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조선』

2018. 6. 4. 20:10책 · 펌글 · 자료/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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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조선 2013.07.05

 

 

저자 문소영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나와 '서울신문'에서 22년째 기자로 일한다. 국회 여당반장과 청와대 출입기자, 경제부 금융팀장, 학술ㆍ문화재 담당기자를 거쳐 현재 논설위원에 재직중이다. 2005년 미국 듀크대학 아시아안보연구프로그램(PASS)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2010년 16~18세기 조선과 일본의 경제와 문화를 비교한 '못난 조선'과 2013년 조선과 일본의 개항을 비교한 대중역사서 '조선의 못난 개항'을 냈다.

 

 

 

 

 

서론: 조선은 못난 나라였다


1. 문화


조선의 도자기 길을 잃다
조선백자, 고립의 흔적
17세기 조선의 가난이 낳은 철화백자
17세기 세계 유색자기를 선도한 일본자기
16~18세기 조선의 수출품, 분청사기
일본 판화, 인상파에 미치는 영향
18세기 진경산수화 vs 11세기 야마토 화풍
16세기 중국?일본의 서양화 전래


2. 경제


조선과 일본의 16~17세기 해외교역
은 수출국 일본까지 확대된 실크로드
조선후기 중산층이 무너지다
국력의 격차를 벌린 조선과 일본의 해양진출
일본, 쇼군이 나서 부국강병을 꾀하다
조선?중국?일본의 쇄국은 수준이 달랐다
인구증가와 구황작물의 전래
일본의 1500년 된 장수기업의 의미


3. 사회


중?일보다 3백 년이 늦은 조선의 가톨릭 전파
‘중국적 세계화’에 만족한 조선의 세계관
해외 정보와 문물에 예민했던 일본
‘?글’의 위기를 불러온 한국인의 배타성
전통, 조선식이냐 고려식이냐?
단일민족이란 허구의식
토론?소통하지 않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한민족 최고의 발명품 ‘한글’을 박대하다
일본과 청나라는 야만국이었나



4. 정치


영?정조 시대, 조선의 르네상스 아닌 역주행
조선후기를 망쳐놓은 이데올로기, 북벌론
사대, 조선의 전유물은 아니야
21세기 한국이 북한의 혈맹 중국과 공존하는 법
조선시대의 교조주의, 주자학
조선의 과거제도, 사회를 획일화시키다
조선, 욕망조차 하지 않았다
18세기 천하도가 이야기하는 것



결론: 내가 살길 꿈꾸는 나라 ‘힘세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1

 

양반들에게 조선 멸망의 책임이 있는데도 사람들이 몇 대조 할아버지가 참판을 했다거나 영의정을 지냈다는 가문의 영광을 되새기는 것을 보면 짜증스럽다.

 

“영어로 차이나는 중국을 뜻하지만 '도자기'라는 보통명사도 된다. 영어로 재팬 역시 일본을 뜻하지만 '칠기 · 옷칠'이라는 보통명사도 된다.

 

15세기부터 만들어진 분청사기를 일본은 18세기 중엽(1639-1743년)까지 초량 왜관에 도자기 가마를 만들어 놓고 주문자 제작방식으로 생산해 가져갔다. 조선 조정은 일본 귀족들의 분청사기에 대한 열기와 수용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18세기 조선의 관료들은 베이징과 에도에서 새로운 문물과 경제적 번영을 목격하고도 애써 눈을 감았다. 오히려 조선의 지배층은 성리학적 관념에 사로잡혀 물질적 풍요보다는 정신적 풍요를 더욱 강조했다. 중국과 일본의 경제적 풍요와 선진문물을 보고도 이를 무시해버렸다.

개항에 앞서 일본은 이미 조선보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0년 이상 경제적으로 앞선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은 동남아뿐 아니라 유럽 등 세계 시장에서 15세기에는 칠기, 17세기에는 도자기, 17세기 이후 약 100년간 전세계 銀 유통량의 30%를 수출했다.

“조선은 임진왜란이나 늦어도 병자호란 때 망했어야 했다.”

 

- 서문 중에서

 

 

 

 

2

 

도자기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반도체 기술 같은 것이었다. 1300도의 고온을 유지할 수 있는 가마 속에서 흙으로 만든 그릇이 금속처럼 단단한 자기로 변한다는 것은 마치 연금술사들의 마술과도 같았다. 16세기까지 자기를 만들 수 있는 민족은 중국, 한국, 베트남밖에 없었다.

 

영국의 웨지우드社가 1750년대 전사기법을 발명하여, 독일에 이어 두번 째로 1715년부터 생산을 시작했다. 이는 중국식 수공업적인 도자기 생산방식에 종지부를 찍은 대사건이었다.

일본은  19세기 중반에 서양 전문가를 고용해 근대적인 도자기 기술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에 동떨어진 조선의 전통 가마들은 19세기 개항기에 급격하게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조선 후기까지 맥을 이어온 전통 도자기 기법들도 덧없이 사라졌다. 도공들이 문자를 몰랐고, 그렇다고 도공들의 제작기법을 글로 남겨줄 뜻있는 양반도 존재하지 않았던 탓이다.

청화백자로 할 것이냐 철화백자로 할 것이냐의 문제는 각 나라의 문화적 차이가 아니라 한 나라의 경제적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였던 셈이다.

17~19세기에 닝본, 중국, 유럽 등의 주류 자기들은 서로 영향을 받아 엇비슷한 채색자기의 세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외부 변화에 무지했거나 조선의 문화가 유일하다는 자만심에 가득찼던 조선의 지배층 탓에 조선백자는 순백자 형태로 남게 됐다.

 

 

 

3

 

세계미술사를 다룬대부분의 책들은 한반도의 미술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 않다. 같은 시대 중국의 미술과 크게 구별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만 몰랐던 것이다.

일본은 헤이안시대(794~1185) 후기인 11세기부터 일본풍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동그란 얼굴에 볼이 통통하고 일본 전통의상을 입은 여자들의 모습이 나타나는 시점이다. 더불어 일본은 10세기 말~11세기 초에 일본어로 쓴 산문 문학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겐지 모노가타리》이다. 또한 1130년 경에는 종이 두루마리에 의인화된 개구리와 토끼들이 웃고 있는 풍자화인 <쵸주기가鳥獸戱畵>도 나타난다.

 

 

 

《다케토리 모노가타리》

 

 

〈쵸주기가〉

 

 

 

 

 

4

 

16세기 초 중국에 들어간 최초의 유럽 미술품은 르네상스 시대의 유화로 된 종교화(책, 판화) 등이었다. 중국에 체류한 선교사들은 16세기 말부터 필요한 그림을 중국인 화가 양성소를 운영해서 직접 공급받을 수 있게 됐다.

사실 중국의 세데노 신부가 운영했던 미술학교보다는 일본에서 선교하던 니콜로 신부가 경영한 화가학교가 더 유명했다. 일본에서는 16세기 말에 동팜 화가를 키우는 학교도 세워졌다.

 

 

 

5

 

공식적으로 조선은 1886년 노비세습제 페지령을 내렸고 1897년에 대한제국이 탄생하면서 노비제도는 종말을 맞았다. 일본은 900년대에 이미 노비제도를 폐지했다. 다른 형태의 천만제도인 '게닌(下人)'이 나타나 1871년 해방령이 내려질 때까지 지속됐지만 공식저긍로 노비제는 10세기에 폐지됐다. 중국에서는 노비가 세습되지 않았고, 옹정제 때 마지막으로 남은 세습적인 천민집단이 거의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