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펌)

2014. 6. 10. 22:19미술/한국화 옛그림

 

 

 

세한도(歲寒圖)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추사 그림의 쌍벽을 이루는 백미이다.

이 그림은 건필(乾筆;渴筆)과 검묵(儉墨;먹을 아껴 쓰는 것;惜墨)을 통해서

고졸하고 간솔한 풍격을 추구했던 추사 그림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학예 일치와 서화 일치는 물론 화선(畵禪) 일치를 통해서

법고창신의 묘경을 지향했던 추사 예술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래서 이 그림은 19세기 중반 서화계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추사 예술의 본질을 이해하는 관건이 될 뿐만 아니라,

19세기 중반 서화계의 새로운 변화를 파악하는 핵심적인 실마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세한도(歲寒圖)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양식적인 측면이나 심미적인 측면에서 볼 때

추사 그림의 본질적인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점이 많지만,

추사의 자전적인 맥락과 실존적인 맥락에서 두 그림의 경계를 상대적으로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적지 않은 별격(別格)의 그림이기도 하다.

이 세한도와 불이선란도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그려졌지만

추사의 절실했던 실존적 울림의 흔적으로서‘본성의 참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불이선란도)


 

 

그래서 <세한도>가 제주 유배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응결된 한 편의 비극적 서사라면,

<불이선란도>는 추사 만년의 사소한 일상이 무심하게 스쳐갔던 하나의 우연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세한도>가 황량한 바닷가에 의연하게 솟아 있는 낙락장송의 고고한 모습 같다면,

<불이선란도>는 적막한 산 속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잡초 같은 모습이다.

그 결과 <세한도>가 꼿꼿하고 당당한 선비 같아 유화(儒畵)의 한 정수를 보여준다면,

<불이선란도>는 걸림 없고 허허로운 禪師 같아 禪畵의 한 정화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세한도(歲寒圖)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이처럼 일견 같기도 하고 일견 다르기도 하지만,

두 그림 모두 추사가 평생에 걸쳐서 추구했던 본질적인 풍경이고 근원적인 경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추사라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었던 두 부분이기도 하고,

추사가 평생을 밟아나갔던 두 단계이기도 하며,

추사의 본질이 실존적으로 드러났던 두 계기이기도 하다.

제주 바닷가의 처연한 유배 속에서 <새한도>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던 하나의 본질적 경계를 경험하고,

다시 북청(北靑)으로 귀양갔다 돌아온 과천 산중의 적막한 은거 속에서 <불이선란도>를 통해

자신이 지향하던 또 하나의 근원적 경계를 경험했다.


이 속에서 추사는 그림이 지닐 수 있는 실존적 의미를 실로 아름답고 격조있게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학예일치와 서화일치는 물론 화선일치를 통해서

평생에 걸쳐 추구하던 법고창신의 묘경을 자득하고 이를 전인격적인 차원에서 회화적으로 실현했다.

추사 그림이 매우 고전적일 뿐만아니라 당대적이면서도

또한 개성적인 느낌과 강한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추사 그림이 주는 감동의 핵심은 바로 이 생생한 실존적 경험을 통해서

법고와 창신의 모순적인 대립극을 그 중심에서 초극한 뒤 이를 不二의 묘경으로 통합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2. 불이선란도의 제작 시기와 배경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본래 추사가 쑥대머리의 시동(侍童)이었던 달준(達俊)에게

어느 날 우연히 손이 가는 대로 그려주었던 작은 난초 그림이다.

그런데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될 때 추사의 복심으로 불린 오규일이 어느 날 우연히 이 그림을 보고

몹시 마음에 들었던지 억지로 빼앗아가고 말았다.

그 후 이 그림은 추사 말년의 애제자였던 소당 김석준을 거쳐서 장택상과 손재형 등을 지난 뒤

지금은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는, 매우 흥미로운 사연이 담겨있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그림보다도 글씨가 더 많을 뿐만 아니라,

그림보다도 오히려 글씨를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독특한 그림이다.

그림보다도 글씨가 많아지게 된 것은 추사가 제발을 네 번이나 추가했기 때문이다.

추사는 우연히 손길 가는 대로 그렸던 이 그림이 이외의 득의작으로 느껴졌는지

여러 가지 사념과과 심회를 적으며 제발을 추가했을 뿐만 아니라,

눈앞에서 문하생들끼리 주인이 두 번이나 바뀌게 되었던 특별한 사연까지 밝히며 제발을 계속 추가했다.


그러나 추사는 제발을 네 번이나 쓰면서도 기년(紀年)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 그림은 정확한 제작 시기가 밝혀져 있지 않다.

이 <불이선란도>는 서예적인 추상성과 불교적인 초월성을 가장 많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노년의 만년작일 가능성이 많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추사가 1852년 8월에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뒤 1856년 10월에 졸(卒)할 때까지

마지막으로 은거했던 과천에서 그린 최만년기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이 <불이선란도>는 현존하는 추사의 거의 마지막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불이선란도>와 관련된 현존 자료를 검토하며 이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논증해 보도록 하겠다.

<불이선란도>를 편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 자료는 <불이선란도> 자체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추사가 네 번이나 추가했던 제발(題跋)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먼저 이 제발을 순서대로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위쪽의 첫 번째 제시와 발문

 

난초 그림 안 그린지 20년 만에 / 부작난화이십년(不作蘭花二十年)

우연히 본성의 참모습을 쳐냈네 / 우연사출성중천(偶然寫出性中天)

문 닫고 찾으며 또 찾은 곳 / 폐문멱멱심심처(閉門覓覓尋尋處)

이것이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일세 / 차시유마불이선(此是維摩不二禪)


만약 어떤 사람이 억지로 요구하며 구실을 삼는다면,

또한 마땅히 유마거사(維摩居士)의 무언으로 사양하리라.

만향(曼香) 쓰다. / 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無言謝之, 曼香.

 


(2) 오른쪽 중간의 두 번째 발문

 

초서(草書)와 예서(隸書), 기자(奇字)의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으며 어찌 좋아하겠는가?

구경이 또 쓰다. -고연재

(以草隸奇字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구竟又題 <古硯齋>

 

 

(3) 왼쪽 아래의 세 번째 발문

 

애초 달준(達俊)이를 위해서 아무렇게나 그렸으니,

단지 한 번만 있을 수 있고,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다.

선객노인(仙客老人) 쓰다.

(낙문천하가)(김정희인)

示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樂文天下士)(金正喜印)

 

 

(4) 왼쪽 아래 안쪽의 네 번째 발문

 

소산(小山) 오규일(吳圭一)이 보고 억지로 빼앗으니 우습다.

吳小山見而豪奪, 可笑.

 

 


추사가 이처럼 네 번이나 제발을 추가한 것은

기본적으로 쓰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추사가 써나갔던 순서대로 다시 복원해서 써보면(네 편의 제발 부분 복원도 참조),

이 <불이선란도>에서 제발과 글씨가 차지하는 조형적 의미가 얼마나 크고 중요하며,

추사가 이를 얼마나 섬세하게 고려한 듯,

위에서부터 역행(逆行)으로 시작해서 오른쪽 아래로 내려와서 순행(順行)으로 작게 쓴 뒤,

다시 왼쪽 아래로 내려가서 역행으로 크게 썼다가

다시 더 안쪽의 그림 옆에 담묵으로 작게 쓰는 등,

위치와 크기는 물론 행법(行法)과 농담(濃淡)까지 적절히 맞추어가며

제발을 계속 추가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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