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미술관,「한국 근현대 회화 100선」

2014. 3. 21. 08:33미술/내 맘대로 그림 읽기

 

 

 

거듭 말하지만 실제 작품을 보는 것과 이렇게 모니터로 보는 것과는 하늘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중섭 화백의 터치나 박수근 화백의 화면 질감은 작품의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 느낌을 무시해버리고 본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거죠.

 

번에 평소 제가 보고싶었던 그림들을 "多數" 볼 수 있었네요. 아주 흡족했습니다. ^__^:: 

 

 

 

 

 

이중섭, 황소 1953년경 · 개인 소장

 

 

멋지지요? 

저 표정이 무얼 말하는 걸까요?

이번 전시회에서 관람객 선호도 1위가 바로 이 작품이라더군요.

저도 이중섭의 소 그림 중에서 이 작품이 젤 맘에 듭니다.

그러나 저한테 전시물 중에서 1위를 꼽으라면

저는 밑에 있는  박수근의「농악」을 꼽겠습니다.

‘이중섭’, ‘박수근’, ‘김기창’, 막상막하죠?

 

 

 

명화를 만나다 - 한국근현대회화 100선전

이중섭, 소 (1953년경, 서울미술관 소장)

 

 

붓 터치가 정말 일품입니다.

이중섭이 소 그림을 23점인가 그렸다는데, 세 작품이 함께 걸린 것은 이번 전시회가 처음이랍니다.

특히 위엣 그림 <황소>는 개인소장이라서 일반인들이 보기가 쉽지 않답디다.

 

 

 

 

 

 

김기창, 아악의 리듬 1967

 

 

여러분은 이 그림을 보며 어떤 악기가 떠오르십니까?

저는 날라리(?)나 버들피리, 그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리는 듯하온데. 

 

 

 

 

 

 

 

 

김환기, ‘산월’(1958)

 

  

 

피난 열차  1951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라는 제목은 김광섭의 詩「저녁에」에 나오는 귀절입니다.

노래는 알았어도 김광균의 시인 줄은 몰랐네요.

 「추일서정」,「성북동 비둘기」,「설야」,「와사등」,「외인촌」, 고딩 때 공부는 많이 했는데. ㅋㅎ 

이 그림은 김환기가 미국(워싱턴?)에 머물 때 그린 연작 중의 하나인데,

고국의 친지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한땀 한땀 그렸답니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리. //


 

詩와, 그림과, 유심초의 노래가 잘 어울립니까?

쿵짜작으로 부르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천경자, 길례언니(1973)

 

 

 

 

 

 이대원, ‘과수원’ (1976)

 

 

전두환네 그림(전재국 컬렉션) 경매 나온 것 중에 가장 비싼 값에 팔렸다는 그 작가입니다.

나는 이 양반 그림 보면 심란하기만 하지 그렇게 좋은 줄을 모르겠습디다. 

홍대인가 서울대인가 미대 학장을 지냈다니깐......

 

 

 

 

 

 

오지호, ‘남향집’ (1939)

 

 

이 작품, 평범해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빛의 표현이 멋지게 잘 됐습니다.

햇빛과 나무 그림자가 감상 포인트라네요.

멀리 떨어져서 감상하면 더 좋습니다.

어린 여자아이가 개 밥 주러 나오는 장면이군요.

‘인상파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해서 토착화시킨 화가’ 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작품들도 방금 검색을 해봤는데, 에이, 다 별룹디다.

이 작품 하나만 괜찮은 것 같습니다.

세잔 모방을 젤 많이 했고, 모네, 그리고 더러 고흐도 흉내냈더군요.

 

 

 

 

 

 

이인성, <가을 어느날>, 1934

이인성, 가을 어느날 1934

 

 

유명한~ 대구 출신 화가죠. 일찍 죽는 바람에 더 유명해졌답니다.

김병총의 『화첩기행』에서 읽은 기억이 나네요. ← 제 블로그 어디에도 옮겨 적은 게 있을 겁니다.

고갱 분위기가 물씬 나지요?

 

 

 

 

 이인성(李仁星·1912~1950)의 ‘해당화’(1944)

 

 

왜 이 양반을 천재화가라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럴만한 점을 못 찾겠는데...?

 

 

 

 

 

 

배운성,가족도 1930-35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이 화가 배운성이랍니다. 자세가 엉거주춤한. 얼굴 생김새가 미당 서정주 같네요. ^^

장안 갑부 백인기 집안의 하인(집사 ·서생)이었답니다. 길상사가 원래는 이 집안 별장이었다네요.

이 양반의 이력이 특이합니다. 공부 좀 해봐야겟습니다.

 

 

 

배운성은 190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와세다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1922년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국립미술종합대학교(1925년 - 1930년)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1940년 귀국하기 전까지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에서 수차례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살롱 도똔느(1927년)를 비롯한 여러 공모전에 유화, 판화를 출품하여 입상하여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1940년 9월 귀국한 뒤 활발하게 활동하였는데 1947년 송정훈 등과 함께 제 1회 앙데팡당 전을 조직하였고 1948년 뒤늦게 서울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작품활동 이외 1949년 제 1회 국전 서양화부에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고 홍익대학교 미술과 초대학장, 경주예술학교 명예학장으로 추대되는 등 미술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하지만 6.25 전쟁 당시 9.28 수복을 전후로 월북하여 조선 미술가동맹, 평양미술대학, 미술출판사 등을 중심으로 북한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종전후 그의 작품을 공개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또한 그의 작품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게다가 배운성이 192, 30년대 제작한 대다수 작품들이 유럽에 남아있어 배운성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월북작가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배운성의 작품이 알려진 것은 1988년 납북, 월북작가 해금조치 이후이다. 소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유럽에서의 활동상이 본격적으로 알려지면서부터였으나 그의 작품은 실제작품이 아닌 그저 사진으로만 국내에 알려져왔다. 이번 전시에 출품작품은 배운성이 1940년 귀국할 당시 유럽에 남겨두고 온 작품 중 일부이다. 몇 년전 우연한 기회에 파리에서 어느 한국인수집가가 구입하게 되면서 작품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었다.

 

- 2001년 덕수궁 미술관 배운성 전 중.

 

1999년 3월. 나는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다.나의 여행 목적은 고암 이응노(1904∼1989) 취재. 고암의 10주기를 맞아 국내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추진되고 있는 이즈음, 그 동안 미뤄오던 고암 이응노의 평전을 어떻게든 좀더 진전시켜 보려는 생각으로 지금 파리 현지로 가고 있는 중이다. 전통을 현대로 승화시킨 동도서기(東道西器)의 거장 고암 이응노. 고암의 조명에는 그의 예술적 도전과 성취가 활짝 펼쳐졌던 파리 30년의 시간과 공간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나는 1994년에 이어 두 번째로 고암의 예술 혼 곁으로 날아가고 있다.

 

이 여행의 또 하나 목적은 월북화가 배운성(1900-1978)의 믿기 어려운 ‘작품 대발굴’ 확인 작업. 몇 달 전 나는 파리의 한국인 유학생(전창곤)이 소장하고 있는 배운성 작품 48점을 사진으로 보았다. 1991년 배운성 논고를 처음으로 쓸 때1), 유럽 시절의 화려한 작품 내막을 안타깝게도 단지 흑백사진으로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배운성의 작품이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니, 이제 원작과 대면한다는 이 벅찬 기대감….

 

불현듯 나는 한국 근대미술과 작가들을 조명할 때 부닥쳤던 한계가 떠오른다. 미술사의 구체적인 연구 대상인 원작의 망실. 특히 나는 작고작가나 월북작가들의 재평가 작업 중에 “작품 같지도 않은 작품으로 과대 평가하려 든다.”는 일부 미술인의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구체적인 ‘물건’의 제시가 없는(혹은 빈곤한) 미술사 기술은 분명 공허한 일이다. 뼈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할 지적이다. 그럼에도 나는 1991년 이쾌대의 작품 발굴과 같은 ‘사건’으로 위안을 삼고 있다. 상실된 미술사 복원 작업의 보람이자 희망이기도 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 평범한 진리를 나는 굳게 믿는다. 작품이란, 더구나 훌륭한 작품이란 참으로 생명이 모질다. 이역만리 남의 땅에 60년 이상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배운성의 작품 발굴. 또 하나의 극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오랜 비행 시간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한국 신문을 펼쳐들고 뒤적거린다. 곧바로 문화면의 톱기사에 눈길을 꽂았다. ‘거룩한 한국 혼 이미륵, 우리 가슴에 살아오소서…’이미륵(1889∼1950). 본명 의경(儀景). 뮌헨대학 동물학 박사. 유창하고 간결한 독일어로 한국의 풍습과 인정을 그린 작품을 발표하여 전후 독일 문단을 뒤흔들었던 소설가. 특히 1946년에 발표한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는 제2차세계대전 직후 ‘독일어로 씌어진 가장 빼어난 문장’이란 평가를 들으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고, 100편이 넘는 서평이 쏟아져 나온 문제작이었다. 신문에는 바로 그 이미륵 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독일에서 돌아온 정규화 교수(성신여대·제1회 이미륵상 수상자)의 글이 실려 있다.2) 나는 이미륵과 배운성이 독일 유학시절 함께 찍은 희미한 한 장의 사진을 생생하게 머리 속에 그려냈다.

 

내 마음속의 이응노와 배운성 사이에 이미륵이 끼어 들었다. 그리고 동년배인 이들 예술가들의 생애와 작품 세계의 ‘공통점 짝짓기’와 ‘차이점 가르기’의 즐거운 게임에 몰두했다. 이미륵과 배운성은 한국을 아직 낯선 땅으로만 알고 있던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 문학과 미술 활동을 통해 유럽에서 한국인의 이미지를 드높였던 예술가들이다. 좀더 뒤늦은 시기에 유럽에서 활동했던 이응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배운성은 16년 동안 베를린을 무대로 활동하다가 파리로 이주했고, 이응노는 반대로 독일에 잠시 체류하다가 파리에 30년간 정착했다. 이미륵과 이응노는 생애의 마지막까지 끝내 고국 땅을 밝지 못했다. 이미륵은 그래펠핑 공동묘지에, 이응노는 파리 신부 라세즈 묘지에 잠들어 있다. 배운성은 6·25 때 북으로 건너가 신의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생각의 꼬리는 20세기의 한국-일본-독일-프랑스-북한을 마구 가로질러 물고 또 물려갔다.

 

그리고 현재. 이미륵과 이응노는 생애와 예술세계의 제자리 찾기 작업이 아주 활발하다. 한국인보다 독일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는 존재였던 이미륵은 오래 전부터 국내 연구가들의 깊은 관심을 받고 있다.3) 이응노는 군사독재시절 금기의 작가로 낙인찍혔지만, 그의 사후에 복권이 이뤄졌을 뿐 아니라 작년 서울 평창동의 이응노미술관 개관과 함께 마침내 예술혼의 금의환향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배운성은 민족분단 반세기의 오랜 장벽 때문에 아직도 이름 석자부터가 낯선 화가다. 한국미술사에서 배운성이 차지하는 올바른 위상 찾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거룩한 한국 혼 배운성, 우리 가슴에 살아오소서….’

 

----------유럽 미술유학 1호의 미술사적 위치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지만, 한국의 근대미술은 불행하게도 일제강점의 역사와 겹쳐 있다. 식민지 조선의 ‘미술 공급원’은 언제나 일본이었다. 양화라는 신미술의 출발은 일본인에 의해 일본 유학을 통해 이뤄졌으며, 이 일본 유학파들이 근대 화단의 기틀을 만들고 이끌어갔다. 그리고 대다수 화가들은 조선총독부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운영된 조선미술전람회를 무대로 예술적 야망을 펼치며 예술가상과 예술관을 다져갔다. 참으로 한국미술의 중대한 역사적 한계가 아닐 수 없다.특히 서구미술의 수용 측면에서 보면, 이 땅에 양화를 도입했던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늘 언제나 일본 미술 ‘편식’에 머물러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이 서구에서 도입하고 해석한 미술의 그늘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미술가들이 익힌 서구적 조형 어법은 일본화된, 일본이라는 징검다리를 거친 간접 체험이었다. 특히 지배국과 피지배국의 역학 관계에서 우리의 주체적 시각은 굴절되고 왜곡되기 십상이었다.

일본미술의 영향에서 벗어나 우리 화가들이 본격적으로 유럽 화단(주로 프랑스)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말부터다. 이응노와 같은 작고작가나 오늘날의 원로작가들이 앞다투어 도불전을 열고 예술 도전에 나서던 일이 붐을 이루던 시절이다. 그리고 보면, 그보다 30여 년 전인 1925년에 최초로 파리 유학을 단행했던 양화가 이종우에게 화단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월북화가 배운성은 그 이종우보다 먼저 유럽에 건너갔던 ‘미술 유학생 1호’였다. 배운성의 미술사적 위치를 가늠할 때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우리 미술계에서는 매우 드물게 서구미술의 현장에서 미술을 배운 화가다. 정규 미술학교에서 본격적인 미술 아카데미 수업을 거치고, 18년간 베를린과 파리를 무대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던 화가다. 배운성은 식민지 조선이 자랑하는 당대 최고의 국제 작가였다. 유럽 각국에서 연이어 개인전람회를 개최하는가하면 유수한 국제전람회에서 수 차례 입상하는 등 화려한 명성을 얻고 예술적 성공의 길을 걸었던 화가였다. 한국미술의 국제화, 세계 속의 한국미술, 그리고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라는 축 사이의 도전과 과제는 배운성으로까지 거슬러 갈 수 있다. 그리하여 배운성의 조명은 한국미술의‘지금, 바로, 여기’ 문제와 면면이 잇닿아 있다.

 

----------경제학도에서 화가로 변신, 베를린 미술학교의 우등생

 

배운성의 유럽 체류(1922∼1940) 시기의 작품 활동은 당시 국내 신문 보도, 유럽 현지 보도, 그리고 귀국 후 1944년 서울에서 열린 제1회 배운성 귀국양화 작품 발표회 카탈로그, 여기에다 북한 미술자료, 필자가 제3국을 통해 입수한 북한 유족의 증언를 통해 그 전모를 재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연구 과제는 남아 있다. 특히 이 시기의 연보는 배운성 자신의 기록 중에서도 잘못된 것이 확인된다.

 

배운성은 가난한 집안 환경 때문에 1915년부터 서울 장안의 갑부 백인기(日亭 白寅基)의 서생으로 살았다. 그는 서화 애호가로 서화협회의 명예회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배운성이 유럽으로 건너간 것은 1922년. 같은 또래인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의 독일 유학 때 몸종으로 함께 떠났다. 북한 자료에도“(1919년)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백가성을 가진 자본가의 아들이 독일로 유학갈 때 그의 뒷바라지를 위해 같이 가게 되었다. (…)베를린에 체류하는 기간 평소 좋아하던 미술공부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자본가의 아들이 병으로 귀국한 후 돌아갈 여비를 보내주지 않아 독일에 남게 된 그는 타향에서 고아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자본가 놈들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주하면서 간난신고하여 고학으로 대학 과정을 모두 마치었다.”고 적고 있다.4)

 

그런데 여러 자료에는 배운성이 1919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중앙대학과 와세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에서 경제학 공부를 계속하려고 독일 유학을 단행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가난했던 배운성의 와세다 유학은 물론이고 몸종 역할과 유럽 유학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추측은 가능하다. 경제학 전공은 어디까지나 주인의 아들 백명곤의 유학 코스가 아니었을까? 배운성은 요코하마를 떠나 오랜 뱃길 여행 끝에 남불의 항구 도시 마르세이유에 도착, 파리를 거쳐 1922년 3월에 베를린에 도착했다. 이 여정을 배운성 자신은 이렇게 적고 있다.

 

“마르세이유박물관에서 처음으로 본 레오나르도의 나체화 같은 것은 특히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아담한 박물관의 분위기가 나의 본능 속에 깊이 잠복하고 있던 예술 의욕을 자극하여 처음으로 나의 예술에 대한 야심이라고 할는지 본능이라고 할는지 그런 것을 일으켜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까지도 경제학 전공을 목적하였던 나는 급거히 그러나 자연스럽게 화가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나는 내 일생에 있어서 마르세이유의 하루를 잊지 못할 것이다.”5)

 

경제학도에서 화가로의 변신. 그 일생의 전환점이 된 마르세이유 박물관의 대형 그림들에 대한 감동은 뒷날 독일의 잡지에서도 밝히고 있다. 예술에 관심이 있는 배운성은 “여러 박물관과 현대 회화 전시회를 관람하려고 우선 파리에 들렀다. 그 후 베를린에서 우연히 한 화가를 사귀게 되자 그는 드디어 결심을 하고 말았다. 그는 데생과 유화를 시작했다.”6)

 

일본과 독일 유학, 그리고 화가로의 결심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지만, 어찌 되었건 베를린에서 배운성의 화가의 길은 시작된다. 그는 처음에 후고 미트(Hugo Mieth 1865∼?)라는 벙어리 노화가에게 개인지도를 받았으며, 또한 빌리 엑켈, 빙켈만, 막스 쿠치만(Max Kutschmann 1871∼1943) 등 베를린의 화가들과 교수들로부터 나체화와 판화 등을 수학했다. 배운성은 레벤훈켄 미술학교에서 1년 간 공부한 뒤 1925년 베를린미술학교에 입학, 본격적인 화가 수업을 받는다.

 

베를린은 제1차세계대전 말기부터 하노버와 함께 독일 다다를 이끌었던 미술의 거점도시였다. 1920년대의 베를린은 파리와 더불어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다. 국제적인 미술 도시로 표현주의, 신줄물주의 등 서로 다른 미술 유파가 혼재해 있었다.

 

배운성은 〈자유와 응용예술종합국립학교〉(이하 베를린국립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이 예술학교는 1924년 〈왕립예술아카데미〉와 베를린의 〈공예박물관〉의 강습소를 합쳐서 설립되었다. 그는 1925년 여름학기부터 가입학이 허가되어 페르디난트 슈피겔(Ferdinand Spiegel 1879∼1950) 교수 아래에서 회화 공부를 하였다. 그 교수로부터 인정을 받아 마침내 미술학교의 정규 학생이 되었다. 배운성을 지도했던 교수 중에는 에른스트 빌렘름 나이(Ernst Wilhelm Nay 1902∼1968)라는 유명 화가도 있었다. 나이는 두터운 붓 터치와 야수파적 색채를 구사했던 표현주의 화가였다. 전후에는 추상 양식, 타시즘 경향의 작품에 도달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배운성은 지도교수였던 슈피겔과 밀접한 인간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슈피겔은 특별히 이렇다 할 재능이 있는 화가는 아니었다.7)

 

----------유럽 국제미술전 수상의 효시

 

베를린미술학교 재학 시절부터 배운성의 대외 작품 활동은 시작된다. 1920년대 후반부터 국내의 신문 잡지는 배운성의 유럽 활약상을 대대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배운성만큼 매스컴의 각광을 한 몸에 받은 화가도 드물다. 배운성의 미술 활동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27년이다.8) 그는 재학 중에 매회 열리는 학생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 이 때 받은 상금으로 프랑스를 여행, 파리의 살롱 도톤느에 목판화 〈자화상〉을 출품하여 입선에 올랐다. 이 때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부터 파리에 체류했던 이종우도 〈모 부인의 초상〉(현재 고려대박물관 소장), 〈인형 있는 정물〉로 입선했다. 우리 나라 화가가 이룩한 유럽 국제미술전 입상의 효시였다. 오늘날에 와서 보면 살롱전 입선이 그리 대단한 경력이랄 수 없지만, 국내에 양화가라 해봐야 손에 꼽을 정도의 숫자이고 겨우 서양화단 형성의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하던 당시의 열악한 시대 상황을 상기해 보면, 현대미술의 중심지에서 두 화가가 거둔 개가는 회화사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배운성은 1928년 베를린미술학교의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우등생에게는 여러 가지 혜택이 있었다. 등록금을 면제받고, 연구생 자격으로 학교에 계속 머물면서 아틀리에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이전과 다름없이 배운성은 슈피겔 교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우등생 화실의 책임교수였다.9) 연구생 생활 중이던 1929년 연초에 배운성은 〈술마시기〉 〈어머니의 애정〉 등 5점의 판화를 국제전람회에 출품하여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다.10)

 

1930년 베를린미술학교 연구원 과정까지 마친 배운성은 이제 다방면에 걸쳐 성공의 길을 걷게 된다. 점잖고 친절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완전히 독일 사회에 익숙해졌다. 배운성은 베를린 사람이 되었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과 교분을 가졌고, 명망있는 인사들로부터 많은 초상화 제작을 위탁받았다.

 

배운성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으로 활동 무대를 넓혀갔다. 1933년에는 바르샤바 국제미전에 〈밀림〉 〈여인의 초상〉 〈자화상〉 등을 출품하여 1등상을 차지했다. 23개국에서 213명의 작가가 총 700여 점을 응모한 이 국제미전에서 배운성의 작품은 “조선적 색채를 지닌 유화요, 순전한 동양 재래 고유의 취미를 더 잘 발휘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1)

 

배운성은 1933년과 1935년 베를린의 쿠를리트 화랑에서,12) 1935년에는 함부르크 민속미술박물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 때 유화·수채화·판화·묵화 등 87점을 선보였다. 당시 유럽 현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시 평문을 남기고 있다.13)

“설득력 있는 방법에 의한 자연에의 충실을 보여주는 풍경화, 표현력이 강한 데생과 화려한 색채로 이루어진 인물화들이 주의를 끈다. 풍경화들 중에서 〈St. Cloud〉 〈눈 덮힌 Lietzen 호수〉는 동양의 안개를 표현한 인상파 화풍의 작품들로 빛과 공기의 처리에 있어서 아주 아름답다. 〈깃대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과 특히 미완성의 대작 〈가족도〉에서는 아시아 회화의 영향이 나타난다. 엄격한 수법과 풍부한 개성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화는 다소 미숙한 색채 선택으로 인한 빛과 음영 처리의 부족함을 보여주는 한편 아시아 대가의 화풍을 모델로 하고 하다. 〈한국의 어린이〉는 평면적 배경과 대상의 선적 묘사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게 착색한 작품이다. 〈어머니와 어린이〉는 독자적인 구성과 인체의 완전한 묘사를 보여준다. 화가의 수묵인물화는 유럽 관객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여기 있는 독일 풍경들은 감동적이며 아시아적 담채 기법을 그린 것이다. 완전히 독자적인 것은 역시 펜에 의한 데생과 수채화들 그리고 목판화들이다.”14)

 

1936년 배운성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 진출, 100여 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15) 이 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목판화전에 출품하여 명예상을 수상했다.

 

----------성공의 길, 조선이 자랑하는 최고의 국제화가

 

배운성은 유화와 묵화, 판화 등 다양한 회화 장르를 섭렵하고, 또한 유럽의 여러 잡지에 수채화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배운성이 창작 생활에서 보여준 이러한 다양한 작품 편력을 그의 친구 쿠르트 룽애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흔히들 배운성의 그림은 동양 정신과 유럽 기술과의 결합이라고들 표현했다.(…) ‘쓴다는 것과 그린다는 것은 별개의 예술이 아니고 그 근원은 하나이며 동일하다’라는 잠언을 아는 (…)배운성은 전 유럽이 자기가 꿈꾸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의 조국 한국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심지어 한국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유럽인들에게 자기 조국의 미를 우선 그림으로 보여줄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그림으로 성공을 거두고 더욱 빛을 보게 되자 그는 문필로도 활동해 보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의 풍습, 습관에 관해 신문지상에 발표했고, 유럽 화가들 앞에서 그가 유럽에서 배운 수업에 감사하며, 동양 묵화의 기법과 비밀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 한국 이야기와 대조되는 중국 전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자기 친구들 앞에서 한국 노래도 하고, 자기 고향의 민속놀이 장면도 보여주고,(…) 동화들도 들려주었다.”16)

 

배운성은 1937년 나드롱카 폰 브레데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나치 정권 아래에서 독일 내의 일반적인 상황이 악화될수록 외국인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던 까닭에 그들 부부는 결혼한 그 해 10월에 파리로 이주했다. 재학 시절 때부터 교수들의 추천으로 이따금 파리 미술계를 견학하기도 했던 그는 몽파르나스에 새 둥지를 틀고 창작 생활에 전념했다.

 

이미 독일에서 단단한 화력을 다진 배운성의 작품 활동은 점차 가속도가 붙어갔다. 1938년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살롱 도톤느에 유화 10점, 데생 2점, 목판화 4점을 출품하여 모두 입선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해 파리 보자르 신문사 주최의 살롱 드 라 소시에떼 내셔날 데 보자르(Salon de la Societe Nationale des Beaux-Arts)에 유화 〈인물〉 〈겨울〉 〈꽃〉 등을 출품했다. 이 살롱의 정기총회에서는 배운성을 장식미술부 회원으로 추천하여 공식 발표했다.17)

 

당시 국내의 매스컴이 배운성의 활약상을 연이어 대대적으로 소개한 것은 어쩌면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약소 민족의 자랑거리이자 동시에 일종의 콤플렉스로 치부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배운성의 예술적 성공은 그렇게 과소평가할 일은 분명 아니다. 1938년 배운성은 파리 샤르팡티에 화랑에서 유화 38점, 수채화 24점, 목판화 등으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 해 가을 파리 르 살롱전에 5점의 작품을 출품하여 그 중 한 점을 파리 박물관이 매입하여 특별 진열했다.18) 유럽 화단에서 배운성 예술의 성가를 짐작케 한다. 당시 동아일보는 샤르팡티에 화랑의 배운성 개인전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예술의 도시 파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3대화랑의 하나인 샤르팡티에(하루 대관료가 7천 프랑이라 한다)에서 열린 동양인의 개인전은 불란서 화단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미술비평가들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배씨가 보통 동양인 화가와 같이 서양의 그림 그리는 법만을 배우는데 급급하지 않고 자기의 에스프리를 자기 양식(동양인으로서의 양식)으로 그린 데 있다고 한다. 배씨는 캔버스보다는 모필로 그리는데 동양인만이 그릴 수 있는 음예있는 선의 미는 서양인으로서는 흉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서양화의 색채와 동양화의 선의 혼연한 화합에 정력을 기울여….”19)

 

----------동선서색(東線西色), 동양화 같은 유화

 

마침내 배운성의 유럽 체류 시절의 작품 내막이 드러나고 있다. 이번에 발굴된 작품 중에는 특히 각종 개인전과 국제전에 출품했던 것으로 확인되는 유화 대표작이 상당 수 포함되어 있다. 이외에도 배운성의 작품은 유럽의 유수한 미술관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이 1944년 귀국전 팜플릿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독일 함브르크시립민속미술박물관에 〈미쓰이 남작의 초상〉, 독일 뤼벵크시립민속미술박물관에 〈세계도〉, 체코 프라하시립미술박물관에 〈인물화〉 〈풍경화〉, 폴란드 바르샤바 미술박물관에 〈인물화〉 등이 소장되어 있다. 이 외에 유럽에 흩어져 있는 배운성 작품의 소재를 파악하는 작업도 앞으로의 과제다. 최근 독일 주재 한국문화원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베를린의 Enthnologisches미술관 창고에서 찾아낸 자화상 〈무당 - 박수〉(〈가족도〉와 함께 배운성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와 〈팽이놀이 하는 아이들〉을 소개하고 있다.20) 아직도 유럽 현지에서의 작품 발굴의 가능성은 열려있다.

 

배운성의 유화 작품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자화상과 초상화, 그리고 가족도 같은 인물화다. 여기에는 초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두터운 마티에르의 인물화가 있다. 그러나 점차 배운성의 인물화는 마치 사진을 베껴놓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매우 사실적인 작품들로 이행하고 있다. 그것은 동양의 북종화, 특히 채색 인물화에서 보이는 섬세한 화면 처리를 떠올린다. 유화지만 유화 특유의 껀진껀진한 점액질이 보이지 않는 매끈한 화면이다. 인물화 중에서도 특히 자화상이 많다. 자화상이란 자의식, 자기정체성이 반영된 그림에 다름 아니다. 그의 자화상 중에는 팔렛트를 들고 있는 화가의 모습이 있는가하면 무당 옷을 입고 조선인임을 뚜렷이 부각시키는 그림도 있다. 이방인 화가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엄연한 현실, 그러나 그 속에서 언제나 자신의 뿌리를 돌이키고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한 예술가의 심경이 농축되어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전통 복장을 입은 자화상의 배경을 서양의 카페 풍경이나 고전 건축(미술관이나 박물관일지 모른다)으로 처리하여 동양과 서양을 한 화면에서 함께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외형로서뿐만 아니라 삶의 환경과 내면으로까지 파고들고 있다.

 

자화상에서 보이는 배경 처리는 다른 인물화에서도 자주 적용되고 있다. 그가 유럽 땅에 첫 발을 디딘 마르세이유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던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과도 연결된다. 레로나르도의 〈모나리자〉와 같이 인물의 배경에 또 하나의 풍경(상황)을 설정해 두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나 일본 여인의 초상 배경은 병풍을 두른 것 같기도 하고, 또는 옛날 사진관에서 인물 뒤에 놓는 소품 같은 분위기를 준다. 아무튼 우리 초상화의 전통, 특히 현대 인물화의 전통에서는 매우 휘귀한 양식이다.(그러나 이쾌대의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과 같이 배운성의 인물화와 비교할 수 있는 뛰어난 작품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초상화는 서양 인물의 경우 자신의 아내나 지인, 어린이들을 모델로 하고 있으며, 동양인들로는 배운성의 유학 중 일독협회 회장을 맡은 미쓰이 남작, 혹은 그의 개인전을 지원했던 일본 외교관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또 한국인으로는 서울의 어머니와 가족, 그리고 이 역시 추정이지만 베를린이나 파리에서 함께 유학 시절을 보냈던 동년배 지인들의 초상화도 보인다. 배운성과 독일 체류 시기가 겹치는 유학생으로 고고학자로 활약했던 도유호(都有浩), 월북 사학자 한흥수(韓興洙), 베를린대학 동양어학과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던 이극노(李克魯)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둘째, 특히 유럽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한국의 풍속을 그린 작품군이다. 혼례 장면, 장고 춤과 같은 무악, 세시풍속 등 한국의 전통 풍습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특히 작가가 유년 시절에 체험했던 그네뛰기, 줄다리기, 널뛰기, 깃발 놀이, 팽이 돌리기 등이 등장한다. 또 아낙들이 냇가에 모여 빨래하는 정경도 담고 있다.

 

배운성은 일제 탄압이라는 민족의 좌절감을 목격하면서 조국을 떠났던 사람이었다. 그리움, 향수, 추억, 우수 등으로 점철된 고단한 해외 생활도 겪어야 했다. 그의 작품은 아주 토속적인 한국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누구나 갖고 있을 유년에의 동경이었다. 소박하고 간결한 표현법과 친근감 가는 한국 풍습의 묘사는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유럽인들에게도 인간 본성에 대한 원초적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배운성의 풍속 소재 작품들은 인물과 함께 배경에 조국의 마을 풍경이나 산야 등 또 다른 풍경을 설정하고 있다. 재현적 사실 기법보다는 이국정서에 기초한 분위기 설정에 치중한 작품들이다.

셋째, 현실의 인물 초상화에 한 걸음 나아가 현실 너머의, 가상의 인물과 풍경을 그려낸 작품이다. 그 동안 각종 자료에서 소개되지 않았던 작품으로 새로운 해석이 요구된다. 아마도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동양의 전설이나 설화를 내용으로 삼고 있거나 선화나 불화 혹은 도석인물화의 서양적 번안이 아닌가 생각된다.

 

----------유럽인의 마음을 뒤흔든 아시아적 특질

 

배운성의 판화 작품도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의 고판화는 근현대로 내려오면서 그 전통이 단절되어 버렸다. 일제강점기에만 하더라도 대다수 미술인들 사이에 판화는 여기 정도로 인식되었으며, 더구나 일본 유학생들 중에서 현대판화의 기법을 도입한 화가는 매우 드물었다. 한편 개화기이래 인쇄매체의 확산과 더불어 삽화, 만화, 풍자화 형식으로 판화의 쓰임새가 확산되었지만, 순수미술의 고정관념 아래에서 그 가치나 역할은 폄하되었다. 한국인의 판화가 공식 전람회에 선보인 것은 1939년 1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최지원(崔志元)의 목판화 〈걸인과 꽃〉 정도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 보면, 배운성이 유럽에서 일찍이 목판화뿐만 아니라 동판화·석판화 등 다양한 판법을 익히고, 국제전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한 사실은 우리 판화사에 기록될 선구적인 활동임에 틀림없다. 그의 목판화 양식은 동양 묵화와 관련을 갖는다. 특히 〈술마시기〉 〈자화상〉 〈세계도〉 〈미쓰이 남작의 초상〉 등의 단색 목판화는 모두가 양각 기법으로 처리하여 이를테면, 동양화의 필선 혹은 여백 같은 조형미를 한껏 살리고 있다. 매끈한 마티에르의 유화처럼 판화에서도 칼자국이 없는 간결한 화면을 추구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배운성의 묵화다. 그가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묵화를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렸을 때 고국에서 동양화(사군자나 서예 정도의 교양수준이겠지만)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이 점이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유럽 땅에서 새롭게 체득한 유화와 병행하여 꾸준히 묵화를 그렸음이 확인된다. 그는 한때 유럽을 순회하면서 동양화 강의를 하기도 했다. 또한 베를린 주제 일본대사관의 접견실 장식그림으로 비단에 산수화를 제작하기도 했다.21) 배운성은 이렇듯 동양의 예술, 예를 들면 서화이명동체(書畵異名同體)라는 예술관을 체질적으로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을 자신이 새롭게 체득한 양화 양식으로 종합해보려는 노력을 보였다.

 

배운성의 이러한 작품 취향이 한국의 문화와 미를 유럽인들에게‘전도하려는’의도에서이건, 아니면 이국 땅에서 뼈저리게 느끼는 모국애의 발로이건 간에 작품 소재와 회화 기법이 유럽인들에게 이국적인 매력을 주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매력이 신비하고 비밀스런 ‘상품’ 가치로까지 빛을 발하여 배운성에게 성공의 길을 열어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유럽의 매스컴은‘섬세한 필치와 우수한 명암법 등 아시아적 특질의 표현’‘유럽의 문화와 미감에 흔들림 없는 고전적 조선의 중후한 예술’로 배운성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동양과 서양의 융합, 그 성과와 한계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진정으로 최초의 유럽 유학생 배운성에게 걸어야 할 기대는 무엇일까? 배운성이 양화라는 전통과 유산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미술의 본거지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그곳 화가들과 상대적으로 작품의 우위를 따진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서구적인 조형 어법을 현지에서 체득하고 그것을 자기화하려는 가열한 몸부림 같은 것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배운성의 작품에서는 안타깝게도 동시대의 미술사적 고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일본 유학을 통한 간접적인 서구미술 수용의 한계를 불식시키고 극복하는 그 어떤 새로운 미술의 모델을 한국미술에 제시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배운성은 서구미술을 수용하여 철저하게 습득하고, 한 걸음 나아가 그것을 우리의 조형 언어로 천착시키기보다는 어쩌면 유럽인들의 호기심과 그들의 이국 취미에 영합하여 소재주의라는 보다 안락한 도피처로 쉽게 안주해버리고 만지도 모른다. 배운성의 유럽 영광의 이면에 우리는 이러한 한계도 동시에 짚어봐야 할 것이다.

 

1991년 필자는 배운성의 제한된 작품 자료에 의거하여 바로 위와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이제 배운성의 작품을 판단할 새로운 근거가 마련되어 필자가 지적한 한계는 조금씩 풀어지고 있다. 나는 여기서 배운성이 활동했던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의 유럽 화단의 동향을 조망하면서 또 하나의 문제를 제기한다.

 

배운성의 작품은 입체파나 미래파, 다다나 초현실주의, 추상미술과 같은 전위미술과는 분명한 거리를 두고 있다. 또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 배운성 작품은 세계미술의 본거지 베를린과 그 자신이 선택했던 베를린미술학교의 주류 미술 경향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배운성이 미술학교에 다닐 때만하더라도 표현주의의 후계자 칼 호프(Karl Hofer 1878∼1955)와 그의 제자 빌헬름 나이, 그리고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 현실을 격렬히 고발했던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 1867∼1945), 바우하우스에서 활약했던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 1888∼1943) 같은 대가들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일본에서 유학했던 한국 미술학도들의 환경과는 판이하게 다른 배운성의 행운이었다.

 

그럼에도 배운성은 나치로부터 퇴폐미술가로 낙인찍혀 미술학교를 쫓겨난 위의 작가들을 ‘선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치 추종자로 철저하게 현실에 순응했던 슈피겔의 제자로 안전하게 학창시절을 마쳤다. 여기서 한국미술의 유럽 유학생 1호와 서구 미술과의 진정한 만남, 그 기대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배운성 작품에는 동시대의 미술을 변혁하려는 의지와 모험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고희동 이후의 일본 유학파의 작품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구상 양식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배운성은 유럽인들의 이국 취미를 이끌어내는 조선적 향토적 토속적 전략을 내세웠지만, 이 향토색 역시 이미 1930년대부터 국내 화단에서도 활발한 비평적 논의와 예술적 성취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히려 배운성의 작품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파리에서 구상적 세계를 추구했던 에꼴 드 파리의 작가들과 여러모로 친연성이 있다. 에꼴 드 파리는, 제1차 대전 이후 유럽 각 도시들의 공전의 경기 호황과 자유 구가의 시대 분위기에서, 특히 정점에 이르렀던 예술 도시 파리의 번영을 반영한다. 에꼴 드 파리는 명확한 미학이나 이즘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국적의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민족성과 그 풍토성에 뿌리를 둔 독자의 양식을 확립해갔다. 이탈리아에서 모딜리아니가 러시아에서 샤갈이 파리로 건너와 활동했다. 특히 이 시기에 샤갈은 고향의 종교적 민족적 풍물을 소재로 한 작품에 몰두한 사실도 주목해 보자.

 

에꼴드 파리 중에 아시아 출신으로 명성을 날렸던 화가는 후지다 츠쿠하루(藤田嗣治 1886∼1986)22)였다.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에 파리에 정착한 후지다는 유백색의 반유성 화면에 가늘고 섬세한 필선으로 정교한 인물화를 그려냈다. 우끼요에를 연상시키는 인물 표현은 일본 미술의 전통과 유럽의 모더니즘을 융합시킨 독자의 양식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미술시장에서의 인기도 급속도로 높아갔다. 말하자면 후지다는 일본이 자랑하는 당대 최고의 국제 화가였다. 따라서 후지다는 일본의 젊은 화가들에게 높은 동경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유학 출신의 한국인 화가들(특히 이쾌대의 경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배운성의 작품과 예술적 야망을 후지다와 연결하고 싶다. 후지다와 배운성의 직접적인 교류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유럽 전역에 걸친 배운성의 폭넓은 행동 반경과 파리 체류 시기를 상기하면, 그는 쉽게 후지다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터이다. 그리고 배운성이 귀국한 뒤의 일이지만,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23) “유럽에서 활동했던 후지다 츠쿠하루의 동양적 선이 유럽인들에게는 어떤 흥미를 끌고 있는지” 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있다. 결코 우연히 넘길 일은 분명 아닌 것 같다. 배운성이 살아있을 때 이미 배운성과 후지다와의 작품 상관관계에 대한 물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으로서는 후지다에 대한 배운성의 영향 부분은 아직 숙제로 남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후지다는 에꼴 드 파리의 역사에 면면히 남아 있고, 배운성은 서양의 미술사는 물론이고 한국(남한)의 미술사에조차 빠져 있다는 엄연한 차이다. 배운성은 앞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양화를 배운다고 해서 꼭 서양 고전만 공부해야 된다는 법은 없겠지요. 양화를 완전히 우리 것으로 하려면, 서양 고전만으로도 안되겠지요. 회화의 본질에 있어선 동서 양쪽 것 중에서 서로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동양미술과 서양미술의 융합, 고전의 현대화, 동양의 선과 서양의 색채, 동도서기(東道西器) 혹은 서도동기(西道東器). 배운성이(또한 후지다가) 지향했던 예술 목표와 험난한 예술적 성취는 당시 근대화 서구화의 패러다임 속에서 조선인(일본인)이 숙명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이자 또한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자기화의 몸무림이었음이 틀림없다. 특히 배운성은 역경을 헤치고 홀로 우뚝 선 자수성가형의 화가였다. 배운성 예술의 성과와 한계 또한 어쩔 수 없는 자기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배운성은 1930년대 후반 파리 시절에 바야흐로 화가로서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 전역에 전운이 감돌고, 마침내 파리가 함락 직전에 이르자 그는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던 작품 1백67점을 두고 서둘러 귀국 길에 오른다. 1940년 6월 11일, 배운성의 몽파르나스 야망이 꺾이는 시간이다. 배운성은 파리를 떠난 지 석 달만인 9월 17일 서울로 돌아왔다.24)



1)김복기, 〈배운성─첫 유럽 유학생의 생애와 작품〉, 《월간미술》, 1991년 4월호
2)〈거룩한 한국 혼 이미륵, 우리 가슴에 살아오소서〉, 《조선일보》, 1999. 3. 18
3)이미륵과 함께 뮌헨서 유학했던 김재원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1959년 1월 1일부터 나흘간 조선일보에 이미륵의 생애를 연재했고, 이 해에 전혜린이 《압록강은 흐른다》를 우리말로 처음 번역했다. 또 정규화 교수는 1975년부터 이미륵을 연구하고 있다.
4)리재현, 《조선력대미술가편람》(증보판), 평양 문학예술출판사, 1999
5)배운성, 〈벙어리 화백과 부르노 고성(古城)〉, 《문화일보》, 1947. 3. 19
6)격주간 패션 잡지 《Die Dame》, 1935년 8월 발행 기사에서. 프랑크 호프만, 〈배운성─베를린 생활 16년의 발자취〉, 《월간미술》, 1991년 4월호 재인용
7)프랑크 호프만, 앞의 글
8)〈불국(佛國) 살롱에 입선한 이(李)배(裵) 양군을 축하함〉, 《조선일보》, 1927. 11. 20
9)프랭크 호프만, 앞의 글
10)〈국제전에 빛난 배운성군의 판화〉, 《조선일보》, 1929. 1. 18
11)〈와소르 미전에 배운성 화백 수위〉, 《동아일보》, 1933. 11. 27
12)〈판화가 배운성 씨, 백림(伯林)에서 전람회 개최〉, 《동아일보》, 1935. 4. 5
13)〈독일에서 절찬을 받은 빛나는 우리의 청년화가〉, 《조선일보》, 1935. 8. 11
14)M. K. R. 〈Ein Koreanischer Kunstler in Deutschland〉,《Hamburger Fremdenblatt》, Nr. 81, 22 marz, 1935. 홍원기, 〈1920~30년대 유럽에서 활동한 한국 화가들〉, 《월간미술》, 1994년 9월호 재인용
15)《이역에 꽃핀 예술 조선 - 배운성군 체코에서 개인전》, 1936. 1. 25
16)쿠르트 룽애, 《배운성,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다》, 문화서적출판사, 다름슈타트, 1950. 김복기, 앞의 글 재인용
17)〈화백 배운성 씨 파리 춘전에 입선, 3대회장서 개인전〉, 《동아일보》, 1938. 6. 21
18)〈배운성 씨의 살롱 작품을 파리 시립미술관에서 매상 진열〉, 《동아일보》, 1939. 2. 2
19)〈동양화적 독특한 선미(線美)로 구주 화단에 대충동〉, 《동아일보》, 1939. 1.8
20)http://www.koreaheute.de/spez/0011/sp11-002hangul.htm
21)프랑크 호프만, 앞의 글
22)후지다는 제2차세계대전 때 귀국하여 전쟁화 제작에 적극 가담했으며, 이러한 경력 때문에 종전 후 전범자 대상에 올라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서 여생을 보냈다.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하여 레로나르로 이름을 바꾸었다. 필자는 이쾌대가 해방공간에 그린 군상이 후지다의 전쟁화와 밀접한 영향 관계가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23)〈배운성 씨의 화실을 찾아서〉, 《춘추》, 1943. 6. 최열, 《한국근대미술의 역사》, 재인용
24)《매일신보》, 1940. 10. 13 과학연구소

 


----------파리에 두고 온 167점의 작품, 기적 같은 부활

 

“이즈음, 귀국 후 첫 작품 발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20년의 유럽 체류 생활에서 제작한, 보물과 같은 전 재산인 나의 작품 전부는 몰락 전야의 파리에 남겨둘 수밖에 없어 지극히 소규모로 이번에 발표회를 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거의 전부는 아니지만, 새로 제작해야 하는 일은 큰 시련이었으며, 그것은 오늘 이후의 생활을 새롭게 창출하기 위한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일과 같은 시국에 뭔가 강력한 것을 창출해야 하는 필연성은 우리들 예술인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선의의 감상을 부탁드립니다.”

 

배운성 제1회 귀국 양화작품발표회. 배운성은 1944년 서울에서 개인전(6. 1∼6 미쓰꼬시백화점 화랑)을 열었다. 그가 2차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함락 직전의 파리를 탈출한 것은 1940년 6월 11일. 그리고 3개월 뒤 9월 17일에 마침내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4년 뒤에 귀국 전람회를 열면서 배운성은 전시 카탈로그의 초대글을 위와 같이 적고 있다.

 

이 초대글 서두에는 서울에 돌아온 지 4년 만에 뒤늦은 귀국 보고전을 열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배운성은 귀국 길에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보물과 같은 전 재산’이 빠져 있었다. 이 사실을 배운성은 귀국 직후 한 문예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 수백 점을 파리에 두고 왔으므로 조선에 별로 없는 초상화를 계획해 개인전을 열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1)

 

파리에 두고 온 작품 167점. 젊은 예술혼을 홀연히 바친,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작품. 배운성은 생전에 이 작품의 행방에 애타했으나 끝끝내 그 운명을 알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연 많은 배운성의 유럽 시절 작품은 다행히 이국 땅 어둠에 보존되어 왔다. 그리고 이 한국미술의 보물을 파리에 유학중이던 한국인 컬렉터(불문학자 전창곤)가 우연한 기회에 발견, 소장하게 되었다.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지난 가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 열린 배운성전(2001. 9. 7∼10. 21)에서 처음으로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낸 작품 48점은 위의 167점 중 일부였다. 그리하여 작품은 화가가 홀로 먼저 귀국한 61년 뒤에 주인의 땅 조국의 품에 안겼다. 작가의 사후에 진정한 귀국전이 열린 셈이다. 배운성 예술의 극적인 금의환향이었다.

 

배운성 귀국 양화작품발표회에는 모두 31점의 유화가 출품되었다.

 

〈어린아이〉(8호), 〈마을의 어린아이들〉(50호), 〈여인상〉(12호), 〈국(菊)〉(12호), 〈동무(冬霧)〉(12호), 〈백마강〉(12호), 〈어머니의 초상〉(6호), 〈유자(儒者)〉(6호), 〈작약〉(8호), 〈덕수궁의 봄〉(10호), 〈꽃〉(6호), 〈조선의 혼례식〉(8호), 〈대동강 반(畔)〉(6호), 〈제례〉(8호), 〈달밤〉(6호), 〈설경〉(25호), 〈봄〉(10호), 〈설달마(雪達磨)〉(8호), 〈겨울의 월광〉(8호), 〈심청전의 일절〉(50호), 〈풍경〉(10호), 〈꽃〉(8호), 〈흰 백합〉(8호), 〈인형〉(8호), 〈무희〉(8호), 〈총석정〉(10호), 〈조선의 해변〉(8호), 〈나의 아틀리에〉(100호), 〈여인들의 놀이〉(6호), 〈김연수(金年洙) 씨 초상〉(특별 출품), 〈남(南) 각하의 초상〉(특별 출품).

 

이 전시에 출품한 작품은 현재 거의 유실된 상태다. 다만 유럽 시절의 작품이 발굴되기 이전, 배운성이 남한에서 제작된 작품으로 유일하게 소개되었던 〈총석정〉이 바로 이때의 출품작으로 추정될 뿐이다.

 

전시 목록을 보면, 배운성은 유럽 시절의 연장선에서 작품을 제작했음이 확인된다. 배운성은 원래 동일한 소재의 작품을 즐겨 그리곤 했다. 과거의 작품을 재현한 것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짐작된다.

이미 필자는 배운성의 유럽 시절의 작품 유형을 세 가지로 분류한 바 있다. 작품 명제로 미루어 보아 귀국전 작품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어머니, 어린아이 등의 초상 인물, 둘째는 혼례식, 제례 등 전통 풍습과 마을의 어린아이들, 무희 등을 그린 향토적 소재의 작품, 셋째는 전설이나 설화를 소재로 한 심청전, 달마도 등이다. 여기에 새롭게 추가된 것이 귀국 후 서울의 고궁 그리고 부여, 평양, 금강산 등 조선 각지의 명승지를 그린 풍경과 꽃 그림이다.

 

----------조선총독의 초상화를 그리며 뒤늦은 귀국전

 

전시 목록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당대 유명 인사의 초상화 두 점. 김연수와 조선총독부 미나미 총독의 초상화(조선총독부시정기념관 소장품). 또한 이 전시는 일제 체제의 실력자들이 후원에 나섰다. 카탈로그에는 김연수, 진학(秦學), 김천성(金川聖), 민규식(閔奎植)과 야스다 미끼다(安田幹太), 우찌다 곤고루(內田鯤五郞), 야나베 에이자부로(矢鍋永三郞) 등이 전시 초청자로 적혀 있다.

 

야나베는 총독부 국민총력연맹 문화부장으로 1941년 2월 2일에 결성된 경성미술가협회 고문으로 참여했으며, 뒤에 조선미술가협회 때도 가담한 일제의 문화행정가였다.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진학(본명 학문 1894∼1948), 조선방적과 삼양사를 경영했던 김연수(1896∼1979) 등은 모두 당대의 권력자들이었지만, 해방 이후 일제 문화정치의 하수인으로 지탄을 받았던 인물들이다. 특히 민규식은 1938년 총독부가 대륙 침략에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정책에 협력하는 민간단체들을 규합하여 결성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이자 이사로 참여했으며, 1941년 친일단체 흥아보국단준비위원회의 상무위원으로 김연수와 함께 가담했다. 배운성 귀국전 후원자의 명단에서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배운성은 유럽에서도 일본인 초상을 많이 남겼다. 특히 배운성은 탁월한 목판화 걸작 〈미쓰이 남작의 초상〉의 모델인 미쓰이 다까하루(三井高陽 1900∼83)와 그의 부인, 그리고 그의 가족으로 추정되는 기모노 입은 여인상을 그렸다. 일본 굴지의 재벌 그룹 미쓰이의 창립자 미쓰이 미나미(三井南)의 아들인 미쓰이는 두 차례(1925∼29, 1933∼35) 독일에 체류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인 데다 배운성은 와세다 대학에서, 미쓰이는 게이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경력이 있다. 미쓰이는 어릴 때부터 막강한 재력을 기반으로 유럽 전역을 순회하며 각국의 실력자들과 인적 교류를 펼쳤다. 그는 어릴 때부터 우표 수집에 심취하여 이 방면에 수많은 저서를 펴내는 등 세계적인 우표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2) 1936년 일독문화협회 이사로 취임한 미쓰이는 배운성에게 베를린 주재 일본대사관 장식을 위한 일감을 제공해 주었다. 배운성은 대사관 접견실에 대형 동양화를 제작했다.3) 미쓰이는 배운성이 유럽에서 이름을 날리는 데 도움을 준 후견인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이렇듯 일본 관료 조직과의 원만한 협력 관계를 유지한 때문인지, 배운성이 유럽 전역을 순회하며 화려하게 펼쳤던 개인전 중, 특히 함부르크와 프라하의 개인전은 일본 영사관과 공사관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자신의 귀국전 카탈로그 이력서에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군국주의 전시 체제협력 혹은 친일 행적의 내막

 

유럽에서의 화려한 영광을 뒤로 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배운성.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미술 환경은 참으로 열악했다. 일제가 전시 체제로 본격 돌입하여 군국주의가 단말마적 발악으로 치닫던 시기, 조선의 미술은 일제의 전시 체제에 동원되는 암흑의 시기였다. 배운성의 귀국과 함께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의 친일 전력과 만나게 된다. 친일. 참으로 수치스럽지만 모질게 따라붙는 민족 아픔의 단어다. 특히 친일미술의 경우, 그 규정과 분석 잣대가 해당 작가의 자발성 여부는 물론이고 작품 양식에 이르기까지의 정황, 증거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매우 미묘한 사안이어서 단정적으로 거론하기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일단 체제 협력이라고 해두자.

 

배운성은 귀국하자마자 1940년 11월에 일제의 민족말살 책략이었던 이른바 내선일체론의 선무공작 무용극 〈부여회상곡〉(대본 이서구, 무용 조택원)의 무대 구성 및 의상을 맡은 일이 있다.4) 또한 1941년 2월 일제의 ‘회화봉공(繪畵奉公)’에 맹세하면서 내선일체 관민합작의 총력 체제를 갖춘 조선미술가협회가 결성되자 배운성은 서양화부 평의원으로 가담했다. 여기에 서양화부 이사로 심형구가, 평의원으로 김은호 이상범 이영일 이한복(일본화부) 김인승 이종우 장발(서양화부) 김경승(조각부) 등이 참여했다.

 

1943년 8월 일제는 조선 징병제를 실시했다. 총독부는 8월 1일부터 일주일간을 ‘징병제 실시 감사 결의 선양운동 주간’으로 선포하고 총력연맹 주최로 조선 신궁에서 징병제 실시를 기념하는 성대한 필승기원제를 열었다. 《매일신보》는 8월 1일자 1면을 〈금일 감격의 징병제 실시〉라는 제목으로 전면 특집을 꾸미고,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라는 시화를 연재했다. 이 난에 배운성은 카네무라 류우사이(金村龍濟)의 시와 함께 나팔 부는 병사를 그린 징병제 축하 그림을 그렸다.5) 또한 1944년에는 일제의 전쟁상을 고무 찬양하는 결전미술전람회(3. 10∼24 총독부미술관)에 〈00기지를 지킨다〉와 〈출동〉을 출품했다.

 

그러나 북한 자료에는 배운성의 청년시절 민족관을 좀 다르게 언급하고 있다. (배운성의 이력 중에서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해서는 남한(혹은 미국)과 북한(혹은 배운성 자신)의 견해와 해석 차이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배운성은)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에서 가내수공업자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 나던 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정의 모든 부담은 병약한 어머니의 두 어깨에 실렸다. 1908년에 인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를 대지 못해 중퇴하고 경성중학교의 급사로 있으면서 노동야학에서 공부했다. 1915년부터 백가 성을 가진 자본가(백인기)의 집에서 서생으로 있으면서 거기에 얻은 돈으로 서울 사립중등학교를 다녔다. 거족적인 반일운동이 벌어진 1919년에 열혈 청년으로 3·1 봉기에 참여하였고,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여 신문 《자유신종보》 《혁신공보》 등을 비밀리에 등사하여 서울과 지방에 배포했다. 3. 1운동 관련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그는 이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백인기의 아들이 독일로 유학할 때 그의 뒷바라지를 위해 같이 가게 되었다. 자본가의 아들(백명곤)이 병으로 귀국한 후 돌아갈 여비를 보내주지 않아 타향에서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자본가 놈들의 비인간적 행위를 저주하면서 간난 신고하여 고학으로 대학과정을 전부 마쳤다.” 6)

 

이렇듯 북한 자료와 여러 증언을 종합하면, 배운성의 이력은 친일과는 상반되는 또 하나의 축으로 엮어볼 수 있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 반일운동 참여, 조선인의 이름으로 참여한 국제 미술전, 이미륵 등 민족주의 유학생들과의 교유, 손기정의 월계관으로 빛나는 베를린 올림픽 때 《동아일보》 현지 특파원 역임, 일본 동맹국인 독일 땅에서 민족 정서를 노래한 경력, 그로 인한 일본 첩보원의 협박 공갈과 권유 형식의 귀국 길….

 

----------조선 향토색의 구현과 유화의 동양적인 기법화

 

유럽 화단에서 배운성 예술의 지표와 성취는 동양 정신과 유럽 기술의 결합, 이른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실현에 있었다. 섬세한 필치와 우수한 명암법 등 아시아적 특질의 표현, 유럽의 문화와 미감에 흔들림 없는 고전적 조선의 중후한 예술, 서양화의 색채와 동양화의 선의 혼연한 화합….

 

유럽 시절 배운성이 이방인으로서 서구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국 정서는 조선 화단에서의 향토색 문제와 맞물린다. 그것은 1930년대부터 국내 화단의 이론과 창작 양쪽에서 꾸준하게 제기되었던 의식 있는 미술의 화두였다. 향토색 구현의 방법론은 시대와 작가에 따라 달랐을지언정, 또한 비평적 어휘의 뉘앙스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것의 진정한 목표는 전통과 현대, 서양과 동양의 조화 속에서 우리 것의 실현, 조선적 민족적 정서의 예술적 실현의 문제로 모아졌다.

 

필자는 특히 유화에 있어서 조선 향토색의 문제란 시대정신이나 정체성 등 작품 정신이나 내용 못지않게(혹은 그 이전에) 서구적 조형어법을 자기화 혹은 우리화하는 방법적 형식적 문제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유화 수용의 일천한 역사를 상기할 때, 새로운 미술 양식의 실현에는 방법적 모색과 천착 과정이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1940년대에 이미 윤희순은 유화의 향토화 양식 획득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유화의 향토화는 양식이나 제재만으로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기법의 문제가 최후의 해결을 주는 것이다. 응시하는 힘 없이 양식부터 세우려는 초조한 마음, 이것을 솔직하게 포기할 때에 견고한 기법 위에 서게 될 것이 아닐까? 그때에 하나의 색편(色片)과 한가닥 선이 확실한 신념 밑에서 정곡(正鵠)한 위치에 놓여 있게 될 것이다.”7)

1940년대 초반의 향토색 논의를 가장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는 미술 활동은 신미술가협회였다. 박문원이 지적한 대로, 신미술가협회는 일제 말기인 1940년대 전반기, 식민지 미술에 대항한 가장 양심적인 재야단체였다. 이중섭 이쾌대 문학수 진환 최재덕 등의 회원들은 암흑기의 미술계에서 민족 정서를 그림으로 담아내려 했다. 그들은 화풍에서뿐만 아니라 작가적 태도에서도 총독부의 조선미전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배운성은 이 신미술가협회 회원으로 가입할 뜻이 있었다. 그러나 1944년 서울의 이쾌대가 지방의 진환에게 보낸 묵필 사신에 의하면, 신미술가협회는 배운성의 가입의사를 거절했다.8) 그 이유가 배운성의 친일 행각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신미술가협회의 대다수 회원들도 결국은 예술지상주의적 예술관에 기반을 두었다는 한계를 파고든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들 중에서 이쾌대 같은 탁월한 화가를 만나는 큰 기쁨이 있다. 배운성과 이쾌대. 둘다 6·25 때 월북한 이후 남한의 미술사에서 전설처럼 사라졌다가 작가의 사후에 작품이 대거 발굴되었다. 근대 한국미술사의 자산을 풍성하게 일궈준 화가다. 두 작가는 조선 향토색 혹은 유화의 정체성 모색이란 측면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바로 동양과 서양 전통에서의 가열한 자기화 모색이다.

 

그러나 조선 향토색의 모색과 실현에 있어 배운성은 이쾌대에 비해 힘과 정신, 방법적 구체성이 훨씬 떨어진다. 배운성의 경우 동양 고전, 특히 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민속 풍속 등 소재주의적 취향에 훨씬 더 경도되어 있다. 반면 이쾌대는 고구려 고분벽화, 십장생도나 병풍 등 화조화, 조선 후기 풍속화의 미인도 등 우리 전통미술의 유산에서 자기화의 자양분을 구체적으로 찾아내고 있다. 작품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당시의 평자들은 ‘고전미를 띠우게 된 색조를 연상케 하여 향토색을 지표로 하는 노력’(윤희순), 〈부인도〉의 ‘향토적인 서정의 세계’(정현웅), ‘향토적인 애착에서 고조될 낭만과 같이 등잔 밑에 전설을 이야기하는 웅변’(길진섭)으로 이쾌대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9)

 

그럼에도 〈가족도〉와 같은 배운성의 몇몇 대표작에서는 조선적 유화의 한 전형을 찾아낼 수 있다. 옅은 마티에르, 인물 형상을 윤곽지우는 예리한 필선, 오방색에 가까운 전통 색채 등의 조형 요소는 김용준이 《조선미술사대요》에서 이쾌대의 작품을 ‘동양화의 선조(線條)의 맛을 가미하려고 한 것’이라 평가한 개념과 그대로 통한다. 실제로 배운성과 이쾌대는 에꼴 드 파리의 총아로 일본 전통과 유럽 모더니즘을 융합한 후지다 쓰쿠하루(藤田嗣治 1886∼1986)가 실행했던 것처럼 세필의 동양 붓을 즐겨 사용했다. 말하자면 ‘칠한다’는 서구의 유화 개념보다는 ‘그린다’는 동양의 서화이명동체 개념에 더 가까운, 한마디로 동양화 같은 유화라 할 수 있다.

 

----------배운성과 이쾌대의 같은 점과 다른 점

 

1940년대의 조선 화단은 전시 체제의 긴박한 시국 흐름에서 유화의 조선화 문제를 동양정신으로 확장해 나가려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윤희순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동양정신의 부흥’으로 제시하고 미술의 과제를 전쟁미술, 동양미의 신발견, 유화의 동양적인 기법화에 두고 있었다. 윤희순의 동양주의 혹은 조선주의는 ‘대동아사상이 미술로 구현되는 형태’였다.10) 따라서 거기엔 일제의 식민 미술정책의 실현과 그 한계 내에서 조선의 정체성 확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안고 있다. 조선 향토색 이론과 창작에서 보여주는 식민성과 민족성의 상반된 측면은 바로 배운성 같은 화가에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양화사에서 유화의 동양적인 기법화는 1920년대의 김종태, 1930·40년대의 배운성 이쾌대 김만형으로 이어졌지만, 그 참된 실현은 해방 이후 서구 현대화 과정에서 꽃피운 김환기와 장욱진 등의 작품에서 대할 수 있다.

유럽 화단에서의 명성과는 달리 귀국 후 배운성 작품에 대한 국내 화단의 평가는 그리 대단했던 것 같지는 않다. 배운성 귀국 양화전람회를 보고 윤희순은 “생각하던 것보다 역작이 적었다”면서 “기법이 장이적 기반을 해탈하기는 아직도 서양과 동양의 분위기의 상이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지적을 덧붙였다.11) 윤희순은 1944년 서울 종로화랑에서 개최되었던 유채화 10인전에서도 배운성의 작품을 ‘달필의 사생 정도밖에 안 된다’는 인색한 평가를 남겼다.12)

 

배운성은 1948년 연말에 개인전을 개최하여 40여 점의 작품을 발표했다. 〈춤〉 〈널뛰기〉 〈시장〉 〈두레〉 〈제물포〉 〈부여〉 〈대동강변〉 등 전시 작품 명제에서 쉽게 짐작 수 있듯이 풍속화와 국내의 명경승을 그린 작품, 그리고 인물화를 선보였다. 박고석은 배운성의 개인전 평에서 “소재에 있어서 로칼리티를 주로 한 작화와, 양식에 있어서 동양적인 원근법과 평면화를 도입한 작품과, 색채 톤의 취급에 있어서 서구 취미가 농후한 작품”으로 분류하고 있다.13) 이 개인전이 귀국 후의 작품 전개 양상을 보여주는 자리였겠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 단 한 점도 없다.

 

북한 자료와 증언에 의하면, 이 시기 배운성의 대표작으로 화가들의 작품 토론 장면을 형상화한 유화 〈나의 화실〉(1945년. 120호), 북행 길을 따라 밤길을 걷는 인물 군상 〈38선의 야경〉(1947년. 80호)을 들고 있지만 이 역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배운성이 남한에서 활동한 기간은 1940년부터 1950년까지다. 이 기간의 제작 활동을 보여주는 작품이 남아 있지 않아 정당한 평가에 한계가 있지만, 배운성은 첫 유럽 유학생으로서의 화단사적 위치와 유럽에서의 명성에 걸맞은 새로운 미술 양식을 보여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배운성이 활동했던 이 10년간이야말로 민족사적으로나 화가 개인으로서도 암흑과 혼란과 격변의 시기였다. 그러나 이 암울한 시기에도 한국 미술사는 이쾌대와 같은 작가들의 빛나는 족적들이 이어졌다. 그가 해방공간에 우리에게 남긴, 민족적 열정을 폭발적으로 분출해낸 저 장대한 인물 군상을 보라.

 

----------성화 제작의 비밀

 

배운성은 1949년에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서양화부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이때 〈성호(聖號)〉라는 명제의 성화를 출품했다. 우리는 이미 유럽 시절부터 성경을 읽고 있는 인물, 묵주를 들고 있는 노인, 또는 성화를 연상시키는 배운성의 작품을 확인한 바 있다. 그는 어떤 연유에서 성화를 그렸을까?

 

배운성의 성화 제작에 대한 비밀은 윤을수(尹乙洙 1907∼71) 신부와의 만남에서 찾을 수 있다. 배운성은 16년간의 베를린 생활을 청산하고 프랑스로 이주했던 초기 한때에, 파리 근교의 고성(古城) 부르노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이 부르노 고성은 젊은 처녀들의 여숙(기숙사)으로 사용되었는데, 배운성은 이 여숙의 독일어 교사를 맡았다. 이 부르노 고성의 학감이 윤을수 신부였다.14)

 

윤을수 신부의 세례명은 라우센시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용산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938년 프랑스로 유학, 소르본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다시 로마 라테란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로마주재 일본대사관 관리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자 1941년 미국으로 탈출하여 뉴욕문화원 교수, 뉴욕교회 보좌신부로 활동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교황청 전교회 한국지부장, 성심대학(현 가톨릭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그는 인보성체수도회의 창설자였다.15)

 

화가 배운성과 신부 윤을수. 특히 윤을수 신부는 유럽 유학 직전 성화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관련 연구 논문을 수차례 발표한 적이 있다. 그는 가톨릭 성물의 한국화를 주장했던 진보적인 성직자였다. 성직자이면서도 한복을 즐겨 입었던 그였다. 배운성은 파리 시절 윤을수의 초상를 그렸다. 국립현대미술관 배운성전 개막 후 필자는 윤을수의 초상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복을 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비장한 시선의 인물, 굳건한 종교적 믿음 혹은 민족주의의 결의에 찬 성직자의 내면을 한눈에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

 

해방 후 두 사람은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윤을수의 성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화가 배운성의 붓에 의해 실현되었다. 실제로 인보성체수도회에서 지금까지 원색도판으로 전해 내려오는 〈한국의 마돈나〉는 윤을수 신부의 부탁으로 배운성이 금강산을 배경으로 그린 한국식 성화였다. 그러고 보면 국립현대미술관의 배운성전에 소개한 유럽 시절의 작품 중에도 한복 입은 성모 마리아가 등장하고 있다. 또한 노골적인 종교화는 아니라 하더라도 현실 세계를 초월한, 종교적 아우라가 감도는 신비한 색채와 계시적 도상이 채용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성서 이야기를 동양적으로 우리식으로 풀어낸 작품일 수 있고, 또한 동양 종교의 영적 세계에 대한 나름의 해석일 수 있다.

 

한국의 가톨릭 미술은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성화 제작의 선구자 장발(張勃)의 독보적 활동과 그의 제자 이순석과 윤승욱에 의해 겨우 명맥을 이어 왔을 뿐, 대부분의 성화와 성물은 외국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배운성이 남한에서 작품 활동을 지속했더라면 한국 가톨릭 미술사에 일정하게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해방공간, 미술교육의 꿈

 

해방을 맞은 배운성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동안 좌우익의 어떤 미술단체에도 가담하지 않는 등 미술계의 표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1947년 8월에 송정훈 등 몇몇 동료화가들과 파리의 무심사 자유출품 제도의 앙데팡당 미술전람회를 조직하였으나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해 11월에는 미군정청 문교부 주최의 조선종합미술전에 〈설경(雪景)〉을 출품했다.

 

배운성이 어떤 형태나 내막으로 좌익 계열에 관련했는지 그 사상 편력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북한 자료에 의하면, 그는 1947년부터 자신의 회화연구실을 좌익 활동의 비밀 아지트로 제공하고, 이 기간 개인전람회를 열어 수입된 금액과 집을 저당한 50여만 원의 돈을 투쟁 자금으로 바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16)

 

무엇보다 그의 젊은 아내 이정수의 사상 편력이 주목거리다. 1917년 함경남도 단천군 신남면 석우리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이병눌의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난 이정수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서울에 유학, 이화여고보를 졸업했다. 1943년 이화여전 문과(영문과의 전신)를 다닐 때 번즈를 연구하고 영시를 좔좔 외웠던 수재였다. 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대학 사회학과를 다녔던 이정수는 사회주의 활동에 심취하여 일제 때 총독부에 체포된 적이 있다. 그의 오빠 이윤수도 좌익의 거물이었다.17)

 

이정수는 해방 후 국문학자이자 좌익사상가로 남로당 중앙위원 및 문화부장을 역임했던 김태준(金台俊 1905∼49)의 비서를 지낸 적이 있다. 김태준은 좌익 활동으로 서울에서 사형당했다. 그의 아내 박진홍(朴鎭洪)도 여성동맹 조직부장을 지낸 열렬한 좌익이었다. 김태준은 한때 배운성의 집에 기거할 정도로 서로가 가까운 사이였다.

 

한 증언에 의하면 배운성은 해방 직후 좌익 활동으로 체포되었으나 이승만과 절친했던 윤을수 신부의 도움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정부수립 직후 좌익 관련자에게 전향을 강제했던 기관인 보도연맹에 이쾌대 정종녀 정현웅 김만형 최재덕 등 뒤에 월북했던 대다수 좌익 미술가들과 함께 배운성이 가입했던 사실이다.

 

그렇게 전향한 배운성은 창작 활동과 미술교육자로서의 활동에 치중했다. 해방 조국의 미술계가 당면한 과제는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미술의 건립이었다. 이 과제는 무엇보다 새로운 신진 양성 기관인 미술대학을 통해 이루어야 했다. 일찍이 미술의 본고장 유럽에서 정규 미술학교를 졸업했으며 귀국 후에는 어느덧 화단의 선배급 위치가 되어 있었던 배운성은 해방 후 대학 미술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파리에서 귀국한 직후부터 이미 배운성은 서울 남산(지금의 저동)에 운성회화연구소를 운영했다. 아틀리에 겸 사설 미술학원 성격의 후진 양성소였다.18)

 

최근 미국에서 발굴된 미군정 시절의 한국 관련 자료는 배운성이 이룩하려 했던 미술교육의 큰 야망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1947년 1월에 작성된 이른바 ‘조선종합예술학교 설립 계획안(Plan of Establishing Chosun Arts Academy)’. 여기서 이 파일의 내용을 처음으로 공개한다.19)

 

조선예술아카데미. 제안자 배운성. 교육 연한 1년. 설립 목적은 각 예술 분야에서 특수한 지식과 뛰어난 기술을 가르침으로써 한국인의 문화를 더 높은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것(별도의 선언문도 작성했다). 강의 분야는 미술·음악·연극·드라마·무용. 교수는 각 분야 56명(미술 분야는 배운성 임용련 김인승 이종우 도상봉 김은호 이상범 정말조 정종녀 윤효중 김경승 강창원). 매월 예산은 학교 건물 설립비 포함 총 1백80만4천 엔. 배운성은 이 계획안을 들고 미군정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조선종합예술학교 설립 계획은 끝내 무산되었다.

 

조선종합예술학교는 뒤에 미술 분야로 축소되어 홍익대 미술학과 창설의 모체가 되었다. 배운성이 중심이 되어 1949년에 홍익대 미술과가 설립되자 그는 초대 학과장을 맡으면서 미술교육자로서의 꿈을 실현해 갔다. 당시 교수진은 진환 이상범 이응노 윤효중 등이었다. 한편 배운성은 1950년 2월 경주예술학교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었다. 경주예술학교는 해방 직후 1946년에 설립된 4년제 학교로 미술과는 손일봉 주경 김준식 김만술 유진명 등이 교수로 가담했다.20)

 

----------북한 판화의 독보적 존재

 

배운성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공산군 점령하의 서울에서 북한 체제에 영합하는 조선미술가동맹에서 활동하다가 9·28 수복 때 가족과 함께 북으로 갔다. 이 무렵 그는 국립미술제작소 판화부를 책임지고 판화 〈미제의 반항〉(1950), 〈유격대원들〉(1951)을 비롯하여 전쟁 관련 선전화를 제작했다.

북으로 간 배운성은 유럽과 남한에서의 화력을 발판으로 삼아 장년기와 노년기를 보냈다. 평양미술대학 출판화 강좌 상급교원(1951∼56), 평양선전성 중앙미술제작소 소속화가(1956), 국립미술출판사 소속화가(1957∼59),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현역미술가(1959∼63)로 창작 활동을 펼쳐나갔다.

 

특히 배운성은 북한 판화 예술 분야의 이론과 실천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활약했다. 선전화, 전쟁화, 기록화 성격의 주제화와 사회주의 건설상을 반영하는 판화를 제작했다. 그런가 하면 아름다운 민족 생활 풍습을 꾸밈없이 묘사한 간결한 양각 기법의 목판화를 남기기도 했다.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는 북한에서까지 조선 풍속의 노래는 면면이 이어졌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유화 작업은 적고, 오히려 1960년대부터 배운성은 일찍이 유럽 시절부터 꾸준히 병행해 왔던 전통 묵화 작업을 남기고 있다. 1961년에는 판화, 수채화, 조선화 75점으로 회갑기념 창작발표회를 열었다.

 

배운성이 북한에서 남긴 대표작으로는 판화 〈원수를 반드시 갚으리라〉 〈소겨리반〉(1953), 〈유희〉 〈라성교〉 〈나들이〉 〈장고춤〉(1955), 〈우리의 자랑〉 〈쇠물이 흐른다〉 〈널뛰기〉(1958), 〈쏠 테면 쏘라〉(1960), 〈제기차기〉(1961), 〈고기잡이〉(1963), 〈홍경래 농민전쟁〉(1965), 〈경사의 날〉(1968), 수채화 〈허궁다리〉(1961), 〈동해안〉(1961), 조선화 〈5호 물동〉(1962), 〈마양도에서〉(1962) 등이 있다.

 

특히 판화 〈수령님의 초상〉 〈우리의 자랑〉은 ‘위대한 수령님의 존귀하신 영상과 불멸의 혁명 활동을 심오한 예술적 형상으로 깊이 있게 반영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목판화 〈나들이〉는 북한의 대외홍보용으로 자랑하는 국보급 작품. 친정 집을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가는 젊은 여인에 대한 애착심을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은 외국순회전람회 때마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조선미술전람회 선전화(포스터)로 나붙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 밖에 〈우물가〉 〈자매〉 〈제기차기〉 〈장고춤〉 〈널뛰기〉 〈유희〉 등에는 여성과 어린이들 속에서 벌어지는 아름다운 민족 생활과 풍습, 오락 등 다양한 내용들이 꾸밈없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배운성은 〈술 마시기〉 〈세계도〉 〈미쓰이 남작의 초상〉 등 국제판화전람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했던 작품 역량을 북한에서 더 이상 꽃피우지 못한 것 같다. 〈미쓰이 남작의 초상〉은 동판화의 음영 기법에 버금가는 섬세한 묘사 기법과 스케일 큰 공간 구성력을 보여준다. 이 완벽한 장인적 솜씨는 한국 판화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뛰어난 덕목이다. 북한에서의 판화는 60년대부터 날카로운 칼맛은 무뎌지고 간명한 선과 부드러운 색채의 수인판화로 전개되고 있다. 북한미술에서는 배운성 판화의 간결하고 선명한 형상 표현, 그리고 색채와 여백 처리를 그들이 민족적 형식의 주체미술로 내세우는 조선화의 담채 기법과 근사한 양식으로 평가하고 있다.

 

“배운성의 작품 형식은 간명하고 회화적 언어 구사에서 통속성이 충분히 보장되어 있었다. 구성이 복잡하지 않고 중심이 또렷하며 불필요한 세부를 생략하고 여백을 잘 살려나간 것은 그의 작품의 간명한 형상을 조건짓는 기본 요인들이다. (…)배운성 판화들의 간명성은 장식적 요소를 내포한 듯한 함축된 형상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선으로 화면 전체를 통일시킨 판화에서 색은 보조적인 표현수단이 되었지만 선에 못지않게 주제 내용을 직관적으로 선명하게 밝혀내는 데 기여하고 있다.”21)

 

----------평양에서 축출, 쓸쓸한 말년

 

서울 - 일본 - 베를린 - 파리 - 서울 - 평양으로 이어지는 파란의 큰 활동 궤적을 그려갔던 화가 배운성. 북으로 간 배운성의 예술적 야망은 어떻게 실현되었을까? 북한의 배운성은 단 한 번도 외국 땅을 밟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국제 무대에서 꽃피웠던 옛 영화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파리에 두고 온 육신과도 같은 작품에 대한 끝없는 미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고향과 자유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배운성은 1960년대에 접어들어 외국 미술계 인사들과의 서신 접촉, 월북한 동료 화가들과의 잦은 회합, 그리고 부르주아적 작품 경향이 당국의 눈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1963년 돌연, 온 가족과 함께 평양 화단에서 축출되었다. 표면상의 명분은 평안북도 미술가동맹 지도원의 신분이었으나 노동학습을 통해 부르주아 정신을 청산하라는 명령이었다. 신의주에서 보낸 배운성의 처참한 말년을 화가의 아내 이정수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노인네가 배가 고파서 풀죽을 쑤는 부엌 문지방 앞에 우두커니 기다리고 계신 걸 볼 때면…. 배 선생은 나를 따라온 거야. 그 분은 그림밖에 모르는 분이셨어.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22)

 

배운성은 1972년부터 병마에 시달리다 1978년 9월 20일 신의주시 백사동 2번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아들 경운·경휘, 딸 경임이 있다. 맏아들 경운은 평앙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대를 이어 판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펌)

 

 

 

 

 

 

최욱경, 어린이의 천국  1977

 

 

 

 

 

 

장욱진, 가로수  1978

 

 

이 분은 동심의 세계에 머물다 간 사람 같아요.

순수함이 물씬 뭍어납니다.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도 이 장욱진님의 작품은 좋아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저는 천상병 시인이 생각납니다만.

 

 

 

 

 

 

 

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1954

 

 

 

 

 

박수근, 빨래터 1954

 

 

 

박수근 <빨래터> 1954년, 캔버스에 유채, 15*31cm

 

 

45억 2천만원에 팔렸다는 그림은 아랫 작품입니다.

전시해놓은 건 위엣 작품이더군요.

확연히 차이가 나죠?

 

 

 

 

 

박수근, 골목안

 

 

 

 

박수근, 농악

 

 

전시된 작품은 이것이 아니라 가로로 된 작품이었습니다. 등장인물도 더 많구요.

얼핏 딱딱하게 정형화 돼 있는 모습이, 춤사위를 어떻게 이렇게 그렸을까 싶은데,

그러나 '매직 아이' 보는 것처럼 지그시 집중해서 감상해보십시요. 

꽹가리 소리에다, 다리도 사뿐사뿐, 엉덩이 씰룩거리는 게 막 느껴지지 않습니까?

와우!,

이제 보니 박수근님 작품은 허투루 볼 게 하나도 없네요!

 

 

 

 

 

 

이상범, 유경 1960

 

 

 

 

 

이상범, 설촌 1960년대초

 

 

이 두 작품은 대작입니다. 가로로 엄청 길어요.

이렇게 봐서는 실감이 안나죠? 흐릿해서 뭐가 뭔지도 모르겠구요?

실제 작품을 보면 아주 멋드러집니다.

변관식의 큰 작품도 3점 전시되어 있습니다만 그건 좀 (……).

 

 

 

 

 

구본웅,  친구의 초상  1935

 

 

초상화의 주인공은 시인 이상(李箱)입니다.

저는 이 작품이 맘에 들더군요. 거친 붓자국과 특징을 살린 표현이 아주 멋집니다.

구본웅과 이상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 불로그에 옮긴 글이 있습니다.

 

 

 

 

 

*

 

 

 

 

 

전시회 기간이 3월 30일까지입니다. 관심 있는 분이라면 서둘러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