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화함대의 기록을 불태워라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 열전]

2015. 11. 3. 09:30책 · 펌글 · 자료/역사

 

정화함대의 기록을 불태워라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 열전]

 

1421년 항해’가 재현된다 [2004.01.15 제492호]

 

현재 중국에서는 정화 함대의 대형 보선을 복원해 ‘1421년 항해’를 그대로 재현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과연 정화 함대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세계일주까지 할 수 있었는지 간접적으로 증명해보자는 시도인 셈이다. 이 프로젝트는 중국의 예비역 해군 장성과 해양학자 등이 추진하고 있으며 스폰서를 모으고 있는 상태이다. 멘지스도 지원 의사를 밝힌다. 보선을 복원한 뒤 1421년의 추정 항로를 따라 항해하며, 선원들은 당시 선원들이 먹던 방식으로 먹는 등 당시와 똑같은 조건을 재현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이전까지는 중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최종 목표다.

 

중국 지도부는 ‘아메리카 발견설’에 대해 현재 외형적으로는 반응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정화 함대에 대해 그들은 이미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명나라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에 차 있다고 분석하는 의견도 나온다. 영국의 우주과학자 마이클 마틴 스미스는 장쩌민 주석이 1996년 당대회 회기 중인데도 매우 이례적으로 국제우주비행사연맹(IAF) 총회에 참석해 발표한 개회사에서 그런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우주정거장은 15년 이내에 가능해질 것입니다. …달과 화성에도 기지를 건설할 것입니다. …중국 과학원 회원인 왕시지 동지는 우주야말로 육지, 바다, 하늘에 이어 인간이 자신을 적응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4번째 영역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나는 아폴로호의 달 착륙 50주년이자 정화 함대 항해 600주년인 2019년 무렵 우리가 달에 갔다가 귀환해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인류의 복리와 장기적 진보를 위해 피도 흘리지 않고, 침략도 하지 않고 새 영역을 발전시키는 것보다 세계 속에서 중국의 위상을 높이는 것은 없습니다. 우주로 나아감으로써 중국은 다시 한번 지구상에서 가장 선진되고 진취적인 문명으로 부상할 수 있습니다. 중국 만세!”

‘선저우계획’(神舟計劃), 제2의 정화 대원정은 이미 시작됐다.

오귀환 /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정화2] “정화 함대의 기록을 불태워라” [2004.01.15 제492호]

 

1천년 동안의 중국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대사건… 왜 그들의 아메리카 경영은 실패했나

1421년 여름 카리브해에서 갈라진 주문의 분견대는 북아메리카로 향했다. 그러나 푸에르토리코에서 허리케인을 만나 배 9척을 잃는다. 비미니 제도에서 발견된 ‘비미니 로드’라는 석조물은 이때 위기 상황에서 배를 해안에 상륙시키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주문 함대는 쿠바를 거쳐 오늘날 미국령인 로드아일랜드에 닿는다. 나중에 아메리카에 온 콜럼버스와 베라차노 같은 초기 항해자들은 바로 이곳에서 이 명나라 선원들의 후손을 만나게 된다. 함대는 캐나다 해안을 따라 북으로 계속 올라갔다. 정화 함대에는 황제의 이런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세상 동서남북의 끝을 찾아서 확인하라. 모든 항해의 기준별의 정확한 위치도 알아내라.”

 

 

놀라운 항해술과 지도제작 능력


그린란드를 돌아간 함대는 적어도 북극점 250마일(약 400km)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일부 중국학자들은 북극점까지 갔다고 주장한다. 나중에 탐험가 난센이 부근에서 발견한 이상한 철제 리벳들의 성분을 정확히 분석하면 이 주장이 맞는지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주문 함대는 다시 시베리아 북부 해안을 타고 동쪽으로 항해한다. 1507년 제滂?‘발트세뮐러 세계지도’에 놀랍게도 시베리아 북부 해안이 백해로부터 베링해협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이런 항해술과 지도제작 능력을 갖춘 것은 정화 함대밖에 없다. 그들은 달의 기울기로 정확한 경도를 결정할 수 있었고, 당시 이미 600년 이상 되는 대양 항해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 1507년 제작된 ‘발트세뮐러 세계지도’. 정화 함대의 궤적을 추정케 해준다.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 북부 해안을 답사한 뒤 그 지도를 제작한 것은 그로부터 300여년 뒤의 일이다. (멘지스는 오늘날에도 무동력선은 아프리카 서안의 케이프 베르데에서 적도 해류를 타면 그대로 카리브해로 들어가고, 멕시코 만류를 따라 미국 동부 해안을 올라간 다음 다시 해류를 타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북대서양 중앙부에 있는 아조레스 제도를 거쳐 다시 케이프 베르데로 되돌아온다고 밝히고 있다. 콜럼버스도 대서양의 해류 등의 영향으로 바로 이 항로로 여행했다.)

 

주문 함대는 그렇게 베링해협을 통과해 중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남쪽 항로로 들어간 주만 함대와 홍보 함대는 브라질쪽으로 내려간다. 그들은 오리노코강 삼각주 지역에 정박했다가 남대서양의 포클랜드 군도로 갔다. 그 뒤 함대는 오늘날 아르헨티나에 해당하는 파타고니아에 상륙해 동식물을 채집하고 연구하며 6개월을 보낸다. 이런 추정은 1430년 명나라에서 출판된 <서양번국 풍물화집>(The Illustrated Record of Strange Countries)에 파타고니아 특산 동물로 지금은 멸종한 ‘밀로돈’이 그림과 함께 묘사돼 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다. 화집에는 “중국에서 서쪽으로 2년을 항해한 곳에서 발견했다”고 적혀 있다.

 

밀로돈은 키 3m에 무게 200kg이나 나가는 동물로 1513년 제작된 <피리 레이스 세계지도>에도 묘사돼 있다. (<피리 레이스 지도>는 멘지스가 정화 함대의 궤적을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되는 초기 세계지도이다. 이 지도는 1428년 제작된 세계지도에서 가장 중요한 ‘남아메리카 부분’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1428년 지도는 포르투갈에서 사라졌는데, 콜럼버스의 항해에 참가했던 한 선원이 이 지도의 ‘남아메리카 부분’을 가지고 있다가 오스만 터키에 포로로 잡히면서 다시 등장한다. 오스만 터키의 제독 피리 레이스가 그 중요성을 알고 새 세계지도에 집어넣도록 지시한 것이다. 따라서 1492년 콜럼버스가 남아메리카를 그린 문제의 1428년 세계지도를 가지고 항해에 나섰다는 추론은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다. 멘지스는 1428년 지도의 최초 원본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제작 능력과 항해능력을 보유하고 있던 정화 함대의 지도일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다.)

 

 

 

» 1513년 제작된 ‘피리 레이스 세계지도’.

 

남중국 원산인 아시아계 닭이 남아메리카 곳곳에서 무더기로 발견된다는 사실도 정화 함대와 남아메리카의 밀접한 연관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거꾸로 남아메리카 원산인 옥수수도 이때 중국과 필리핀 등에 전래됐다.

아메리카에 첫 식민지를 건설하다

주만과 홍보의 함대는 마젤란해협 부근에서 서로 헤어진다. 주만의 함대는 태평양으로 들어가 차가운 훔볼트 해류를 타고 남아메리카 동부 해안을 거슬러 올라갔다. 홍보의 함대는 남반구 항해에서 기준별이 된 카노푸스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남극해의 남셰틀랜드 제도로 내려갔다.

주만 함대는 페루 해역에서 남적도 해류를 타고 다시 서쪽으로 밀려갔다. 그들은 투오모토 군도와 피지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에 상륙했다. 뉴캐슬 바로 북쪽 해안에 닻을 내린 그들은 돌로 수비대 시설을 세우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어느 곳보다 풍부한 선박 잔해와 중국 특산품이 발견된다. 금을 채굴한 흔적도 남아 있다. 주만 함대는 그 뒤 인도네시아에 해당하는 스파이스 제도까지 갔다. 놀랍게도 그들은 중국으로 가지 않고 다시 해류를 타고 북아메리카로 되돌아갔다. 미국의 서부 해안에 도달한 함대는 해안을 따라 남아메리카까지 내려가며 곳곳에 정박했다. 새클라멘토에서는 정화 함대의 선박 잔해의 흔적, 벼 등이 확인됐고, 중국계로 보이는 사람들이 인디언들과 함께 살았다는 신빙성 있는 기록도 남아 있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도 정화 함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닻이 발견됐다. 무엇보다 멕시코 서해안 마초아칸에서 지금도 제작되는 옻칠기·직물염색 제품 등은 정화 함대와 이곳 원주민들이 교역을 했으며, 중국인들이 장기간 거주하며 이 기술들을 전수해주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베네수엘라 인디언 가운데서는 중국인 혈통을 증명하는 DNA가 확인되고 있으며, 페루 인디언 가운데서는 중국어를 말하는 인디언들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주만 함대가 아메리카에 상륙해 결국 첫 식민지까지 건설했음을 보여준다. 그 뒤 주만 함대는 다시 적도 해류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1423년 10월 중국으로 귀환한다. 주만의 함대 가운데 중국에 도착한 것은 총 25척 가운데 단 한척이다.

 

 

 

» 별호가 ‘삼보’였던 정화는 영문으로 ‘Sambo’ 또는 ‘Sin Bao’로 서양에 전해졌다. 그런데 ‘Sin Bao’가 아랍권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Sin Bad’로 오기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따라서 ‘신밧드의 모험’은 원래 ‘정화의 모험’인 셈이다.

 

정화 함대의 강력한 후원자인 영락제는 1424?타타르족을 정벌하러 갔다가 병으로 죽었다. 손자인 선덕제가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의도로 실시한 1430년의 제7차 대항해를 끝으로 명나라는 바다를 닫아버리기 시작했다. 환관과 라이벌 관계였던 한림학사들은 무능한 황제들을 부추겨 환관들이 주도하던 대항해 정책을 무너뜨렸다. 남경의 조선창을 폐쇄하라는 칙령이 포고됐다. 대양 항해 선박을 더 이상 만들지 말라는 칙령에 저항하던 사람들은 처형됐다. 중국의 찬란한 대항해 시대는 유학자 세력의 눈먼 이기심에 짓밟혀갔다. 그 마지막 장면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대양 강대국에서 내륙국가로의 추락

“1477년 한 야심적인 환관이 정화의 대항해에 대한 기록을 내줄 것을 병부에 요구했다. 병부의 부책임자였던 한림학사 유대하는 문서보관소에서 정화 함대가 만든 지도와 기록 등 방대한 분량의 문서를 압수한 뒤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병부의 각신(장관)에게는 ‘분실됐다’고 보고한다.

‘어떻게 문서보관소의 공식 문서들이 분실됐다는 말이오’

‘삼보(정화의 별호)의 서양 원정은 수만금과 수만의 양곡을 낭비했을 뿐입니다.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멋지고 비싼 물품을 가져온들 조정에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설사 그 옛날 문서들이 아직 보관돼 있더라도 이런 일이 재발되는 것을 뿌리째 뽑기 위해선 모조리 없애버려야 합니다.’

모든 사태의 전말을 알아챈 각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역시 공은 대단하오. 다음 이 자리는 확실히 당신 것이야!’”(루이즈 레바티즈 <중국이 바다를 지배하던 시대>(When China Ruled the Sea·국내 미번역)에서)

과연 정화 함대가 아메리카까지 갔는지 중국 역사나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나아가 이 분서 사건를 계기로 중국은 해양강국의 자리를 급속히 잃기 시작한다. 15세기가 되기도 전에 중국에서는 대형 보선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보선들은 조선소에서 썩고, 화약과 총포의 연구도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아메리카에 남은 중국인과 모국의 연결선은 다시 복원되지 않았다. 중국은 이제 대형 보선으로 대양을 누비던 강대국에서 중소형 평저선 따위로 대운하나 오가는 내륙국가로 전락했다. 분서 사건 뒤 채 30년도 지나지 않아 명나라는 해안 지역을 지속적으로 침범하는 왜구들조차 제대로 막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중국은 그 뒤 거의 600년 동안 강대국의 자리를 되찾을 수 없었다. 정화 함대의 기록을 불태운 것은 바로 지난 1000년 동안의 중국 역사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오귀환 /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출처 : 솔바람소리
글쓴이 : 구름에 달가듯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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