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아재 조영석

2012. 8. 16. 14:18미술/한국화 옛그림

 

 

 

觀我齋 趙榮祏 (1686-1761) 

 

 

까치

 

 

 

강상조어도

 

 

 

노승

 

 

 

마굿간 馬童

 

 

 

말 징박기

 

 

 

새참

 

 

 

송작도 (松鵲圖)

 

 

 

手工旋車(선거)圖

 

 

 

어선도

 

 

 

장기

 

 

 

 

 

 

 

 

 

(펌)

☞ 관아재 휘 영석(교과서에 실린 선조)

1. 생애(生涯)와 인품(人品)

관아재(觀我齋) 조영석[1686-1761]은 겸재(謙齋) 정선[1676-1759],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1707-1769])과 더불어 조선 후기 사인화(士人畵)에 있어서의 삼재(三齋)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지며, 또한 문장(文章)과 서(書), 화(畵)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불리어지던 인물이다. 즉 그는 조선후기의 예술(藝術), 특히 회화(繪畵)에 있어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는 숙종(肅宗) 12년(1686년) 2월 14일(음력)에 순창군수를 지낸 해(楷)의 사남 일녀중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영조(英祖) 37년(1761년) 3월 27일에 76세를 일기로 타계(他界)하였다. 본관(本貫)은 함안(咸安)이며, 자(字)를 종보(宗甫), 호(號)를 관아재(觀我齋), 석계산인(石溪散人)이라 하였다. 그는 슬하에 중희(重希), 중완(重脘), 중담(重膽)의 삼형제와 딸 셋을 두었다.
그의 생애(生涯)와 사람됨에 대하여는 "함안조씨참판공파파보(咸安趙氏參判公派派譜)", 유척기(兪拓基)의 문집인 "지수재집(知守齋集)" 및 홍직필(洪直弼)의 "매산집(梅山集)에 실려 있는 묘지명(墓誌銘)에 의해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이 문헌(文獻)들을 종합(綜合)하여 그에 관해서 대충 소개(紹介)해 보고자 한다.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은 28세 때인 1713년에 진사(進士)가 된 후 33세 때인 1718년에 장릉참봉(종9품)을 시작으로 관로(官路)에 들어서게 되었다. 사옹원봉사(종8품)를 거쳐 37세 때인 1722년에는 상서원직장(종7품)에 승진되었고 머지않아 다시 종6품직에 승급될 것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인 영복(榮福)이 임인사화(壬寅士禍)에 연루되어 유배(流配)됨을 보고 관직(官職)을 사퇴하였다.
그 후 40세 때인 1725년에는 파주(坡州)에 있는 공릉의 직장(종7품)에 다시 보임되었고, 이듬해에는 장원서별제(종6품)에 승진되었다. 이때부터 30년 동안 그는 종6품직인 제용감주부, 태복시주부, 전생서주부, 연기(燕岐), 적성(赤城), 의령(宜寧), 안음현(安陰縣)의 현감직(縣監職) 등 경(京)·외관직(外官職)을 두루 거치고 정6품직인 사헌부감찰과 호조좌랑, 종5품인 의금부도사, 종묘령(宗廟令), 정5품인 형조좌랑, 종4품인 사옹원과 사도시의 첨정 및 배천군수(白川郡守)를 역임하고 정4품직인 광흥창수(廣興倉守)에 이르렀다.
71세 때인 1756년에는 정3품인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급되고 중추부첨지(中樞府僉知),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제수되었다.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지 않은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은 이처럼 관직(官職)에서는 크게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76세를 일기로 엽세(葉世)한 후에 그에게는 가선대부(嘉善大夫)와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추증(追贈)되었고, 그의 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정부인(貞夫人)에 봉작(封爵)되어 영예(榮譽)를 더 하였다. 그는 사후(死後) 2개월만에 파주의 유산(遊山[現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장곡2리·놀미])에 있는 부인의 묘소 옆에 합장되었으며,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은 저명한 학자였던 이단상(李端相)의 아들이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수제자중의 한사람이었던 간암(艮菴) 이희조(李喜朝[1655-1724])에게서 학문을 닦았는데 그의 스승 이희조(李喜朝)가 바로 그의 장인인 이하조(李賀朝)의 형인 점을 고려하면 그는 스승의 질녀(姪女)와 혼인(婚姻)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부인의 외조부가 안동김씨가문의 김창국(金昌國)임을 감안하면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당시의 명문가와 혼인(婚姻)을 맺었다고 하겠다.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은 "성격이 강직하고 기(氣)가 맑으며 뜻이 높고 행동은 잘 가다듬어져 있으며, 크고 작은 일에 척도(尺度)가 근엄(謹嚴)하고 관청(官廳)이나 집에 거처함에 있어 스스로 부응(副應)할 규모(規模)를 가지고 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형과 누님을 부모처럼 섬겼으며, 아들과 조카들을 교육함에 있어서는 엄하였다.

또한 그는 일찍이 "사람에게는 네 가지 욕심(慾心)이 있으니 그것은 생(生)·색(色)·관(官)·재(財)로서 사람은 누구나 이것을 경계해야 되지만 특히 벼슬하는 사람은 더욱 명심해야 한다."고 말해 그의 묘지명(墓誌銘)을 쓴 유척기(兪拓基)가 관직생활 30년 동안 늘 이것을 되새겼다고 하는데 이것은 "관아재고(觀我齋稿)"의 만록(漫錄)에도 실려 있다. 이로 보면 그는 분명히 강직하고 절도가 있으며, 청빈(淸貧)한 선비였다고 믿어진다.
또한 그의 모습은 고죽(孤竹)과 같았고, 절조(節操)는 돌처럼 단단했으며, 아의(雅意)는 임천(林泉)에 두어 영리에 급급하지 않았고 매일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티끌 하나 없이 청소를 하고 책상 위의 책들은 언제나 가지런히 정리했었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깔끔하고 탈속(脫俗)한 인품(人品)을 지녔다고 추측된다. 그래서 자연을 배경으로 시가(詩歌)를 읊으며 자적(自適)하는 것을 보면 마치 그림 속의 사람이나 신선(神仙) 속의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러한 말들은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그에게 보낸 찬사(讚辭)였다고 생각되지만 그의 인간됨이 본래 대단히 고결하고 훌륭했음을 의미한다는 것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심지(心志)가 굳고 뜻에 맞지 않은 것에는 타협(妥協)할 줄 몰랐다고 믿어진다.
아마도 이러한 성격(性格) 때문에 그는 광해군(光海君)과 세조(世祖), 그리고 숙종(肅宗)의 어진(御眞)을 제작할 때에 집필(執筆)을 강요하던 영조(英祖)와 군신(群臣)들에 맞서서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50세 때인 영조 11년(1735년)에 광해군(光海君)과 세조어용(世祖御容)을 중모(重摹)할 때 그가 화법(畵法)을 이해하므로 왕이 그를 불렀으나, 의령현감으로 있던 그는 "이와 같은 일은 화사(畵師)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한 부름에 가지 않는 것은 예부터의 의(義)로다."라고 말하면서 끝내 명(命)에 응하지 않았다.
다시 13년 뒤인 영조 24년(1748년)에 숙종어진(肅宗御眞)을 중모(重摹)할 때 입참감동(入參監董)의 명(命)을 받고 응했으나 처음의 소명(召命)과는 달리 또 다시 집필(執筆)을 강요받게 되었다. 이때도 그는 "오늘의 일은 을묘년(乙卯年) 때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하면서 죽기를 무릅쓰고 사양하였다. 그는 "예경(禮敬)에도 선비가 더불어 할 일이 아니라고 되어있고, 신(臣)이 비록 미천(微賤)하오나 스스로 여러 화사(畵史)들과 자리를 같이 하여 의관(衣冠)을 욕(慾)되게 하겠나이까?"라고 주장하면서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고집(固執)은 왕의 노여움과 여러 중신들의 비난을 샀지만 종국(終局)에는 영조의 이해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선비화가가 그림을 그려서 먹고사는 화원(畵員)들과 신분상 혼동(混同)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피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처럼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던 것은 그의 굳은 심지(心志)와 타협(妥協)을 모르는 강직한 성품(性品)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觀我齋稿」의 繪 史的 意義에서 발췌】

2. 시(詩)·서(書)·화(畵)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문장(文章)·서(書)·화(畵)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지칭(指稱)되었다. 시(詩)는 성당(盛唐)때의 것을 공부했고 만년(晩年)에는 송(宋)의 진간제(陳簡齋)를 좋아했는데 고아핍진(古雅逼眞)하여 속(俗)됨이 없었다고 한다.
서예(書藝)에 있어서의 필법(筆法)은 여러 체(體)를 합쳐 일격(一格)을 이루었는데 힘이 있고 뛰어나 붓을 휘두르면 나르는듯한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 했으며, 만년에는 명말(明末)의 동현재(董玄齋)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점은 관아재의 서체(書體)와 동기창(董其昌)의 그것을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만년에는 학문적인 면에서 주서(朱書)에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그림에도 뛰어났는데 인물(人物), 산수(山水), 화조(花鳥)와 영모(翎毛), 풍속(風俗) 등 비교적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특히 인물화(人物畵)에 뛰어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어용중모에 거듭 집필(執筆)을 강요당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의 인물화 실력과 관련하여 "송천필담(松泉筆譚)"에 나오는 기록이 주목(注目)을 끈다.
관아재 조영석은 속화와 인물화에 뛰어났는데 겸재 정선에게 늘 말하기를, "만약 만리강상(萬里江山)을 그리기로 한다면 일필휘지(一筆揮之)과 필력(筆力)의 웅휘(雄揮)함, 그리고 기세의 유동(流動)함에는 내가 군(君)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그러나 털 오라기 하나에 이르기 까지 핍진정교(逼眞精巧)하게 그리는 데에는 군(君)이 반드시 조금은 나에게 양보해야 할 것이오."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의 이 말은 신빙성이 크다고 느껴진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묘사력(描寫力)에 상당히 자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스승이었던 이희조의 화상(畵像)과 형의 화상(畵像)을 그렸던 것으로 믿어진다.
전반적으로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의 회화는 조선시대 후기의 윤두서나 김두량의 경우처럼 전통주의적 취향(趣向)을 짙게 띠면서 다른 일면으로는 새로운 시각(視覺)과 경향(傾向)을 보여주기 시작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의 산수 인물화나 영모 또는 화조화 등에는 조선중기 회화의 전통이 강하게 엿보이고 있으면서도 소재의 선정이나 묘사에 있어서는 생활주변의 관찰에서 얻어진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풍속화적인 소재의 그림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서 후대(後代)에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등의 화가들에 의해 꽃피게 될 풍속화의 유행을 예시(豫示)해 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제첩(麝臍帖)」에 실려 있는 그의 그림들은 더욱 괄목할 만하다. 이 화첩(畵帖)의 표지에는 "勿示人犯者非吾子孫-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마라. 이것을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고 속에는 사천 이병연(李秉淵)의 제발(題跋)에 이어 작품이 실려 있다. 이 문구는 비록 관아재의 아들이 써넣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 실려 있는 그림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한 관아재의 뜻을 전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어째든 이 화첩(畵帖)의 그림들 대부분이 일상생활 속에서 포착한 소재들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정확하게 묘사한 것들로서 풍속화와 스케치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들이며, 앞으로 전개될 조선후기 회화의 새 경향을 예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공재 윤두서나 남리 김두량과 더불어 전통주의적 경향과 보수적 진보주의 경향을 함께 띠었던 18세기 전반부의 대표적인 화가(畵家)라고 볼 수 있다. 【「觀我齋稿」의 繪 史的 意義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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