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인구 : 448만 명 (영토. 한반도 4분의1)
1인당 국민소득 : 1만4500달러
인종 : 크로아티아 89.6%, 세르비아 4,5%, 기타
종교 : 카톨릭 87.8%, 정교 4.4%, 이슬람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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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는 그야말로 눈부시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이 나라의 국가가 "Our beautiful homelland"이겠는가. 남서쪽으로 길게 뻗은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1200여 개의 섬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와 닿는다. 유럽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휴양지로 꼽히는 아드리아 해안에는 세계적 부호와 유명인사들의 별장과 요트가 줄지어 있고, 알프스 산맥 쪽에선 라벤더 향기가 가득 실려온다. 하늘과 맞닿은 자주색 지붕의 예쁜 집들이 언덕을 따라 늘어서 있고, 너른 벌판엔 포도나무가 펼쳐져 있다. 고대 로마제국의 문화유산이 곳곳에 남아 있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전혀 다른 풍요로움과 평화로움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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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도 견디고 오스트리아와 오스만제국의 침략도 견디고, 제1 제2차 세게대전도 견뎠던 이 아른다운 천년고도 두브로브니크가 정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것은 발칸전쟁이었다. 세르비아군은 1991년 6월 두브로브니크를 에워싸고 7개월 동안 공격을 가해 수많은 주민을 살해하고 파괴했다. 포위공격이 시작되자 세계의 언론은 유네스코 유산에 대한 군사공격을 신속히 타전했고, 파괴되고 있는 두브로브니크 고성의 사진을 본 국제사회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국제적 압박에 직면한 세르아군은 대규모 진격 대신에 포위한 채 언덕 위에서 박격포로 조준공격과 해상공격을 진행했다. 결국 세르비아의 공격으로 고성 824개 건물 중 70%가 훼손되었고, 그 중 9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세르비아는 두브로브니크에 큰 상처를 주고 1992년 5월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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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플리트와 자그레브 중간쯤 지점, 크로아티아의 허리를 깊게 파고들어온 보스니아와의 접경지역에 호수와 나무의 요정이 산다는 플리트비체 호수가 있다. 디나르 알프스산맥을 끼고 있는 천혜의 산림이다. 접근하기가 어려워 '악마의 정원'이라고도 불렸다. 깊은 울창한 천연림으로 둘러싸인 16개의 호수와 92개의 폭포가 끊임없이 계단처럼 흘러내리며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유럽인들이 죽기 전에 꼭 한번 봐야할 비경으로 꼽는다. 계절마다 다른 빛깔을 뽐내는 호수와 폭포를 보기 위해 해마다 백만 명이 넘는 탐방객이 찾아온다.
플리트비체 호수는 1949년 개장한 크로아티아 최초의 국립공원이다. 1 , 2차 세계대전과 발칸전쟁의 와중에도 이 일대만큼은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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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타샤(Ustasa)는 세르비아 주도의 유고왕국에서 독립해 카톨릭에 기반을 둔 순수 크로아티아 민족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1929년에 설립되엇다. '봉기'를 뜻하는 우스타샤의 이념은 이후 나치즘과 파시즘, 민족주의, 교권 근본주의가 섞이게 되었다. 제2차 세게대전이 터지자 나치독일을 지지하며 이웃에 대한 공격에 선봉에 섰다. 나치에게게 배운대로 각지에 수용소를 세워 이민족을 감금하고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정교도, 무슬림, 유대인, 집시 등 약 수십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세르비아측은 110만 명이라고 주장한다. 유대인도 3만2천 명이 죽엇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도와주며 살인 연습을 한 추스타샤는 가스실 등에서 이민족을 집단적으로, 조용히 살해했다.
출처. 이종헌, 『낭만의 길 야만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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