을 시도하게 되어 페르시아 전쟁이 시작 되었다.

페르시아의 첫번째 그리스 원정은 함대가 아토스 곶에서 폭풍으로 파괴되는 바람에 실패 하였다.

 

그리고 2년 뒤 다리우스 대왕은 아테네 북방 40킬로비터 지점에 위치한 마라톤에 군대를 상륙시킨다. 아네테는 밀티아데스의 지휘 아래 홀로 페르시아 군을 맞아 승리를 거두게 되고, 이 승리의 기쁜 소식을 시민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아테네로 사력을 다해 달린 것이 오늘날 마라톤 경기의 효시가 된 것이다.

 

기원전 480년 다리우스를 계승한 크세륵세스 대왕이 그리스로 세 번째로 침공한다.

 

1) 아르테미시움 전투 - 아르테미시움에서 벌어진 해전.

2) 테르모필라이 전투 - 영화 300의 배경이 되는 전투. 스파르타의 리오니다스 왕과 300 명의 용사가 주축이된 그리스 군이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페르시아 육군의 행진을 막은 전투. 스파르타인의 변절로 결국은 페르시아군에 전멸 당하고 만다.

3) 살라미스 해전 - 살라미스 전투에 임한 페르시아 함선은 약 650여척이고, 그리스 함선은 약368척이었다. 숫적으로는 분명한 페르시아군의 우세였지만, 결과적으로 그리스 군이 승리를 했다.

 

그리스 사령관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는 물론 그리스 군대또한 살라미스 해전으로 끌어들인 장본인 이었다. 또한 기묘한 작전으로 승리를 따낸다. 두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함선 숫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건 역사학자들은 크게 3가지로 말한다. 

 

충격, 지휘방식, 지형 이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과 첫 대면을 했을 때 육체적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페르시아인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거짓정보에 그리스군은 자멸하기 직전으로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는 상태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맞닥뜨리니 그리스 군은 사기가 충전하여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였으니, 가벼운 전투만 예상했던 페르시아군은 그 충격을 헤어나지 못한 것이다.

페르시아 지휘관이 많이 사망한 것이 그 두번째 원인인데, 그리스와 달리 페르시아는 중앙집권적 요소가 강했다. 따라서 지휘관이 사망하자 와해되기 쉽상 이었다. 

마지막 원인은 지형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리스 군은 살라미스의 특이한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해협의 좁은 공간을 이용하여 페르시아 함대의 장기인 속도를 못내게 하였고, 수적인 우세가 좁은 해협에서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살라미스 해전으로 페르시아 전쟁의 모든 국면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그리스군은 지상에서 플라타이아 전투, 해상에서 미칼레 전투를 치르고 페르시아 군을 완전히 격파한 뒤에야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크세륵세스가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를 계기로 더 이상의 그리스 침공을 단념했다는 점에서 이 전투는 결정적이었다.

 

 

<인물>

테미스토클레스: 살라미스 해전의 판을 짜고, 그리스의 승리를 이끈 아테네인 그리스 사령관.

크세륵세스: 페르시아 3차 전쟁을 일으킨 페르시아의 대왕. 다리우스 왕의 아들.

아르테미시아 여왕: 페스리아 지원군인 할리카르나소스(현재 터키의 보드룹 시)의 여왕.

헤로도토스: [역사(Histories]의 저자. 혹자는 그를 역사의 아버지라 부른다.(로마의 정치가 키케로가 한 말)

아이스킬로스: 그리스 비극 작가. 살라미스 해전을 주제로 한[페르시아인들] 이 포함된 비극 3부작으로 디오니소스제전에서 우승.

 

 

 

 

<감상평>

- 테미스토클레스의 최후 :

아테네인들은 테미스토클레스가 제아무리 세인의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라 해도 그의 동상 앞에 고개 숙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

(* 테미스토클레스는 정적들에 의해 470년대말 도편추방 당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크세륵세스의 아들 아크타크세륵세스에게 의탁하였고, 마그네시아 태수가 되어 남은 일생을 보냈다.)

 

"민주주의는 위대한 인물을 경게하는 습성이 있다." 본문에서 발췌한 저 어구는 일부 동감을 한다. 다수결의 원칙이란 양날의 검이다. 다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 마땅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소수들의 의견이 묵살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에서 현대의 간접민주주의로 넘어온 것도 정치 체제가 발전을 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허나, 그것도 문제는 많아서 모두다를 만족시키지는 못하는 듯 하다. 

 

 

- 제국적 민주주의 탄생 :

기원전 477년, 아테네를 중심으로 그리스 도시국가들 간의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해상 동맹이 조직되었다. 델로스 섬에서 조직되었다 하여 델로스 동맹이라 일컫는다. 아테네를 맹주로 한 이 동맹에는 과거에 페르시아에 예속되어 있던 도시국가들이 많이 참가했다.

페르시아는 이들 예속국가에 조공을 요구했었다. 아테네도 똑같은 요구를 했다. 도시국가들 입장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아테네 제국으로 지배세력의 이름만 바뀐 꼴이 되고 말았다. 

 

 

작성자 shjaws80

 

 

 

 

 

 

서평 2

 

 

살라미스 해전은 그리스가 페르시아로부터 거둔 승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관점을 떠올린다면, 더구나 승자가 서양인 그리스인 점을 감안한다면 다소 의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해전이 기원전 480년이라는 점과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같이 고문 또는 구전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져왔기 때문에 이 역사적인 사건을 구체적으로 담아내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살라미스는 바로 섬이라는 것이다. 이 섬의 위치는 당시 그리스 도시 국가였던 아테네가 위치한 아티카 반도의 남서쪽에 위치한 섬이었으며, 실제 아티카와 살라미스의 거리는 대략 2~3km정도였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실이지만, 사실 살라미스 해전이 벌어지기 전에 아테네는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시아에게 점령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테라모필레 전투에서 수적 우위를 통하여 결국 스파르타의 레오다니스가 구축한 방어선을 돌파하여 페르시아군은 아테네가 위치한 아티카 반도를 휩쓸기 시작하였으며, 실제 아테네를 점령하게 된 것이다.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휘 하에 살라미스 섬을 비롯하여 피난을 하게 되었고, 그리스의 연합 해군은 일단 살라미스에서 머물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살라미스 해전은 육지에서는 페르시아가 아테네까지 점령을 하여 점차 펠로폰네소스 지역으로 진출을 노리는 상황에서 그리스의 연합 해군과 페르시아의 해군의 대치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리스에 비하여 페르시아는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며, 그 비율은 대략 1:3 정도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실제 살라미스 해전이 벌어지기 전에 아르테미시움에서 해전이 벌어져서 이미 그리스 연합국이 승리를 거두긴 하였으나, 페르시아의 해군의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에 여전히 살라미스 해전을 앞두고 페르시아는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소 눈에 띄눈 점이 있다. 당시 그리스의 아테네 3단 노선은 질적인 측면에서 페르시아의 노선에 비하여 충격과 기동성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 역시 쉽사리 해전을 주도적으로 이끌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배리 스트라우스는 이러한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을 독자에게 세세히 전달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이 해전의 승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배리 스트라우스는 철저한 고증과 문헌의 분석을 통하여 살라미스 해전을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단순히 전술의 우세로 그리스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복합적인 요소가 있었음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테네가 그리스 연합국에서 가장 많은 함선을 제공하였지만, 실제 총사령관은 스파르타의 에루리비아데스였다는 점과 많은 도시 국가들로 구성이 되었다는 점은 지휘 체계에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음을 시사한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에서 결전을 주장하지만, 대다수의 국가는 페르시아의 육군이 스파르타를 비롯한 다수의 도시 국가들이 위치하고 있던 펠로폰네소스쪽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점에서 우선 살라미스에서 철수를 원하고 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 상황에서 그리스는 어떻게 살라미스 해전을 치룰 수 있었던 것일까?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을 앞두고 오나라는 노장인 황개를 위나라에 투항시키는 사항계를 이용하여 위나라의 경계를 허술하게 만든 후 전투를 치뤘다고 한다. 살라미스 해전에서도 바로 이러한 계책이 실제로 등장을 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의 노예를 이용하여 크세르크세스에게 투항의 의지를 밝히며, 곧 그리스 함대가 퇴각할 것이라고 밀서를 보낸 것이다. 사실 페르시아도 이전의 해전에서 그리스로부터 패배를 당한 상황이라서 섣불리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다가, 이 밀서를 받고나서 공격을 가하게 된다. 더욱더 극적인 것은 실제 그리스의 함선 몇 척이 퇴각하는 모양새마저 포착이 되자, 페르시아는 살라미스 해협으로 모든 해군을 출동시키게 되고, 그리스 연합국은 퇴각을 포기하고 페르시아 해군과 일전을 벌여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처럼 커다란 해전을 앞두고 계략의 대결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점과 그것을 고증과 고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주는 이 책 <살라미스 해전>은 희미한 역사적인 사건을 구체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살라미스 해전은 페르시아가 그리스에 진출하기 위한 작전이 좌절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미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서의 동부지방을 장악한 상태에서 벌어졌다는 점과 이 해전으로 인하여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처한 페르시아의 철수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이 해전이 세계 3대(또는 4대) 해전이라고 불리우는지 자연스럽게 수긍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전투의 결과로 인하여 아테네의 지중해 패권의 장악으로 인하여 수십년간 번성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는 점과 이를 질투하는 스파르타로 인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을 떠올린다면 한번쯤 짚고 넘어갈 해전이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된다.

 

 

 

 

 

 

 

 

 

펌))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살라미스 해전)

 

 

  제1차 페르시아 전쟁 : 다리우스 왕의 원정로   

 

 

 

그리스는 단순한 snaffle재갈 타입을 썼지만 쓰임은 아주 정교했다. 크세노폰은 자신 스스로 유능한 승마수로서 재갈 쓰임의 세세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저술서에 이에 대한 글을 남겼다. 분명히 고대 기병들은 재갈을 이용하여 말을 다루는 복잡한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천천히 걷는 것부터 속보에 이르는 단순한 명령은 다리를 밀치거나 센터 중심의 위 아래 이동 또는 혀 차는 소리, 고삐를 죄고 푸는 사용등을 모두 포함한다. 이와는 별개로 다른 훈련이 요구되는 기병들 이를테면 말 궁수들에게는 다리와 신체의 도움이 중요했고 긴 창과 칼을 쓰는 기병들은 목 고삐 그리고 보다 신속한 회전이나 킥 같은 것들이 강조되었다.

후세 전문가들은 최소 2년이상의 훈련을 거듭해야 가능한 기술로 평가를 한다. 아무튼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의 적수로서 그리스는 페르시아가 수만의 기병을 보유한 것에 반해 많은 기병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스가 지위와 부의 상징으로 말을 인식은 하였지만 그들은 주로 보병력에 치중을 했다. 앞서 안급한 대로 그리스 지형은 가파르고 산악지대가 대부분이고 나머지 땅은 말같은 동물들의 목초를 경작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단지 부자들의 말을 기를 정도의 여유가 있었을 뿐이다. 대부분 시 정부는 민주적이거나 민주체제 형식으로 말은 엘리트들과 영합해 말의 대중화를 감하고 전투력 동원에 회의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리스는 시민 의용군으로서 장갑보병을 경쟁력있는 군으로 생각했다. 더욱이 전투 형태로 방집 밀집군 형태인 랑스(phalanx)라고 하는 전통을 고수하는 형태라 기동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5미터나 긴 투창을 들이대고 밀집형태로 모여선 이 팔랑스는 예로부터 이어온 전형적인 고대형태로 그리스의 전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기병대의 결함과 연계가 된다. 아무튼 둘 간의 전쟁은 최상으로 훈련된 보병과 기병의 첫 번째 만남으로 기록되고 있다. 기원전 499~449년 페르시아 제국은 지중해 재상권을 소유하며 페르시아 율법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전복할 시도를 한다.

 

 

 

 

 

 

 

 페르시아 해군은 곧장 노를 저어 살라미스 섬으로 향했다. 이 섬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극히 좁은 해협이었기에 수가 적은 그리스 해군에게 유리한 지형이었다. 하지만 페르시아 해군의 병력은 기록상으로는 1200여척이었고, 실제적으로 전투에 참가했을 병력은 대략 800여 척이라고 한다. 그에 비해 그리스 함선은 400척 미만으로 추정된다.

 

사실 소규모 도시국가로 이루어진 그리스 세계와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이 충돌한 것은 기원전 550년경 키루스 대왕이 이오니아를 정복하면서 일어났다. 이오니아의 독립적인 도시국가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페르시아는 각 나라에 참주를 보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모두에게 문제거리가 되어버렸다.

기원전 499년 당시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낙소스 섬을 정복하고자 원정대를 보내었다. 그러나 원정대는 패주하였고, 아리스타고라스는 생각을 바꾸어 (별 어려움 없이)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소아시아의 헬라스 지역 전체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하였다. 그리하여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나 기원전 493년까지 이어졌는데, 점점 소아시아의 더 많은 지역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아테나이와 에레트리아의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고 기원전 498년에 이들 군대의 도움으로 페르시아의 지역 도읍인 사르데이스를 점령하여 불태웠다.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이런 일을 한 아테나이와 에레트리아에 복수하기로 맹세하였다. 반란은 계속되어 기원전 497~495년 사이에 양측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기원전 494년에 페르시아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반란의 중심지인 밀레토스를 공격하였다. 라데 전투에서 이오니아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여 반란군은 몰락하였고, 이듬해에 마지막 저항도 진압되었다.

다리우스는 자신의 제국 땅에서 다시는 반란이 일어나고 본토 그리스인이 개입하는 일을 막기 위하여 그리스를 달래고 사르데이스를 불태운 아테나이와 에레트리아를 주벌할 계획에 착수하였다. 기원전 492년에 페르시아는 처음으로 그리스를 침공하였는데, 페르시아 장군 마르도니오스는 트라케와 마케도니아를 복속하였으나 여러 불상사로 조기에 작전을 끝내야하였다.

 

기원전 490년에 페르시아의 두 번째 군대가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의 지휘 하에 그리스로 출정하였는데, 이번에는 에게 해를 건넜다. 페르시아 원정군은 퀴클라데스 제도를 점령하고 에레트리아를 포위한 끝에 함락하여 파괴해버렸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은 아테나이를 공격하는 길에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나이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아서 페르시아의 노력은 당분간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자 다리우스는 그리스를 완전히 정복할 계획을 세웠으나, 기원전 486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리스 정복의 과업은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넘어갔다. 기원전 480년에 크세르크세스는 몸소 원정길에 나서 터무니없이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두 번째로 그리스를 침공하였다. 페르시아는 유명한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스파르타와 아테나이가 주도한) 그리스 연합군을 무찔러 그리스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전투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

세계 4대 해전

1) 살라미스해전,

2)칼레해전(1588)은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을 침략하려는 의도로 벌인 해전으로 이 해전 이후에 영국이 스페인의 뒤를 이어 새로운 해양 강국으로 발전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3) 트라팔가해전(1805)은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 일어난 가장 유명한 해전으로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결국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4) 한산도해전을 말한다. (*명랑해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이 전투가 앞선 설명대로 너무도 극적이고 12330이라는 압도적 수적 불리를 극복했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를 저들 서양의 사가들이 믿을 수 없다는 이유이다.)

 

살라미스 해전은 ─ 당시의 페르시아 왕은 크세르 크세스, 그는 결단력이 부족한 왕으로 역사책에서는 묘사하고 있는데 이 전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꽤 고민을 했던 모양이다. 이에 대항하는 아테네 지도자는 시대의 풍운아 테미스토 클래스. 거칠 것없이 육로로 전진을 했던 크세르크세스는 4개월 만에 헬레스폰트에서 아티카까지 진격하며 승리를 거듭해왔다.

그렇지만 9월 말이 되자 폭풍의 계절이 시작되었고 보급로가 위협받았다. 아티카의 농작물을 모두 불태웠기 때문에 병사들이 식량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모든 징조가 불운하게 돌아갔다. 그리스군을 빨리 찾아 궤멸시키지 않으면 아사할 판이었다. 사방으로 보낸 스파이덕분에, 그리스군이 지협에 장벽을 건설하고 모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굶주린 병사들을 힘들게 산맥 너머로 보내기 보다는 해군을 동원하기로 했다.

 

그는 아테네 남부에 있던 함대 중 선봉대를 살라미스 부근으로 보냈다. 그리스 함대가 사로닉Saronic 만에서 전투를 벌이면 페르시아의 대함대로 전멸시키거나 자기 고향으로 달아나면 하나씩 추격해서 궤멸시킬 생각이었다. 이 계획은 거의 성공할 뻔 했다. 917, 크세르크세스 함대가 사로닉 만에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그리스 함대, 특히 펠로폰네시스 도시국가는 고향이 무방비로 노출되었다는 걱정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육군이 지협근처에 접근 중이라는 보고까지 들어오자 동요는 공황으로 커져갔다. 테미스토클레스도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는 그리스 해군을 살라미스에 묶어두는 한편, 크세르크세스가 살라미스로 함대를 몰아넣게 유인해야 했다

 

그리스군 전략회의가 벌어지던 919일 새벽, 테미스토클레스는 몰래 빠져나와 노예 한 명을 작은 배에 태워 페르시아 함대로 보냈다. 노예는 페르시아 장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급히 돌아왔다. 그리스군은 이제 반반으로 갈라졌고 자신과 아테네군은 배반을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페르시아군에게 합류하지 않는 병력은 그날 밤에 지협쪽으로 퇴각할 예정이며, 그대로 둔다면 크세르크세스의 원정은 늘어질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지금 공격한다면 이미 배반을 결정한 병력의 도움을 받아 쉽게 승리할 수 있으니 빨리 행동에 옮기라고 강력히 권유했다. 페르시아 장군은 그의 정보를 사실로 믿고 왕에게 전달했고 크세르크세스는 함대에게 만 안으로 서둘러 진입하라고 명령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은 성공했고, 크세르크세스가 기대한대로 행동했다.

 

페르시아 함대가 조용히 만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 소함대에게 페트리티스Petritis 봉을 돌아 메가라Megara 해협을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2개 소함대를 더 보내 프시탈레이아Psyttaleia 섬 양쪽에서 살라미스 해협을 봉쇄했다. 그리고 보병을 섬에 상륙시켜서 해전이 벌어졌을 때에 달아나거나 밀려오는 배를 사냥하도록 준비시켰다. 자정이 되자 페르시아 함대는 만을 완전히 봉쇄했고 그리스군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리스군은 아침이 되어서야 포위당한 것을 알았고 귀순한 페르시아 함선(페르시아 선원 중 상당수는 그리스인)을 통해 결전이 임박했음을 알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건 도박이 성공해서, 결전에 나서는 그리스 함대를 보고 기뻐했다. 심지어 그리스 지휘관들은 그에게 사기를 북돋는 연설을 부탁하기도 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920일 새벽에,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고향의 자유를 위해 반드시 승리하자는 연설을 했다. 연설이 끝나자, 병사들은 서둘러 배로 달려갔고 해협을 향해 배를 저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 전역이 보이는 산에 올라 왕좌에 앉았다. 새벽에 산에 오른 그는 그리스 함대가 정박지에서 나와 북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군이 메가가 해협이 봉쇄된 줄도 모르고 탈출을 시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함대를 해협으로 더 밀어넣어 그리스 함대가 달아나지 못하게 했다. 페르시아 함대는 전열에 90척의 함선을 1.7km 넓이로 세우고 배에는 30~40명의 보병과 궁수를 태우는 전통적인 전투방식을 따랐다. 크세르크세스는 함대가 너무 밀집대형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페라미스Peramis를 도는 순간 좌익 이오니아Ionia 함선이 서로 충돌하며 뒤로 쳐졌고 우익 페니키아Phoenicia 함선은 훨씬 앞서면서 페르시아의 전투대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설상가상으로, 페르시아 함선이 해협에 들어서자 달아나는 줄 알았던 그리스 함선이 갑자기 배를 돌리며 전투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스 갤리선의 승선인원은 적었지만 더 날렵하고 기동성이 좋았다. 18명의 보병이 탄 180척의 아테네 3단노선은 페르시아 우익에 맞섰고 페니키아 함선은 해류에 밀려 좁은 지역으로 들어왔다. 유인작전은 대성공을 거뒀다. 그리스 함대는 75척씩 4열 횡대로 초승달 모양의 대형을 취했다. 좌익 아테네 함선은 기동력을 살리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었지만, 밀집대형의 페니키아 함선은 좁은 공간에서 해류에 밀려 서로 부딪치며 대형조차 갖추기 힘들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해협을 잘 알고 있으며 결전의 순간이 지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아침만 해도 산들바람만이 불었는데, 날이 밝으면서 북쪽으로 큰 물결이 치고 있었고 비교적 가벼운 그리스 함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렇지만 큰 물결은 위가 더 무거운 페르시아 함선에게 더 위협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공격에 나섰다.

 

그의 판단이 옳았다. 큰 물결에 밀린 페니키아 함선은 심지어 그리스 함선에게 옆구리를 내주기까지 했다.(당시는 대포가 없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선수로 옆구리를 들이받아 가라 앉히거나 보병이 배에 올라 적의 노꾼을 죽여 무기력하게 만드는 전술이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옆구리를 보여준다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다.)헤로도투스Herodotus의 기록에 따르면 아테네 갤리선의 함장 아메이니아스Ameinias가 가장 먼저 페르시아 함선을 들이받았다. 플루타르크Plutarch는 아메이니아스가 크세르크세스의 동생 아리아메네스Ariamenes의 기함에 달려들었고, 페르시아군은 거대한 선체 위에서 화살과 창을 퍼부었다고 설명했다. 새부리처럼 생긴 두 배의 황동 선수가 서로 들이받으며 엉켰고 아리아메네스가 적의 배위로 건너가려는 순간에 창을 맞고 바다에 떨어졌다

 

두 함대는 서로를 들이받으며 육박전을 벌였다. 페르시아 함대는 일부분만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함선은 11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기동력도 뒤처지는데다 전투를 시작하자 마자 제독을 잃은 페르시아 함대는 사분오열하기 시작했다. 승리를 너무 확신한 나머지, 부제독을 임명하지도 않았고, 각 함선의 함장이 알아서 전투를 벌여야했다. 일부 함선은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대해에서 함선이 계속 밀려들면서 물러나는 배와 진입하는 배가 완전히 엉켜버렸다. 우익 페니키아 함선이 페르시아 해군의 패전을 결정지었다. 경험많은 선원이었는데도 단호한 그리스군의 저항에 놀란 이들은 무질서하게 뒤로 물러났고 쏟아져 들어오는 다른 배와 충돌했다. 육지 근처에 있던 배는 뭍으로 올라가 주저앉았고 선원은 달아났다.

 

크세르크세스는 나중에 함장을 불러모아 패전의 책임을 물었는데 페니키아 함장은 좌익의 이오니아 함선에게 책임을 돌렸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산위에서 이오니아 함선이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 지를 지켜보았기 때문에 즉시 페니키아 함장들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함선에 승선했던 페르시아 보병은 거의 모두 수영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배와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반대로 수영에 능숙한 그리스 보병은 배가 가라앉아도 뭍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해전이 벌어지자 아테네 장갑보병(호프라이트Hoplite)가 살라미스에서 프시탈레이아로 건너가 페르시아 보병을 모두 처리했고, 운좋게 섬으로 헤엄쳐온 페르시아 병사를 모두 죽였다. 페니키아 우익이 대열을 이탈하는 동안, 아테네 함대는 페르시아 함대의 중앙과 좌익으로 선회했다.

 

페르시아 중앙의 길리기아Cilicia 함선은 용감하게 맞섰지만 페니키아 함선이 후퇴하는 모습을 보고는 함께 물러났다. 이제 페르시아의 좌익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중앙의 일부만 고립되었다. 아테네 함대는 달아나는 페니키아와 길리기아 함선을 추격하지 않고 고립된 페르시아 함대를 옆과 뒤에서 협공했다. 이오니아 함대는 궁지에 몰렸는데도 대단한 분전을 펼쳤다. 포위된 상태에서 아테네 함선을 들이받았고, 곧바로 들이받혀서 침몰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 함선 위로 뛰어 올랐지만 이미 아테네 함대에 포위된 상태에서 에기나Aegina 함대까지 달려들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살아남은 함선은 서풍을 받아 대해로 탈출하기 위해 힘껏 노를 저었고 만신창이가 된 나머지 배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스 함대는 대승을 거뒀지만 아직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최대 300척을 잃었다고 해도 아직도 대단한 전력이 남아있었다(당시의 기록으로는 최대 600, 현대의 분석으로는 300척이상이 남은 것으로 추산한다. 그리스는 최대 378척 중 40척을 잃었다.) 반파된 함선을 정리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후처리였지만, 서풍을 받아 이오니아와 나머지 함선을 빠져나간데다가 선원과 병사가 모두 달아난 빈 배도 대해로 밀려나갔다. 그리스군은 대열을 정비하고 부숴진 배를 급히 보수하며 또 다시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페르시아 해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하지만 페르시아 해군은 돌아오지 않았다.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 해협을 뒤덮은 병사들의 시체와 함선의 잔해를 지켜보다가 팔레룸Phalerum으로의 총퇴각을 명령했다. 그리고 2일 후에는 헬레스폰트로 다시 물러났다. 패전과 함께 자신감도 완전히 부숴져버렸고 오히려 그리스군의 추격을 염려했다.

 

리스 해군이 에게 해를 건너 헬레스폰트 부교를 끊는다면 보급은 고사하고 자신도 꼼짝없이 고립될 판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아티카에 주둔한 육군에 대해서도 걱정했다. 에게 해를 장악한 그리스군은 페르시아 제국의 동쪽 국경으로 건너와 그렇지 않아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그리스 주민의 반란을 조장할 수 있다. 크세르크세스는 급히 되돌아가 그런 움직임을 봉쇄해야 했지만 그에게는 제왕으로서의 평판도 중요했다. 단 한 번 졌다고 해서 그리스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총퇴각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고민끝에 중간을 선택했다. 육군을 사촌인 마르도니우스Mardonius의 지휘하에 테살리Thessaly에 두되 보급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두기로 했다. 이제 페르시아군은 방어에 주력하게 되었다. 크세르크세스와 본대는 45일 만에 헬레스폰트로 되돌아왔다. 그리스군의 추격은 전혀 없었지만, 대신에 전염병, 굶주림과 추운 날씨가 페르시아군을 괴롭혔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정치가와 전략가로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부패의 상징이기도 했다. 워낙 권모술수에 능해 아테네 시민과 정적의 반감을 샀고 결국에는 국외로 추방되어 크세르크세스의 아들을 위해 페르시아의 총독이 된다. 반전과 반전의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페르시아 제왕 크세르크세스Xerxes의 야심에 마침표를 찍은 전투는 아르테시움Artesium과 살라미스 해전도 아니었고, 테르모필레의 전설적인 전투도 아니었으며, 바로 플라타이아 전투였다. 기원전 479년 여름, 플라타이아 아래의 평원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10만 명의 페르시아군과 그리스 동맹군돠 대치를 한다. 이제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