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대륙봉쇄령-풀투스크 전투,바르샤바 공국?

2015. 11. 3. 09:07책 · 펌글 · 자료/역사

대륙봉쇄령-풀투스크 전투,바르샤바 공국

 

 

 

돈은 총보다 무섭다 - 대륙 봉쇄령 (상편)

 

 

지난 편에서는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대승을 거둔 나폴레옹이 보무도 당당하게 포츠담과 베를린에 입성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때 포츠담에 있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묘소에서 나폴레옹은 대왕의 모자와 검, 허리띠 등을 파리 앵밸리드로 보냈는데, 이때 프랑스로 보낸 것은 이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실은 나폴레옹은 개인적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은제 자명종 탁상 시계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슬쩍 했고, 이 시계는 결국 세인트 헬레나의 나폴레옹 침실까지 따라가게 되지요.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무찌른 뒤 얻은 전리품 중에는 이런 은시계 말고도 수천 마리의 군마와 600문이 넘는 대포, 많은 현금 궤짝 및 식량 등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전리품은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현대의 라이프치히의 전경입니다.  세상은 넓고, 가볼 곳은 참 많군요.)



라이프치히는 작센 (Saxony)의 수도로서, 중부 독일의 대도시였고, 당연히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의 물류 창고에서, 프랑스 군은 면직물 등 다량의 영국제 상품을 발견하고 이를 압류합니다.  이렇게 압류한 상품은 현장에서 현지 상인들에게 경매에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군사 작전에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 상품의 수송 및 판매처 확보 등을 할 수는 없었고, 현장에서 처분한 뒤 그 댓가로 받은 금화/은화를 가져가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상품의 양이 어찌나 많았는지, 헐값에 경매에 붙였는데도 그 수익이 무려 6천만 프랑 (현재 가치로 대략 8천4백억 원 가량)이나 되었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에서 격파한 오스트리아에게 부과된 전쟁 배상금의 금액이 4천만 프랑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거액이었습니다.  영국제 면직물의 양이 너무나 많았으므로, 나폴레옹은 이를 다 팔지 않고 그 중 일부로 자신의 그랑 다르메 (La Grande Armee) 전체의 군복을 새로 만들게 할 정도였습니다. 

 

굳이 라이프치히에서의 이 사건이 아니었어도, 나폴레옹은 이미 영국 상공업의 위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영국은 가게 주인들 (shopkeeper)의 나라' 라고 부르며 하찮다는 듯이 표현했지만, 사실은 그 위력에 대해 전율하고 있었고 또 부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근위 척탄병의 군복 모습입니다.  다음 편에 보시겠습니다만, 정말 나폴레옹의 병사들 상당수가 영국제 천으로 만들어진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아이러니컬한 일이지요.)

 

우리나라를 포함한 현대 국가들의 정치판도 그렇고, 제1차 및 제2차 세계대전도 그렇습니다만, 모든 싸움판의 원인은 무슨 고귀한 정의감이나 감정적인 자존심이 아니라 바로 돈입니다.  가령 미국이 대량 살상무기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라크에는 쳐들어가도, 보란 듯이 핵 실험을 빵빵 터뜨리며 시끄럽게 울어대는 북한은 애써 무시하는 일이나, 리비아의 내란에는 즉각 개입하면서도 시리아의 내전에는 벌써 몇년 째 손을 놓고 있는 것도 다 돈 냄새가 나느냐 안 나느냐에 따른 것이지요. 

 

나폴레옹 전쟁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프랑스 대혁명 자체가 누가 세금을 더 내야 하느냐라는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영원한 숙적 영국이 프랑스와 그 전부터 백년 가까이 전쟁 상태에 있었던 것도 바로 돈 때문이었습니다. 

 

두 나라가 전쟁을 할 때는 단지 상대방이 마음에 안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본과 한국은 이미 전쟁을 해도 수십번은 했을 것이고, 북한과 한국도 결딴이 날 때까지 죽어라 전쟁을 했겠지요.  우리나라가 개념상실 망언왕국 일본이나 세습독재 지상낙원 북한과 전쟁을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돈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그렇다치고, 시리아 내전처럼 당장 무고한 사람들이 마구 죽어나가는 상황을 국제 사회가 그저 구경만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도덕성이니 기독교 정신이니 알라신이니 정의니 하는 것들은 정말 립 서비스에 불과한 것이 확실합니다.)



흔히 프랑스 대혁명 이후 부르봉 왕가를 복위시키기 위해 영국이 즉각 대불 동맹전쟁에 뛰어 들었다고들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대혁명 초기 영국은 팔짱을 끼고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영국은 1792년 초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연합하여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때도 그야말로 강건너 불구경하는 입장이었고, 1792년 9월 루이 14세가 폐위되었을 때도 잠자코 있었으며, 심지어 왕정국가로서 참기 어려운 사태였던 1793년 1월의 루이 16세의 처형 때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선포된 것은 1793년 2월 들어서였는데, 그것도 영국이 선포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가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이 분이 루이 16세입니다.  1775년에 그려진 그림이니, 21세 때의 모습이네요.  참고로 아래 나오는 베르겐 백작은 이 루이 16세가 가장 신임하는 장관이었습니다.)



이야기는 1786년에 맺어진 에덴 조약 (Eden Treaty)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이전까지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모든 유럽 국가들의 경제 개념은 상당히 원시적이라서, 무조건 수출은 좋은 것이고 수입은 해로운 것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국이나 프랑스나 서로 상대국가의 수입 물품에 대해서는 높은 관세를 매겨 사실상 수입을 봉쇄하고 있었습니다.  

 

1678년에, 영국에서는 아예 법으로 모든 프랑스 산 물품, 즉 와인, 식초, 브랜디, 아마포, 비단, 소금, 종이 뿐만 아니라, 프랑스 산 비단이나 실, 가죽 등의 재료가 들어간 모든 공산품까지도 수입을 금지시켰습니다.  프랑스 상품과의 경쟁으로 손해를 보고 있던 영국 상인 및 제조업자들의 입김이 강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전쟁 중 정당하게 노획된 물품이라고 할 지라도, 절대 영국 내로 들여오거나 재판매를 할 수 없도록 하고 현장에서 즉각 불태워버리거나, 와인이나 브랜디의 경우 바다나 강에 쏟아버리도록 명령이 내려질 정도였습니다.  (물론 병사들이나 수병들은 와인과 브랜디를 자기 입 속에 쏟아버렸겠지요.)  이런 수입 억제 정책은 프랑스 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계 경제사에 우뚝 서는 고전 중의 고전,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입니다.  저도 이거 읽어봐야 하는데... 가만 보면 은퇴 뒤에도 정말 할 일은 많은 것 같아요.  돈이 안되어서 문제지요.)




(물론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반기를 드는 경제학 서적도 있습니다.  이거 집에 사놓기만 하고 아직 몇 페이지 못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보니까... 경제학자들은 문장을 일부러 어렵게 써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는 모양이에요.  제가 이해력이 딸리는 건가요 ?)



그러다 1783년 끝난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을 물먹이느라 재정을 탕진한 프랑스가 당장 농산물을 수출해야 하는 필요성과, 북미 식민지를 상실하는 바람에 자국산 공산품을 위한 새 수출 시장을 급히 찾아야 하는 영국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1786년 이 두 국가 사이에 관세를 대폭 낮추자는 에덴 조약 (Eden Treaty)이 맺어지게 됩니다. 

 

이때 프랑스 측의 책임자는 중농주의자였던 베르겐 백작 (Charles Gravier, comte de Vergennes)이었고, 영국측 책임자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Wealth of Nations, 1776년 출간)에 잔뜩 영향을 받은 오클랜드 남작 에덴 (William Eden, 1st Baron Auckland)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영국산 공산품의 프랑스 시장에 대한 진입 장벽이 크게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 에덴 조약으로 인해 손해를 보게 된 프랑스의 대형 제조업자 및 상인들, 즉 부르조아 시민계급의 불만이 프랑스 대혁명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보고 있습니다.




(에덴 조약의 주연인 프랑스 베르겐 백작입니다.  루이 16세의 충신이었던 그는 자신이 프랑스 대혁명의 씨앗을 심었다는 것을 이해했을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혁명 발발 2년 전인 1787년, 70세의 나이에 과로가 원인이 되어 병사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영국은 혁명이 벌어진 이후에도 프랑스 시장에 자국산 공산품을 신나게 팔아대고 있었으므로, 프랑스 왕의 목이 잘리건 말건 프랑스와 굳이 전쟁을 해서 이 커다란 시장을 잃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의 주역이었던 중산층 시민 계급은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익을 갉아먹는 값싼 영국 제품이 눈엣가시였습니다. 

 

결국 이들은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 영국 제품의 수입 금지를 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프랑스 대혁명에 영국이 참전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프랑스 측으로서는 영국 공산품을 막아내야 했고, 영국 측으로서는 거대한 프랑스 시장을 뚫어야 했던 것이지요.  부르봉 왕가의 복위 따위 같은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습니다.




(이 그림은 1783년에 그려진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의 초상입니다.  이 그림이 특히 유명한 것은 앙투와네트가 입고 있는 저 드레스 때문입니다.  저건 영국제 모슬린 (mulsin)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거든요.  당시 프랑스는 비단 산업이 발달했지만, 목화솜으로 만든 모슬린 옷감이 유럽 상류층에 대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전에 쓴 글에서도 나폴레옹이 1803년 6월 영국 타도를 위해 조성된 불로뉴 캠프에 시찰을 가는데 동행하는 조세핀이 개념도 없이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 가겠다고 부득부득 우기는 바람에 대판 부부 싸움이 벌어진 에피소드를 적은 적이 있었지요.)



자,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당연히 영국과 프랑스의 화물선들이 서로의 항구로 자국 상품을 실어나르는 상업 활동은 당연히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영국산 물품은 프랑스로 전혀 못 들어오고, 또 프랑스 산 물품은 영국에서 구경할 수 없게 된 것일까요 ?  물론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적은 물량이나마 인도산 목화솜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고, 영국에서도 프랑스 산 브랜디를 (매우 높아진 가격으로) 어렵게나마 계속 구할 수 있었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  바로 중립국 덕분이지요.  가령 프랑스는 포르투갈을 통해 영국 화물선이 실어오는 목화솜을 조금씩 (훨씬 더 비싼 가격에) 수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산 브랜디도, 중립국인 독일 북부 한자 (Hansa) 동맹 자유 도시들, 가령 브레멘 (Bremen)이나 함부르크 (Hamburg)로 먼저 수출되었다가 거기서 많은 이윤을 붙여 다시 영국으로 수출되었습니다.  이래서야 양국 사이의 전쟁은 중립국들만 신나는 일이 되어 버리게 됩니다. 




(한자 동맹의 전성기를 표시하는 지도입니다.  한자 동맹은 13세기부터 시작되어 14세기 말에 절정에 달했지만, 그 잔재는 18세기 후반까지도 남아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원래 유럽으로 반입되는 설탕이나 커피의 40%는 프랑스령 생 도밍그 (Saint Domingue)에서 오는 것일 정도로, 프랑스는 생 도밍그로부터 엄청난 부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혁명이 나고, 노예 반란이 일어나고 (검은 나폴레옹 vs. 하얀 나폴레옹 http://blog.daum.net/nasica/6862510 참고), 제1차 동맹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영국 해군이 프랑스 선박의 씨를 말려 버렸지만, 생 도밍그의 설탕과 커피는 계속 한자 항구들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 화물선들 덕분이었지요.  미국 선박들이 때를 만난 메뚜기처럼 미국과 생 도밍그, 발트 해를 오가면서 설탕과 커피, 유럽의 공산품을 실어날랐습니다.  아미앵 조약에 의해 1802년~1803년의 짧은 기간 동안 프랑스 선박들이 다시 생 도밍그에 나타나게 되자, 미국의 설탕 무역액은 재앙을 만난 듯 주저 앉았습니다만,  제3차 동맹 전쟁이 벌어지자 미국 해운업은 다시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영국 해군으로서는 봉쇄 활동을 펴느라 죽도록 고생만 하고, 그 달콤한 결실을 미국이 다 가져가는 모양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결국 미국과 영국의 전쟁이었지요.  흔히 1812년 영미 전쟁의 원인이 영국 해군에게 체포되는 영국 해군 탈주병 출신 미국 선원들에 대한 납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인권과 국가 위신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돈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미국이 생 도밍그의 설탕과 커피 수출을 도맡으며 희희낙낙할 수 있었던 것은 생 도밍그의 반란 노예들이 계속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생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전쟁이 난 마당에 중립국이고 나발이고 영국 해군은 모든 선박이 적국인 프랑스 항구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요 ?  여기서 국제 상식 퀴즈 하나 내드리겠습니다.  가령 우리나라와 일본이 전쟁에 돌입했다고 치지요.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 유조선 한척이 원유를 가득 싣고 인천항에 입항하려 합니다.  이때 일본 해자대의 구축함이 이 유조선에게 뭘 어쩔 수 있을까요 ?  일본이 프랑스와의 관계를 생각하여 감히 그 유조선을 건드리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 

 

원유는 확실히 군수 물자와 상관있으니 그렇다치고, 더 어려운 문제 하나 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입항이 아니라 출항입니다.  중국 화물선 한 척이 한국산 스마트폰을 잔뜩 싣고 부산항을 출발하여 상해로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스마트폰 대금은 이미 HSBC 은행 싱가폴 지점을 통해 한국 기업에 송금한 상태라서, 그 화물 소유권이 이미 중국 기업에 있다고 해보십시요. 

 

일본이 그 화물선을 막아설 권리가 있는 것일까요 ?  이야기는 더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가령 한국 해군 잠수함이, 오사카 항에 입항하려는 일본 민간 유조선을 격침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  만약 이렇게 민간인 화물선을 격침시키는 것이 옳은 일이라면, 인천 공항에서 이륙하는 대한항공 여객기를 일본 공자대 전투기가 격추하는 것도 옳은 일인가요 ?  저 여객기 안에 미국으로 피난가는 여자와 아이들이 타고 있는지, 일본에 침투하려는 완전무장한 특수부대 1개 중대가 타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나요 ?




(그런 해상 봉쇄 문제에 있어서 가장 좋은 예는 케네디 대통령 시절 쿠바의 미사일 위기 때의 미소 대치 상황이었습니다.)



그냥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때그때 달라요' 입니다.  사실은 '정답은 없다'가 더 정확한 답이 되겠습니다.  놀랍게도, 이런 전시 해상 봉쇄에 대해 규정된 국제법 같은 것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것이, 법이라는 것은 위반할 경우 처벌을 가할 수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인데, 국가를 처벌할 기관이 없으니까 국제법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실 잘못된 것입니다. 

 

국제 협약 정도가 맞는 이야기지요.  이런 해상 봉쇄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의된 국가간의 협약 같은 것조차 없습니다.  그것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전쟁이 발발할 경우 적국을 해상 봉쇄할 정도로 해군력에 대해 자신 있는 나라가 1~2개국 정도 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해상 봉쇄는 모두 불법'이라고 주장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합의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지요.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유럽 해상의 상황이 딱 저랬습니다.  당시 제해권은 영국 해군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각국의 주장은 간단 명료했습니다.  "Free ships make free goods."  즉, 중립국 선박이 실어나르는 물자에 대해서는 전쟁 당사국 어느 쪽도 훼방을 놓아서는 안된다 라는 것이 당시 중립국들의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입장은 당연히 달랐습니다.  영국 해군은 중립국 선박이라 할지라도 영국 해군이 검색을 해서 금수 물품 (contraband)을 싣고 있을 경우 그 선박을 나포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이렇게 나포된 선박은 정당한 나포물 (prize)가 되어 그 나포 주체인 영국 해군 함정 또는 사략선 (privateer)이 매각 처분할 권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파고 들면 들 수록 더더욱 복잡해졌습니다. 

 

가령 엄연한 금수 물자인 흑색화약 100톤을 싣고 가는 스웨덴 선박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만난 곳이 프랑스 해안에서 30 해리 이상 떨어진 공해상이라면, 이 선박을 나포하는 것이 정당한지가 문제가 됩니다.  당시 영해라는 개념은 해안선에서 3해리 (5.6km) 까지를 인정해 주었는데, 이 3해리 영해까지 들어오기 전에는 나포를 할 수 없다면, 사실상 나포할 확률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대부분의 항구는 거대한 해안포가 지키고 있었으므로, 특히 1해리 안에 들어가게 되면 더 이상 추격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영국 해군은 공해상에서라도 중립국 선박을 얼마든지 검색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실력 행사를 했습니다.  당연히 중립국들은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이건 아무런 법적, 도덕적 근거가 없는 해적 행위가 다름없다는 것이었지요. 



(산 레모 매뉴얼입니다.  아마존에서 이것도 판매하네요 ??)



자, 다시 여기서 한일 간의 가상 전쟁 상태로 되돌아가 보지요.  아까 정답이 '그때그때 달라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일본이 부산항에 입항하려는 프랑스 유조선을 나포하거나, 최소한 되돌려보낼 권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일정 조건이 갖추어져야 했습니다. 

 

바로 '봉쇄 선언'이었지요.  이 봉쇄 선언의 조건이라는 것도 무슨 법적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관습법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조건을 그나마 서류상에 적어 놓은 것이 산 레모 매뉴얼 (San Remo Manual)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냥 국제 인권 기구 (International Institute of Humanitarian Law)에서 주관한 몇 차례의 회의 (1988년~1994년)에 국제 법률 및 해군 관계자들이 모여 그동안의 해상 관습법을 정리한 권고안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법적 강제성이 없습니다.  아무튼 이에 따르면, 정당한 해상 봉쇄가 되려면 몇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가령 어떤 항구가 봉쇄 구역인지, 또 어떤 물자가 금수품 (contraband)인지 명확히 선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 조건이 덧붙여집니다.  바로 봉쇄 구역을 실질적으로 봉쇄할 능력이 있어야만 그 봉쇄 선언이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해상 봉쇄 (blockade)라는 것은 육상에서의 포위 (siege)의 연장 개념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제1차 세계 대전 때 해군력이 미약했던 독일이 미국 뉴욕 항구를 '봉쇄 지역'으로 선포하고 중립국들의 입출항을 금지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합법적이라면, 모든 전쟁 당사국이 적국이나 중립국의 모든 항구를 다 봉쇄 지역으로 선포할테니, 합법적인 봉쇄와 비합법적 봉쇄의 구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될테니까요. 

 

그러니, 만약 일본이 한국의 주요 항구를 모조리 봉쇄한다고 선언하려면 그 주요 항구 앞바다마다 최소한 1척 이상씩의 군함을 항상 배치해 놓아야 합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수많은 작은 포구까지 다 봉쇄 지역이 될 수는 없고, 인천항이나 부산항, 울산항 등과 같이 상당한 규모의 항구만을 봉쇄 지역으로 선포할 수 있는 것이 상식입니다. 

 

요즘처럼 수상 함정이 공중 공격에 취약한 상태에서는 그렇게 24시간 적국 앞바다에서 봉쇄 활동을 펼칠 수는 없으므로, 해상 봉쇄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건 1810~1814년 기간 중 프랑스 지중해의 툴롱 항구를 봉쇄 중인 영국 해군의 모습입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실제로 봉쇄 선언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이 선언한 독일에 대한 해상 봉쇄 구역입니다.  의외로 그리 넓지도 않고, 또 발트 해의 좁은 입구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사실 넓을 필요도 없었지요.)



다시 18세기 말, 제1차 대불 동맹전쟁 시절로 되돌아가보지요.  당시도 합법적인 봉쇄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이 국제 해상 관습상의 상식이었습니다.  영국도 중립국 선박들이 프랑스와 해상 무역을 계속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봉쇄 선언을 해야만 했는데, 대범한 영국 정부는 '모든 프랑스 해안선을 봉쇄한다'라는 막무가내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모든 해안선이 봉쇄 상태이므로, 어느 항구이건 프랑스로 가는 모든 중립국 선박들을 얼마든지 검색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지요.  이런 '전 해안 봉쇄'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아무리 영국 해군이 제해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봉쇄였습니다. 

 

영국이라고 군함이 수만 척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따라서 중립국들은 이건 실질적이 아닌 '서류상의 봉쇄' (paper blockade)에 불과한 것이며 이 봉쇄 선언 자체가 비합법적인 것이라며 또 다시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영국이 선언한 '서류상의 봉쇄' 조치는 영국 해군 함장들에게 크게 환영되었습니다.  저 위의 툴롱 항구 경우처럼 정말 실질적인 봉쇄를 펼칠 경우 뭔가 나포물을 건질 확률이 0에 수렴하는 것에 비해, 서류상의 봉쇄는 많은 적국 선박 또는 중립국 선박들로 하여금 '봉쇄를 뚫고 갈 수도 있겠다'라는 희망을 주었으므로 나포물을 건질 확률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저 그림은 1797년, 프랑스 해안가에서 프랑스 전함 Droits de l'Homme (인권) 호를 추격 끝에 좌초시키는 영국 프리깃 함 HMS Amazon과 HMS Indefatigable의 모습입니다.  C.S. Forester의 소설 시리즈 Hornblower의 주인공인 혼블로워는 저때 펠류 함장 밑에서 저 인디퍼티거블 호에 타고 있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영국은 분명히 프랑스에 물건을 수출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요.  따라서 영국제 상품을 싣고 프랑스로 들어가는 중립국 선박을 막아야 하는 것은 영국 해군의 역할이 아니라 프랑스 해군이 해야 하는 것 아니었나요 ?   맞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경제 관념으로는 원료를 수입 가공한 뒤 되팔면 국제 무역 수지가 흑자여서 좋은 것이었으므로, 영국 식민지에서 프랑스로 들여오는 목화솜 같은 원자재에 대한 수입은, 프랑스 측의 승리이자 영국 해군의 패배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따라서, 프랑스로서는 비록 제해권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저 육지 및 연안의 세관원들을 동원하여 영국제 물품에 대한 단속만 수행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 초기에, 모든 영국제 상품들은 금지 품목으로 정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프랑스를 출입하는 모든 중립국 선박들은 프랑스에 영해에 들어오면 프랑스 세관선에게 철저한 검색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때의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왔냐 하면, 그 큰 배 안에서 약간이라도 영국제 상품이 발견되기만 하면 화물 뿐만 아니라 선박 전체를 몰수해버리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당시 영국은 산업 혁명을 시작한 공업 대국이어서, 선박 내에 잡기류나 선원들의 옷가지 중에라도 영국제 물건이 100%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될 정도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초기의 광기와 부정부패로 인해, 이런 조항들이 악용되어 부당하게 선박과 화물을 몰수당한 중립국 선장들이 많았습니다. 

 

가령 어떤 선장은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의 금속제 단추가 영국제라는 이유로 배를 빼앗겼고, 심지어 어떤 배의 선장은 프랑스 세관원에게 매수당한 선원 하나가 '방금 프랑스 세관원들이 오기 전에 선장이 영국제 장화 한켤레를 몰래 바다에 버렸다'라고 거짓 증언하는 바람에 배를 빼앗겼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중립국 선박들은 아무도 프랑스 근해로 올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고, 이런 상황은 프랑스 총재까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가 대외 무역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것은 영국 해군보다는, 오히려 해적떼에 가까운 프랑스 세관원의 역할이 더 컸다고 합니다. 






(미국 독립 전쟁의 시발점이 된 1770년 보스턴 학살 사건을 묘사한 판화 중 한 장면입니다.  북미 식민지 주민들에게 조준 사격을 하고 있는 영국 레드코트들의 등 뒤로 'Custom House' 즉 세관 사무소라고 씌인 간판이 보입니다.  얼마나 세관이 미웠으면 꼭 저기에 저 간판을 그려 넣었을까요 ?)



덕분에 프랑스 국내에서 영국산 공산품은 씨가 말랐느냐고요 ?  이 또한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총칼보다 강력한 것이 돈이라고,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 양국 모두에서 밀수가 대유행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국 및 적국 해군 감시를 뚫고 영국산 면직물이나 프랑스산 비단, 설탕과 커피, 와인과 브랜디를 부지런히 실어날랐습니다.  게다가, 국가가 인정하는 밀수까지도 있었습니다. 

 

이른바 면허장 제도 (License System)이라고 해서, 법령으로는 적국인 프랑스 또는 영국과는 무역하지 말라고 해놓고, 몇몇 대상인들에게는 두둑한 세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적국과의 무역을 허락하는 제도였습니다.  이런 제도는 아무리 적국이라고 해도 쌍방이 서로 상대방으로부터 필요한 물품들이 있기 마련이고, (가령 술고래 영국인들에게서 고급 프랑스 산 브랜디를 정말로 빼앗을 수는 없었지요) 또 어차피 밀수로 왔다갔다 하는 것을 뻔히 아는 처지에 이왕이면 세금이라도 받자는 의도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더욱 많은 양의 상품이 독일 등을 통해서 프랑스와 영국 쌍방으로 부지런히 오갔습니다.  그 결과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기간 중 북부 독일의 한자 동맹 도시들은 때아닌 무역 호황으로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 기간 중에는 아예 대놓고 상품과 선박의 국적만 세탁해주는 선박 거래소가 상업적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을 정도였으니, 한자 동맹 도시들은 서류 몇 장만 떼어 주고 떼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지요.



(뭐 영국 귀족 나으리들께서도 적국인 프랑스를 미워할 뿐, 프랑스 산 브랜디를 미워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에도 썼습니다만, 나폴레옹이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유럽 정복 같은 것이 아니라, 유럽의 국가들이 하나의 연방체가 되어 같은 화폐와 같은 도량형을 쓰면서 평화로운 번영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즉, 현재의 EU 같은 것을 벌써 200년 전에 구상했던 것이지요.  나폴레옹의 정치행정적인 영민함은 실로 대단하여, 그가 만든 제도 중 나폴레옹 법전이나 프랑스 중앙 은행, 리세 (lycee)라는 고등학교 제도 등 지금까지 그대로 살아남은 것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복잡한 역사와 사회 구조로 엉망진창이던 스위스의 정치 제도를 나폴레옹이 (비록 미국의 제도를 많이 본뜨기는 했지만) 산뜻하게 고쳐 놓은 것이 지금까지 거의 그대로 이어질 정도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스위스 편을 읽어보세요.)  아마 아우스테를리츠나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따위가 없다고 하더라도, 정치가 나폴레옹만으로도 나폴레옹이 위인으로 인정될 정도라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런 그의 구상을 적극적으로 막는 것이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영국 입장에서는 분열된 유럽 대륙이 자국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에 유리했으니까요.  지금도 영국은 유럽 대륙의 유로화 체제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있지요.  그런 영국을 꺾기 위해 나폴레옹이 구상했던 원대한 작전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산산조각이 난 뒤, 그는 영국 해군은 물론이고 그 근거지인 영국 본토를 친다는 계획도 영구히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해군이 없으면 정말 영국을 손봐줄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요 ?




(나폴레옹의 신묘함은 전장보다 오히려 책상머리 위에서 더 빛이 났..을까요 ?  이 그림은 더 유명한 그림인 '튈르리 궁 서재에서의 나폴레옹'이라는 그림의 두번째 버전입니다.  더 유명한 첫번째 버전이나 이 버전이나 모두 다비드가 그린 것이지요.  확실히 첫번째 버전의 나폴레옹이 더 젊어 보이네요.)



보셨다시피, 나폴레옹의 등장 이전부터도 영국은 유럽 대륙과의 교역만 막아버리면 스스로 무너질 빚쟁이 나라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프랑스 혁명 초기부터 이미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1794년에 이미 켈라르 (Cailard)라는 프랑스 외교관이 대륙 국가들이 연합하여 '스페인의 타구스 (Tagus) 강부터 독일 엘베 (Elbe) 강까지' 영국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창한 바 있었습니다. 

 

또 나폴레옹이 좋아했던 영국에 대한 경멸적 지칭인 '가게 주인들의 나라' (the isle of shopkeepers)라는 표현도 사실 1796년 국민 공회에서 바레르 (Bertrand Barère)라는 정치가가 썼던 표현이었고, 바로 이 바레르가 국민공회의 공안위원회에서 '외국 선박은 오직 그 자국의 상품만을 프랑스로 실어올 수 있다'는 법령인 항해 조례 (Navigation Act)를 제정하자고 주창하면서 이 조치로 영국을 망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썼던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보신 것처럼, 중립국의 존재들 때문에라도 프랑스 국민의회나 총재 정부 시절에는 영국과의 경제 전쟁이 그다지 신통한 결과를 내놓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폴레옹이 경제 전쟁으로 눈을 돌리면서 이야기는 달라졌습니다.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기존의 경제 전쟁에 새로운 전략을 가미했던 것일까요 ?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로 이제 북부 한자 동맹 도시들까지 모조로 프랑스의 세력권 안에 들어가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스케일의 경제 전쟁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거슨 본격 '영국 왕따 전략' !  오토만 제국도 프랑스의 동맹으로서 사실상 저 봉쇄령에 동참한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 군을 격멸시키고 베를린에 입성한 뒤인 1806년 11월 21일, 이른바 대륙 봉쇄령 (Continental System, Continental Blockade)를 발표합니다.  이 칙령에서 나폴레옹이 정한 것은 크게 4가지였습니다.

1. 영국 본토 (British Isles) 전체가 이제 봉쇄 상태에 들어가므로, 영국 본토와의 모든 거래나 통신은 금지된다.

2. 프랑스가 점거한 유럽 대륙에서 발견되는 모든 영국인과 그 재산은 정당한 나포의 대상이 된다.

3. 모든 영국산 제품, 즉 영국의 공장이나 그 식민지로부터 오는 모든 상품은 정당한 나포의 대상이 되고, 그 매각 대금의 절반은 영국 해군이 해상에서 나포한 선박에 대한 보상금으로 사용된다.

4. 영국 또는 그 식민지 항구로부터 직접 오거나 또는 그런 항구에 잠깐이라도 기항했던 모든 선박은 대륙 내의 모든 항구에 입항을 금지한다.

이 조치들은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었고, 나폴레옹이 주도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영국이 먼저, 1806년 5월 16일, 프랑스 브레스트 (Brest) 항구부터 엘베 (Elbe) 강 사이의 전체 구간에 대해 봉쇄 조치에 들어간다고 선언했었지요.  제4차 동맹전쟁에 프로이센이 뛰어들면서부터 프로이센을 위해 엠스 (Ems, 네덜란드와 독일 사이의 강) 강부터 엘베 (Elbe) 강 사이의 해안은 같은 해 9월부터는 봉쇄에서 해지해 주기는 했지만요. 

 

나폴레옹은 그렇게 실효성이 부족한 '서류상의 봉쇄' (paper blockade)의 부당성을 비난하며 역으로 영국 본토를 봉쇄한다고 '서류상 봉쇄'를 선언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국의 불법 행위에 따른 정당한 보복 조치라는 뜻이지요.  저 4번째 조항도 영국의 강압적 조치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 조항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 전체를 '서류 상으로 봉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모든 중립국 선박들은 행선지가 어디건 간에, 무조건 영국의 항구에 들러 '항구세'를 지불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었거든요.  이 조치는 프랑스는 물론 중립국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는데, 나폴레옹은 그 조치에 대해 정면으로 대응되는 법령을 발동하여, '영국의 명령에 복종한다면 곧 프랑스의 적이다' 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지요.  




(엠스 Ems 강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실제로, 이제 나폴레옹은 엘베 강을 넘어 폴란드의 비스툴라 (Vistula) 강 하구까지 석권한 상태였으므로, 아드리아 해의 달마시아 (Dalmatia, 지금의 크로아티아) 해안부터 시작하여 발트 해의 거의 전부를 봉쇄할 실력을 갖춘 셈이었습니다. 

 

과거 국민공회나 총재정부가 아무런 실력도 없이 공허하게 말로만 '영국놈들을 말려죽이겠다'라고 떠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갖춘 상태에서 이 대륙 봉쇄령을 내린 것이었지요.  과연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은 실효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  영국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이로 인한 결과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  그건 다음 기회에 보시도록 하시지요.

 

 

황금과의 전쟁 - 대륙 봉쇄령 (하편)

 

지난 편에서는 대포로는 어찌해 볼 수 없었던 강적 영국에 대해, 나폴레옹이 경제적인 공격을 위해 1806년 11월 대륙 봉쇄령을 선포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당사자인 영국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  적국이 '나 너하고 교역 안 해 !' 라는 선언을 할 경우, 이쪽에서 취할 방향은 두가지 중 하나입니다.  적이 막는 것을 하는 것, 즉 어떻게든 그 대륙 봉쇄를 뚫고 교역을 하는 것이 한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나도 너하고 교역 안 해 !'를 선언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일단 영국이 대외적으로 취한 방법은 두번째 방법, 즉 맞불작전이었습니다.  영국은 당장 2개월 뒤인 1807년 1월 7일, 추밀원령 (Order in Council)을 통해 프랑스와 독일 해안을 모두 봉쇄한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조치는 1807년 내내 여러번의 추가 추밀원령에 의해 강화 및 확대  되었습니다.  나중에 영국 의회 발언 중 이런 표현이 나왔는데, 이 상황을 아주 잘 묘사한 것이었지요.  "프랑스는 우리의 상업 활동에 대해 문을 닫았고, 우리는 그 문에 빗장을 걸었다." 




('존 불 (영국의 의인화 캐릭터) vs. 나폴레옹' 또는 '봉쇄 대 봉쇄'라는 제목의 풍자화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디스했던 이 양방향 봉쇄에서,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해군력이 없던 나폴레옹이었지요.  존 불의 식탁에는 거대한 스테이크가 놓여 있는데 나폴레옹의 식탁에는 수프 한 그릇만 달랑 놓여 있는 것을 보십시요.) 



어떻게 보면 영국의 조치는 불필요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저쪽이 문을 닫고 열지 않겠다는데, 이쪽에서 억지로 그 문을 열기 위해 때려부수는 것이라면 몰라도, 굳이 이쪽에서도 문을 잠글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요 ?  실은 차이가 있습니다.  영국의 추밀원령이 나오기 전까지, 프랑스 화물선들이 감히 항구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동안 프랑스의 연안 무역을 대행하며 짭짤한 수익을 올리던 중립국들이 많았습니다. 

 

가령 프랑스의 지중해를 통한 무역은 거의 덴마크 상선들이 수행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1807년의 추밀원령에 의해, 프랑스와 교역하는 선박들은 영국 해군의 적법한 나포 대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조치는 여태까지 프랑스와 거래하던 모든 중립국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이 처음으로 구체화되었던 1806년 11월의 베를린 칙령은 그래도 좀 이성적이고 부드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가령, 비록 영국의 공산품을 싣고 어디론가 항해를 하던 중립국 선박이 재수없게도 프랑스 해군 전함과 딱 마주쳤다고 하더라도, 공해상에서는 영국의 상품을 싣고 간다는 것 만으로는 나포 대상이 아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또 그 배가 감히 프랑스 국내 항구나 프랑스가 점령한 이탈리아나 프로이센 등의 항구에 입항을 했다가, 세관 검사에서 그 적재 화물 중 영국제 모슬린 직물 30톤이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영국제 상품만 압류가 될 뿐 그 화물선 전체가 압류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항구에는 상선들이 와글와글 해야 돈과 물자가 돌고 사람들도 활기를 띠게 되는데, 세관 활동이 강화될 수록 그 활기는 떨어질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영국의 추밀원령은 훨씬 난폭하고 위압적이어서, 프랑스 및 그 위성국가에서 출항했거나 반대로 그쪽을 목적지로 삼고 항해 중인 중립국 선박이 공해상에서 영국 해군에게 걸리게 되면, 선박 전체를 나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어디서 출발했는지, 또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어떻게 파악하느냐고요 ?  먼저 중립국 선박을 정선하도록 명령한 뒤, 선적 서류 검사를 통해서 적발했습니다.  

 

물론 이런 서류야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었으므로, 중립국 선박들이 빠져 나갈 구멍은 많았습니다.  가령 당시 프랑스령 생 도밍그에서 생산되는 설탕과 커피는 (비록 이때는 반란 흑인 노예들이 전체 섬을 점거한 상태였습니다만) 프랑스 및 독일에서 매우 인기 있는 상품이었는데, 이들을 실어나른 것은 대부분 중립국인 미국 화물선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먼저 생 도밍그에 가서 럼주와 총기, 식량과 공산품 등을 하역하고, 그 댓가로 받은 설탕과 커피를 싣고 곧장 유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일단 보스톤이나 뉴욕 등의 미국 항구로 입항한 뒤, 설탕과 커피를 실제로 하역했다가, 다시 그것을 선적한 뒤 유럽으로 출항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예 선원들과 선장을 다른 인원으로 교체하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는 모두 영국 해군이 적용하는 추밀원령을 피하기 위한 꼼수였지요. 

 

(19세기 초 미국 보스톤 항구의 모습입니다.)



그러다보니, 영국 추밀원령은 이런 맹점을 보완하고자 훨씬 더 강력한 추밀원령을 추가로 발표했습니다.  즉, 영국 해군이 중립국 선박들은 모두 영국 또는 영국 식민지 항구에 무조건 기항을 하도록 강제한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국 항구에서 받은 기항 증명서가 없을 경우 근처의 영국 항구로 가도록 경고를 하고, 어정쩡한 곳에서 그런 기항 증명서도 없이 항해하고 있는 선박은 프랑스와 교역하는 선박으로 보고 나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영국 항구에 기항하도록 강제했다는 것은, 바꾸어 생각하면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프랑스와 교역을 해도 나포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영국 항구에 기항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셔야 합니다.  일단 영국 항구에 기항을 하게 되면, 영국 세관원들이 승선하여 선적화물을 꼼꼼히 조사한 뒤, 프랑스나 그 식민지, 또는 프랑스의 동맹국산 물품이라고 판단되는 것에는 무거운 관세를 부과했습니다. 

 

그 물건이 영국으로 반입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지요.  가령 커피에는 100파운드에 해당하는 무게 당 28실링, 흑설탕에는 10실링, 백설탕에는 14실링을 부과했습니다.  이는 제품 가격의 20~3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했을까요 ?



(당시 카리브 해의 설탕 생산은 잔혹한 흑인 노예 노동을 필수적으로 동반했으므로, 설탕 무역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인들이 비난을 하곤 했습니다.)




(현대에 참치 어획 때문에 돌고래가 죽는다고 참치 통조림 불매 운동이 일어나는 것과 유사하게, 차에 설탕을 넣는 것은 노예 학대를 허락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설탕을 먹지 말자는 운동이 있기는 했답니다.  이 풍자화에서 영국 왕과 여왕이 공주들에게 '설탕 없이 차를 마시니 아주 맛이 좋구나' 라고 이야기하는데, 공주님들의 표정은 과히 좋지 못하네요.)



짐작하시는 바와 같습니다.  바로 프랑스 및 그 식민지산 상품의 가격을 관세만큼 높여버림으로써, 유럽 시장에서 영국 상품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려는 조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생 도밍그는 영국의 자메이카보다 훨씬 더 경쟁력 있는 설탕 및 커피 생산지였습니다. 

 

자메이카 산 설탕이나 커피는 생산 단가가 생 도밍그보다 너무 높아서, 유럽 시장에서 경쟁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 도밍그 산 설탕과 커피에 강제로 관세를 매기면, 필연적으로 유럽 시장에 도착했을 때의 상품 원가가 20~30%나 올라 버리므로, 이제 자메이카 산 상품이 경쟁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었지요.  그 속셈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것이 그런 관세가 부과되지 않는 상품 목록이었습니다. 

 

그런 면세 대상 품목은 주로 곡물류로서, 영국산 상품과 시장에서 경쟁할 일이 없는 상품들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당시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해안을 봉쇄했던 것은 프랑스의 전쟁 수행 능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전략 물자를 수입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서, 프랑스 산 물품이 해외로 수출되는 것을 막는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즉, 유럽, 미국이나 중남미 등의 식민지 시장에서 영국산 상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반대로 영국산 제품이 프랑스 국내로 반입되는 것은 영국으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일이었습니다.




(영국이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은 식민지인 자메이카는 바로 인근의 생 도밍그, 즉 아이티와 비슷한 기후에 있었는데도 커피 및 사탕수수 농사에 있어서 생 도밍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는 유명한 브랜드이긴 합니다.) 


 

(정부가 'e-Commerce를 이용해 세계와 통상하라'라고 부추긴 것은 기업들에게 수출을 하라는 이야기였지 소비자들에게 해외로부터 수입을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었지요.  최근 정부가 급격히 커진  해외직구에 대해 조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다분히 국내 대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맞긴 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영국이 자국의 제품이 프랑스 측에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해상 봉쇄 같은 으리으리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조치보다 훨씬 더 간단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바로 수출 금지라는 행정 명령이지요.  하지만 정작 영국이 수출 금지 조치를 취했던 품목은 단 2가지였습니다. 

 

바로 목화솜과 기나수 껍질 (cinchona bark)이었지요.  이 기나수 껍질이라는 나무껍질은 당시 흔히 예수회 나무껍질 (Jesuit's bark)로 불렸는데, 이는 남미에서만 나는 특산물이자 획기적인 말라리아 치료제로 쓰이던 의약품이었습니다. 

당시 전쟁에서는 적탄에 맞아 죽는 병사들보다는 열병으로 죽는 병사들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나수 껍질은 군수품 바로 그 자체였으니까 그럴 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목화솜을 금수품으로 지정한 것은 프랑스의 면직물 산업을 고사시키겠다는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품목을 금수품으로 지정한 것은 이렇게 함으로써 '영국과 교역하지 않으면 너희는 망한다'라는 의사를 분명히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나수 껍질입니다.  사람의 목숨을 좌우하는 귀중한 약재였기 때문에 무척이나 비쌌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영국의 추밀원령에 대해 격노하여, 1807년 12월 밀라노 (Milan) 칙령을 발표합니다.  이 조치는 베를린 칙령에서 그래도 합리적이었던 부분을 없앤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즉, 화물 중에서 영국제 상품이 발견되더라도 해당 상품만 압류 조치하던 것을 아예 선박 통째로 압류하도록 하고, 또 공해상에서라도 영국제 상품을 싣고 가던 선박은 나포 대상임을 선언했던 것입니다. 

 

어차피 프랑스 해군은 바다에 나가지도 못하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요 ?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해군이 무서워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정말 전혀 못 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해군보다는, 노르망디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프랑스 사략선(privateer)들이 무척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무장이 변변치 않은 작은 쾌속선에 무장 선원들을 가득 싣고 영국 해협 일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인도 등지에서 값진 화물을 싣고 돌아오는 화물선들을 나포하여, 영국의 통상로에 심각한 위협을 주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그 나포 대상이 훨씬 더 많아진 것입니다.


(동인도 회사 소속 켄트 Kent 호를 공격 중인 프랑스 사략선 콩피앙스 Confiance 호의 모습입니다.  이 사건은 1800년에 있었는데, 저 그림 속에서 작은 배가 콩피앙스입니다.  저 켄트 호는 무려 40문의 대포를 장착한 무장 상선이었고, 특히 화재가 발생한 다른 배의 승객들을 구출해서 태우고 있었기 때문에 무려 300명의 군인을 포함한 437명의 인원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콩피앙스 호는 15문의 대포에 고작 150명의 선원을 태우고 있을 뿐이었지요.  그런데도 1시간 반의 전투 끝에 콩피앙스 호는 켄트 호를 나포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때 나포 이후 1시간의 약탈이 허락되었는데 여성 승객들은 엄격하게 보호될 정도로, 프랑스 민간 사략선들은 해적과는 달리 신사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영국 해군성은 이 콩피앙스 호의 선장 로베르 쉬르쿠 Robert Surcouf 에게 현상금을 걸기도 했습니다.   쉬르쿠는 1809년 현역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무려 40 척을 나포하는 활약을 했는데, 이후에는 다른 사략선을 무장시켜 내보내는 선주로서 또 많은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영국 해군성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는 등 명예롭게 살다가 1827년 노르망디에서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양측의 이런 비이성적인 해양통상 정책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중립국 선박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영국 측의 요구에 응하자니 프랑스 측에게 나포될 판이고, 그렇다고 프랑스 측의 명령에 따르자니 영국 해군에게 나포될 판이라서 어느 장단에 놀아야 할지 난감해졌습니다. 

 

중립국 선박들은 영국 해군에 보여줄 선적 서류와 프랑스 세관에게 보여줄 서류를 각각 따로 준비함으로써 이런 상황을 회피했으나, 영국이 추밀원령을 내세워 무조건 영국 항구에 기항하여 관세를 낼 것을 강요하자 그것도 어려워졌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프랑스 중심적인 보호주의 정책을 펴기 시작하면서 중립국들에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이렇게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피해를 보던 중립국들 중 가장 큰 피해를 보던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영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상선단을 보유한 삼각 무역 대국이었는데, 영국 해군이 공해상에서라도 프랑스 및 그 동맹국과 교역하는 선박들을 나포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큰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예로, 미국 매릴랜드 주의 한 거상은 무려 15척의 상선단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1807년 9월 이후 출항한 선박 중 겨우 3척만 무사히 귀환했을 뿐, 2척은 프랑스 및 스페인 측에 나포되었고, 1척은 함부르크에 기항했다가 프랑스에게 억류되었으며, 9척은 영국 측에 나포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미국-영국 간의 1812년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만, 그건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저 위에서, 영국이 프랑스를 해양 봉쇄했던 이유가 프랑스를 말려죽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프랑스 산 제품과의 경쟁을 없애기 위함이라고 했었지요.  이렇게 적국에게 자국의 제품을 팔아 돈을 벌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프랑스 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직접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중단한다' 라고 선언했지만, 그건 주로 영국에게서 수입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을 뿐, 수출은 계속 하고 싶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나폴레옹도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싶어서였을까요 ?  물론 그것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가 영국 시장에 프랑스 제품을 팔려고 노력했던 주된 이유는 바로 영란은행에 저장된 금과 은, 즉 정금(specie) 때문이었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역사를 보면 인간의 목숨보다는 돈이 훨씬 더 소중하다고 모두들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의 미국이야 달러 화가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기축 통화이므로, 글자 그대로 돈이 나무에서 열린다고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즉, 미국이 돈이 필요하면 조폐창에서 달러를 찍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물론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미국 FRB가 그런 것을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그에 비해서, 당시 영국 파운드 화는 그런 기축 통화의 지위를 가지지 못했고, 당시 전세계는 금 또는 은만을 진정한 화폐로 인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영국이 부자라는 것은 금광과 은광이 풍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식민지 무역을 통해 들여오는 목화솜, 커피, 설탕, 염료, 향신료, 비단 등의 산물을 비싼 값에 유럽에 팔아 금과 은을 긁어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영국이 부자라고 해도,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맞서 돈 먹는 하마인 그 엄청난 해군 전력을 유지하고 그것도 모자라 대불 동맹국들에게 막대한 군자금을 대주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당시 영국의 부채 총액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영국은 영란은행의 존재로 인해 이런 국채 발행과 매각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있긴 했습니다만, 분명 전쟁은 영국 경제에 큰 부담을 주고 있었습니다.   '무분별한 국채 발행은 결국 그 국가를 파멸시킨다'라고 경고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처음 출간된 1775년, 영국의 국채는 1억2천4백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만, 그 책의 3번째 에디션이 인쇄될 때는 1783년 종료된 미국 독립전쟁 비용 때문에 거의 두배로 폭증한 상태였습니다. 

 

영국이 제1차 대불동맹전쟁에 뛰어들던 1793년, 그렇게 영국 국채 누적액은 2억3천만 파운드였는데, 1802년 아매앵 조약으로 제2차 대불동맹전쟁을 끝낼 무렵에는 그 총액이 무려 5억7백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이 금액이 어느 정도의 액수인지 느껴보시려면, 무려 100년도 지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 영국의 국채 총액이 5억8천7백만 파운드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당시 영국의 재정 상태는 파탄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1797년 2월에는 금태환 정지 (suspension of convertibility), 즉 파운드 지폐를 은행에 들고 가도 그 액수에 해당하는 금으로 바꿔주지 않는 비상 조치를 취합니다.  이 조치는 향후 22년 간이나 지속되는데, 이는 파운드 화 지폐의 가치를 폭락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렇쟎아도 어려운 영국 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즉각 깨닫지는 못했지만, 역설적으로 파운드 화 폭락으로 인해 영국산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올라가고 해외로부터의 자금 유입이 활발해져서 결과적으로 영국의 경상수지가 급격히 좋아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17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영국 GDP 대비 국채 비율입니다.  보시다시피 나폴레옹 전쟁 때가 역사상 최고 비율을 차지했었습니다.  그 다음은 제2차 세계대전 때였군요.)



아무튼 나폴레옹이 노리던 것은 바로 이것, 영국의 금과 은을 말려버림으로써 영국 경제를 파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으로부터 금화와 은화를 더 반출해낼 수 있다면, 영란은행에 예치된 금화와 은화에 근거한 파운드 화의 가치는 폭락할 것이고 그렇게 영란은행이 무너지면 영국 재정과 함께 영국 해군도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애초에 대륙 봉쇄령을 내린 것도, 영국으로 반입되는 금은의 꾸준한 흐름을 차단하여 영국을 경제적으로 몰락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유럽 대륙으로부터의 원재료나 공산품 공급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을 말려죽이겠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었지요.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유럽 대륙의 원재료든 공업제품이든 영국에 적극적으로 수출하여 영국으로부터 금은을 탈탈 털어내야 했습니다. 

 

그런 나폴레옹의 의도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이 그가 1810년 5월 그의 재무장관 고댕 (Gaudin)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에서, 그는 "내 의도는 프랑스로부터의 식량 수출과 외국 금화의 수입을 장려하는 것이다" 라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또 1808년 5월, 그의 동생이자 네덜란드의 왕이던 루이 (Louis)에게 보낸 편지는 더 노골적이었습니다.  그는 이 편지에서 네덜란드의 진 (gin)을 영국에 밀수를 통해 수출하는 방법에 대해 지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형님다운 어조로 강조했습니다.  "거래 대금은 반드시 다른 상품이 아닌 금화나 은화로 받아야 한다.  절대 다른 상품으로 받으면 안된다.  알겠느냐 ?"


(지금은 진 하면 영국산을 떠올리지만, 원래 진은 네덜란드가 원산지입니다.)



(나폴레옹에 의해 네덜란드 왕이 되었다가 이젠 진 술장수 노릇까지 하게 된 루이 보나파르트입니다.  그는 누구 덕분에 네덜란드 왕이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정말 진심으로 네덜란드 인들을 위한 네덜란드 왕 노릇을 열심히 했습니다.  덕분에 네덜란드 인들로부터는 크게 칭송을 받았으나 나폴레옹에게 찍혀 폐위되고 말았지요.  이 양반의 아들이 바로 나폴레옹 3세입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은 영국을 몰락시키기 위한 경제적 투쟁이 주된 것이었습니다만, 사실 나폴레옹은 거기에 다른 불순한 의도도 슬쩍 끼워 넣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유럽 전체가 하나의 체제 안에서 평화롭게 다 같이 번영하는 세상을 꿈꾼다고 했으나,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프랑스의 이익만을 지키는 보호장벽으로서 대륙 봉쇄령을 이용했습니다. 

 

확실히 유럽 대륙 시장에서 영국 상품이 크게 줄어듬으로써, 프랑스 국내 상공업은 다소 활기를 띠게 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보호무역주의적인 속셈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1807년 12월 밀라노 칙령 발표 직후 나폴레옹이 당시 해군상이던 드크레 (Decree)에게 지시한 조치들입니다. 

 

그는 프랑스 항구에 입항한 러시아, 네덜란드 등 동맹국의 상선들을 억류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정말 가관인데, '영국 해군이 장악한 바다를 무사히 건너온 선박들은 동맹국 선박으로 서류를 세탁했을 뿐 사실상 영국 선박이거나, 그게 아니라 정말 동맹국 선박이라면 어차피 바다에 나가자마자 곧 영국 해군에게 나포될 것이 뻔하니 프랑스가 억류해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부당한 억류의 근거라는 것이 어처구니 없는 것이긴 해도, 또 따지고 보면 말이 전혀 안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지요.  정말 당시의 바다는 영국 해군의 것이었으니까요.  이 조치는 프랑스 국적 이외의 상선은 아예 프랑스에 출입하지 말라는 극단적인 보호무역주의 정책이었습니다. 


(목화밭에 열린 목화의 모습입니다.  당시 목화는 주로 인도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재배되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영국 해군의 손이 닿지 않는 유럽 대륙 내부에서의 산업과 통상에서조차, 이런 노골적인 보호무역주의를 드러냈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나폴레옹은 자신이 국왕으로 있는 이탈리아 왕국 (롬바르디아 등 북부 이탈리아)에 모든 면직물의 수입을 금지시켰습니다.  이유는 면직물은 사실상 모두 영국산이거나, 또는 영국으로부터 수입된 목화를 가공한 제품이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우습게도, 프랑스 산 면직물은 제외라는 단서 조항을 슬그머니 끼워넣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목화솜이 단 한줌도 나지 않았으므로, 결국 그것도 영국 식민지 또는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것이 뻔했는데도 그런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조항을 넣은 것이지요.  사실 나폴레옹은 비록 자신이 국왕으로 있었는데도 이탈리아 왕국의 번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면직물 외에도 프랑스 산 상품들은 거의 무관세로 이탈리아 왕국으로 수입되도록 했고, 반대로 이탈리아 왕국에서 생산된 상품은 상당한 관세를 내야만 프랑스로 수출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정책은, 전통적으로 스위스 및 남부 독일 지방과 깊은 관계를 가지던 북부 이탈리아를 강제로 프랑스 경제권에 철저히 예속시키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리옹에서의 실크 직조장의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가내 수공업 수준이었지요.)


 


(산업 혁명에 들어서 증기기관을 이용한 직조기를 돌리던 영국 섬유 산업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예 더 나아가 십자군 전쟁 이후 이탈리아에 발달했던 비단 산업을 완전히 몰락시키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해외 시장에서 프랑스 산 비단과 경쟁하던 이탈리아의 비단 수출을 완전히 금지시킨 것입니다.  수출이 허락된 것은 프랑스의 견직물 (비단) 생산의 본산인 리옹 (Lyons)으로의 비단 원사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마치 생색이라도 내듯이 원래 프랑스에 수출할 때 다른 종류의 상품들에게 부과되던 무거운 관세를 면제시켜 주었습니다.  비단 원사는 리옹에서 가공하여 다시 수출할 수 있는 원재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왕국은 정식 국왕인 나폴레옹을 대신하여 그의 의붓아들 외젠 보아르네 (Eugene Beauharnais)가 부왕 (viceroy) 자격으로 다스리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친히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La France avant tout" (프랑스가 모든 것에서 우선)이라고 강조하며 이탈리아의 경제를 훼손하여 프랑스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망설이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또 중부 독일의 작지만 부유한 공업 강국 베르크 (Berg) 공작령은 전통적으로 이탈리아에 공산품을 수출하여 부를 쌓았는데, 나폴레옹의 이런 조치로 인해 당장 이탈리아 시장을 잃고 몰락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마침 이 공작령의 주인이 나폴레옹의 매제인 뮈라 (Joachim Murat)였으므로 자신의 영지가 망하는 것을 자신의 재산이 줄어드는 것으로 받아들인 뮈라의 부탁으로 베르크 만큼은 이탈리아에 수출을 할 때 관세가 면제되는 특혜를 누리다가, 곧 제 정신을 차린 나폴레옹에 의해 그 특혜가 철폐되면서 프랑스 산 무관세 제품에게 가격 경쟁력을 잃고 결국 몰락하는 처지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베르크 공작령의 수도는 지금의 뒤셀도르프입니다.  이 그림은 17세기 후반 뒤셀도르프의 St. Andreas 대성당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전쟁 외에도 정치와 경제,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항상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여러번 이야기된 바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의 승리가 곧 프랑스의 경제적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항상 신경을 썼습니다.  단순히 패전국에게 전쟁 보상금을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령 나폴레옹은 1809년 9월, 바그람 (Wagram)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오스트리아 쇤브룬 (Schonbrunn) 궁전에서 당시 프랑스 내무부 장관이던 푸셰 (Fouche)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며 투덜거렸습니다.  "해당 부서에서 일을 제대로 했다면 짐이 비엔나로 밀고 들어온 전과를 활용하여 프랑스의 상인들과 제조업자들이 더 많은 직물과 도자기 등의 상품을 오스트리아에 판매하도록 독려했을 걸세.  이전에 그런 상품들은 오스트리아에게 엄청난 관세를, 가령 직물만 하더라도 무려 60%의 관세를 내고 있었네.  당연히 나의 승리를 이용하여 거의 무관세로 비엔나의 창고들이 터질 정도로 프랑스 상품을 판매해야 하네.  그런데 관련 부서에서는 생각도 없고 행동도 없군."


(바그람 전투에서의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의 경제 부문에 대한 이런 열정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나폴레옹의 대등한 라이벌이 되고자 노력했던 베르나도트와 연관된 일화입니다.  그는 나중에 스웨덴의 왕세자가 된 이후, 스웨덴 궁정에서 통치에 대한 실무 학습을 시작하는데, 그때의 일화를 그와 함께 일했던 스웨덴 귀족인 트롤-바흐트마이스터 (Trolle-Wachtmeister)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베르나도트는 다른 것은 몰라도 경제 부분에 대해서만은 자신을 가르칠 사람이 없다며 대단한 자신감과 긍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장군 출신임에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스웨덴에 나보다 더 휼륭한 군인이 300명이 있다고 해도 뭐라고 반박하지 않겠네.  하지만 난 경제 부문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 특별한 수업을 거쳤으므로, 그 부문에 대해서만은 내가 스웨덴 내에서 최고 전문가라고 자신하네."  베르나도트가 항상 나폴레옹을 질투하고 그의 모든 것을 따라했던 것을 생각하면, 나폴레옹이 경제 쪽에 대해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스웨덴 내 최고 경제 전문가인 '경제왕' 베르나도트, 아니 칼 14세의 동상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제 황제'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 정책은 결국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  다들 아시다시피, 별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이 착각하는 것이 있었는데, 영국이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이 이해하는 것처럼 그냥 식민지의 상품을 유럽에 판매하는 단순 삼각 무역을 통한 것만이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랬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나폴레옹의 낡은 경제학이 이해하는 바는 거기까지였겟지요.  나폴레옹이 브리소 (Brissot) 등 프랑스 지식인들의 저술을 읽고 형성한 견해에 따르면, 영국이 자랑하는 부라는 것은 결국 아무 실체가 없는 서류상의 신용 창출 구조, 즉 영란은행의 국채 제도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충격을 줘서 금은 등 귀금속 공급을 끊기만 하면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광대하고 기름진 농토를 가진 농업과 역사 깊은 명품 장인 제도에 근거한 탄탄한 상공업에 기반을 둔 프랑스와는 전혀 달리, 영국의 경제 구조는 허약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되던 무렵, 이미 영국은 산업 혁명에 본격 진입한 상태였습니다.  즉 영국 산업은 막대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이는 유럽 대륙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외제가 값싸고 질이 좋은데 그걸 무시하고 더 비싸고 품질이 떨어지는 국산품을 쓰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결국 통하지 않는 정책이었습니다.  가령 카리브 해의 사탕수수 공급이 끊기면서 나폴레옹은 원래 프로이센에서 시작된 사탕무 (sugar beet)의 생산과 정제를 장려하여 유럽 대륙 내에서의 설탕 생산에 힘을 쓰기도 했지만, 그런 경쟁력 없는 산업은 결과적으로 도태될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도태되었지요.

 

(사탕무에서 설탕을 뽑아보자는 시도는 예나-아우어슈테트 패전의 주범인 프로이센 빌헬름 3세의 지시로 본격화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 뒤를 이어 대량 생산을 시작했고, 이에 힘입어 1813년에는 아예 카리브 산의 설탕 수입을 금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간과, 혹은 일부러 무시했던 것들도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을 갉아 먹었습니다.  바로 영국과 거래를 해야만 하는 다른 나라들의 형편이었지요.  가령 러시아 같은 경우, 귀족들의 주된 돈벌이는 '자신의 장원에서 생산된 곡물을 영국에 수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807년 틸지트 (Tilsit) 조약 이후 러시아도 대륙 봉쇄령에 강제로 참여하게 되면서 러시아 귀족들이 당장 빈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쌍두 독수리의 영광이 프랑스의 젊은 독수리에게 짓밟히는 것은 뭐 아무래도 좋았으나, 당장 자기 주머니가 가벼워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또 위에서 언급했 듯이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은 '영국에서 금은을 빼내오자'라는 목적 외에도 '동맹국들의 손해는 곧 프랑스의 이익'이라는 이기적인 프랑스의 경제적 욕심이 듬뿍 가미된 것이었기 때문에, 동맹국들의 성심어린 참여는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과적으로 유럽 각국은 프랑스의 감시망을 피해 영국과 활발한 밀무역에 탐닉했지요. 


(대륙 봉쇄령 당시 영국산 제품이 대륙 내로 밀반입되던 루트를 표시한 지도입니다.)


심지어 프랑스 군의 군수품 중 일부도 영국산으로 채워질 정도였습니다.  가령 1812년 영국 의회에서 "프랑스 육군 병사들의 군복은 요크셔(Yorkshire) 산이며, 술트(Soult) 원수를 포함하여 그의 군단 병사들의 군복 장식품은 버밍엄(Birmingham) 산이다" 라는 발언이 나왔을 때 영국 의원들은 무척이나 득의양양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영국산 공산품은 물론 프랑스 정부가 영국 공장에 주문을 해서 도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국이 중립국에 수출한 상품이 몇 번의 생산지 세탁을 거쳐 결국 프랑스 국내로 반입된 것이지요.  프랑스 육군의 구매부에서는 이런 상품이 사실상 영국제라는 것을 과연 몰랐을까요 ?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러나 구매부에서야 구매해야 할 물품은 있는데 예산은 제한되어 있으니, 그 중 가장 질 좋고도 저렴한 제품을 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주력 산업이었던 섬유산업에 있어 가장 앞선 경쟁력을 갖춘 것은 바로 영국이었으니, 그런 기준으로 선택되는 물품은 다 영국산일 수 밖에 없던 것입니다.


(잔뜩 폼을 재며 포즈를 취한 술트 원수입니다.  저 군복이며 장식품이 영국산이었다는군요 ?)



사정이 그러했기 때문에, 비록 영국의 국채는 나폴레옹의 기대처럼 계속 불어나 1815년 워털루 전투 즈음에는 영국 전체 GDP의 2배에 달하기도 했습니다만, 영국 국채에 대한 신용은 끝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영국에게는 프랑스처럼 광대한 기름진 농토와 명품 장인 제도는 없었을지라도, 산업 혁명 덕택에 웅장한 공업 능력을 보유하게 된 것이 영국 경제의 근간이 되어 준 덕분이었지요. 

 

이렇게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난 괴물이었던 영국 산업계에게 전쟁을 선포한 나폴레옹은 확실히 이길 수 없는 적수에게 덤벼든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댓가는 1812년 러시아의 진흙구덩이 속에서 처절하게 치르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먼 훗날로 미루시고, 다음 편에서는 나폴레옹이 폴란드로 진했을 때 어떤 모험을 겪게 되는지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 지난 번에도 밝혔지만, 이번 편 내용의 상당 부분은 Eli Heckscher의 "대륙 봉쇄령의 경제적 해석"이라는 책의

 

 

 

굴욕 그러나 꺼지지 않는 열망 - 폴란드의 짧은 역사

 

 

지난 편에서, 이제 프로이센을 그야말로 '쳐부순' 나폴레옹이 베를린 칙령을 발표하며 영국에 대한 경제 전쟁에 돌입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물리적인 전쟁이 끝났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잔여 프로이센 군은 레스토크 (Anton Wilhelm von L'Estocq) 장군의 지휘 하에 프로이센 왕과 왕비를 보호하여 동부 프로이센으로 피난 중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서쪽으로 지원오고 있던 러시아 군과 합류하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이들과 또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싸워야 했을까요 ? 



(레스토크 장군은 하노버 출신입니다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프랑스 위그노 망명객의 후예입니다.)


나폴레옹은 일단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러시아 군과 끝내지 못한 볼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러시아 군은 나폴레옹의 손에 쓰라린 패배를 맛보긴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나폴레옹에게 항복을 하거나 화친을 구걸하거나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때 짜르 알렉상드르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중재 하에 더 이상의 적대 행위 없이 러시아로의 퇴각을 허락받았지요.  그 이후로 나폴레옹과 알렉상드르는 한번도 평화 조약을 맺거나 한 적이 없었습니다.  즉, 그들은 아직 휴전 상태일 뿐이었지요.  이번 제4차 동맹전쟁도 사실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주축이 된 전쟁이었습니다.  당연히 나폴레옹은 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실은 나폴레옹은 러시아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러시아가 저 니에만 (Nieman) 강 서쪽으로 자꾸 기어나오지 않는 이상 싸울 이유가 별로 없었지요.  나폴레옹은 황량하고도 광활한 러시아에서 탐나는 것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베를린 칙령의 발표와 함께,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볼 일이 생겼습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영국과의 교역로가 되고 있던 러시아의 항구들을 봉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은 싸움보다는 친구가 되자는 볼 일이었습니다.  아주 대등한 입장의 친구보다는, 말 잘 듣는 착한 친구가 필요했지요.  물론 러시아처럼 동부 유럽의 일진 노릇을 하며 자신이 아주 힘이 세다고 생각하고 있던 왈패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 먼저 나폴레옹은 그의 주먹 맛이 얼마나 호된지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보통 인터넷 소설 속에 나오는 일진들의 우정 형성 과정과 아주 똑같았습니다.  자, 일진이 있다면 당연히 그 동네에서 그 일진의 빵셔틀 노릇을 강요당하며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대표적인 친구가 바로 폴란드였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불리바가 폴란드 군을 결국 격파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고골리의 원작 소설 속에서는 폴란드 군에게 붙잡힌 불리바가 화형을 당하며 죽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포로가 된 그의 작은 아들도 바르샤바에서 팔다리를 하나씩 꺾으며 죽이는 끔찍한 처형을 당하지요.)


제가 어렸을 때 인상적으로 보았던 영화 중에 대장 불리바 (Taras Bulba)라는 1962년 작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줄거리는 대충 러시아 카자흐 (코작) 부족들과 폴란드의 전쟁 속에서, 카자흐 족장 불리바의 족장 아들인 안드레이와 폴란드 공녀와 비극적인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그 영화 속에서 폴란드는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강대국으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카자흐는 (사실 알고보면 불리바가 속한 카자흐는 원래 러시아가 아닌 우크라이나 카자흐지만) 야성미 넘치고 용감하지만 빈약한 부족으로 나옵니다. 

 

저는 어릴 때 그 영화를 보면서, 속으로 '야, 한때는 저런 강대국이었던 폴란드가 어쩌다 저렇게 찌그러져서 소련 밑에 깔려 있을까' 하고 궁금해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때 비록 어렸지만, 폴란드가 그 영화 속에서 나온 것처럼 대장 불리바의 매복에 빠져서 망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거든요.


(1772년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도입니다.  프로이센의 작은 영토와 비교가 됩니다.)


확실한 것은, 그 영화 속에서 묘사되었던 것처럼, 원래 폴란드는 동부 유럽에서 매우 강력한 국가였다는 것입니다.  '대장 불리바'의 배경이 된 크멜니츠키 봉기 (Khmelnytsky Uprising)가 일어났던 17세기 중반은 폴란드가 그 강성함의 절정에서 내려오기 시작할 때였는데, 이 반란은 폴란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우크라이나 카자흐들의 무장 봉기였습니다. 

 

실제로 이 봉기를 계기로 우크라이나가 폴란드에서 러시아의 손으로 넘어갔지요.  하지만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이는 최소한 한때 우크라이나를 지배할 정도로 폴란드가 강성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폴란드는 14세기에 리투아니아 대공국 (Grand Duchy of Lithuania)의 수장인 야기엘로 대공 (Wladyslaw II Jagiello)이 폴란드 왕국의 야드비가 (Jadwiga) 여왕과 결혼하면서 사실상 하나의 연방체가 되는데, 이때부터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16세기 중반 루블린 연맹 (Union of Lublin)을 맺고 정식으로 하나의 연방체가 된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은 17세기 초반 절정에 달했을 때는 무려 1천만 명이 넘는 인구와 현재의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및 러시아 일부까지 포함하는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는 대국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문물의 발달이 늦었던 동구권에서, 그래도 서방과 가장 가까이 있던 폴란드가 가장 강성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 양반이 리투아니아 대공 야기엘로 (Wladyslaw II Jagiello)이자 결혼으로 폴란드 왕까지 겸하게 된 블라디슬라브 2세입니다.)


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나름 독특한 정치 연합체였습니다.  일단 저 루블린 연맹은 당시 마지막 야기엘로 왕조의 폴란드 왕이 자식 없이 사망한 것을 계기로 만들어졌던 것이기 때문에, 이후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의 직위에 오를 사람을 귀족들 중에서 투표로 선출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폴란드 귀족 사회에서는 "왕은 군림할 뿐, 통치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이 있었지요.  결국 권력이 취약할 수 밖에 없었던 선출직 국왕보다, 실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의회였습니다.  그런데, 초반에는 민주주의적으로 잘 굴러가던 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정치 체계가 다소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블라디슬라브 4세 (Wladyslaw IV) 재위 기간 중, 만장일치제도가 들어선 것입니다.  즉, 의회에서 이미 통과된 법안이라고 해도, 의회 기간 중 어느 의원이라도 "Nie pozwalam!" (난 반댈세!) 라고 외치기만 하면 그 법안이 무효가 되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소수의 의견이라도 존중해야 한다는 아름다운 인본주의 원칙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위한답시고 자기 가문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해가 가는 법안이 만들어져서는 안된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제도였습니다.  그 결과, 이후 약 2세기 동안 총 150회 열린 의회 기간 중 53회에서는 아무런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는 극도의 수구 성향으로 치닫게 됩니다.


(1562년의 루블린 동맹이 선포되던 현장의 모습입니다.)


위에서 언급되었던 대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리즈 시절은 17세기 초반이었는데, 그 절정기는 바로 이 블라디슬라프 4세가 역시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으면서 끝이 나버립니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의회에 만장일치제도가 도입된 시기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몰락하기 시작한 때와 일치합니다.  일단, 좀 너무한 것 아닌가 싶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의회의 만장일치제도는 엉뚱한 방향으로 폴란드의 안보를 해치게 되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그 주변에 러시아와 프로이센, 그리고 오스트리아 등 쟁쟁한 강국들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런 외국 세력이 그 많은 의원들 중 한명만 제대로 매수하면, 어떠한 법안도 통과가 안되도록 마음대로 조종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원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리투아니아 지역은 떠오르는 강국 러시아로부터의 침략으로부터 위태위태한 상황이었고, 폴란드와의 연합을 통해서 간신히 그 위협을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 들어서 선거로 뽑히는 왕위에 외국 세력에게 조종되는 귀족 가문들이라는 오묘한 조합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점점 하나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됩니다.  일단 외부 강대국, 특히 러시아가 지원하는 세력이 왕으로 선출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거의 러시아의 위성국 비슷한 신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1622년 당시 폴란드 의회 세임 Sejm의 모습입니다.)



폴란드의 마지막 왕인 스타니슬라브 2세 (Stanislaw II August, Stanislaw August Poniatowski)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젊은 시절 러시아 주재 영국 대사의 수행원으로서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생페체르부르그 (Saint Petersburg)에 갔던 그는 당시 26살이자 3살 연상이었던 젊은 러시아의 황후 예카테리나 (Yekaterina Alexeevna)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스타니슬라브는 엄청난 유부녀와 바람이 난 셈이었는데, 이 여자가 나중에 남편을 몰아내고 러시아의 여성 짜르가 된 예카테리나 대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남녀 관계에서 자유분방한 여걸로서, 당시 스타니슬라브 외에도 깊은 관계인 다른 남자들이 꽤 있었는데, 쿠데타로 집권한 지 2년만인 1764년, 스타니슬라브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으로 선출되도록 해줍니다. 

 

물론 이건 러시아가 폴란드 왕을 '임명'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폴란드 내의 여러 유력 인사들에게 친필 편지를 보내고, 스타니슬라브의 선거 자금으로 2백5십만 루블을 대기도 하고, 선거를 둘러싼 폴란드-리투아니아 내부의 무력 분쟁을 이유로, 의회 투표장 수 km 인근까지 러시아 군을 전방 배치하는 등 갖은 노력 끝에 친러시아 파로 알려진 스타니슬라브를 왕으로 선출하도록 하는데 도움을 준 것이었습니다. 


(이 분이 폴란드의 마지막 국왕 스타니슬라브 2세입니다.  이분의 개혁 노력과 무능력함은 폴란드 역사에서 뒤섞인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여제의 치마폭에 싸여 왕이 되었으니 당연히 러시아에게 아양을 떨며 폴란드 인들을 수탈하며 지낼 것 같다고요 ?  천만에 말씀이었습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스타니슬라브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더 강력하고 부강한 왕국으로 만들기 위해 개혁에 돌입했습니다.  그 개혁의 요체는 한마디로 상류 귀족들의 권력과 특권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사이에서 균형잡힌 외교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폴란드가 하는 모든 일의 발목을 잡는 암적인 존재 의회 만장일치제도를 폐지하려 했습니다.  이런 개혁은 본질적으로는 옳은 것이었습니다만, 이는 (당연하게도) 내외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현재처럼 분열되고 무기력한 존재로 남아있기를 원하던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는 전쟁 불사를 외치며 개혁을 반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타니슬라브의 개혁으로 특권과 권력을 잃게된 폴란드 귀족들은 더더욱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게다가 스타니슬라브는 카톨릭 국가인 폴란드에서 비카톨릭신자들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법안도 통과시키려 했기 때문에 더더욱 상황이 더 나빠졌습니다.


(전통적인 복장의 폴란드 귀족 Szlachta 입니다.)

왕권이 약한 나라에서 국왕이 기세등등한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하려들면 반드시 댓가가 따릅니다.  이들은 1768년 바르 (Bar)라는 곳의 요새에서 동맹 선언을 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독립성을 대외적으로,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스타니슬라브 2세로부터 지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사실 스타니슬라브는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러시아 군의 총구 앞에서 이루어진 투표로 왕이 된 사람이었으므로 그런 비방을 받아도 뭐 할 말이 별로 없긴 했습니다.   이들은 국왕군과 러시아 군에 맞서 전쟁을 선포했고, 곧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오합지졸인 귀족 동맹군이 막강한 러시아 군에게 상대가 될 리가 없었지요. 

 

결국 이들은 약 4년 간의 투쟁 끝에 분쇄되어 일부는 도주하고 일부는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참극을 맞게 됩니다.  이 와중에 대내외적으로 기반을 잃게 된 국왕 스타니슬라브 2세는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의 요구에 따라 영토를 할양해주게 됩니다.  이것이 1772년의 제1차 폴란드 분할입니다.


 


(전투 전에 기도를 올리는 바르 동맹군의 모습입니다.  결국 이들의 반란이 폴란드 제1차 분할을 가져오게 됩니다.)


사실 이 영토 할양 자체의 기획자는 러시아가 아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었습니다.  18세기 후반, 새로 떠오르던 강국인 러시아가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큰 승리를 거두자, 러시아가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발칸 반도를 빼앗게 되면, 그 지역을 역시 노리던 오스트리아는 동부 유럽의 힘의 균형이 깨어질까 노심초사 하여, 내친 김에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할 기세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두 국가와 모두 친교 관계를 가지고 있던 프랑스가 중재안이랍시고 오스트리아에게 '대신 최근에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실레지아 일부를 되돌려 받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 라고 제안을 하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화들짝 놀라게 된 것입니다. 

 

그는 실레지아 대신,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이 3개국이 나눠 먹자고 제안을 합니다.  물론 원래 보상받아야 할 대상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몫이 가장 크도록 했지요.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이미 러시아의 위성 국가였으니, 따지고 보면 자기 땅을 남에게 갈라주는 양상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타니슬라브 2세가 노골적으로 탈 러시아적인 성향을 보였고, 또 바르 동맹 반란으로 폴란드 국내 상황도 너무 혼란스러웠으므로, 이런 말썽 많은 위성국가 따위는 필요없다 라고 러시아로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러시아가 오스만의 땅을 빼앗으려고 시작한 전쟁에서 땅을 잃은 것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된 셈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1773년 폴란드 제1차 분할을 승인하는 폴란드 의회에서 분할에 반대하며 드러눕는 극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애국 귀족 레이탄 (Tadeusz Rejtan)의 모습을 그린 유명한 그림으로서, 얀 마테이코 (Jan Matejko)의 작품입니다.  결국 이런 쇼우에도 불구하고 사실 분할 승인 외에 따로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레이탄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당시 유럽 사회는 '같은 기독교 국가 간에는 정의가 앞서야 한다'라는 허울 좋은 가식을 뒤집어 쓰고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영토 할양에 대해 국제 사회의 도움을 요청한 스타니슬라브 2세의 호소에 반응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폴란드 분할의 당사자 3국이 분할의 명분으로 '무정부 상태로 빠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무능력'을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핑계거리일 뿐이고, 비정한 국제 사회에서, 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안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지요.

 


(제1차 폴란드 분할을 논의 중인 열강들의 모습입니다.  맨 왼쪽이 당연히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스타니슬라브 2세는 나름 폴란드를 개혁을 통해 다시 일으켜 보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폴란드 귀족들과 러시아의 반대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791년 소위 5월 헌법, 즉 영국식 입헌 군주제를 표방한 헌법을 개혁파와 함께 발표하며 개혁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만천하에 알렸습니다. 

 

이 헌법은 바로 2년 전인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나온 헌법에 거의 가까운 것으로서, 프로이센과 러시아 등 절대 왕정을 추구하던 주변 강국들의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이것들이 누구 코 앞에서 프랑스 대혁명 흉내를 내려는 것이냐 !!' 라는 것이었지요. 

 

특히, 폴란드의 이런 개혁적이고 도전적인 성향은 향후 폴란드가 다시 부흥하게 되면 1772년에 분할된 옛 영토를 반환해달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을 주변국들이 하게 했지요.  특히 자신들의 위성 국가 노릇을 탈피하려는 이런 노력에 대해 러시아의 분노가 매우 컸습니다.

 

(지엘렌체 전투 이후 진격하는 코작 기병들의 모습입니다. 지엘렌체 전투에서 폴란드 국왕군이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수적 열세 때문에 폴란드 국왕군은 후퇴해야 했거든요.)



하지만 정작 폴란드의 이런 개혁 노력에 가장 분노한 것은 결국 또다시 폴란드의 특권 귀족층이었습니다.  이 헌법으로 자신들의 권리가 침해당하게 된 귀족들은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폴란드의 개혁 헌법에 반대하는 연맹을 맺고, 1792년 5월 우크라이나의 타르고비카 (Targowica)라는 작은 마을에서 헌법 반대 선포식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4일 후 러시아의 대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경을 넘어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하지요.  스타니슬라브 2세에게 충성하는 세력은 폴란드 군의 수를 10만명까지 끌어올리는 계획을 세우지만, 돈도 사람도 없이 모든 것은 서류상의 꿈이었을 뿐, 헌법을 지키겠다고 모인 병력은 고작 3만7천의 오합지졸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지엘렌체 (Zielence) 전투에서 러시아 군에게 승리를 거두는 등 몇몇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러시아 군의 강력한 지원을 업은 타르고비카 연맹군, 즉 귀족 연맹군은 스타니슬라브 2세의 연방군에게 결국 승리를 거둡니다.   이때 스타니슬라브 2세는 결정적인 패배를 맞기 전에, 이미 수적인 열세가 너무 크다고 판단하여 쓸데없는 희생을 줄인다는 취지로 항복을 했는데, 이 결정은 피끓는 폴란드 인들게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됩니다.



(이 그림은 제2차 폴란드 분할 직후에 벌어진 1794년 봉기에서 폴란드 인들이 타르고비카 연맹 지도자의 초상화를 교수형에 처하는 모습입니다.  많은 폴란드 인들은 타르고비카 연맹을 결과적인 배신자로 여기고 원망했습니다.)


스타니슬라브 2세가 너무 무대책으로 러시아에게 반기를 든 것 아니냐고요 ?  스타니슬라브 2세는 나름 한답시고 프로이센과 손을 잡고 동맹을 맺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러시아의 침공을 본 척 만 척 했지요.  이미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폴란드를 또 갈라먹기로 비밀 협약을 했던 것입니다.  애초에 외국 세력을 믿고 일을 벌인 것 자체가 잘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요. 


 


 

(프로이센 왕과 폴란드 왕 사이에 맺어진 1793년 협정서입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종이조각일 뿐, 폴란드의 제2차 분할을 막지는 못했지요.  프랑스 어로 씌여진 것이 눈에 띄는군요.)

 

제일 딱하게 된, 아니 쌤통이 된 것은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겠다고 스타니슬라브 2세의 헌법에 맞서 싸웠던 타르고비카 연맹체의 귀족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저 러시아 군이 상황을 헌법 이전으로 되돌려주고 돌아가기를 기대했습니다만, 러시아는 프로이센과 함께 폴란드 땅을 추가로 나눠 가지고 동시에 이 귀족들의 특권을 대폭 박탈했습니다. 

 

이때 '폴란드를 프로이센의 음흉한 간섭으로부터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러시아 뿐이다' 라며 러시아 편을 들던 일부 귀족은 '이제 폴란드는 끝났다 난 이제 러시아 인이다' 라며 변절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1793년의 제2차 폴란드 분할입니다.  여기에는 오스트리아는 참여하지 않았지요. 


 


(이 분이 진정한 자유의 투사, 코시우스코 장군입니다.  이 양반은 소시적에 군사 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으나, 이미 폴란드가 바르 동맹 내전을 겪으며 몰락하고 있던 중이라, 군 장교직을 얻지는 못하고 어느 부자집에 가정교사로 취직을 합니다.  그러다가 그 집 주인 딸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하려고 하다가 잡혀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나는 봉변을 당하기도 하지요.  한마디로, 진짜 사내였다는 이야기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여태까지 '그래도 옛것이 좋은 것이다' 라는 믿음 하나로 폴란드 전통 귀족층을 지지하던 세력들도 크게 흔들렸습니다.  무조건 옛것이 좋다고 해서 따른 결과가 이 모양이었으니 당연했지요.  이런 국민들의 정서는 타르고비카 전쟁에서의 항복을 승복하지 못하고 망명을 택했던 많은 폴란드 장교들로 하여금 다시 러시아와 싸워 폴란드의 자유를 되찾자는 용기를 갖게 했습니다. 

 

특히 미국 독립 전쟁에도 참전했고, 바로 전의 타르고비카 전쟁에서 러시아 군을 상대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코시우스코 (Andrzej Tadeusz Bonawentura Kosciuszko) 장군이 그 반란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제2차 폴란드 분할 바로 다음 해인 1794년 3월, 폴란드의 옛 수도이자 제2의 도시인 크라코프 (Krakow)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는 5가구 당 소총, 창 또는 도끼로 무장한 병사 한 명씩을 제공하도록 요구하며 동원령을 내렸는데, 워낙 무장이 빈약하여 풀베는 큰 낫으로 자원병들을 무장시키기도 했습니다.  코시우스코는 이런 빈약한 병력을 이끌고 라츠와비세 (Raclawice) 전투에서 러시아 군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라츠와비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코시우스코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이때가 코시우스코 인생 최고의 날이었을 겁니다.)

 

사실 이 전투는 어찌 보면 별 의미없는 충돌에 불과했습니다만, 이 승리의 소식은 폴란드 전역에 들불처럼 번져 폴란드 민중의 가슴을 들끓게 했습니다.  러시아 군은 특히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군의 반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시내 무기고를 접수하려 했지만, 이는 오히려 정말 폴란드 수비대의 봉기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때도 이미 모든 힘을 잃은 스타니슬라브 2세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우물쭈물하기만 하여 폴란드 역사에서 결국 좋은 이름을 남길 마지막 기회를 잃고 말았지요.  이런 봉기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 (Vilnius)에서도 일어나는 등, 폴란드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기세를 올린 코시우스코는 모든 폴란드 인은 자유라는 선포를 하며 농노제를 폐기하고 귀족들의 전횡을 금하는 등 개혁을 약속하며 농민들의 지지를 끌어냈습니다. 



(이것이 코시우스코의 폴라니에츠 Polaniec 선언문입니다.  여기서 그는 개인의 자유와 농노 해방, 농민들의 경제적, 정치적 권리 등을 선언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선언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폴란드 국민이라고 할 때는 귀족들만을 뜻하는 것이었고, 폴란드 국민의 대부분이 속하는 농노 계급은 제외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증강된 러시아 군과, 폴란드 민중의 무장 봉기가 이미 분할된 기존 폴란드 영토까지 번질 것을 우려한 프로이센의 참전으로 인해 폴란드 봉기군은 곧 수세로 밀리게 되었습니다.  1794년 10월 벌어진 마치에요비체 (Maciejowice) 전투에서 코시우스코는 패배했고, 그 자신도 부상을 입고 러시아 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결국 폴란드 봉기는 실패로 끝났고, 1795년 10월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 사이에 맺어진 협약에 의해 제3차 폴란드 분할이 이루어지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맙니다. 

 

개혁에 대한 열의는 있었으나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던 무기력한 왕 스타니슬라브 2세는 러시아 군의 감시 속에 러시아 생페체르부르그로 이송되어, 사실상 감금 상태에서 예카테리나 2세가 부여한 연금을 받으며 빈곤하게 살다 1798년 뇌졸증을 일으키고 사망합니다.  이후 폴란드 민족은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 120년 이상을 지내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독립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1,2,3차에 걸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축소 과정입니다.)



다시 1806년으로 돌아오지요.  이제 도주하는 프로이센 군을 쫓아 진격하는 나폴레옹이 발을 내딛게 되는 땅은 불과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자랑스러운 폴란드 땅이었던 곳이었고, 아직도 독립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은 폴란드인들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역사와 지리에 통달한 나폴레옹은 당연히 이런 폴란드 분위기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폴란드 인들이 그에게 바라는 바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압제하던 바로 그 3개 강국, 이 세상을 나누어 지배하던 떵떵거리던 오스트리아-러시아-프로이센을 차례로 꺾으며 그야말로 천하무적의 위세를 자랑하던 나폴레옹 본인이 바르샤바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던 것입니다. 

 

그것도 계몽사상 정신이 녹아든 나폴레옹 법전을 손에 들고 말입니다 !  폴란드 인들에게 있어 나폴레옹은 그야말로 하늘이 보내준 영웅이었을 것입니다.


(폴란드로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던, 세상에 다시 없는 절대 군주라고 여겨졌던 오스트리아 황제와 러시아 짜르를 한곳에 모아놓고 그야말로 박살을 내놓은 영웅 나폴레옹 본인이 역시 폴란드의 원수였던 프로이센을 두들겨패고 그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폴란드로 오고 있다 ?  이건 요즘 헐리웃 스타의 내한에 비할 바가 아닌 빅 이벤트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폴란드 인들이 그렇게 순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폴란드 사회에서 독립을 꿈꾸는 이들은 크게 3개 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1) 누가 뭐래도 지정학적, 역사적인 관계를 볼 때 폴란드가 독립을 하려면 결국 러시아를 잘 설득하는 수 밖에 없다는 친

     러파
2)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이 폴란드에 나타난, 이 하늘이 내린 기회를 놓치면 언제 독립을 할 수 있겠느냐는 친불파
3) 외세에 의존하여 독립을 하겠다는 것은 독립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조차 파악 못한 멍청이들이나 하는 소리라는

    독자파

이중 누가 옳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  각 파는 나름대로의 타당한 합리성과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나폴레옹은 폴란드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고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폴란드를 러시아와 동맹을 맺기 위한 도구로서 이용할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예전에 갈라먹었던 폴란드 땅을 토해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며 불안해 할 오스트리아가 자신에게 반발하여 다시 무기를 들지 않을까 신경을 쓰는 상황이었습니다. 


(폴란드가 다시 독일의 침공 위협에 처했던 1938년 발행된 폴란드 우표입니다.  특이하게도, 맨 왼쪽에 칼을 든 코시우스코와 함께 중앙의 토머스 페인, 오른쪽의 조지 워싱턴 등 미국 초창기 인물들을 등장시켰습니다.  독일의 위협에 맞서 미국에게 뭔가 호소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



그런 의중을 가장 잘 파악했던 것이 1794년 크라코프 봉기의 주인공 코시우스코였습니다.  그는 러시아 군의 포로가 되어 생 페체르부르그의 감옥에 갇혔으나, 예카테리나 2세의 사망 이후 파벨 1세의 사면을 받아 일단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었습니다. 

 

미국에서 휴양을 하던 코시우스코는 1798년 일단의 폴란드 군인들이 나폴레옹 휘하에서 싸우고 있으며, 특히 그의 여동생의 아들들도 나폴레옹 군에 입대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고무되어 즉각 프랑스로 가기로 합니다.  그는 친구가 된 미국 대통령 제퍼슨의 도움으로 프랑스로 건너갔으나, 프랑스는 나라도 없고 귀족도 아닌 일개 폴란드 망명객인 코시우스코를 환영하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에 건너간지 거의 1년 뒤인 1799년 말, 당시 제1통령이던 나폴레옹을 간신히 만난 그는 폴란드 독립에 대한 열정과 계획을 나폴레옹에게 설명했으나, 나폴레옹은 그를 '자신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촌뜨기 망상가'로 취급했습니다. 

 

당연히 코시우스코도 나폴레옹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는데, 그는 나폴레옹을 '프랑스 공화국의 장의사'라고 평하며, 그의 독재적인 정치 성향을 경계했습니다.  1806년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격파하고 폴란드를 향해 진격하자, 코시우스코도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는지 다시 나폴레옹에게 편지를 보내 폴란드 의회 민주주의와 옛 영토 회복을 탄원했으나 나폴레옹은 그의 편지를 가볍게 무시했을 뿐이었습니다. 

 

코시우스코는 나폴레옹이 바르샤바 공국을 세운 것도 어디까지나 러시아와의 흥정을 위한 것일 뿐 폴란드의 독립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새로 탄생한 바르샤바 공국으로 귀국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폐위된 이후, 그는 결국 러시아의 짜르 알렉상드르 1세를 만나 폴란드의 독립을 호소하지만, 그에게서도 실망하고 결국 스위스로 다시 망명하고 맙니다.  그가 겪었던 처지가 당시 폴란드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폴란드 크라코프에 있는 코시우스코 언덕입니다.  이는 1817년 코시우스코가 스위스에서 사망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1820년부터 3년간 폴란드 전국의 모든 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은 성금과 크라코프 시민들의 자발적 노동으로 쌓은 인공 언덕입니다.)



이런 폴란드를 향하여 이제 나폴레옹이 진격합니다.  그는 여기서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됩니다.  과연 폴란드에서 나폴레옹을 기다리는 것은 어떤 모험들이었을까요 ?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명령에 따르는자 망하고 거역하는자 흥한다-풀투스크(Pultusk) 전투

 

 

지난 편에서 우리는 이제 나폴레옹이 진격해 들어갈 폴란드의 슬픈 역사와 그를 대하는 나폴레옹의 태도에 대해 짧게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싸우게 될 대상은 폴란드가 아니라 바로 러시아였지요.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진격에 대해 어떤 태도였을까요 ?

 

예나 전투 이후 프로이센이 지리멸렬 상태가 되자, 러시아의 짜르 알렉상드르에게는 2가지 옵션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그냥 프로이센을 본 척 만 척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록 나폴레옹과 1대1로 붙는다 하더라도 프로이센을 구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패기넘치고 의리으리한 젊은이였던 알렉상드르는 2번째 옵션을 택합니다.  그는 저 남쪽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투르크와의 분쟁이 벌어져 그쪽으로 8만의 병력을 보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무리하여 이미 폴란드에 배치된 병력 외에 약 3만7천의 제2 야전군을 별도로 편성, 이를 프로이센을 향해 보냅니다.

 

 

 

(의리으리한 상남자 알렉상드르는 실제로 무척이나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틸지트 회담의 내용을 보면 의리는 이익 앞에 한낱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프로이센의 국경선을 넘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소 망설였습니다.  이 선을 넘는다면 과거 폴란드 영토로서, 러시아의 충돌이 불가피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편에도 언급했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와는 구태여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의 그랑 다르메 (Grande Armee)는 사실상 1805년 울름 Ulm 작전을 위해 프랑스를 떠난 이후, 한번도 프랑스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해외 주둔하고 있어서 병사들의 피로도가 심각한 편이었습니다.  게다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나폴레옹의 황제 정권도 그리 뿌리가 깊은 편이 아니어서, 그렇게 오래 파리를 비워두는 것이 과연 옳은 판단인지 의심될 정도였습니다. 

 

가령 당시 파리와 프로이센 사이를 잇는 도로 위에는 파리와 나폴레옹 사이를 오가는 서신을 소지한 전령이 거의 항상 말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모든 결정을 나폴레옹 개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지요.  어느 정도로 심했는가 하면 파리에서 공연되는 연극의 주제 선택까지도 나폴레옹의 의견을 물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의 정권이 오로지 나폴레옹 개인에게 의존하는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는 점과 함께, 나폴레옹은 계몽 군주가 아니라 독재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일화이지요.

 

 

 

(연극 희곡 선택까지 나폴레옹이 직접 했다니까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나폴레옹은 대단한 연극 애호가였습니다.  이 그림은 당시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던 대배우 탈마 Francois-Joseph Talma 가 당시 연극에서 로마인 킨나로 분장한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은 탈마의 연극 공연을 일반 대중들과 함께 극장에서 즐겨 보았는데, 당시 인기 희곡 중에는 어쩔 수 없이 간혹 가다 독재자를 비난하는 내용의 대사가 나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탈마 본인을 비롯하여 나폴레옹의 측근들은 식은 땀을 흘리며 귀빈석에 앉은 나폴레옹의 눈치를 보아야 했는데, 나폴레옹 본인은 그런 장면에서는 깜빡 조느라 아무것도 못들었다는 듯한 연기를 그럴싸하게 해내는 재치를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 군이 폴란드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는, 과감하게 폴란드로 진군을 시작합니다.  러시아와의 충돌은 더 이상 피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는 먼저 심리적, 자연적으로 서구와 동구를 나누던 경계선이던 비스툴라 (Vistula) 강을 건너, 과거 훈족과 마쟈르, 몽골의 기병들이 내달렸던 광활한 폴란드의 평원을 가로질러 내달렸습니다.  그러나 과거 훈족과 몽골은 어땠는지 몰라도,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는 '내달렸다'라는 표현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기동성을 보여주었습니다. 

 

1806년 11월 28일, 러시아 군이 버리고 간 바르샤바(Warsaw)를 폴란드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다부의 제3군단이 무혈 점령하고, 토른 (Thorn)을 포위하고, 비스툴라, 부크 (Bug), 우크라 (Wkra, Ukra), 나레프 (Narew) 등의 여러 강에 다리를 놓는 등 많은 성과를 이루기는 했지만, 그 진격 속도는 몽골 기병은 커녕, 여태까지 나폴레옹의 보병들이 보여주었던 기동성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이 지도에서 신 동부 프로이센 Neuostpreussen을 찾아보십시요.  이 신 동부 프로이센은 제3차 폴란드 분할 이후 프로이센에 합병된 폴란드 영토로서, 약 90만명의 인구를 가진 곳이었습니다.  크게 플로스크 Plozk 와 비알리스토크 Bialystok 의 2지방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807년 나폴레옹과 알렉상드르가 맺은 틸지트 조약에서, 플투스크가 속한 플로스크는 프랑스의 위성 국가인 바르샤바 공국으로, 비알리스토크는 러시아로 귀속되게 됩니다.  결국 프로이센이 빼앗은 폴란드 땅을 프랑스와 러시아가 나눠가진 셈이 됩니다.  빌헬름 3세와 맹약을 맺은 알렉상드르로서는 의리으리한 일이지요.)

 
일단 도로 사정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의 지방 도로들도 당시에는 진흙투성이 비포장 도로에 불과했지만, 부유한 서구에 비해 경제적 문화적으로 열악했던 폴란드의 도로망은 그야말로 늪과 같은 진흙탕이었습니다.  특히 폴란드는 11월이 우기로서, 그렇쟎아도 열악한 도로 사정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었습니다.  병사들의 무릎까지, 그리고 수레의 바퀴축까지 진창 속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랑스 군을 괴롭힌 가장 큰 장애물은 식량 부족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과거 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 독일 등지를 누비고 다닐 때 진지하게 식량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군대가 당연히 'live off the country', 즉 알아서 현지 조달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작전을 짰습니다. 

 

물론 덕분에 병사들은 전투 현장에서는 거의 언제나 배를 곯아야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굶어 죽을 지경은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든 오스트리아든 독일이든 모두 어느 정도 부유하고 넉넉한 동네로서, 잘 정돈된 농가들의 창고 문짝을 걷어차면 하다 못해 감자 몇 자루나 밀가루, 포도주 항아리를 얻을 수 있었고, 찬장을 열었을 때 버터와 치즈가 나오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감자는 이때 즈음해서는 동구권에 널리 재배되는 인기 구황작물로서, 나폴레옹 본인을 포함한 프랑스 군이 즐겨먹는 음식물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과 예카테리나 대제 등이 앞장 서서 감자 재배를 장려한 덕분이지요.)

 

 

그러나 가난한 폴란드에 와보니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일단 황량하고 광활한 대지에 비해 사람 사는 마을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마을이 나온다 해도 다른 동네처럼 많은 집이 몰려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집도 초라했고, 창고와 찬장은 더더욱 초라했습니다. 

 

프랑스 군은 자신들이 해방군이라고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책이 뭔지 신문이 뭔지 몰랐던 폴란드 농민들은 프랑스 군을 그저 또다른 외국군, 그것도 배고픈 외국군이라고 생각할 뿐이었고, 얼마 안되는 비축 식량마저 폴란드 농민들이 이 외국 귀신들에게 빼앗길까봐 귀신처럼 숨겨 놓았습니다. 

 

심지어 이집트 사막에서조차 물 걱정은 몰라도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난생 처음으로 병참선 걱정을 해야만 했고, 이런 식량 보급은 열악한 도로와 곳곳에 즐비한 습지와 강, 지류로 인해 더욱 지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안 좋았던 것은, 이렇게 인적이 드물고 황량한 지역에서는 나폴레옹의 눈과 귀 역할을 하던 정찰병과 첩자들의 발도 묶일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중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의 극찬을 받은 회고록을 쓴 마르보 (Jean Baptiste Antoine Marcellin de Marbot)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이랬습니다.

 

"날씨는 끔찍하고, 식량은 희귀하고, 와인은 아예 없고, 맥주는 형편없고, 식수는 진흙이 섞여 탁하고, 빵도 없고, 숙소라는 것은 소나 돼지와 함께 쓰는 움막이다.  이것이 폴란드다."

 

 


(마르보는 당시 24살의 젊은 장교로서, 제7군단을 지휘하는 오쥬로 원수의 부관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스페인 전쟁과 러시아 원정에서도 활약했고, 워털루 전투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는데, 그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것은 주로 그가 남긴 회고록 덕분입니다.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그의 회고록을 읽고 '최근 4년간 읽은 책 중 최고'라며 극찬했으며, 유서에도 '마르보가 저작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10만 프랑을 그에게 유산으로 남긴다'라는 항목을 넣을 정도였습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폴란드의 진흙 속에서 고생할 때 러시아 군도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알렉상드르가 임명한 제1, 제2 야전군의 총지휘관은 카멘스키 (Mikhail Kamensky) 장군이었는데, 이 양반은 이 풀투스크 전투 당시 이 분 연세가 무려 68세로서, 사실 상당한 고령이셨지요. 

 

게다가 원래 이분은 1788년 몰다비아에서 투르크 군과 싸울 때 지휘권에 대한 반발 문제로 강제 보직해임 당한 뒤 한번도 현역을 맡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분에게 지휘권을 맡겼다는 것이 당시 러시아 군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지요. 

 

아무튼 카멘스키 장군은 지휘를 맡자, 일단 부크 (Bug) 강을 지키던 베니히센 (Levin August Theophil, Count Bennigsen) 백작의 제1 야전군을 우크라 강까지 후퇴하도록 명령합니다.  짜르 알렉상드르가 보내준다는 제2 야전군과 합류하겠다는 이유에서였는데, 사실은 맹수같은 나폴레옹과 혼자 싸우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라고 의심이 들긴 합니다. 

 

 알고 보면 제2 야전군 지휘관도 그리 믿음직스럽지는 못했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주정뱅이 짓으로 악명을 떨친 북스게브덴 (Friedrich Wilhelm von Buxhoeveden) 장군이 지휘관이었거든요.  아무튼 약 6만5천에 달하는 제1 야전군과 3만7천 정도의 제2 야전군이 합류하면 글자 그대로 10만 대군이 되므로, 어느 정도 파괴력 있는 병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카멘스키 백작님이십니다.  카멘스키 백작님은 자신의 영지에서도 농노들을 잔혹하게 다루었던 것으로 악명 높았는데, 아니나다를까 풀투스크 전투에서 이탈하신지 3년 후인 1809년 그렇게 학대받던 농노에게 그만 살해되고 맙니다.  꼴통 노친네가 천벌 받았다고 해야 하나요...)



하지만 일단 후퇴 뒤에 상황을 지켜보니, 의외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은 소문대로 전광석화처럼 치고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처럼 도로망과 보급품 문제 때문이었지요.  이러자 카멘스키 장군은 '내가 공연히 겁을 먹고 광활한 영토를 내버린 꼴이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는 12월 초, 다시 베니히센 장군에게 나레프 강을 향해 진격을 명했습니다.  하지만 12월 10일, 모들린 (Modlin)에서 프랑스 군이 나레프 강을 도하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다시 덜컥 겁이 났던 카멘스키 장군은 다시 우크라 강까지 후퇴를 명했습니다.  이때 공연히 험한 날씨 속에 우크라 강과 나레프 강 사이를 왔다갔다 해야 했던 러시아 군과 베니히센 장군의 좌절감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지도에는 우크라 강의 모습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우크라 강은 나레프 강으로 흘러드는 여러 지류 중 하나입니다.)

 

 

 

(우크라 강은 보시다시피 작은 지류입니다.)

 

 

카멘스키 장군이 나타나기 전까지 제1 야전군 사령관으로서 최고 지휘관이던 베니히센 장군은 원래 나폴레옹과 한번 제대로 붙어 보기를 벼르고 있었습니다.  이 양반의 본명은 레빈 아우구스트 Levin August Gottlieb Theophil 로서, 당시 61세의 노장이었습니다.  원래 이분은 러시아 인이 아니라 브라운슈바이크 (Braunschweig) 태생의 독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7년 전쟁 때도 10대 후반에 하노버 군에서 싸웠지요.  7년 전쟁이 끝나자 아버지의 타계와 자신의 결혼 등 가정 문제로 인해, 그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1764년 하노버 군에서 제대했고, 무려 9년 뒤인 1773년에야 러시아 군에 입대를 하여 투르크 군과 싸웠습니다. 

 

그는 이후 러시아 군에서 승승장구하여 오스만 투르크나 페르시아와의 전쟁 뿐만 아니라 폴란드 봉기 진압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소장까지 승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파벨 1세에 의해 군에서 쫓겨나는 봉변을 당했지요. 

 

그런 연유로 그는 확실히 파벨 1세의 암살 사건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알렉상드르 1세가 그를 다시 군에 복직시켜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이후 맡은 직책에서 첫번째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임무가 바로 이 1806년 폴란드 방면 야전군 사령관이었습니다. 

 

이렇게 피끓던 베니히센은 아무 전략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상관인 카멘스키 장군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특히 베니히센은 제2 야전군 사령관 북스게브덴과 합류한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습니다.  그는 원래부터 북스게브덴과 무척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베니히센 장군입니다.  이후 다음 해에 벌어진 아일라우 전투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를 패배시키기도 했던 그는 원래 하급 귀족 출신의 독일인이었습니다.  나중에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비로소 알렉상드르 1세에 의해 백작에 봉작되었고, 전쟁이 끝난 이후 고향 하노버의 영지에 은퇴하여 81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실은 러시아 군에서 1817년 완전히 은퇴하게 된 것은 워낙 행정 업무 처리가 미숙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한편, 나폴레옹은 늘 하던 대로 러시아 군을 한 방에 일망타진 하기 위해 큰 그물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러시아 군이 처음에는 포젠 (Posen)을 중심으로 집결하고 있다고 보았으나, 곧 이어 풀투스크 주변이 러시아 군의 중심지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뮈라의 총 지휘 하에, 다부의 제3 군단, 오쥬로의 제7 군단, 란의 제5 군단과 뮈라 직속의 제1 기병 예비대를 동원하여 풀투스크로 진격하게 했습니다.  한편, 네와 베르나도트, 베시에르 등은 러시아 군의 우익을 북쪽으로 우회하여, 레스토크의 지휘 하에 있는 잔존 프로이센 군을 상대하도록 했습니다. 

 

 

 

(12월 초의 모습입니다.  프랑스 군의 좌익은 레스토크의 프로이센 군을 밀어내고 우익은 러시아 군을 포위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술트의 제4 군단이 레스토크와 베니히센 사이로 신속하게 밀고 들어가는 것인데, 폴란드의 열악한 도로망은 그를 허락하지 않았지요.)

 

 

12월 23일, 다부의 제3 군단은은 끈덕지게 진격하여 작은 전투를 치르고 마침내 우크라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카멘스키는 불과 며칠 전 전진 명령을 내렸을 때의 패기를 전부 잃고 훨씬 북동쪽인 오스트로웽카 (Ostrolenka)로 후퇴를 명령했습니다. 

 

이때 카멘스키는 아예 신경쇠약에 걸렸는지, 병을 이유로 지휘권을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도 않은 북스게브덴에게 넘기고 제1 러시아 야전군에서 이탈하여 자기 영지로 되돌아가 버리는 기행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베니히센은 아마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러시아 군의 움직임이 전해지자, 나폴레옹은 이것이 전쟁을 끝낼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도주하는 러시아 군의 퇴로를 막고 결정타를 먹이기 위해, 란의 제5 군단을 풀투스크로, 다부와 오쥬로를 그 좌측으로 각각 급파했습니다.  동시에 술트도 우크라 강을 건너 오쥬로를 지원하도록 했지요.  하지만 여기서 나폴레옹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베니히센이었습니다. 

 

 베니히센은 카멘스키의 명령을 혼자서 거부하기로 결심하고, 풀투스크에 남았던 것입니다.  베니히센에게는 4개 사단, 총 4만이 훨씬 넘는 병력이 있었고, 무엇보다 128문의 대포라는 막강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멘스키의 명령에 따라 후퇴한 것은 제1 야전군의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이런 사정을 모르고 이 대군을 향해 단독으로 뛰어들던 란에게는 총 2만의 병력과 38문의 대포 뿐이었습니다.  사실상 승패는 결정된 셈이었지요.

 

 

 

(풀투스크는 나레프 강가에 면해 있는 작고 예쁜 도시로서, 폴란드의 작은 베니스라고 불린다는군요.) 

 

 

풀투스크는 나레프 강 서안에 있는 작은 마을로서, 언듯 보면 왜 베니히센이 하필 여기서 프랑스 군과 싸우려 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까딱하면 동쪽으로 후퇴해야 하는 베니히센으로서는 배수의 진이 될 수도 있는 환경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차피 이미 남쪽에서 나레프 강을 건넌 프랑스 군은 서쪽이 아니라 강을 끼고 남쪽에서 치고 올라올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대군으로 알려진 프랑스 군에게 포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쪽 측면이 강으로 보호되는 것이 유리했지요.  하지만 베니히센이 풀투스크를 결전지로 고른 것은 마을 서남쪽에 있는 언덕 때문이었습니다.  숨을 곳이 없이 평탄한 폴란드의 대평원에서 이런 나지막한 언덕은 대단히 중요한 군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역전의 맹장 란도 이 언덕으로 인해 큰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베니히센은 이 언덕 뒤에 중앙군을 숨겨 두었고, 우익은 톨리 (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 ) 장군 지휘 하에 인근 모진 (Mosin) 숲에, 좌익은 바고부트 (Karl Gustav von Baggovut) 지휘 하에 풀투스크 마을 자체에 진을 치도록 했습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프랑스 군이 보기에는 러시아 군의 좌익과 우익 정도만 눈에 보였고, 정면의 언덕 위에는 약간의 코작 기병대 외에는 관측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언덕과 마을과 숲에 가려 그 뒤에 얼마나 되는 병력이 있는지 알아볼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12월 26일 정오 무렵의 풀투스크 상황입니다.)

 

 

크리스마스 밤을 남서쪽 즈브로스키 (Zbroski) 마을에서 보낸 란의 제5 군단은, 1806년 12월 26일 아침 7시 풀투스크를 향해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거리는 고작 8km였으므로 걸어서 2시간도 안되는 거리였지만 실제로는 3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이날 겨율 치고는 유난히 날씨가 따뜻하여, 폴란드의 악명 높은 진창길이 다 녹아 있었던 것입니다. 

 

말을 탄 란이 먼저 현장에 도착하여 풀투스크의 러시아 군 진형을 살폈지만, 그는 언덕이라는 장애물 때문에 베니히센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명령서에 따르면, 러시아 군은 총퇴각을 시작했고,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러시아 군의 후위대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게다가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진눈깨비로 인해 시야가 더욱 제한되었습니다.

 

무릎까지 빠진다는 폴란드 진흙길을 헤엄쳐 오느라 기진맥진한 프랑스 제5 군단이 공격을 시작한 것은 도착한지 1시간 정도가 지난 오전 11시부터였습니다.  란은 정석대로, 눈에 보이는 러시아 군 좌우 양익을 향해 수셰 (Louis-Gabriel Suchet)의 전열 보병과 용기병대를 왼쪽으로, 클레파레드 (Claparède)의 경보병과 트레이아르 (Treilhard)의 경기병대를 오른쪽으로 보내 교전을 시작했습니다.  중앙으로는 베델 (Wedell, Vedell)의 지휘 하에 2개 대대의 전열 보병을 진격시켰습니다. 

 

 

 

(수셰는 원래 리옹의 비단 방직업자의 아들로서,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전형적인 시민 계급 출신이었습니다.  유능한 군인으로서 스페인 전선에도 활약한 그는 그 공으로 나중에 공작의 지위에도 오르지요.  루이 18세의 복위 때도 프랑스 귀족 작위를 받았으나,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 편에 섬으로써 모든 것을 잃어야 했지요.)

 

 

모든 전투가 다 그렇습니다만, 전투 자체는 상당히 격렬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베니히센도 프랑스 군의 공격에 대응하여 예비대를 투입한데다, 특히 중앙으로 진격했던 베델의 보병대가 우익의 클레파레드의 경보병을 돕기 위해 오른쪽으로 선회하다가 언덕 뒤에서 뛰어나온 러시아 기병대에게 측면을 노출시키면서 프랑스 군에게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트레이아르의 경기병들이 우익으로 돌격해들어가자, 예상치 못한 강력한 포병대가 산탄 포격을 퍼부어 경기병들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좌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수셰와 함께 란 본인이 좌익의 공격을 지휘했는데, 란이 직접 이끄는 공격답게 처음에는 러시아 군을 숲 속으로 밀어 붙이고 러시아 군의 대포들까지 노획했으나, 숲 속에서 예상보다 엄청난 규모의 러시아 예비대가 반격을 해오자 노획했던 대포를 버리고 다시 숲 밖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가장 황당한 경험을 했던 것은 베델의 뒤를 이어 중앙으로 진격했던 가잔 (Gazan) 장군의 제2 공격대열이었습니다.  언덕의 능선을 넘어서자마자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웅장한 규모의 러시아 군 본대와, 그 앞에 주욱 늘어선 포병대였습니다.  곧 그 대포들로부터 무시무시한 대포알들이 날아와 프랑스 보병들을 픽픽 쓰러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2시가 될 즈음에 프랑스 군은 거의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진흙길에서 3시간 행군하느라 지친 몸으로 공격에 나선 2만 병력이, 128문의 대포를 앞세운 4만에게 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더 큰 문제는 여기서 후퇴를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돌아갈 길도 올 때와 마찬가지로 진흙 늪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지요.  특히 러시아 군은 포병과 기병에서도 프랑스 군을 압도했으므로, 이대로 퇴각할 경우 추격하는 러시아 군에 의해 피해가 엄청날 것이 뻔했습니다.

 

 

 

(오후 3시 경의 상황입니다.  서쪽에 푸르니에 돌탄느의 부대가 나타나 톨리의 부대가 그를 상대하고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하지 못한 구원 병력이 나타납니다.  다부의 제3 군단 휘하 제3 사단 약 6천 병력이 뜬금없이 북서쪽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들을 지휘하던 푸르니에 (Fournier d'Aultanne) 장군은 원래 다른 러시아 군을 추격하도록 명령을 받고 인근까지 진격했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을 듣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베니히센의 병력은 란의 병력과 푸르니에의 병력을 다 합한 것보다 월등히 많았으므로 이들이 전체 전황을 뒤집어 놓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푸르니에의 제3 사단은 역시 진흙구덩이를 급히 헤쳐 오느라, 가지고 온 대포는 단 1문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푸르니에의 병력은 란의 숨통을 터주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일단 베니히센은 이 새로운 부대의 출현에 대해 바싹 긴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력 규모는 작았지만, 그 위치는 강을 등지고 있는 베니히센을 포위하기 딱 좋은 위치였던 것입니다.  

 

그는 우익의 톨리 장군을 중앙 쪽으로 후퇴시키고 중앙의 예비군을 더 우익으로 투입하여 이 새로운 부대에 대해 응전했습니다.  이에 따라 란에게 퍼부어지던 공격이 반감되었지요.  또 러시아 군 중앙의 강력한 포병대가 서쪽, 그러니까 러시아 군의 우익으로 푸르니에를 상대하기 위해 대거 이동하자, 중앙에 있던 가잔 (Gazan) 장군이 러시아 군의 좌익을 공격할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때 바고부트 장군의 러시아 군을 밀어내고 러시아 군 대포들을 탈취하기도 했으나, 예비대로 있던 톨스토이 (Alexander Ivanovich Ostermann-Tolstoy) 장군의 기병대가 달려들면서 곧 쫓겨나 다시 대포들을 버리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톨스토이 장군입니다.  이 분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문호 톨스토이와 같은 가문 맞습니다.  이 분의 초상화에서 옷깃을 움켜잡은 오른손의 포즈가 좀 오묘한데, 이분은 1813년 프랑스의 방담 장군이 포로로 잡힌 쿨름 전투에서 왼손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무관하게 전후 유럽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인기남으로서 곳곳에 정부와 사생아를 남기셨습니다.  정작 정실부인과는 소생이 없었지요.)

 

 

심한 진눈깨비 속의 이런 악전고투 중 어느 덧 밤 8시 정도가 되자, 어둠을 틈타 프랑스 군의 후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선 푸르니에 장군의 제3 사단은 왔던 길을 다시 밟아 다부 원수의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후퇴를 시작했고, 란도 오전 10시에 공격을 시작하기 위해 병력을 집결시켰던 위치로 일단 후퇴하여 만신창이가 된 제5 군단을 재정비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더 후퇴하지 않고 밤을 지새웁니다.  왜 란은 더 후퇴하지 않았을까요 ?  프랑스 제1의 맹장이라는 자존심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둠 속에 그 진창길을 통해 후퇴하려니 병사들이 너무 지쳐 있어서였을까요 ?  하긴 란 본인을 포함하여, 클레파레드와 베델 등 전투에서 선두에 섰던 지휘관들은 모두 부상을 입을 정도로 전투가 치열했으니 지치기는 정말 지쳤을 것입니다.

 

 

 

 

(열혈남아 란은 항상 전투를 선두에서 지휘했기 때문에, 많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결국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의 대포알에 생명을 빼앗기지요.  용기있게 앞장서고, 나폴레옹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던 결과가 그랬습니다.  왠지 씁쓸하군요.)

 

 

란이 후퇴하지 않은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예상과는 달리 러시아 군의 추격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건 사실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프랑스 군은 공식적으로는 이날 전투에서 700명이 전사하고 1200명이 부상당하는 등, 총 22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당시에도, 또 지금도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7천, 최소 5천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입니다.  러시아 군의 피해는 러시아 측에 따르면 포로 1500을 포함하여 3500이었는데, 프랑스 군에 따르면 1800명의 포로를 포함하여 6800에 달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프랑스 군은 사실상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베니히센은 추격하지 않았을까요 ?

 

실은 추격은 커녕, 이날 밤 베니히센은 짐을 싸들고 나레프 강을 건너 동쪽으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 풀투스크 전투가 러시아 군의 대승이라고 보고하면서, "나폴레옹 본인이 이끄는 6만 대군을 맞아 우세를 점하며 풀투스크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뒤, 고립을 피하기 위해 명예롭게 후퇴했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러시아 군의 규모를 과소 평가했던 프랑스 군과 달리, 그는 프랑스 군의 병력을 과대 평가했고 또 그 정도 병력이라면 나폴레옹 본인이 지휘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성공적으로 한판 떴으니, 이젠 됐다라고 판단하고 부리나케 후퇴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용장 란은 이름 값을 제대로 했습니다.  그와 그의 제5 군단이 너무나 뚜렷한 수적 열세와 지형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에, 베니히센은 프랑스 군의 규모를 실제보다 훨씬 크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란은 현장에 남았지만 베니히센은 후퇴했으므로, 프랑스 군은 승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전투의 승패는 양측의 피해 규모를 비교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누가 후퇴를 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으니까요. 

 

 

 

(여기서 어떻게 러시아 군이 700여명의 사상자만 내고 빠져나갈 수 있었는지 지도만 보면 이해가 안되네요.  골리민 전투의 상황입니다.)

 

 

한편, 바로 인근 골리민 (Golymin)에서는 같은 날 다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뮈라가 지휘하는 3만8천의 프랑스 군이 정반대로 1만7천의 러시아 군에 대해 2대1로 수적 우세를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뮈라가 러시아 군의 규모를 과대 평가하는 바람에 이 전투도 흐지부지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즉, 소규모 전투 후에 러시아 군이 철수하면서 별다른 전과 없이 끝나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뮈라는 '난 러시아 군이 5만 정도라고 생각했다' 라고 초라한 변명을 해야 했지요.  

 

나폴레옹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번 작전의 목표였던 베니히센의 러시아 제1 야전군의 포착 및 섬멸에 완전히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아끼는 부하를 거의 사지로 몰아 넣은 셈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비록 다부의 활약 덕분에 대성공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자신의 중대한 판단 착오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이어 2연타로 발생했으므로, 연전연승을 거듭해오던 나폴레옹으로서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풀이 죽은 나폴레옹은 폴란드가 자신이 겪어 왔던 그 어떤 전장보다 열악한 환경이라는 것과, 이런 폴란드의 한겨울 속에서 전투를 계속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는 봄이 올 때까지 작전을 멈추기로 결심하고, 각 군단이 겨울 숙영지를 찾아 휴식을 취할 것을 명한 뒤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여기서 그는 뜻밖의 운명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보시겠습니다.

 

 

나폴레옹, 미개한 국민을 두려워하다

 

 

나폴레옹은 1815년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된 뒤 그의 열정과 분노, 아쉬움 등을 삭일 겸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대인물이 직접 구술한 회고록이니 정말 소중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료이겠습니다만, 사실 그 회고록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당대는 물론 현대에도 그닥 높은 점수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나폴레옹은 소싯적부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거짓말을 하도 많이 했기 때문에, 인생 노년기에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쓴 회고록의 모든 부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사이트 등에서 공짜로 다운로드 받아볼 수 있는 '나폴레옹 회고록'은 사실 그의 친구이자 비서였다가 개인 비리가 적발되어 쫓겨난 부리엔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도, 부리엔 개인의 이해 관계에 따라 매우 왜곡된 부분이 많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그의 회고록 부분 중에는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집권 기간 중 프랑스의 문맹률이 무려 96%에 달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 역시 많은 역사가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부분입니다.  이미 1680년 대에, 프랑스 인구 중 20% 정도는 자신의 이름을 쓰고 읽을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1780년 정도가 되면 그 비율은 37% 정도에 달했지요.  특히 프랑스는 워낙 큰 나라이다 보니, 나폴레옹 시대에 프랑스 전체의 정치 판도는 비교적 부유한 프랑스 북부 지방의 인구가 좌우하다시피 했는데, 그 프랑스 북부 지방에서는 전체 성인 남자의 2/3 정도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고 합니다. 

왜 나폴레옹은 이렇게 자기가 다스린 위대한 나라 프랑스의 국민들을 글도 못 읽는 미개한 국민으로 깎아내렸던 것일까요 ?  한마디로 '이런 미개인들을 이끌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려면 나 정도의 독재 행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랬을까요 ?



 

일단 프랑스 국민의 96%가 문맹이었다는 것은 나폴레옹 본인도 믿지 않는 수치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가 1797년 7월 15일 북부 이탈리아에서 작전 중에 파리의 총재 정부에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밀라노를 점령한 그의 부대 병사들 사이에 회람되던 프랑스 신문 내용이 나폴레옹 자신에 대한 중상모략으로 가득한 것을 보면 그 프랑스 신문사는 영국에게서 뒷돈을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니 그 신문사의 윤전기를 끌어내어 박살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참모장 베르티에 (Berthier)에게 병사들 사이에서 회람되는 신문이나 책자들에 대해 엄격한 검열을 실시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애초에 전국민의 96%가 문맹이라면, 당연히 그의 부대원들 대부분도 문맹이었을테니, 그런 신문이 돌아다닌다고 그가 신경쓸 필요가 없었겠지요.


뿐만 아닙니다.  그는 1797년 캄포 포르미오(Campo Formio) 조약으로 제2차 동맹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새로운 작전에 들어갔는데, 그건 바로 언론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는 1797년~1798년 사이에  자비로 무려 6개의 신문사를 만들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는 신문을 찍어냈습니다.  물론 그 신문사들의 기사는 사실상 나폴레옹 자신이 구술한 것들이었지요.  역시 국민 전체의 96%가 글도 못 읽는 미개인이라면 구태여 그렇게 돈을 들여가며 어용 신문사를 만들지는 않았겠지요. 


 


(르 모니퇴르 지도 그런 나폴레옹의 어용 신문 중 하나였습니다.  사진은 워털루 전투 약 10일 후인 1815년 6월 27일자 신문입니다.  패전 직후에도 황제 폐하라고 지칭하더니, 이제 즈음 되서는 불경스럽게도 황제 폐하라고 하지 않고 나폴레옹이라고 부르네요.)



나폴레옹은 위대한 군사적 천재이자 황제이니까, 그가 지배한 국민들을 이렇게 '미개하다'며 경멸하는 것이 당연했을까요 ?  실은 나폴레옹은 그의 국민들을 경멸함과 동시에 무척 두려워하는 편이었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미개한 국민들이 우르르 몰려와 유서 깊은 부르봉 왕조의 루이 16세를 끌어내다 목을 치는 것을 목격했는데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는 국민들에 대한 두려움을 이런 말로 표현한 적이 있었습니다.

"리옹에서 성난 노동자들 2천명과 상대하는 것보다는 전장에서 외국군대 2만명과 싸우는 것이 더 쉽다."

그는 이렇게 두려운 미개 국민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총칼이 아닌 언론과 예술을 택했습니다.  그는 항상 언론을 검열하고 통제하며 자신에 대한 반대 여론이 퍼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애를 썼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언론 기사가 나가도록 어용 신문을 만드는데도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가령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 직전에는 73개사였던 파리의 정치 신문사가 1800년에는 13개사로, 다시 1811년에는 고작 4개로 줄었는데, 이렇게 남은 신문사들은 물론 100% 어용 신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 내부에서는 나폴레옹의 끊임없는 전쟁과 여성 추문, 어려워지는 국민의 삶에 대해 비난하는 기사는 찾아볼 수가 없었지요.  이런 언론 통제에 대한 나폴레옹의 굳은 의지는 1805년 그가 비밀 경찰 책임자인 푸셰 (Joseph Fouche)에게 보낸 편지의 다음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나는 내 이익에 반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인쇄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푸셰의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의 권력은 사실 탈레랑, 푸셰, 그리고 캉바세레스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이렇게 자신이 듣고 싶은 소리만 언론에서 나오는 것이 과연 나폴레옹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나폴레옹도 사람인지라 그가 내리는 모든 결단이 다 옳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의 정책에 대해 비판하고 견제를 할 세력이 필요했는데, 그럴 수 있는 세력을 나폴레옹이 다 없애 버렸으므로 나폴레옹의 정책은 한번 잘못 되면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사실 그렇게 좋은 판단이 아니었던 대륙 봉쇄령이나 스페인 전쟁, 그리고 결정타였던 러시아 침공 등이 그대로 이루어졌고, 결국 이는 나폴레옹 자신의 폐위와 프랑스의 굴욕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프랑스에 건전한 언론이 살아 있어서 나폴레옹에 대한 견제가 있었다면 오히려 나폴레옹의 왕조가 더 이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이런 비판 세력에 대한 필요성은 나폴레옹의 밀수 품목을 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대륙 봉쇄령을 내려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시켜 놓고도, 일부는 영란은행의 황금을 유출시키기 위해, 일부는 자기 자신의 필요성에 의해 영국과의 밀수 거래를 용인하거나 적극적으로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대개는 영국에 비단이나 고급 와인 같은 프랑스 제품을 팔고 그 댓가로 황금을 받아오는 형태였으나, 일부 품목은 영국제 상품을 받아왔는데,  그 품목 중 하나가 바로 영국 신문들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자신도 자신과 그의 현황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궁금했던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신문 뿐만 아니라 책이나 팜플렛 등 모든 인쇄물에 대해서도 가혹한 검열 조치를 시행했습니다.  1810년, 이미 탄탄하던 '비공식 검열'을 공식화한데 이어서, 1811년 10월 14일에는 아예 배포해도 좋은 모든 서적의 목록을 공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서적 출판 허가제를 도입한 셈이었지요.  이렇게 그의 광활한 제국 내에서 문필가들은 나폴레옹의 비밀 경찰들의 감시에 위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나폴레옹의 비밀 경찰들도 바다 건너 영국의 풍자 만화가들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주로 영국에서 나오는 그에 대한 만평을 매우 혐오했고, 그것들이 주로 프랑스 망명 귀족의 재정 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며 평가 절하하면서도 분노했습니다. 

 

심지어 영국과의 평화 협정이었던 1802년 아미엥 조약에서, 나폴레옹은 영국 언론과 만화가들이 만들어내는 자신이나 자신의 정책에 대한 조롱을 살인이나 사기와 동일한 범죄로 다루어 추방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조항을 평화의 전제 조건으로 삽입하려고 했을 정도였지요.


(당시 영국의 만화입니다.  저렇게 방구 세례를 받는 초상화는 당시 영국 국왕이던 조지 3세입니다.  당시의 영국 언론의 자유분방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딴 이야기를 해보지요.  예전에 제가 고등학교 때인가... 일요일 밤에 라디오에서 세계 명작 소설 등을 50분 정도로 각색하여 성우들이 라디오 드라마 형태로 연기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작품 중에 '바다의 침묵'이라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지금 찾아보니 그 소설의 원제는 'Le Silence de la mer', 즉 글자 그대로 바다의 침묵으로서,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한 1941년에 레지스탕스로 활약한 장 브륄러 ( Jean Bruller)가 쓴 소설입니다.  줄거리를 한줄로 요약하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어떤 마을에 주둔한 독일군 장교과, 그 장교가 숙사 할당을 받은 어느 프랑스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평소 프랑스를 동경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인품도 훌륭한 신사였던 그 독일군 장교가 그 집의 노인 및 그 조카딸과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거기서 그 독일군 장교가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문학하면 프랑스지요.  독일에 대단한 문필가가 누가 있던가요 ?  괴테 ? 쉴러 ?  하지만 프랑스는 라신느, 모파상, 발자크, 뒤마, 위고 등등 너무나 대단한 문학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도 음악하면 반대로 독일이 최고지요."

 


('바다의 침묵'은 1949년 프랑스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유럽 대륙의 문학을 주도하던 프랑스에서, 유독 암흑기가 있었으니 바로 나폴레옹 집권기였습니다.  나폴레옹의 문학 탄압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나폴레옹 시대에는 뛰어난 작가가 전혀 배출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영국에서는 이 시기에 제인 오스틴, 키츠, 셸리, 바이런 등 유명 작가들이 많이 배출되었지요.

원래 나폴레옹은 나름 문학에 대해 취미가 있는 사람이어서, 책도 많이 읽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연애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과 거의 결혼할 뻔 했으나 결국 베르나도트의 와이프가 된 데지레 클라리 (Desiree Clary)와의 연애 이후인 1795년 펜을 잡은 그는 일필휘지로 9페이지짜리 클리송과 유제니 (Clisson et Eugenie)라는 연애 소설을 썼는데, 사실 그 내용은 다소 손발이 오그라드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글 솜씨는 이런 연애 소설보다는 그의 전과 보고서에서 훨씬 더 빛났습니다.   전에 머나먼 다리 (http://blog.daum.net/nasica/6862462) 편에서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의 로디 (Lodi) 전투는 사실상 전술적 목표 달성에 실패한 초라한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먼저 전투 보고서를 통해, 그리고 나중에는 르죈 (Lejeune)의 멋진 그림을 통해 이 전투를 대단한 의미를 가진 역사적 전투로 승화시켰지요.  이렇게 과장된 전투 보고서와 거장들을 동원해 그린 미화된 전투 묘사화 등을 통해, 나폴레옹은 국민들에게 프랑스의 영광이라는 환상을 불어 넣었습니다.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전설적인 돌격을 선두 지휘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입니다.  이 그림의 실제 사연에 대해서는 아르콜레의 용자 http://blog.daum.net/nasica/6862468 편을 참조하세요.)


여기서 잠깐, 나폴레옹의 주장과는 달리 국민들의 절반 정도가 읽고 쓸 줄 알았다고 해도, 그렇다는 것은 국민들의 절반 정도는 정말 문맹이라는 뜻이 됩니다.  사실 그런 문맹 국민들에게는 인쇄물과 서적에 대한 검열은 별반 효과가 없었겠지요.  이런 '정말 미개한' 국민들에게도 나폴레옹의 여론 통제는 마수를 뻗쳤습니다. 

 

바로 극장을 통해서였습니다.  사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 몰리에르와 라신 등 대문호들 덕택에 연극에 대한 애호가 대단한 나라였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이런 연극 열풍은 계속 이어져 단두대를 피해 지하실에 숨어있던 귀족들까지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극장 관람석을 몰래 찾을 정도였으니까요.  나폴레옹 자신도 연극 공연의 광팬으로서, 1800년 당시 제1통령이던 나폴레옹에 대한 폭탄 암살 시도 때도, 사실 나폴레옹은

극장에 가던 중이었지요. 


(이 그림은 1800년 나폴레옹에 대한 암살 기도가 아니라, 1858년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에 대한 암살 시도였던 Orsini 사건을 그린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때도 나폴레옹 3세는 극장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링컨 대통령도 극장에서 암살 당했네요.)



이런 연극 공연은 책에 비해 이해하기 쉽고 대중의 감성에 직접 호소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나폴레옹은 연극 내용의 통제에 직접 펜을 들 정도로 세심하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가령 1805년 나폴레옹은 밀라노에서 푸셰에게 편지를 써서 프랑스의 성군인 앙리 4세를 주제로 한 새로운 연극을 취소하라고 지시했는데,   이유는 너무 근대의 일이라서 관객들에게 '필요없는 열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격파하고 바르샤바 입성 직전이던 1806년 말, 당시 매우 바쁘고 긴박한 상황이었음에도 푸셰에게 또 편지를 써서 레이니에르 (Reynier)의 연극 '성전 기사단'에 대해 비평하며 '성전 기사단'을 화형에 처한 프랑스 왕 필립이 독재자가 아닌 '국가의 구원자'로 그려져야 한다고 타박하는 세심함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연극 공연을 세밀하게 통제하기 위해서는 배우들 개인에 대한 통제가 필수적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당시의 대배우 탈마 (François-Joseph Talma)의 개인적인 친구로서, 공연 불과 12시간 전에 편지를 써보내며 '그 연극 말고 이 연극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요구할 정도였고, 푸셰의 비밀 경찰들은 각 배우며 여배우들의 일거수일수족을 감시하며 그들의 사생활까지 모두 파악하여 개인적인 약점을 확보해두기도 했습니다.   가령 어떤 여배우에 대한 사찰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었지요.

'마담 슈비니는 자신의 전원 주택에 24세의 젊은 남자와 함께 있었는데 그 남자는 세상에 별로 알려지 않은 인물로..."


 


(당대의 대배우 탈마입니다.  이 그림은 라신느의 희곡 부르투스에 출연하던 모습인데, 이렇게 정말 토가 같은 제대로 된 로마 의상을 입고 나온 것은 탈마가 거의 최초라고 합니다.  그 이전에는 연극 배우들이, 로마 시대 사람을 연기하는데도 비교적 현대적인 옷차림을 하고 나왔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런 연극 공연은 사실 관람료가 꽤 비싼 것으로서, 중산층 이상에게나 주어지는 문화 혜택이었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나폴레옹은 정작 연극 공연이 가장 큰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대상이던 문맹의 서민들에게도 이 연극 공연이라는 도구를 활용하고자, 집권 초기이던 1802년 8월 15일 그의 생일 축하일 때부터 시작하여, 특별한 기념일이나 행사에서 자주 공짜 극장 공연을 베풀었습니다.  이런 특별 무료 극장 공연은 그가 1814년 권좌에서 내려올 때까지 12년 간 무려 28번이나 펼쳐졌습니다. 





(막간을 이용한 자랑질...  작년 파리 여행 때 제가 직접 찍은 오페라 가르니에 내외부의 모습입니다.  이 아름다운 극장은 나폴레옹 3세가 지은 것으로서, 나폴레옹 가문과 극장의 인연은 참 질긴 것 같습니다.   당시 이 극장의 설계가 자신이 지원하던 건축가에게 맡겨지지 않은 것에 대해 삐져 있던 황후 유제니가 개관식에서 '이건 뭐 루이 14세 스타일도 아니고 루이 15세 스타일도 아니고...' 라며 투덜거리자, 건축가인 샤를 가르니에가 '황후 마마, 이건 나폴레옹 3세 스타일입니다.  그런데도 불평을 하십니까 ?' 라고 맞받아친 것이 유명한 일화입니다.)


사실 나폴레옹이 국민들은 미개인이라고 비웃고 깔보았다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의 권력이 근본을 따지고 들면 총칼이 아닌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존경을 쥐어 짜내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던 것입니다. 

 

가령, 저 위에서 언급한 '앙리 4세' 연극의 취소를 지시하는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푸셰에서 '정부가 간섭한다는 티를 내지 않으면서 막아야 한다' 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국민이 두렵지 않았다면 그냥 '미개한 국민들은 황제의 칙령을 받으라~ 연극 취소하랍신다~' 라고 일방적으로 선포를 했겠지요.

미개하든 미개하지 않든, 국가의 주권과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국민 여론이 방송이나 일부 신문사의 선동질이나 여론 조작에 휘말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특히 공영 방송이 정권의 의향에 좌우되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대로 된 민주국가의 핵심 요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보수나 진보 양쪽 모두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뉴스 보도에 있어 중립과 공정이라는 것의 정의 자체가 매우 모호하므로, 이에 대해서는 양측 모두에게 할 말이 많은 것이 사실이겠지요.  하지만 공영 방송이 정권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양측 다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미녀를 팔아 세운 나라 - 발레프스카와 바르샤바 공국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이 '폴란드 땅'이라고 할만 한 도시에 처음으로 입성한 것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806년 11월 어느날 저녁 즈음 포젠 (Posen, 또는 포즈난 Poznan)에 에젤망 (Exelmans) 대령이 이끄는 제1 엽기병 대대 (Chasseurs-Cheval)가 입성할 때였습니다.   처음에는 먼저 입성한 선발된 기병들이 군도를 뽑아든 채 시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삼엄한 경계를 펼쳤으나, 곧이어 보병 부대들이 외곽에 집결한 뒤 시내 광장으로 질서정연하게 행군해 들어올 무렵에는 상당수의 시민들이 몰려 나와 이들을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인 에젤망 대령의 눈에, 상황은 매우 명료해 보였습니다.  프랑스 군은 완전히 우호적인 지역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고국 프랑스 도시에 들어올 때보다도 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곧이어 병사들이 몇명씩 나뉘어 시민들의 주택에 숙소를 배정받을 때, 프랑스 본토에서라면 집주인 가족들은 뚱한 표정으로 이들을 맞았을텐데 이 폴란드 시민들은 매우 흥분된 환대로 이들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포젠/포즈난 시의 위치는 위 지도에 표시된 제2차 폴란드 분할 구역 중 제일 서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지도상에는 Poznan이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지난 폴란드의 짧은 역사 편에서 정말 간략히 보셨듯이, 폴란드는 1794년 코시우스코 (Andrzej Tadeusz Bonawentura Kosciuszko)의 봉기가 러시아 군에 의해 진압된 뒤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에 의해 완전히 국가로서의 존재가 사라진지 약 10년 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폴란드 인들은 조국을 갈갈이 찢어 나눠가진 주변 강국들, 즉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그리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깊은 원한을, 그리고 이들을 차례로 꺾으며 진격해온 프랑스에 대해서는 적의 적이면 나의 친구라는 우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라는 국가의 위대함이 개인의 모습으로 발현된 존재였던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요즘의 인기 연예인 또는 스포츠 스타 이상의 전율을 느끼고 있었지요.  어쩌면 이 프랑스 황제가 폴란드의 독립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으니까요.

폴란드 인들의 이런 열기는 1807년 1월 1일, 휴식과 행정 업무 처리를 위해 바르샤바로 들어오는 길이던 나폴레옹에게도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바르샤바 근처의 블로니 (Blonie, 혹은 Bronia)라는 마을로 접어들자, 많은 바르샤바의 폴란드 시민들이 자신의 얼굴을 보고자 미리 나와서 열광적인 환영을 보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차를 타고 있던 나폴레옹은 그런 군중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환호에 답할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그는 약간 중2병 기질이 있었던지라, 일반 대중 따위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하는 성격이었고, 특히 바로 직전의 풀투스크 전투에서 개운하지 못한 결과를 맛보고 돌아오던 참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던 중, 그의 마차 옆을 호위하던 장교가 어떤 숙녀 한명을 데리고 마차 창문으로 다가 왔습니다. 

"폐하, 보십시요.  이 아름다운 숙녀분이 폐하의 용안을 뵙기 위해 이런 군중들 속을 뚫고 나오는 용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숙녀는 나폴레옹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습니다.  그 여자는 눈부신 외모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유창한 프랑스 어로 자신이 폴란드에 온 것을 천번만번 환영하며, 자신이 가져다 줄 폴란드의 구원에 대해 열정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즉각 마차 좌석에 마침 있던 꽃다발을 들어 그 숙녀에게 건네주며 '이것을 나의 선의의 표시로 받아달라.  바르샤바에서 또 만나기를, 또 그때 내게 개인적인 감사의 말을 해주기를 바란다.' 라고 너무나 노골적인 의사 표시를 했습니다. 




(18세기말~19세기 초반 바르샤바의 모습입니다.)



바르샤바로 돌아온 이후, 나폴레옹은 바르샤바의 내노라하는 귀족들과 귀부인들이 베푸는 만찬에 참석했는데, 특히 그 자리에는 미인들이 가득한 것이, 바르샤바에서 가장 아름다운 귀부인들이 선발되어 만찬에 참석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바르샤바의 귀족들은 나폴레옹의 손에 폴란드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여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기세였으니, 당연히 귀족 가문의 가장 아름다운 숙녀들을 총동원했던 것이지요.  실제로 나폴레옹도 이렇게 '눈에 띄게 아름다운 숙녀분들이 비정상적으로 많이 모인 것'에 대해 치하의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바르샤바 귀족들은 영웅호색이라고 당연히 나폴레옹의 입이 귓가에 걸릴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만찬이 끝나고나서, 나폴레옹의  궁정 장관(Grand Marechal du Palais)인 뒤록 (Geraud Christophe Michel Duroc)으로부터, '폐하로부터 직접 꽃다발을 받았던 블로니의 금발 숙녀분은 대체 왜 나타나지 않았는지'에 대한 불만을 듣고 놀라야 했습니다.  바르샤바의 귀족 사회는 당장 그날 밤부터 그 블로니의 금발 숙녀의 정체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아 그 정체를 찾아냈습니다.  바르샤바의 귀족 사회가 그다지 넓은 동네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대체 이 숙녀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





(이 그림은 나폴레옹의 궁정 화가라 할 수 있는 제라르 Gerard의 그림이므로, 거의 실제 모습에 가까울 것입니다.  외모만 보면 그렇게까지 미인은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만, 아마 태도나 교양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력이 대단한 여자였나 봅니다.  클레오파트라도 그런 유형의 미녀였다고 하지요.)




다들 아시다시피, 이 여인의 이름은 마리아 발레프스카 (Marie Walewska) 백작부인이었습니다.  1786년 12월 생이니까, 나폴레옹을 블로니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막 20살이 된 어린 나이였지요.  이 여자는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결혼한지 2년도 안되었고, 이미 아들 하나를 둔 젊은 엄마였습니다.  아버지인 라친스키 (Mathieu Laczynski)는 가난한 백작 가문 출신이었으나, 어머니인 에바 (Eva Zaborowska)는 부유한 자보로프스키 (Zaborowski) 출신이었지요.  덕분에 마리아는 괜찮은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가령 마리아에게는 니콜라 쇼팽 (Nicolas Chopin)라는 이름의 프랑스 어 가정교사도 있었는데, 이 사람의 아들이 바로 유명한 폴란드 작곡가인 프레드릭 쇼팽 (Frederic Chopin)이 됩니다.




(유명한 제자와, 위대한 아들을 둔 행복한 가정교사 니콜라 쇼팽의 초상입니다.)




이 모자랄 것 없어 보이는 젊고 아름다운 백작부인에게도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그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인 발레프스키 백작 (Athenasius count Colonna-Walewski)은 결혼 당시 이미 70을 바라보는 노인네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귀족 가문이라고 해도, 그렇게 아름답고 젊은 귀족 아가씨가 왜 그렇게 오늘내일 하는 노인네에게 시집을 가야 했을까요 ?  여기에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있었습니다.  이 마리아라는 아름다운 아가씨는 그렇게 얌전한 아가씨는 아니어서, 18살이 되기도 전에 이미 임신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가문의 스캔달과 딸의 미래를 걱정했던 어머니 에바가 서둘러 흥정을 했고, 그 결과로 노친네인 발레프스키 백작과 서둘러 혼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발레프스키 백작은 이렇게 태어난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쿨하게 인정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발레프스키 백작에게나 마리아에게나 이익이 되는 흥정이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 비슷한 일이 몇년 뒤 다시 벌어질 운명이었으니, 더더욱 그럴싸한 이야기이긴 합니다.

발레프스카 백작부인이 된 마리아가 그다지 얌전한 젊은 귀부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1807년 1월 나폴레옹과의 첫대면에서도 드러납니다.  당시 바르샤바 전체가 다가오는 나폴레옹의 존재에 대해 마치 월드컵 전야제처럼 흥분한 상태였긴 하지만, 귀족 가문의 젊은 아가씨 또는 유부녀가 신사의 보호 없이 자기들끼리 그런 환영 행렬에 나설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일탈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 예쁜 아가씨에게는 항상 있기 마련인 무수리 여자 친구 한명과 함께 마차를 타고 무작정 나폴레옹을 보러 떠난 것이지요.  여기서 잔뜩 몰린 군중들의 틈 속에서 마리아와 그녀의 무수리 친구는 거의 압사당할 뻔 하다가 그녀의 유창한 프랑스 어와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나폴레옹 근위대 장교의 눈에 띄어 나폴레옹 마차 옆까지 안내를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했을 뿐, 자신이 나폴레옹을 다시 만나 그런 영웅의 주목을 받는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르샤바 시내의 아름다운 귀부인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던 나폴레옹을 위한 만찬에도 참석을 사양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녀의 미모에 대한 나폴레옹의 인상은 너무나 강하여,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비위를 맞추기 급급했던 폴란드 귀족들이 그녀를 찾아 나섰던 것이지요.  그녀를 찾는 것은 쉬웠습니다.  그녀를 따라 나폴레옹 마차 곁까지 갔던 그녀의 무수리 친구가 발레프스카 백작부인이 나폴레옹에게서 꽃다발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이미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포니아토프스키 왕자의 모습입니다.  이 양반의 아버지는 폴란드 왕족이었고 어머니는 오스트리아 귀족으로서, 태어난 곳도 비엔나였고 군 생활은 오스트리아 장교로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삼촌인 스타니슬라브 2세의 영향을 받아 폴란드로 국적을 정하고 활약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라가 망하는 봉변을 당했지요.  이 양반은 1809년 오스트리아-폴란드 전쟁에서 공을 세워 프랑스 군의 원수직까지 맡게 되는데, 나폴레옹 휘하의 원수 중 외국인은 이 양반이 유일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마리아 발레프스카는 당시 바르샤바 시민들 중 최고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 (Jozef Poniatowski)의 방문을 받고 무척 놀랐습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의 마지막 왕이었던  스타니슬라브 2세 (Stanislaw August Poniatowski)의 친조카로서, 폴란드의 마지막 분할 때까지도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싸웠으며, 폴란드가 그렇게 망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폴란드의 다음 왕이 되었을 진짜 거물이었기 때문이었지요.  마리아 발레프스카는 그런 거물이 자신을 만나러 온 이유에 대해서 더욱 놀라야 했는데, 그 내용이 '나폴레옹이 원하는 여자가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온 바르샤바가 알고 있다.  나폴레옹의 한마디에 폴란드의 운명이 걸려 있다.  조국을 위해 나폴레옹의 애정을 만족시켜 달라'는 너무나 뻔뻔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발레프스카는 수치스러워하며 그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라는 사람들이 번갈아 그녀를 방문하여 그녀에게 나폴레옹의 정부가 되어 줄 것을 요청했고, 특히 놀랍게도 그녀의 남편인 발레프시키 백작이 앞장서서 그녀의 방에 들어와 이렇게 야단을 치는 바람에 결국 나폴레옹에게 가야만 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폴란드 최고의 귀족들을 모욕하고 있는거요 !  지금 우리 집 현관에 누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줄 아시오 ?  바로 프랑스의 원수인 뒤록 장군이오 !  이런 대인물을 현관에서 기다리게 한다는 것은 우리 조국의 운명을 쥐고 있는  프랑스 황제를 모욕하는 일이오.  남편으로서 명하건데, 당장 일어나 당신을 데리러 온 사람들을 맞아들이시오 !"





(큰 전공은 별로 없으나, 나폴레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던 뒤록의 초상입니다.   궁정 장관이었던 그의 역할은 한마디로 나폴레옹의 바깥 살림살이를 돌보는 일이었는데, 때문에 본의아니게 나폴레옹의 여자 심부름도 많이 해야 했습니다.)




그런 초상류층 유부남 유부녀의 불륜이 구체적으로 어떤 절차에 의해서 벌어지는지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발레프스카는 위엄을 지키며 쉽게 나폴레옹에게 자신을 허락하지 않았고, 나폴레옹은 황제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능수능란하게 '밀땅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며 며칠에 걸쳐 혹은 차갑고 점잖게, 바로 다음날은 불처럼 격정적으로 반응하며 발레프스카를 정복해 나갔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많은 신사 숙녀들이 참석하는 만찬에 발레프스카 부인을 초대하고, 밤이 늦어 다른 손님들이 돌아갈 때 따로 시종이 발레프스카 부인에 '잠시 여기서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라는 전언을 하며 나폴레옹의 침실로 그녀를 인도해가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아마 같이 만찬에 참석했던 폴란드 귀족 남녀들은 발레프스카가 뒤에 남는 것에 대해 애써 모르는 척 하며 자기들끼리 '성공입니다 성공이에요 !' 라는 눈빛을 주고 받았겠지요.

이렇게 외국의 권력자에게 자기 나라의 미녀를 갖다 바치며 그 비위를 맞추려는 행동이 역사적으로 드문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자랑스러운 행동은 절대 아니지요.  특히 남편으로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정말 굴욕스러울 것 같은데, 의외로 발레프스키 백작이 앞장 서서 아내를 그렇게 내몰았다는 것은 현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당시 기준으로도 그런 일은 결코 대놓고 이야기할 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에 썼던 나폴리 스캔들 - 엠마 이야기 http://blog.daum.net/nasica/6862519 편에도 이런 장면이 나오지요.  그 경우에도 엠마의 남편인 해밀턴 경은 평소 존경하던 넬슨 제독과 아내 엠마의 불륜에 대해 모르는 척 눈감아 주다가 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한집에 이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동거하는 무척이나 불건전한 모습을 연출했었지요.  당시 이 사건은 영국 사회 전체를 수치스럽게 만든 불륜 스캔들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엠마 해밀턴의 초상입니다.)




당대에 이런 스캔들이 2건이나 있었다고 해서 당시 도덕 기준에는 이런 일이 흔히 받아들여지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가령 엠마 부인의 경우, 넬슨이 죽는 순간에도 엠마에게 충분한 연금이 지급되도록 구질구질하게도 여러 차례 반복하여 유언을 남겼지만, 점잖은 영국 사회는 철저하게 엠마 부인을 무시했습니다.  또 나중의 일입니다만, 나폴레옹과 발레프스카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발레프스키 백작이 자신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이라고 선언하고 그렇게 키웠습니다.  만약 그렇게 자신의 아내가 나폴레옹의 정부였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면 그렇게 행동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이렇게 남편의 묵인 혹은 종용에 의해 이루어진 고위층들 스캔들의 여주인공 엠마나 마리아 발레프스카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다 젊어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가 할아버지 뻘의 귀족과 결혼한 여자였다는 점이지요.  엠마는 서민층 출신의 사실상 화류계 여자였다가 늙은 해밀턴 경과 결혼을 했고, 마리아 발레프스카도, 비록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불과하지만 어린 시절 불장난에 의해 혼전에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늙은 발레프스키 백작에게 시집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 두 여자들은 남성 귀족들이 전체 사회를 쥐고 흔들던 시대에 남자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역할을 해야 했던 불행한 희생물일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 발레프스카의 또다른 초상화입니다.)



하지만 또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넬슨 제독이나 나폴레옹이나 각각 엠마와 발레프스카를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또 이 두 여자들도 넬슨 제독과 나폴레옹을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조국이 원하지 않았던 사랑을 했던 엠마 부인의 경우는 더욱 그랬습니다만, 조국이 강요한 사랑을 해야 했던 발레프스카의 경우도 못지 않게 나름 애절한 사랑이었다고 합니다.  처음에 나폴레옹과 발레프스카의 불륜은 이 어린 미녀가 나폴레옹의 애간장을 쏙 빼놓아, 프랑스 황제로 하여금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에게 나라 하나 정도 쯤이야 뚝 떼어 주지 뭐' 하는 마음이 들기를 기대했던 폴란드 귀족 사회의 기대 때문에 발레프스카에게 강요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폴란드 귀족들이 간과했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비록 그때 즈음해서는 상당히 살이 찌고 여자 밝히는 추잡한 30대 후반의 아저씨였으나, 한때 날렵한 턱선을 자랑했던 미남으로서 이탈리아 남자들의 바람둥이 DNA가 박혀 있는 남자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발레프스카를 사랑한 것은 처음부터 확실한 사실이지만, 나중에는 폴란드 귀족들의 바램과는 정 반대로, 발레프스카가 나폴레옹을 더 사랑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제1통령 시절의 나폴레옹입니다.  사실 객관적으로 못 생긴 편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리고 미녀로 나폴레옹을 유혹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폴란드 귀족들의 계획은 애초에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무척 여자를 밝히는 사람이었으나, 어디까지나 여자를 노리개 취급했을 뿐, 결코 여자를 위해 자신의 야망에 조금이라도 손해끼칠 일을 하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발레프스카를 유혹할 때는 '자신의 한마디면 폴란드가 다시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 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나폴레옹 군 내에서 서열 2위 정도에 해당하는 뮈라 (Murat)가 1806년 말 바르샤바에 맨 처음 들어와, 독립에 대한 청원을 하는 폴란드 귀족에게 둘러 싸였을 때, 뮈라는 '프랑스는 한번도 폴란드 분할을 승인한 적이 없다, 폴란드가 자기 자신을 지킬 용기를 증명해 보인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라는 정도의 아리송한, 그러나 긍정적인 립 서비스를 폴란드 귀족들에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뮈라에게 '쓸데없는 말을 했다'며 뮈라를 크게 질책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를 독립시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처음부터, 프로이센이나 러시아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단순 무식한 장군이 아닌, 노련한 정치가이자 지식인이었던 그는 프로이센 정도의 2류 국가야 가볍게 밀어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 러시아와 같은 대국은 싸우기 보다는 화친해야 할 상대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폴란드 독립을 선언한다는 것은, 폴란드 분할 때 그 영토의 가장 큰 부분을 떼어갔던 러시아와 갈 때까지 가보자는 소리 밖에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관록의 제국 오스트리아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설령 프로이센이 차지한 폴란드 땅만을 대상으로 독립 폴란드를 선언한다고 해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 점령된 폴란드 영토에서도 소요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를 위해 프랑스의 피를 흘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발레프스카가 자신에게 넘어온 상태라고 확신이 되자, 침대에서 '나는 당신의 연인이기 이전에 프랑스의 황제요... 나 개인의 사랑을 위해 프랑스의 국익을 희생시킬 수는 없단 말이오' 라며 고뇌하는 척 하며 발레프스카의 양해를 구했습니다. 




(1807년 당시 막 수립된 시기의 바르샤바 공국의 지도입니다.  바르샤바를 포함한, 중앙의 크림색 부분의 땅입니다.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 때 바르샤바 공국을 침공한 오스트리아에 맞서 전쟁을 벌인 결과, 오히려 오스트리아 영토를 일부 점령하여 영토가 좀더 커지게 됩니다.)




비록 독립국가는 아니었지만, 폴란드 귀족들의 독립에 대한 염원은 바르샤바 공국 (Duchy of Warsaw)으로 구현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이 점거했던 폴란드의 옛 영토를 기반으로, 바르샤바 공국을 세워 준 것입니다.  이 공작령(duchy)라는 것은 왕이 아닌 공작이 다스리는 땅으로서, 자치권을 가진 독립된 지역이긴 했으나, 외교권과 같은 독립 국가가 누려야 할 외교권이 없었습니다.  공작이 다스리는 땅이니 이 나라의 주인인 공작이 있을텐데, 그건 누구였을까요 ?  당연히 아들 없이 사망한 전 국왕 스타니슬라브 2세 (Stanislaw August Poniatowski)의 친조카이자 이름난 장군이었던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가 적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도면밀한 나폴레옹은 전혀 엉뚱하게도 작센의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1세 (Frederick Augustus I of Saxony)에게 폴란드 공작이라는 작위를 새로 부여하고, 작센의 왕이라는 직위에 더해 이 바르샤바 공국의 주권자로 임명합니다.  이는 작센 왕국에게 바르샤바 공국을 떼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작센 왕이 개인적인 직위와 영토를 따로 갖는 형태였지요.  간단히 말해서, 작센 왕 아우구스투스는 명의만 빌려주는 바지 사장인 셈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왜 포니아토프스키를 따돌리고 이런 조치를 취했던 것일까요 ?





(바지 사장인 작센 왕 아우구스투스 1세입니다.)




포니아토프스키가 특별히 나폴레옹에게 밉보였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보다 먼저 뮈라와 만났었는데, 매우 용감한 군인이자 젋어서 오스트리아 군에서 장군까지 지냈던 진짜 귀족 포니아토프스키는 뮈라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었고, 뒤이어 만난 나폴레옹에게도 무척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물이 바르샤바 공국의 실질적인 주인이 된다면 그건 주변국에 대한 도발이 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이 바르샤바 공국이 포니아토프스키의 지휘 하에 정말 제대로 된 국가 형태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나폴레옹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르샤바 공국을 세운 것은, 폴란드 귀족들의 독립 국가에 대한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필요할 때마다 병력과 자금을 뽑아 쓸 수 있는 전진기지를 동부 유럽 한복판에 건설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바르샤바 공국이 설립되면서, 폴란드 귀족들의 자존심은 충족되었을지 몰라도, 그 자존심의 댓가는 상당했습니다.  그 댓가는 끊임없는 전쟁과 재정난으로 다가왔지요.

원래 폴란드는 러시아, 독일, 오스만 투르크 등 주변에 워낙 강적들이 많았고 게다가 폴란드 내부에서도 귀족들간의 내전이 잦아 크고 작은 전쟁이 많은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국민들의 전쟁 경험이 많을 것 같지만, 의외로 폴란드는 인구 대비 병력의 비율이 상당히 작은 나라였습니다.  아직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전인 1781년 경, 유럽 주요 국가의 성인 남성 인구 대비 훈련된 병력의 비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폴란드       1/472
프랑스       1/153
오스트리아  1/90
러시아       1/49
프로이센    1/26


프로이센 같은 경우 워낙 군국주의가 판을 치는 나라이고, 러시아는 카자흐처럼 세금 대신 수년간 짜르의 군대에서 기병으로 복무를 해야 했던 유목 민족의 존재 때문에 이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게 나타났다고 쳐도, 폴란드는 비교적 평화로운 프랑스에 비해서도 이 비율이 지나치게 적은 편이었습니다.  대체 폴란드처럼 전쟁이 많았던 나라에 이게  어찌된 일이었을까요 ?

그 이유는 폴란드의 낙후된 사회 구조 탓이 컸습니다.  미국 역사가인 슬로안 (Sloan)이 당시 폴란드 인들에 대해 '폴란드 인들은 멍청하고 게으른 촌뜨기 아니면 쾌락에 탐닉하는 우아한 귀족들이다'라고 쓰기도 했듯이, 폴란드는 중산층 시민 계급이 발달하지 않은, 지배층 귀족들과 피지배층 농민들의 격차가 큰 신분 사회였습니다.  원래 전쟁을 담당했던 귀족들은 당연히 날개달린 후자르 (winged husaar)의 로망을 잊지 못하고 귀족스러운 기병의 육성에만 심혈을 기울였지요.  덕분에 폴란드의 창기병 울란 (Ulhan, 폴란드 창기병의 전성시대 http://blog.daum.net/nasica/6862375 참조)은 유럽 전역에서 명성이 자자했지만, 그런 일류 기병들만으로는 폴란드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특히 18세기 중반 이후의 전장은 잘 훈련된 보병과 포병이 지배했기 때문에, 기병 위주의 군사력은 낡은 시대의 유물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하고 케케묵은 폴란드 귀족들은 기병을 포기하고 냄새나는 농민들을 긁어모아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것이 귀족의 체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폴란드 병사라고 하면 저 독특한 모자를 쓰고 창을 든 창기병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폴란드의 지배층인 귀족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근대 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낡은 사상에 젖어 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폴란드 귀족들은 '폴란드 인이여 단결하라'를 외칠 때, 그 폴란드 인이라 함은 어디까지나 폴란드 귀족들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 전체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은 폴란드 인이라고 인정하지도 않았지요.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농민들도 폴란드 국민이라고 인정한 것은 제2차 폴란드 분할 바로 다음 해인 1794년 코시우스코(Kosciuszko) 봉기 때 코시우스코 장군이 선포한 폴라니에치 (Polaniec) 선언문이 최초였습니다.  이때 많은 농민들이 코시우스코 봉기에 가담했는데, 이들은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고작 풀베는 큰 낫 등으로 무장한 상태로도, 러시아 군과 싸워 이기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병력과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은 패배하긴 했으나, 이렇게 1년 반 동안이나 러시아 군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코시우스코가 내건 구호, "Gli uomini liberi sono fratell" 즉 자유인은 모두 형제다 (Free men are brethren) 라는 평등 사상이 폴란드 농민들에게 희망과 애국심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폴란드 농민들은 세금을 걷어가는 사람들이 폴란드 귀족이건 러시아 귀족이건 사실 별 상관이 없었으므로 뾰족하게 지킬 것도 없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이렇게 근대 계몽 사상에 입각한 자유와 평등이 어떤 위력을 가지는지 이해 못했던 귀족들 때문에 결과적으로 넓은 영토와 결코 적지 않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의 군사력은 그다지 위력적이지 못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3차례에 걸친 폴란드의 분할이었습니다. 




(1794년 코시우스코 봉기 때의 모습입니다.  농민 복장의 폴란드 병사들과 그들의 손에 들린 낫 같은 조잡한 무기들을 보십시요.)



나폴레옹은 이러했던 폴란드 인들의 군사력을 완전히 프랑스 식으로 환골탈태를 시켜놓습니다.  그는 바르샤바 공국을 세우고 자신이 작성한 바르샤바 공국 헌법을 선포함과 동시에, 21세부터 28세 사이의 모든 남성들이 6년 동안의 의무 복무를 하도록 징집제를 실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징집제는 폴란드의 자유를 수호하기 보다는,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가령 처음에 약 2만이 넘는 병력으로 시작한 바르샤바 공국의 군대는 징집 서류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1807년 8월, 각 사단 중 가장 훈련과 장비 상태가 좋은 연대를 뽑아 머나먼 스페인으로 파병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어서 벌어진 러시아와의 전투에서도 적극 활용되어 2천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야 했습니다. 




(사실 폴란드 망명자들로 이루어진 나폴레옹의 폴란드 군단은 바르샤바 공국 설립 이전부터도 온갖 위험전장에 투입되어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심지어 폴란드의 독립과는 정말 조금도 상관없는 생 도밍그 노예 반란 진압에도 투입되어 많은 이들이 황열병에 희생되었습니다.)



폴란드 인의 피를 흘려야 한다면 최소한 그 싸움이 폴란드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또 참전할지 말지 여부를 폴란드 인들이 결정해야 할텐데, 바르샤바 공국 중 어느 누구도 그 결정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미 결정된 내용이 파리에서 파견된 프랑스 대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통보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폴란드 인들은 자신들의 기묘한 반쪽짜리 나라가 '작센 왕에, 프랑스 법에, 프로이센 화폐에, 군대만 폴란드 인들로 채워져 있다' 라고 씁쓸한 농담을 주고 받았습니다.  이런 병력 착취는 점점 정도가 심해져서, 1812년에는 전체 인구가 430만 밖에 안되는 작은 공국에서 무려 10만이 넘는 병력이 나폴레옹을 따라 두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러시아로 떠나야 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전체 성인 남성 중 군사 훈련을 받은 인구의 비율이 1/472였던 나라에서, 이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체 인구의 1/43이 현역으로 복무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는 당연히 엄청난 젊은이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르샤바 공국의 국방부 장관직과 프랑스 군의 원수직을 겸직하던 포니아토프스키 본인의 목숨까지도 결국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희생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포니아토프스키의 전사 장면을 그린 모습입니다.  일설에는 적의 도강을 두려워 한 프랑스 군이 무차별로 쏘아대는 총격에 사살된 것이라고도 합니다.)



나폴레옹의 수탈은 젊은 남자들을 병사로 끌고 가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워낙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끌려 갔으므로 농업 생산력이 떨어졌고, 게다가 대륙 봉쇄령에 의해 곡물 수출길이 막히자 당장 경제도 어려워졌습니다.  거기에 한술 더떠 나폴레옹은 그야말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짓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즉, 1807년 틸지트 (Tilsit) 조약에서 프로이센으로부터 뜯어낸 전쟁 배상금 채권을, 당장 현금이 필요하다면서 폴란드에게 채권깡을 해서 넘긴 것입니다.  즉, 바르샤바 공국에게 이 4천3백만 프랑 상당의 채권을 2천1백 프랑의 현금을 받고 넘겼습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투자를 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좋은 투자라면 나폴레옹이 폴란드에게 넘길 리가 없었겠지요.  이 채권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빚을 진 프로이센이 빚을 제때 갚을 능력이 되어야 했지만, 패전의 충격에서 헤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리던 프로이센은 이 빚을 갚지 못했습니다.  이는 곧장 신생 바르샤바 공국을 재정 공황 상태에 빠뜨렸고, 폴란드 인들은 심각한 인플레와 과중한 세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야기를 다시 발레프스카에게 되돌려 보시지요.  나폴레옹의 인생에서 큰 위치를 차지한 여자들 셋을 고르라면 (어머니와 여동생 같은 가족은 빼고) 뭐니뭐니해도 전처 조세핀과 후처 마리 루이즈, 그리고 정부 발레프스카를 뽑을 수 있습니다.  조세핀에 대해서야 따로 말이 필요없겠고, 마리 루이즈는 오스트리아와의 유대 관계를 맺어준 정략 결혼녀라는 점, 그리고 나폴레옹의 모든 애정이 다 결집된 존재였던 로마 왕 나폴레옹 2세를 낳아주었다는 점을 빼면 사실 나폴레옹의 애정을 차지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발레프스카는 나폴레옹이 정말 순수하게(?) 사랑한 여자였습니다.  그는 바르샤바에 있는 내내 발레프스카를 처소로 불러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행궁을 동부 프로이센으로 옮겨갔을 때는 아예 발레프스카를 함께 데려갈 정도였습니다.  1809년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여 다시 한번 비엔나 쇤브룬 (Schonbrunn) 궁전을 점령했을 때도, 나폴레옹은 그녀를 불러들여 쇤브룬 궁전 옆의 주택에 살게 했지요.  이때 매우 중요한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발레프스카가 임신을 하고 나중에 사내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황녀님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리 루이즈입니다.  이 여자가 발레프스카와 나폴레옹의 결별을 가져옵니다.) 



나폴레옹은 조세핀에게서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당시 의학으로는 그것이 나폴레옹의 문제인지 조세핀의 문제인지 밝힐 수가 없었지요.  특히, 조세핀이 전남편 보아르네 장군과의 사이에서는 아이를 2명이나 낳았으므로, 나폴레옹은 더욱 자기 자신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을 겁니다.   나폴레옹은 조세핀보다 더 부지런하게 끊임없이 외도를 했고, 그 중 여배우 하나가 나폴레옹의 아이라고 주장하며 아이를 출산하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도 실제로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일 것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그 여자의 평소 생활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확신할 수는 없었지요.  그런데, 이때 태어난 아이는 모두가 100% 확실한 나폴레옹의 아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100% 확신할 수 있었고, 자신의 제국을 영원히 이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실 황후에게서 태어난 적자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그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다시 한번 꺾은 나폴레옹은 이를 계기로 조세핀과 이혼하고 합스부르크 황실의 마리 루이즈를 맞아들이게 되지요.

발레프스카는 나폴레옹의 아이인 알렉상드르 (Alexandre Joseph)를 데리고 1810년 나폴레옹을 따라 파리로 왔습니다만, 나폴레옹은 이미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녀에게 파리 시내 몽모랑시 가(Rue de Montmorency)에 저택 하나를 주어 거기서 나오는 연간 12만 프랑의 임대 소득을 얻을 수 있도록 했지만, 그건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라는 신호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발레프스카에게 파리 시내 모든 황실 박물관에 무료 입장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습니다만, 아마도 그건 발레프스카에게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때 나폴레옹과 발레프스카의 관계는 사실상 끊어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프스카는 나폴레옹을 무척 사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812년 발레프스카는 자신을 나폴레옹에게 팔아먹은 남편 발레프스키 백작과 이혼합니다.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서류상으로만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던 결혼이었습니다.  그녀는 이혼할 때 발레프스키 백작의 재산 절반을 받아왔는데, 아마도 바르샤바 공국의 설립에 몸바쳐(?) 도움을 준 그녀에 대한 남편의 선물이었나 봅니다.  그녀는 1814년 나폴레옹이 폐위되어 초라한 엘바 섬에 유폐되자, 그의 여동생 외에는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던 그를 찾아 엘바 섬까지 찾아감으로써 변치 않은 그녀의 사랑을 역사 앞에 증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끝까지 개자식이었습니다.  한동안 그녀를 자신 곁에 두었으나, 나폴레옹은 그녀를 결국 쫓아보내다시피 돌려 보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곁에 있을 경우 정실 황후 마리 루이즈가 자신을 찾아 오지 않을 핑계거리가 된다는 것이었지요.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사실 나폴레옹이 원했던 것은 마리 루이즈 본인보다는 그녀가 가진 오스트리아 황실과의 연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적자인 아기 로마 왕이었습니다.  물론 마리 루이즈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미 오스트리아 귀족 장군 나이페르그 (Adam Albert von Neipperg)와 바람이 난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 패기있어 보이는 애꾸눈 장군이 나이페르크입니다.  처음부터 마리 루이즈가 나폴레옹과 합류하지 못하도록 마리 루이즈를 잘 달래라는 지시를 받았던 그는 시작부터 1년 안에 나폴레옹의 와이프를 내 여자로 만들겠다고 공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리 루이즈는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이 장군의 애인이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서 끝내 버림받은 그녀는 1816년 나폴레옹의 먼 친척인 또다른 코르시카 출신의 프랑스 귀족인 도르나노 (Philippe Antoine d'Ornano) 백작과 재혼을 합니다.  이 결혼은 오래 전부터 발레프스카를 사모해온 도르나노 백작의 구애에 발레프스카가 응한 결과였습니다.   그녀는 그 다음해 도르나노의 아이를 낳고는 신장병으로 인해 병사합니다.  아직 31세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그녀가 낳은 나폴레옹의 아들인 알렉상드르 발레프스키 백작 (Alexandre Joseph Colonna-Walewski)은 처음에는 폴란드의 백작으로서 살아가다, 나중에 프랑스 외인부대의 장교직을 지내며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뒤, 2월 혁명 때 루이 필립을 지지하는 오를레앙 파가 되어 그 밑에서 관직에 올랐고, 이어 나폴레옹 3세의 정부 하에서는 영국과의 외교 관계일을 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가 나폴레옹의 친아들임을 알고 있었으나 정작 자신은 자신의 아버지가 발레프스키 백작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 분이 알렉상드르 보나파르트 발레프스키 공작입니다.  원래 폴란드 백작이었는데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공작의 작위를 받았거든요.  이건 1856년 찍은 사진입니다.)

 

출처 : 솔바람소리
글쓴이 : 구름에 달가듯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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