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루체른,「빈사의 사자상」(펌)

2015. 8. 25. 10:17여행/스위스

 

 

 

스위스 용병(Reisläufer)들은 중세 말기부터 계몽주의 시대까지 유럽 용병시장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브랜드’였다. 그들은 그들만의 창과 핼버드로 무장한 밀집방진으로 유명했다. 당시 스위스의 각 ‘주(州)정부(canton)’들은 백성들에게 군역을 부과했기 때문에 스위스인들은 전투에 잘 훈련되어 있었고 또한 군장비도 갖추어져 있었다.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고 싶은 타국 군주들은 주정부에 의뢰를 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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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인들의 용맹함은 13세기 말경부터 시작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부터 널리 알려졌다. 이들이 용병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계기는 부르군트 전쟁(Burgundian Wars, 1474~1477)인데, 부르군트 공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스위스 용병들은 프랑스 왕에게 고용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스위스인들은 때로는 개별적으로, 때로는 주정부의 기치 아래 외국 고용주의 돈을 받으며 타지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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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용병들의 가공할 만한 위력의 거대한 장창방진과, 포로를 잡아두는 것을 거부하는 특성과, 승리로 점철된 전과(戰果)는 타인에게 공포와 경의를 갖게 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 “군주론”에서 그들의 전쟁수행 방식에 대하여 장문으로 언급했다. 프랑스 발루아 가의 왕들은 스위스인들이 없으면 제대로 군대를 꾸리지 못했을 정도다.

스위스의 젊은이들은 낙후된 고향에서 바랄 수 없는 경제적 수익과, 모험과, 유능한 군인으로서의 스위스인의 자부심과, 오랜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전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외지로 나가 싸우고, 더러는 죽곤 했다.

1490년대까지 스위스 용병들은 용병시장을 사실상 독점했다. 그러나 이후 스위스 용병들을 모방한 용병부대가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여준 것이 바로 “란츠크네히츠Landsknechts"였다. 그들은 독일 출신이었으며, 스위스인들의 전술에 대해 속속들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스위스 용병과 란츠크네히츠는 대(大)이탈리아 전쟁(Great Italian Wars, 1494~1559)에서 비로소 자웅을 가리게 된다. 스위스인들은 노바라 전투(Battle of Novara, 1513)에서 밀라노 공국의 편에 서서 프랑스에 고용된 란츠크네히츠를 철저하게 격파했다. 그러나 이후 마리냐노 전투(Battle of Marignano, 1515), 프랑스 편에서 싸운 비코카 전투(Battle of Bicocca, 1522), 파비아 전투(Battle of Pavia, 1525) 등에서 패배하면서 용병세계에서의 일인자 자리를 내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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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최강의 자리를 내주기는 했으나, 그들은 여전히 유럽에서 사랑받고, 또 그들의 명예를 중히 여기는 용병들이었다.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루이 16세의 왕궁으로 폭도들이 난입했을 때, 죽어가면서까지 자리를 지킨 위병들은 다름 아닌 스위스인들이었다. 오늘날에도 바티칸 시국에서는 근위병으로 스위스인들을 고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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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파랑-빨강의 화려한 제복과 절도 있는 표정, 상시 방어 체제의 태도. 바티칸을 지키고 있는 세계 최소 규모의 군대 군인은 다름 아닌 스위스 용병이다. 가난한 알프스 산속에서 식구들을 벌어먹이기 위해 돈을 받고 이웃 나라를 위해 대신 싸우며, 그 용맹함과 신의로 유명해진 스위스 용병의 현대판이라 할 수 있다.

스위스 근위병은 1505년 6월 21일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바티칸 궁을 보호하기 위해 신속히 200명의 군인을 파견해 줄 것을 스위스 동맹에 요청하면서 바티칸을 엄호하게 되었다.

첫 150명의 근위병이 그 해 가을 로마로 파견되었고, 1506년 1월 로마에 도착하게 된다.

이 도착일이 스위스 근위병의 탄생일로 지정된 것.

스위스 근위병들은 그 동안 무수히 많은 희생을 치러오기도 했는데, 실례로 1527년 5월 6일, “로마 약탈” 때 카를 5세 황제의 군대와 치른 전투에서 약 150명의 스위스 근위병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실제로 목숨을 잃은 대다수의 근위병들은 취리히 출신의 개신교 종파였음에도 교황을 엄호하겠다는 맹세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

스위스 근위병들은 이 날을 여전히 기념하며 신입 근위병들이 바티칸과 교황을 목숨을 지켜 엄호할 것을 선서하게 하고 있다.

오늘날 스위스 근위병은 110명의 남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최소 복무 기간은 2년이다. 교황청 거주자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띄고 있으며, 교황의 외출을 수행하는 역할을 겸하고 있다.

스위스 법상, 스위스 시민이 국외에서 입대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나, 단 한 가지 예외로 교황청의 엄호는 허용하고 있는 것.

정부는 이를 치안 임무의 하나로 “중립”과 “평화”를 모색하는 스위스 자체 임무라고 보고 있다.


스위스 근위병에 관련한 몇 가지 사실.

 

- 스위스 근위병은 최대 110명을 넘지 못한다.

- 지원자는 반드시 스위스 국적을 가진 천주교인이어야 하며, 만 19세 이상 30세 이하, 신장 174cm 이상이어야 한다.

- 입대시에는 미혼이어야 하나, 차후 결혼은 가능하다.

- 월급은 매달 CHF 1,800이다. (환율 CHF 1을 750원 정도로 보았을 때, 약 135만원 정도)

- 최소 2년간 복무해야 한다.

-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다는 설이 많지만, 실제로 미켈란젤로가 디자인 했다는 증거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500년 전, 스위스 근위병 스스로 자체 디자인 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스위스의 화폐나 여권 등 스위스는 실용 디자인이 무척 발달한 나라다.)

 

 

 

빈사의 사자상 (루체른의 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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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덴마크의 유명한 조각가 토르발트젠(Thorwaldsen)이 1821년 조각한 기념상으로서 1792년 파리 튈르리 궁전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를 보호하려다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을 추모하기 위해 바위에 새겨낸 조각이다.

 

스위스는 지금은 아주 잘사는 나라, 평화로운 나라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지만 스위스가 옛날부터 잘 살았던 것은 아니다. 국토(41,000㎢)의 25%만이 경작 가능하고 나머지가 알프스 산맥과 쥬라 산맥, 그리고 호수로 이루어진 산악국가인 관계로 식량이 부족하여 수백년전부터 용병으로 팔려다녔고 이민을 가야했기에 지금도 미국의 일부 지역은 스위스에서 이민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스위스 지명의 마을들이 존재하고 있을 정도이다. 가난했던 스위스 시절, 세계에서 가장 용맹했다는 스위스 용병들은 이곳 저곳으로 팔려간다.

그들이 가진 것은 용맹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용병이 바로 스위스 용병이었고 그들의 특징은 돈에 팔려 가긴했지만 신의와 의리를 지켜내는 것 하나였다. 그들은 주로 로마 교황청의 인정을 받아 그곳으로 용병으로 파견되었고 또 프랑스로 많이 팔려갔다.

이들 스위스 용병은 두 번에 걸쳐서 크게 진가를 발휘하였는데, 첫 번째는 1527년 5월 6일 독일 황제(Charles-Quint)의 군대가 로마교황을 공격하였을 때 로마 베드로 광장의 진입로를 봉쇄하면서 147명의 교황호위병이 전사하는 가운데 나머지 42명의 호위병이 교황(Clement VII)을 피난시켰던 일이었다.

두 번째는 불란서 혁명때 군중들이 파리의 튈르리궁으로 쳐들어온 1792년 8월 10일 스위스 호위대가 죽어가는 순간까지 군중을 방어하는 가운데 불란서왕 루이16세와 왕족들은 정원을 가로 질러 피신하게 되는 데 이때 26명의 장교와 760명의 사병이 사망한 것이었다.

루이 16세가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의 사명은 왕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처절한 전투 끝에 목숨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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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사자상, 죽어가는 사자상.

충성을 다했던 그들 스위스 용병들, 약속을 지켜낸 용병들, 등에 창이 찔려 죽어가면서도 루이 16세의 방패를 가슴에 깔고 있다.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것이다.

왼쪽 옆의 휘장은 스위스의 휘장이다. 십자가가 있는데 그것은 무너지지 않은 채 세워져 있다. 아마도 사자는 죽어도 그 스위스의 정신, 신의를 지키고 약속을 지켰던 그들의 정신만은 죽을 수 없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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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on of Lucerne"


19세기 초의 걸작품으로 유명한 "루체른의 사자"는 1792년 파리에서 영웅적인 전투를 하다 최후를 맞은 스위스 경비병을 기념하여 건립되었다. 피 비린내 나는 프랑스 혁명의 시작 일인 8월 10일 혁명의 폭풍은 튀러리(Tuileries) 왕궁을 덮쳤다. 스위스 용병 경비연대는 루이14세의 명령에 따라 무기를 버렸고 결과적으로 잔악한 폭도들에게 살육당하고 말았다. 사자는 언제나 용맹과 힘의 상징이었으며 작가에게는 최후까지 싸웠던 비극적인 사건의 형상화가 되었다. 창으로 심장을 꿰뚫렸음에도 사자는 아직도 부루봉 왕가의 문장인 백합꽃이 새겨진 방패를 앞발로 감싸고 있다. 기념물의 건립은 다른 연대의 전우들과 친구들의 기부금과, 특히 육군대령 칼 파이퍼(Pfyffer)의 주도로 이루어 졌다. 또 빈사의 사자(dying lion)를 상징물로 한것도 그의 착상이었다. 모델은 유명한 덴마크의 조각가 베르텔(Bertel)(1770-1844)의 작품이었으며 1820/21년 알호른(Alhorn)에 의해 바위에 조각되었다. 본래의 모델은 빙하의 정원(Glacier Garden)에 전시 되어 있다. 암벽의 벽감은 43 휘트, 사자는 30휘트 이다.

기념물 위의 암벽에 새겨진 라틴어의 내용은 "충성스럽고 용감한 스위스인 에게" 그 밑에는 튀러리를 사수하다 순직한 26명의 장교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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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오는날의 더욱 슬퍼보이는 빈사의 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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