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술/미술 이야기 (책)

몽마르트 & 탕기영감

 

 

 

 

                           Vincent van Gogh - Portrait of Pere Tanguy, 1888

 

 

 

 

............................

............................

 

 

몽마르트의 벌집 같은 아틀리에 대신 이들은 넓은 카페에서 모임을 열었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카페는 더없이 풍부한 소재를 제공했다. 반 고흐가 초상화를 그린 탕기(1825-1894) 영감도 이 근처에 살았다. 탕기 영감은 몽마르트 거리에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거의 아버지나 큰형님 같은 존재였다. 그는 실의에 가득찬 가난한 화가들을 격려하고,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나눠주고, 자신의 작은 가게에서 이들의 그림을 팔아주기도 했다. 화구나 물감에 지불할 돈이 없을 때는 그들이 그린 그림과 바꿔주었다. 탕기영감이 세상을 뜰 무렵 피사로, 고갱, 고흐, 세잔, 쇠라, 기요맹 등의 작품을 엄청나게 소장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거의 시세가 없는 그림이었지만...... 세잔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도 바로 탕기 영감의 가게였다.

 

 

 

반 고흐는 탕기 아저씨의 멋진 초상화를 완성했지. 탕기 아저씨는 마르티르街의 물감 장수였어. 가게가 비좁다보니 동시에 두 개의 그림을 걸 수가 없었어. 우리는 거기서부터 전시를 시작했다네. 월요일에는 시슬레, 화요일에는 르누아르, 수요일에는 피사로, 나는 목요일, 금요일은 바지유, 그리고 토용일에는 용킨트가 캔버스를 걸었어. 자기 그림이 걸린 날에는 탕기 아저씨의 상점에서 하루종일 보내는 거야. 어느 목요일, 아저씨가 저쪽에서 걸어오는 키 작은 남자를 가르켰지. 바로 도미에였어, 내가 그토록 찬양하는. 그가 혹시나 내 그림 앞에 멈추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내 가슴은 마구 뛰기 시작했고, 나는 아저씨랑 얼른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커튼 뒤에 숨어 그 위대한 인간을 훔쳐보았어. 도미에는 진열장 앞에 멈추었고 내 그림을 찬찬히 보았지. 그리곤 입을 비죽거리더니 한 쪽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이내 가버리더군. 이 날은 내 생애 가장 슬픈 날이었다네.

 

- 사샤 가트리는 자신의 책에서 클로드 모네(1840-1926)가 한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탕기 영감은 원래 '에두아르 고티에'라는 상점에서 수채화 물감을 혼합하던 직공이었는데, 이 상점이 팔리면서 일터를 잃자 언덕 위 호텔에서 관리인으로 일하게 되었다. 가진 기술이 물감 섞는 일이라, 화구 가게를 운영하 며 틈틈히 물감을 만들어 등에 지고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주변 아틀리에를 오르내리며 팔곤 했다. 현재처럼 물감이 공업화되지 않았던 시대에 각 상점의 독특한 물감들은 나름의 고객층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마네가 엔캥상점의 물감을 주로 사용했다면 르누아르는 뮐라르 상점의 물감을 주로 사용하는, 그런 식이다.

 

반 고흐(1853~1890)가 권총 자살로 37살의 삶을 마감한 얼마 후, 한 비평가가 몽마르트르 거리의 화방들을 전전하다 탕기 염감의 가게에서 반 고흐의 정물화를 한 점 발견했다. 얼마냐고 묻자 탕기 영감은 공책을 뒤지더니 "42프랑이오"라고 했다. 비평가가 "왜 40프랑이나 50프랑이 아닌 42프랑을 부르는 것이오?" 라고 묻자, 그는 대답했다. "그 불쌍한 반 고흐가 죽기 전 내게 빚진 액수요. 42프랑 이제 갚았구려."

 

 

- 『민혜련의 파리예술기행』

 

 

 

 

 

 

 

 

 

 

 

 

 

 

 

봉주르! 이정아의 미술박물관

등록일 | 2010.01.22

조회수 | 5,309

고흐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탕기 영감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 Julien Francois Tanguy 1825∼1894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Julien Francois Tanguy 1825~1894)는 일명 탕기아저씨, 혹은 탕기영감으로 불리는 물감 상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가난했던 파리 화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죠. 탕기는 1867년 파리 몽마르트르의 클로젤가(街)에 화방을 열었습니다. 그는 고흐, 모네, 피사로, 세잔, 고갱 등 많은 화가와 교류했고, 당시 파리에서 무려 70km나 떨어진 바르비종이나 아르장퇴유까지 순회 판매를 하기도 했습니다. 
마음씨 좋았던 탕기는 가난한 화가들에게 미리 그림 값을 냈고, 때로는 외상도 주었습니다. 또 돈 대신 그림을 받고 화구를 주기도 했죠. 탕기는 화가들의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였는데요, 많은 화가들은 그를 ‘페르탕기(Pere Tanguy)’, 즉 ‘탕기아저씨’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따랐습니다. 특히 고흐와 매우 특별한 관계로, 고흐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그의 후원자를 자처하기도 했습니다. 
 
1886년 2월 20일, 테오는 파리 몽마르트 거리 19번지에 있는 구필 화랑에서 형 빈센트 반 고흐가 보낸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고흐가 파리에 막 도착했으며 루브르에 있는 살롱 카페에서 가능한 한 빨리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흐가 파리에 온 것은 테오와 같이 생활하면서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서였죠. 또한 파리에서 그림 수업을 받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몽마르트 언덕 아래, 라팔 거리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테오와 고흐의 공동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몽마트르, 그곳은 고흐에게 희망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준 곳이었습니다.  

 

 

 

 

그동안 인상주의 화가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빈센트는 동생 테오가 소개해 준 물감 상인 탕기 영감의 상점에서 베르나르(Emlie Bernard 1868~1941),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 등을 만나면서 인상주의 회화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흐는 곧 이들과 합류하며 함께 작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 속에서 오로지 그림 그리는 일만을 구원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고흐와 파리의 멋쟁이 화가들은 잘 맞지 않았고 결국 고흐는 4개월 만에 이들의 화실을 떠나고 말았죠. 
 
그러나 그의 붓놀림은 그 어느 때보다 부지런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훗날 거장 고흐를 탄생시키는 강렬한 색채 탐구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의 작품에서 이제 색채가 제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파리의 지붕과 몽마르트의 풍차들을 그리면서, 그동안 그렸던 어두운 색조의 그림과는 다른 강한 색채를 사용한 그림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과음과 퇴폐적인 생활을 한 빈센트는 건강이 많이 나빠졌지만, 그들의 영향을 받아 그의 화풍에 변화가 생긴 것이죠.


 

 

 

당시 탕기 영감은 고흐에게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천재적인 고흐가 가난 때문에 작품 활동에 전념하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는 당시 작품 값도 안 나오는 고흐의 작품을 받고 물감 등 화구를 내주었으며 외상을 주기도 하면서, 고흐의 작품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탕기는 고흐를 종종 점심 식사에 초대하기도 했으며 까다로웠던 고흐를 위로하고 이해해주었죠. 고흐는 이런 탕기 영감을 초상을 3점을 그렸습니다. 그 중 둘은 일본 판화를 배경으로 밀짚모자를 쓴 모습이며(1887, 니아르코스 컬렉션/파리, 로댕미술관), 세 번째 그림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요(1887, 코펜하겐, 니 칼스베르크 미술관). 그 그림들에서 우리는 모델인 탕기 영감의 선량한 성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제 탕기 영감을 만났어. 그는 내가 막 완성한 그림을 가게 진열장에 걸었어. 네가 떠나고 나서 그림 네 점을 완성했고, 지금은 큰 그림을 그리는 중이야. 이 길고 큰 그림들을 팔기는 어렵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나중에는 사람들도 그 안에서 야외의 신선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야.’ 고흐가 사랑했던 동생 테오에게 보냈던 편지를 보면, 당시 고흐가 얼마나 탕기 영감을 의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888년 파리를 떠난 고흐는 1889년 5월 8일, 고흐는 생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즈음 그의 작품은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누구보다도 먼저 탕기 영감은 자신의 미술용품 가게에 고흐의 작품을 전시하였습니다. 

그런 탕기는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이 불우했던 천재 예술가 고흐가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남기고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자, 다음날 테오, 베르나르, 가셰 등과 함께 오베르 묘지에 서 있었죠. 
탕기 영감이 죽은 뒤, 그의 가게에는 당대 최고 화가들의 주옥 같은 작품들이 발견되었고, 덕분에 소실될 수 있었던 명작들이 빛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흐를 포함한 많은 화가들의 삶에 도움을 주었던 탕기 영감은 그들의 생활뿐 아니라 작품 활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던 후원자였으며, 결국 최고의 현대미술 작품을 우리에게 선물한 고마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고흐가 그린 <탕기 영감의 초상> 앞에 서면 가난해서 모델을 쓸 수 없었던 화가 고흐와 이를 안타깝게 여긴 너그러운 탕기 영감의 대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고흐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선물한 그에게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