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

2016. 8. 15. 07:57미술/한국화 현대그림

 

 

 

 

 

비운의 천재 화가, 이인성
[특집] 화가 이인성(李仁星, 1912~1950) 탄생 100주년
2012년 09월 09일 (일) 02:56:01최학모 기자 greenchm@snu.ac.kr

“너 커서 이인성 되겠구나!” 이는 한때 대구에서 그림에 소질 있는 아이에게 하는 가장 큰 칭찬이었다고 한다. 1930년대 조선 미술계를 주름잡으며 천재 화가로 불렸던 이인성(사진), 그는 동시대 다른 작가보다 많은 작품과 성과를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남기고 요절했다. 이인성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학신문』에서는 대중들에게 생소한 이인성의 삶과 예술세계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붉은 흙빛' 띤 우리 땅 화폭에 담아내기까지

이인성이 주로 활동했던 1930년대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으로 혼란스럽던 민족적 시련기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일본에서 유입된 서구문화가 만개한 시기이기도 했다. 1909년 화가 고희동이 일본에서 최초로 들여온 서양화가 점차 정착됐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적 회화’에 대한 화가와 평론가들의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 논의를 시발점으로 미술계는 우리의 지리와 기후를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향토색’을 그림에 사용하려 노력했다.

이와 동시에 1930년대는 국내 화단계에 지역단위 화가들의 결속이 활발히 이뤄진 시점이기도 하다. 특히 이인성의 고향이었던 대구는 경부선이 부설된 후 식민지 내륙 거점으로 성장해 급속히 도시화됐다. 일본인 화가들이 일본과 근접한 대구에 모여 서양화단을 꾸리자 이에 경도된 우리 화가들은 ‘0과회’, ‘향토회’ 등의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초기 대구화단의 이러한 양상은 별도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던 이인성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 제공: 대구 미술관 
 



이인성은 18살 때 계성학교 정문에서 쉬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고 그린 「그늘」이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에서 입선하면서 미술계에 데뷔했다. 그는 집안이 어려워 보통학교만을 겨우 졸업했지만 대구미술사 사장 서동진의 눈에 띄어 그림을 배우게 됐다. 서동진을 비롯한 향토회 선배들 아래서 수채화를 배운 그는 황갈색과 청회색 등의 어두운 색을 주로 사용해 근대적 도시 풍경을 담백하고 산뜻하게 표현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는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받은 「세모가경」 덕에 지역유지들과 경북여고 시라가 주키치 교장의 도움을 받아 1931년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인성이 일본에서 유학했던 시기 일본에서는 1880년대 유럽으로 떠났던 일본인 화가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서양화단을 이끌고 있었다. 당시 일본 미술계는 인상파, 후기인상파, 야수파 등 서양의 근대적 유파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인성은 꾸준히 모네, 세잔, 보나르, 마티스, 고갱 등 각 유파를 대표하는 화가의 화풍을 답습했다. 그는 이러한 연습을 통해 당시 한국 관전(官展)에서 선호하던 정통 서양화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4년 동안의 일본 유학 생활이 끝나갈 무렵, 방학 중 한국을 왔다간 이인성은 우리의 땅과 문화에 대한 향수에 젖게 됐다. 1930년대 초반, 한국 미술계를 달궜던 ‘향토색론’의 영향이다. 그의 우리 땅에 대한 그리움은 당시 그가 신문에 기고했던 연재기행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34년 9월 7일부터 닷새간 이인성은 동아일보에 풍경스케치와 서울 북한산 일대를 다니며 쓴 연재기행문 「향토를 찾아서」를 기고했다. 그는 연재기행문에서 “향토의 풋풋한 흙의 향기와 관하면서 걷게 됐다”며 “적토(赤土)를 밟는 것이 청산한 안정을 준다”고 기록했다.

1934년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탄 「가을 어느 날」에는 그러한 그의 향수가 잘 구현돼 있다. 작품에 도회적, 서구적 분위기를 담으려 했던 이전과 달리 그는 이 작품에 풍부한 색채감, 연속적 붓질, 탄탄한 구성력을 바탕으로 향토적인 형태와 정서를 불어넣었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에 적갈색으로 한국적 체형의 벌거벗은 여인, 일상 속 사물, 친숙한 식물을 그려내 우리의 정서에 익숙한 향토색을 찾고자 한 것이다. 이후에도 「경주의 산곡에서」와 「한정」 등의 작품을 통해 화폭에 흙빛을 담아냈다.

 

 



  

  「가을 어느 날」

 사진 제공: 대구 미술관 
 



이인성은 이렇게 부지런히 다양한 양식을 모색하고 수용해 1930년대에 이르러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했다. 동시대 화가였던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등이 5- 60년대에 이르러서 화풍을 완성한 것에 비해 매우 이른 시기였다. ‘향토적 서정주의’라 불리는 그의 화풍은 근대 서양화에 조선 향토색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서정성을 갖추고 있다. 1944년 해당화가 흐드러진 붉은 바닷가와 구릿빛 소녀를 꼼꼼한 붓질과 고운 색채로 공들여 그려낸 「해당화」는 ‘향토적 서정주의’가 완성된 이후 그의 대표작이다.

 

 



  

  「해당화」

 사진 제공: 대구 미술관 
 



그렇게 천재성을 한창 꽃피우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던 1950년 11월 어느 날, 이인성은 귀가하던 중 통금시간에 걸려 경찰과 시비가 붙게 된다. 그의 집에 쫓아온 경찰은 공포탄을 겨누었지만 실탄을 쏘고 말았다. 오발탄으로 인한 사고였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 이른 죽음이었다.


이인성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

향토적 서정주의를 완성하며 근대 한국 미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이인성이지만 관전화가라는 수식어는 늘 그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살아있는 동안 꾸준히 조선미전, 제국미술전람회 등 관전에 작품을 선보였고 관전의 추천작가를 맡았던 적도 있기 때문이다.

친일논란 역시 바로 이 지점에서 제기된다. 그가 참여했던 조선미전은 일본에서 한국의 화풍을 일본에 동화시키고자 설립한 것으로, 1930년대 중후반을 지나며 일제는 조선미전에 향토색 짙은 작품제작을 요구했다. 여기서의 ‘향토색’은 우리나라를 전근대적이며 정체된 식민지 풍경으로 묘사하라는 주문을 담은 말이었다. 이인범 교수(상명대 조형예술학과)는 “이인성은 관전과 같은 일제의 제도적 인프라를 통해 성공했다”며 “그에 대한 평가가 일제의 이데올로기와 별개로 이뤄지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인성이 관전화가였다는 사실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전문 미술대학이 없었던 당시에는 유학길에 오르지 않고서는 서양화를 배울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미전은 서양화라는 새로운 조형작성법을 가르쳐주는 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이인성은 여러 차례 관전에 참여하며 서양화 양식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이중희 교수(계명대 동양화과)는 “서양화가 싹트던 그 시기에 작가들은 관전과 재야를 구분해야 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다”며 “관전은 미술계에 등용하는 유일한 통로였기에 이인성도 닥치는 대로 관전에 출품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인성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한 것과 다름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도 존재한다. 화가 손동진은 이인성이 “자신의 색채를 찾는 과정에서 다양한 화풍을 시도했을 뿐”이라며 “향토적 서정주의의 확립 이후에는 식민주의적인 그림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1930년대 이후의 이인성의 그림에는 일본에서 요구한 향토색이 아닌 이인성만의 ‘향토적 심미주의’가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림에서 조선적 체형의 인물과 향토적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원색으로 풍경과 인물을 아울러 우리 민족의 서정성을 높였다. 결국 그는 자신의 화풍에 향토색을 입혀 관전에 출품하는 과정을 통해 한국 근대 서양화의 양식적 정립과 성숙을 이끌어낸 것이다. 신수경 강사(목원대 미술교육과)는 “이인성이 보다 자유롭게 한국적 색채를 실험했기에 우리나라 서양화단이 보다 질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후대에 녹아든 '향토적 서정주의'

그가 다진 서양 근대 회화의 기틀은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의 정서, 색채, 소재를 끌어와 서양화에 접목한 시도는 50, 60년대까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정취적·목가적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한 지류를 형성했다. 이 계보는 인물과 풍경의 조화와 심화된 향토적 소재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화가 박상옥은 이인성 작품의 화풍을 가장 뚜렷하게 수용한 화가로 손꼽힌다. 대상의 관조를 통한 차분한 그림을 그렸던 이인성처럼 박상옥은 자신의 작품에 인간과 전원이 어우러진 풍경을 담아냈다. 이 양식이 다시 국전에서 임규삼, 이동훈, 이인영 등으로 이어졌다. 한편 이인성의 원색을 이용한 강렬한 색채감을 주로 이어받은 화가로 류경채, 이봉상, 김흥수 등이 있다. 또 박항섭, 박창돈, 최영림은 자신의 작품에 서정성을 짙게 가미하는 방식으로 이인성의 뒤를 좇았다.

현재 이인성과 관련된 연구는 다양한 방면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는 풍경화부터 인물화, 수채화부터 유채화와 수묵화까지 소재와 장르를 불문하고 그림을 그린 화가였기 때문이다. 신수경 강사는 “최근 여러 학문 분야에서 이인성을 주목하고 있다”며 “이는 그만큼 이인성이 근대미술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방증한다”고 말했다. 특히 이인성이 말년에 그렸던 동양화를 연구하는 것이나 일본 유학과 수채화를 관련지어 이인성 회화의 계보를 분석하는 것은 최근 새롭게 시작된 연구동향이다.

이처럼 짧은 삶을 살았음에도 한국 근대 미술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이인성. 그가 만약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처럼 해방 이후의 한국의 풍경을 조금 더 오래 그려냈더라면 어떤 대작이 나왔을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상상해본다.

 

 

 

     

 

 

 

 

 

 

 

 

 

 

 

 

 

 

 

 

 

 

 

 

요절한 한국의 서양화가 <이인성(李仁星)>

 

 

 

 

 

해방된 조국에서 기쁨에 술취해 돌아오던 이인성은 같은 동포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이인성은 그렇게 죽었다.

 

 그 손끝이, 손끝에서 나온 그림이 일본인의 눈을 놀라게 했던 이인성의 마술적 재능이 총한방에 죽고 말았다.

자신을 서슴지않고 천재라고 표현하던 이인성이 통행금지에 걸려 죽었다.

 

환쟁이 이인성은 그렇게 죽었다.

하지만 이십년이 흘러간 지금 그의 그림은 남아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천재의 재능을 엿보이게 하고 있다.

여러가지로 따지지 말라.

 

예술가가 무슨 특권이 있다고 통행금지 이후에 다닐 수 있담 하고 따지지 말라.

자기가 뭐라고, 뭐 대단한 인물이라고 통행금지 이후 다닌담 하고 따지지 말라.

그렇게 말하는 너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위대한 천재화가를 죽인 사람들이다.

 

. 이조백자는 지금에 와서는 위대한 예술품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전에 그들을 백정 취급하였다.

그들을 따로 살게 했고, 그들끼리 혼인케 하였으며, 열병걸린 전염병환자 취급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빚었다. 그들의 한을 도자기로 빚었다.

 수백년 지나서 그 이조자기는 그들을 멸시하였던 우리들의 유일한 자랑스런 유산으로 남아있다.

우리 문학의 고전도 마찬가지다.

춘향전도, 흥부전도, 심청전도 멸시받았던 하위계급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구화문학이다.

말하자면 하위문화들의 소산이다.

그것을 우리는 배운다. 배우고 있다. 자연스럽게 배우고 있다.

 

 

 

 


왜 그들을 죽은 다음에 추모하는가.
왜 이인성이 죽은 지금에 그들을 위해 기념비를 세우는가.
왜 그들을 우리곁에 살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가.
살아서 명동에서,

무교동에서 술취한 이인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가.
왜 살아있는 천재 이인성이 우리 곁에서 시대의 예언을 내려주는

그 신의계시를 듣지 못하게 하는가.

나는 아르헨티나의 작가 아소트리아스의 경우처럼 -

그의 집 1㎞ 근처에는 다음과 같은 푯말이 붙어있다고 한다.

여기엔 우리의 위대한 작가 아소트리아스가 글을 쓰고 있는 구역입니다.

 경적을 삼가해 주십시오 라고. - 거국적인 대접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죽일 필요야 없지 않는가.
예술가는, 천재의 예술가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는 신에게서 태어날 뿐이다.
왜 신에게서 태어난 그를 죽여야만 하는가.


나는 총을 쏘지 않았다라고 자위하지 마라.
나는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다고 자위하지 마라.
나는 하층계급을 멸시했던 양반계급이 아니야 라고 자위하지 마라.
나는 바리새인이 아니니까라고 자위하지 마라.
먼훗날 그대들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예술가와 더불어 살지 못하고, 예술가를 추모만 했었던 바보와 같은 할아버지들이었다고.

(중략)

예술가를 추모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위대한 민족은 천재와 더불어 살고 있다.
천재들을 추모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위대한 민족은 천재와 더불어 살고 있다.
이웃으로서 그들의 숨결을 들으며 살고 있다. <來週水曜字에 계속>

 

 

 

 

 

▲ <<해당화 : Sweet Brier Flowers>>
1944, 캔버스에 유채, 228.5X146cm, 호암미술관 소장
1944, Oil on canvas, Collection of Ho-Am Art Museum, Yongin

 



작가 최인호가 오래 전에 화가 이인성의 최후를
소설적으로 각색해 쓴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의 한 부분이다.
한국의 고갱이요 세잔으로 불렸던 이인성은 1950년 늦가을
서른아홉 나이로 북아현동 집에서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최후를 마친다.
어떤 기록은 이미 집 근처 술집에서부터 경찰관과 시비가 있었다고도 전한다.

이인성의 최후는 이 땅에서 예술 한다는 것의 자리매김이
어떠했는가를 소스라치게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어쩌면 천하의 이인성이라고 했을 때 치안대원은
당시의 세도가 중 이기붕 일가쯤의 한 사람으로 지레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당시는 이씨 천하였으니까. 그래서 어떤 기록에 보면
취한 이인성을 정중히 ‘모셔다 드렸다’고 나온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는 세도가는 커녕 일개 ‘환쟁이’였던 것. 치안대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것이다.

 

 

 

 

 

 


글쓴이는 묻는다.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 그리고 스스로 대답한다.
“우리 곁의 천재를 죽인 것은 너와 나 우리 모두”라고,
나는 그 시대에 살지 않았다. 총을 쏘지 않았다 말하지 말라”고.
허다한 우리 곁의 천재적 예술가를 멸시하고 심지어 죽음의 길로 까지 내몰고 나서
추모비, 기념비를 세운다 호들갑 떨지 말라고.

“너 커서 이인성 되겠구나.”
한때 대구에서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에게 ‘화가 되겠구나’ 대신 그렇게 말했다 한다.
그는 1912년 대구 남성동에 있는 작은 음식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근대 화가들이 대부분 지주나 자본가 혹은 관료가문 출신의
자제들이었던 데 반해 이인성은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가의 길을 갔다.

그가 쓴 어떤 글에 의하면 부친은 그의 뜻에 극구 반대하여
몽둥이를 들고 나올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세계아동작품전에 슬며시 출품하여 특선하였으나
정작 부모님은 화를 내시는지라 서럽기까지 했노라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난과 주변의 몰이해에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당시 구로다세이키가 빠리로부터 돌아와 일본 화단에 일으킨
외광파의 영향을 받은 일인 미술교사들에 의해 서양화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한국 고미술 연구가로 이름 높던 시라카미 쥬요시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어 태평양 미술학교에 적을 둔다.
그는 메이지(明治, 1868-1911) 말기로부터
다이쇼(大正, 1912-26) 초기에 걸쳐 이입된 후기 인상주의적 기법을
‘조선의 향토색’으로 수용하여 토착화시킨다.
이를테면 평범한 주변의 일상적 사물을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한국적 색체, 형태와 정서로 덧입혀갔던 것이다.
그에게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가져다 준

<경주의 산곡에서>와 같은 작품은 천년 영화가
몇 개의 기왓장으로 나뒹구는 폐허가 된 고도 경주와
힘없는 어린 소년들을 대비시켜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는데,
헐벗은 아이들과 매미와 산하를 통해 당시의 민족상황을 표현하였다.
동시에 붉은 황토색을 통해 특유의 조선정서를 형상화시킨 것이다.

 

 

 

 

 

 


그는 도시에서 출생하여 도시에서 살다간 도시인이었지만
대부분의 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토착에 탐익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 세련된 근대적 감각을 불어 넣었다.
버터 냄새나는 서양 기름 물감을 토장국 맛 나는
카슬카슬한 조선 황토의 토착미감으로 바꾸어버린 이인성.
아니다. 인위적으로 바꾸었다기보다는 체질로 풀어내고
토해냈다는 편이 낫다. 조선의 붉은 토지와 맨드라미,
조선 여인의 흰 저고리와 검은 무명치마 같은 색채의 대비로써
그는 암묵적으로 민족적 미의식을 드러낸다.
투쟁적 모습을 보이거나 목청 높여 드러내놓고

민족주의를 부르짖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그의 그림은 향토 정서 이상의 울림을 주고 있다.

그가 그린 <아리랑 고개>와 그 그림에 관한 고백은 그의 이런 생각의 뼈대를 가늠하게 한다.



▲ 아리랑 고개
1934, 57.5X77.8cm, 종이에 수채, 호암미술관 소장


“보리타작 시즌은 과연 아름다운 볼거리다. 모두 ‘예술적 콤포지션’의 하나이다.
다른 나라에 없는 조선의 보리타작이라서일까? 몸을 가볍게 들어서
‘도리깨’를 번쩍 들어올리는 그 순간의 이즘(ism)은 얼마나 대륙적인가?
여기저기서 흘러오는 아리랑의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며 또 걷기 시작한다.
황혼의 들길은 끊없이 아름답고 ‘감정적’이다.”
- 1935.6.19. 유족 소장의 자료-

그는 거의 독학으로 수채화와 유화를 공부해 열여덟 나이에
선전(鮮展)에 입선한 이래 연달아 입. 특선을 거듭하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약관 26세 나이로 추천작가가 되었던 식민지 화단의 별이었다.
경쾌한 붓터치와 동양화의 파묵법(破墨法, 거친 먹그림 기법의 하나)을 연상시키는 필세에
토속적 정감 넘치는 소재의 화면들. 그 위에 강한 명암 대비에 의한 미묘한 긴장과 울림,
넘치는 문학성 등으로 ‘이인성류’는 선전(鮮展)뿐 아니라
해방 후의 국전 작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 경주 산곡에서
1935, 130.5X195.6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그의 선전(鮮展) 참여 이력이 때로 그를 평가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그가 한국적 미의식을 명료히 드러낸 작가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인성의 아들 채원씨는 그 부분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아버님이 줄곧 선전(鮮展)에 참여하셔서 각광을 받았대서
그 부분을 약점으로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신 분으로서
그런 제도적 관문을 거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화가로 입신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처럼 화랑이 많아 개인전을 통해 자신을 알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니까요.
비록 선전(鮮展)에 참여는 했지만 아버님은 끊임없이 우리 그림을 그리려 애쓰신 분입니다.
아버님의 그림은 숫제 동양화입니다.

저희는 아버님께서 고이 간직해 오신 미발표 작품
백여 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에는 종이에 그린 수묵화가 많습니다.
제 짧은 눈에도 아버님의 수묵화는 아버님의 개성과 기질을 유화 쪽에서 보다 휠씬 잘
발휘하신 것으로 보였습니다.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었대서 서양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수채와 유채를 주로 쓰긴 했지만 아버님의 그림은 한국화였습니다.”

 

 




▲ 가을 어느날
1934, 96X161.4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그는 도시인이었으면서도 우리 산, 우리 물의 아름다움은 물론 심지어
공기의 흐름까지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때로는 일상의 풍경에서 암울하고 애잔한
식민지적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세잔의 <생 빅트와르 산>은 알아도
이인성의 <경주의 산곡>에는 무지하다. 고갱의 <타히티 여인>의 그 원시적 생명력은
예찬하지만 <어느 가을날>의 황막한 들판에 반나(半裸)로 선 조선여인에는 무심하다.
모네의 <수련>을 누가 모르랴. 그러나 이인성의 <해당화>는 낯설다. 우리는 거의 늘 그랬다.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리의 눈으로 허다한 일본인 화가들이
식민지 청년 이인성의 재능을 시샘했지만 나라 안에서 그 이인성은
정작 보잘 것 없는 ‘대구의 식당집 아들’이었을 뿐이다.

 

 




▲ 정물(해당화)
1940년대 후반, 48.5X31.5cm, 종이에 수채

 


1936년 24세에 일본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던 김옥순과 결혼한 그는 귀국 후
장인되는 김재명의 남산병원 3층에 현대식 화실을 꾸며
안정된 가운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940년 상처하고 실의에 잠기면서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1947년 김창경과 재혼하면서 이듬해 서울 동화화랑에서 재기전을 갖게 되고
다시 일어서기까지 그는 참으로 감내하기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1950년 장남 채원군이 탄생하고 제2의 전성기가 열리는가 했지만
그 해 11월 4일 그만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 계산동 성당
1930년대 중반, 35.5X45cm, 종이에 수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서양화로 조선의 ‘향토색’을 담으려 노력했던 이인성의 흔적은

 대구에서 찾을 길이 없다.
이인성의 활동 반경을 짚어주는 것으로는 봉산 문화거리 입구에
사각의 표석이 하나 서 있을 뿐이다.
옛 정취와 연경되는 것은 그나마 약전 골목, 그리고 메마른 도시의 향기같은
한약 냄새가 끝나는 지점의 계산동 성당. 하늘에 닿을 듯한 뾰족 십자가에
남북으로 길게 익랑(翼廊)을 단 이 고딕식 성당을

 이인성은 몇 차례나 화폭에 담았다.
서쪽 하늘을 물들인 이인성의 그림 속의 그 붉은 빛 구도 안에 서 있건만
천지간에 화가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다.

 

 

 

 

 





▲ <<백장미 : White Reses>>
1940, 나무판에 유채, 45.3X37.3cm
1940, Oil on wooden board

 

 

 

 

 

 

 

 




▲ <<어촌(덕적도 풍경 : Fishing Village)>>
19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32X41cm, 개인소장
later 1940's, Oil on canvas

 

 

 

 

 

  

 

 

 

 

 

 

 

이인성 작. <자화상(Self-Portrait)> 1950,나무에 유채, 26.5X21.8cm

 

 

 

이인성(李仁星, 1912.8.28 ~ 1950.11.4) 

 

서양화가 주요수상 :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 창덕궁상(1935)

주요작품 : 《경주의 산곡에서》 《실내》

대구(大邱) 출생. 보통학교를 나온 뒤 서동진(徐東辰)에게 사사,

수채화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1930년 도쿄미술학교를 다니면서

일본 제전(帝展)에 출품, 수차 입선하였다.

1935년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으며,

 같은 해 제전에서는 준특선,

1937년 추천작가가 되었다.

1938년 개인전,

1940년 김인승(金仁承)·심형구(沈亨求)와 함께 3인전을 가졌으며,

  개인 아틀리에를 열어 후배를 양성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8·15광복 후는 이화여고 교사를 지냈고,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작품 경향은 인상파적인 감각주의에서 그의 이국 취향과 토속적 소재를 발전시켰다.

 작품으로 《경주(慶州)의 산곡에서》 《실내》 등이 있다.

 

 

 


 

 

 

 

 

 

'미술 > 한국화 현대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춘천, 이상원 미술관  (0) 2016.10.23
오치균  (0) 2016.08.15
이중섭 그림모음  (0) 2016.08.14
이우환 위작, 그럴 만도 하네.  (0) 2016.06.30
公州화가 임동식, 대전시립미술관 개인전  (0) 2016.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