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시코 고야》 작품해설

2013. 12. 26. 18:09미술/서양화

 

 

 

 

고야 Francisco Goya(1746~1828)

(출처. 비공개카페)

 

 

 

마하와 얼굴을 가린 사나이들

 

고야는 1775년, 의형(義兄) 파이유의 주선으로 왕립 산타 바루바라 디피스리 공장에 취직이 되어 벽걸이의 밑그림 그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자기 개성을 자유롭게 발휘하기 시작한 제2기(1776~80) 시대의 유명한 작품인 <파라솔>과 이 작품은 같은 무렵에 그려진 작품들이다. 송림이 이어진 안달루시아 산책길을 집시 남녀의 커플이 산책하고 있다. 바위에 걸터앉은 불량배가 여인에게 시비를 걸어오고 있다. 집시 여자가 손으로 가리키며 무어라 타이르고 있는 장면이라고 고야는 해설을 달고 있다. 마호.마하라는 서민의 생활상을 생생한 풍속화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고야의 풍속화의 출발 점이었다. 묘사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파라솔 EL QUITASOL

1777년 캔버스 油彩 104×152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도자기 파는 사람

 

가르든 시대 제2기의 고야는 어린이들의 놀이나 어른들의 놀이 정경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이 그림은 마드리드 시의 전경, 귀부인을 태운 마차가 그림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앞 쪽에 젊은 부인과 노파 한 사람이 발렌시아 산(産) 도자기를 고르고 있고 장사 아치는 비스듬히 옆으로 앉아 응대하고 있으며 고야가 즐겨 그려 넣는 개 한 마리가 있다. 인물 배치라든가 동작이 구도상의 변화와 짜임새를 주고 있으며 원경과 근경도 포인트를 둔 중경을 돋보이게 하는 대조적인 구도로 고야의 작화(作畵) 능력의 뛰어남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그 밖에 화면의 분위기 조성이나 공간 처리 등의 표현은 고야의 완성기를 뒷받침해 주는 수작(秀 作)의 하나이다.

 

 

 

 

 

聖가족

 

제작 연도는 명확치 않다. 성 요셉과 마리아, 어린 예수와 요한의 4인을 그린 것이며 하나의 집단체로서 표현 한 것이다. 네 사람의 얼굴 표현이나 색감은 리얼하게 표현했으며, 제각기 다른 표현에서 그 인물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요셉의 깊이 있는 표정, 마리아의 자애로우며 사랑에 넘치는 듯한 표정, 두 어린이의 청순한 표정과 부드러운 살결의 표현도 놀랍다. 요셉과 마리아가 입은 늘어진 옷과 마리아의 청색 옷의 대비적인 효과도 촉각적이며, 부드러운 질감 표현도 뛰어난 작품이다. 고아는 이후 종교화를 순연(純然)한 상징화로서만이 아닌 인간 드라마의 표현 형식으로 승화시켰다.

 

 

 

 

 

宰相 플로리다 블랑카 백작

 

고야는 일생을 통하여 여러 가지 장르를 개척해 나갔으며, 1771년 <마누엘 데 바루카스 마츄가 상> 이후 끊임 없는 많은 초상화를 제작했다.이 그림은 고야가 다피 스리 공장에서 밑그림을 그리게 된 8년 후, 그 당시 재상의 초상을 그리게 된 기회를 얻어 그 기쁨을 죽마지우 인 사파데르에게 보낸 편지에 '백작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처도 알고 있고, 자네에게도 알려 주고 싶었다. 내가 백작의 초상을 그리게 된 것을 . 나에게는 이 기회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씌여 있다. 이 그림에서는 당시 유행이었던 로코코적 미의식과 바로크적 이상을 절충한 회화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오스나 공작 부인

 

오스나 공작 가(家)는 16, 7세기 스페인 최고의 실력가이며 귀족이다. 제9대 오스나 공작 부인은 그 자신이 베나벤데 여백(女伯) 공작이기도 했다. 그녀는 왕비와 알바공 부인과 더불어 당시 마드리드 사교계를 삼분(三分)한 인물이며, 고야 최대의 후원자의 한 사람이었다. 알바공 부인을 스페인 전통파를 대표하는 마하적인 여성이라 본다면, 오스나공 부인은 프랑스풍을 대표하는 여성이었다.

이 그림은 화려한 프랑스 모드 의상으로 성장한 부인을 로코코적인 아름다운 색조와 섬세한 터치로 그린 고야의 초기 초상화 중의 하나이다. 자연스럽지 못한 느낌을 주는 자세는 냉엄하고 지배적인 위엄을 지닌 모델의 성격을 표현했기 때문이리라.

 

 

 

 

 

눈보라 : 겨울

 

4계절의 4부작 중의 하나인 겨울 작품이다. 세 사람의 사나이가 사냥꾼을 앞세우고 몰아치는 찬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당나귀 등에 죽은 돼지를 싣고 움직이고 있으며, 개 한 마리가 자연의 맹위에 저항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무거운 회색조의 하늘과 흰 눈의 한설이 몰아치는 설경을 실감나게 표현했으며, 겨울 풍경의 분위기 조성도 대단히 인상적이며, 특히 화면에 등장한 인물군의 표정들도 한파(寒波)와 싸우는 엄숙한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聖요셉의 죽음

 

종교 도시 발라돌리드의 산타아나 교회의 요청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이 그림의 밑그림이 남아 있으나, 그것은 이 작품과는 많이 다르며 고민하는 성요셉을 그리스도가 부둥켜 안고 있는 드라마틱한 발상으로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는 신인 그리스도가 지상에 있어서의 아버지 요셉의 시신 앞에 조용히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손을 모은 요셉의 양손에 그리스도가 오른손을 펴서 어루만질 듯한 부분이 그림의 중심을 이루었다. 왼손은 벌려 위쪽에서 내려 흐르는 빛과도 연결짓는 구도법으로 작품을 제작했으며,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는 엄숙하며 자애로움이 화면 가득히 감싸 주고 있다. 고야가 제작한 종교화 중 귀중한 작품의 하나이다.

 

 

 

 

 

마뉘엘 오소리오 데 츠니가

 

이 가련한 소년은 한 때 고야의 후원자이었던 아루다미라 백작의 둘째 아들. 고야는 인간의 추악상에도 극히 민감했지만, 순수하며 깨끗한 존재에 대해서도 무조건 반응을 보였던 인정 많은 화가였다. 어린이 본래의 청순함과 가련함을 존중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 가련한 소년을 하나의 실재자로서 표현했다는 점에서도 그의 높은 심성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고야의 초기 초상화의 특징적인 좋은 예이기도 하다. 밝은 빨간색의 대담한 색조와 명쾌한 윤곽은 당시 신고전주의의 표현 양식의 영향이 나타난 작품이다.

 

 

 

 

 

여름(수확) LA ERA

1786-87년 캔버스 油彩 276×641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알바 공작 부인

 

고야 전기에 화려한 화제를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고야의 작품에 등장한 것은 이 그림이 처음이다. 2년 후 미망인이 된 그녀를 방문, '고야에게만'이라는 명제가 붙은 유명한 <검은 옷을 입은 초상>을 제작하였다. 그림 속의 공작 부인이 오른 손으로 가리키는 지면에 '알바 공작 부인에게, 프란시스코고야, 1795년' 글이 씌어져 있다. 알바 공작 상의 경우와 다른 감정으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경직된 자세라든가 인형과 같은 무표정한 모습과 차가운 인상을 풍기게 한다. 평온한 마음이 아닌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측 아래에 그려 넣은 조그만 개 뒷다리에 맨 빨간 리본은 애교스럽다.

 

 

 

 

 

세바스티안 마르티네스

 

마르티네스는 스페인 남부 카디스 지방의 실업가로서 1792년 말 고야가 중병을 치른 뒤 귀머거리가 되었을 때 많이 보살펴 준 사람이다. 모델이 왼손에 들고 있는 종이에 [돈 세바스티안 마르티네스의 벗 고야 그림] 1792년'이라 씌여져 있다. 고야는 인간미 넘치는 사람으로 자기와 관련있던, 신세진 사람은 거의 작품으로 제작하여 남겨놓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특히 등장 인물 오른 손에 종이를 들게 하고 자기가 중병으로 고생할 때 돌봐 준 고마움을 작품으로 보답한 이 작품은 고야의 '혼의 초상화'라 불린다. 초상화로서의 가치도 높으려니와 모델의 인간성 묘출이 더욱 생명력 넘치는 작품이라 하겠다.

 

 

 

 

 

魔女의 집회

 

왕가(王家)를 제외한 고야 최대의 후원자였던 오스나 공 부처 소유의 작품이며, 아라예다 저택의 부인 거실을 위하여 그린 마녀를 테마로 한 6점의 그림 중 한 작품이다. 병을 앓은 후의 고야의 내적인 심리 변화는 여실히 화면에 반영되어 갔다. 현실미 있는 인간상과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혼합 표현되어 가는 환상적 작품 세계는 만년의 <검은 그림>과 연결성이 농후하다. 인가와 떨어져 있는 산 위, 스산한 달밤에 마녀들이 마녀의 상징인 수산양을 둘러싸고 일 주일 동안의 전과(戰果)를 보고 하고 있는 장면이다. 고야가 마녀 신앙에 인간적으로나, 화가로서도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녀를 테마로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왕비 마리아 루이사

 

고야는 왕비 루이사의 초상을 약 20차례나 그렸다. 이 작품은 왕비의 45세때 제작된 작품이며, 마하(서민) 스타일로 표현했다. 고야의 초상화 배경을 보면 다양하게 처리하고 있다. 당시 실내의 가구를 배경으로 또는 무대상의 실재감을 주는 공간 처리, 풍경을 원경으로 배치하여 그리는 경우 등 변화 무쌍하다. 이 그림에 있어서 특히 의상을 그렇게 가볍고 투명하게 그린 점, 어깨 위에 걸친 베일의 투명하고 가벼운 질감의 표현도, 의복과 육체와의 조화를 이룬 표현에서도 고야가 아니면 보기 어려운 기량과 예술성을 알 수 있다. 최고 권위자인 왕비가 마하 스타일로서 위엄을 표시한 아이러니칼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라 티라나

 

이 작품은 당시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했던 무대 배우 마리아 로사리오 페르난데스를 모델로 그린 등신대(等身 大)의 초상화이다. 고야는 같은 모델로 백의의 반신상도 제작했다. '라 티라나'란 이름은 같은 배우였던 남편이 지어준 애칭이다. 고대풍의 화려한 의상으로 단장하고, 발코니에 서 있는 모습은 당대의 명배우로서의 당당한 품격을 엿볼 수 있다. 인물을 강하게 부각시킨 고야 특유의 초상화 기법을 알 수 있으며, 몸에 걸친 붉은 색조의 화려한 의상, 그리고 장신구 등은 여배우로서의 세련미와 품격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다.

 

 

 

 

 

발코니의 마하들

 

난간 안쪽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며 앉아 있는 마하들, 배후에서 지켜보는 그늘 속의 사나이들, 등장 인물들은 밝은 가르든 시대와 동일하나, 이 그림에서는 온화하며 밝은 자연스러움은 보이지 않는다. 어둠침침한 벽과 난간의 제한되어 있는 공간 속에 4인의 남녀가 크게 클로즈업되어 있다. 청각을 상실한 후의 고야가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것, 즉 인간의 드라마의 추구자로 변해진 것을 나타낸 작품이다. 중기 이후의 일대 특징이 되는 갈색과 흑색의 주조색이 화면의 심도(深度)를 나타내고 있다. 인상파 시대의 대가 마네의 작품 <발코니>의 발상원(發想源)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마라가토와 싸우는 修道士베드로

 

1806년 아루칸다라 수도사 베드로가 무장한 도적 마라가토를 맨손으로 잡은 사건이 일어나 세상을 온통 놀라게 했다. 고야는 이사건을 극적인 수법을 써서 6점의 시리즈 작품으로 제작했다. 이 그림은 그 중 세 번째 작품이다. 처음 2점의 작품에서는 도적이 수도사에게 총을 들이대고 어깨에 짊어진 물건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장면이고, 나머지 3 점의 작품에서는 도적의 총을 뺏은 수도사가 총신으로 도적을 쓰러뜨리고 도망치려는 도적에게 발포, 도적을 체포한다는 장면을 연속적으로 그렸다. 격렬한 필촉을 구사, 색면과 동세(動勢)를 약동감 넘치는 분위기로 생생한 현장감(現場感)을 표현해냈다. 이 사건이 있은 2년 후 발발한 항불(抗佛)전쟁에 즈음하여 이 6점의 시리즈 작품에서 고야의 시국을 꿰뚫는 영감을 감지할 수 있다.

 

 

 

 

 

 

이사벨 코보스 데 포르셀

 

녹회색조(錄灰色調)의 단순화된 배경, 밤색머리에 엷고 긴 숄을 몸에 감아 늘어뜨린 멋, 터질 듯한 관능미 넘치는 앞 가슴, 두툼한 입술, 강한 의지의 상징인 듯한 눈, 풍만한 육체 등 고야가 남긴 가장 정열적인 여인상이라 하겠다. 생동감 넘치는 개성적인 여인상은 하나의 민족적 특성 즉, 스페인 여인의 상징이라 하겠다. 고야의 초상화에서 항상 얼굴에 중점을 두며, 의상이나 장식물 배경 등은 간략하게 표현하는 예가 많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인물의 몸매나 복장이나 모든 면에 정성을 기울였으며, 감각적인 효과나 회화적인 효과도 빈틈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순교

 

1649년 3월 16일 두 프랑스인 선교사가 캐나다의 이로구오 족에게 체포되어 순교했다 한다. 고야가 이 사건을 발상원으로 하여 나시체(裸屍體)를 토막 내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제작한 시기는 항불 전쟁 중이었다. 고야가 1 세기 반이나 지난 훗일에 이러한 사건을 작품으로 다룬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신념에 사는 어려움이나, 정의와 불륜, 인간 본연의 본질성과 야만성에 대한 통찰 등 여러 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고야는 이러한 테마로 시사적인 많은 작품을 그렸다. 반역이나 자유가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듯 하다.

 

 

 

 

 

거인

 

1812년 고야 재산 목록에 기재되어 있는 작품. 폭풍 직전으로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 구름 위에 거인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두려움에 떠는 듯 역마차 떼들은 공포에 싸여 사방으로 도망치는 듯하며, 전면에 노새 한 필이 무심히 서 있다. 고야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는 모르나, 노새를 스페인어로 바보 또는 얼간이라고 한다. 이 그림에 대한 해석도 구구하다. 페르난도 7세에 대한 풍자적 표현이라고도 하고, 거인을 나폴레옹 또는 전쟁의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하며,그 반대로 거인이 군중을 뒤로 방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거인을 스페인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보는 설도 있다. 어쨌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고야의 상상력의 비약을 말해주는 작품이리라.

 

 

 

 

 

죽음이 올 때까지

 

죽음에 직면한 피골이 상접한 노파가 화려한 신부 옷차림을 하고 온통 다이아몬드를 몸에 걸친 추괴(醜怪)한 모습으로 해골같이 생긴 시녀가 내민 거울을 보고 있다. 그 거울 뒷면에는 '어떻습니까?'라고 씌어져 있다. 두 사람의 뒤에서는 빗자루를 치켜들고 금방 내려칠 듯한 모습으로 서 있는 날개 돋친 염라대왕의 사자가 습격하려는 절박한 순간을 볼 수 있다. 노파가 머리에 얹은 화살표의 다이아몬드는 <카를로스 4세 가족>이란 작품의 왕비의 머리에 꽂은 물건과 같다. 그 물건은 재상인 애인 고도이에게 증정한 것이라 한다. 노파의 빨갛게 그려진 눈을 음란한 욕망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 시대상을 풍자한 고야의 비유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작품의 회화성에 있어서도 우수한 작품이다.

 

 

 

 

 

 

 戀文

 

<죽음이 올 때까지>와 함께 리르 미술관에 소장된 유명한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의 대조적인 면을 가지고 비평가들도 많은 논란을 벌이고 있다. 젊음과 늙음, 미(美)와 추(醜), 삶과 죽음 등을 대비하는 고야의 특징이 이때에 이르러서 더욱 강렬해졌다. 삶에 대한 낙관적 해석과 죽음에 대한 비관적인 해석을 같은 크기의 캔버스에 2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이 그림의 배경이 된 곳은 고야가 즐겨 그리는 만사나레스 강변이다. 하늘은 중간 톤으로, 원경의 건물들은 밝게, 중경의 군상(群像)들은 하프톤으로 처리했으며, 주인격인 마하들은 가장 밝고 가장 어두운 강렬한 색조로 콜로즈업 해서 앞으로 끌어당겨 강조해 냈다. 한 마리의 강아지가 연문(戀文)을 보는 마하에게 기어오르려는 정경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강조하고 있다. 고야의 작품 중 걸작 중의 하나이다.

 

 

 

 

 

마을의 투우

 

스페인에서 투우는 빼 놓을 수 없는 커다란 행사로 되어 있다. 중앙에서는 물론 지방에서까지도 투우를 하는데, 널빤지로 둘레를 막고 투우장으로 사용한다. 이 그림도 지방의 투우이며 귀족이나 농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피가돌(창으로 소를 찌르는 투우사)이 소에게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을 그린 작품. 격렬하게 움직이는 동적인 자세를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투우를 지켜보는 군중이나, 원경으로 처리한 풍경도 곁들여 주제인 투우의 긴박감을 자아 내는 분위기 조성을 더 한층 강조하고 있다.

 

 

 

 

 

 

대장간

 

고야의 작품 중에는 많은 풍속화 작품들이 다양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어른들의 놀이, 어린이들의 놀이, 사랑을 속삭이는 정경, 투우, 사회 습관과 각종 계층의 직업에까지 널리 다루고 있다. 이 그림은 <큰 돌의 운반 작업>, <수확>, <상처입은 석공>등 노동을 모티브로 한 일련의 작품 중의 하나이다. 노동층의 다이내믹한 인간 생활의 본질적인 측면을 추구한 것이다. 불에 달궈진 빨간 쇠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둘러싼, 3인의 각기 다른 자세는 하나의 공통된 노동의식에 결속(結束)되어 있음을 고야는 잘 포착하여 표현했으며, 격렬한 힘의 리듬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데포르메된 노동자의 심각한 표정, 격렬한 터치로 박진감 있는 화면의 분위기를 유감없이 표현한 작품이다.

 

 

 

 

 

고야와 의사 아리에타

1820년 캔버스 유채 117X79Cm 미니애폴리스 예술 연구소 소장

 

이 그림 아래쪽에 『1819년 말에 중하고 위험한 병에서, 뛰어난 의술과 정성으로 73세의 나를 구해준 벗 아리에타에게 감사하며 1820년 고야는 이 그림을 그림』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고야가 [검은 그림]의 작품제작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의사에게 부축되어 약을 먹으려는 중환자 고야의 모습에서 사경을 헤매는 듯한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한 그림이다. 고야는 이러한 중병을 세 차례나 겪으면서 삶과 죽음의 처절한 경험을 겪었고, 더욱더 심오한 예술관이 형성되어 갔다. 사경에서 세 번씩이나 회생하여 더욱더 농도 깊은 걸작을 많이 남겼다.

 

 

 

 

 

 

사투르노

 

앞서 소개된 자화상을 그린 4년 후 고야는 빈사의 중병에 빠졌었다. 다행히 회복은 되었으나 그 후 '귀머거리 집'에서 유폐 생활을 보냈다. 이 집에서 생활하면서 14 점의 작품을 제작했으며, 이 시기의 그림은 '검은 그림'이라고 불린다. 고야는 대단히 음침하여 공포와 억압을 괴물로서 상징하는 표현주의적 작품을 2층 건물 벽면에 가득차게 그렸다. 이 그림도 그 집 식당 벽면에 그린 작품의 하나이다. <사투르노>는 하늘의 지배권을 자식들에게 빼앗기게 될 두려움으로 5인의 어린 자식들을 차례차례 먹어서 죽여 버렸는데, 이 고대 신화의 신은 토요일에 마녀들의 집회를 연다는 신이기도 하다. 공포, 절망, 분노 등을 상징하는 듯한 처절한 화면 구성은 놀랍다. 고야의 정신적.내면적 파동이 이러한 표현주의적 작품을 표출한 것이다.

 

 

 

 

 

 

두 노인

 

귀머거리 집 1층 입구 벽면에 그려진 작품. 프라도 미술관 목록에는 <2인의 수도사>로 되어 있으며, 그밖에 <2 인의 괴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그림이 소장되어 있는 프라도 미술관장 하메엘 데 스라스 씨는 이그림의 흰 수염의 인물을 고야로 보고, 등뒤에서 크게 소리치는 괴물은 고야가 귀머거리가 된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복장으로 보아서 깊은 산중에서 수도하는 수도사로도 보인다. 교회나 수도회를 탄압했던 나폴레옹 정책을 비판하는 작품인지도 모를 일이나 그 시기의 고야의 자학적인 심리 상태로서는 이러한 내용의 작품이 나타났음 직도 하다.

 

 

 

 

 

자화상

 

고야의 약 20점의 자화상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고야가 69세 때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노쇠기에 이른 연령이지만, 이 그림에 나타 난 것을 보면 그의 위엄있는 표정과 불굴의 의지력과 왕성한 정열 같은 것을 엿볼 수 있다. 큼직한 얼굴, 깊이 꿰뚫는 듯한 예리한 눈, 굵은 목둘레 와 딱 벌어진 가슴 등에서 강인한 의지력 등을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색조는 흑색. 백색, 그리고 황토색을 주조로 비교적 단조로운 작품이지만,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이 있고 고야의 깊이 있는 정신적 내면 세계를 뿜어 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聖이시드로祭

 

귀머거리 집 1층 식당에 그려진 작품, 5월15일은 마드리드 수호성인 성 이시드로제 축제로서, 1년 중 가장 성대한 기념일이다. 1788년 고야가 42세 때 그린 이 주제의 작품은 명랑하고 화려한 작품 내용이었었다. 30여 년 후 5월 15일에도 그 화려한 정경을 귀머거리 집에서 바라보았을 터인데, 표현내용이 180도 달리 회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작가의 정신 상태의 변화를 말함이다. 수려한 목장 풍경도 평화로이 흐르는 냇물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둡고 침울하며 전율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 속에서 무엇인가 절규하는 듯한 군중들의 집단이 그로테스크하게 표현되어 있다. 30여 년의 세월이 인간 고야에게 이다지도 엄청난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게 했음이 작품의 내용으로 여실히 증명되는 것이다.

 

 

 

 

 

 

호세 피오 데 모리나

 

고야는 보르도에 옮긴 다음에도 죽음 직전까지 초상화를 계속 그렸다.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이며, 고야 최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고야의 연구가 호세 구데 올은 이미 완성의 작품에서 고야의 제작 과정을 엿볼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처음 단계에 있어서는 객관적. 자연주의적 태도로 모델에 최대한 담았다. 다음 단계에서 형태를 단순화하는 동시에 촉각적 가치와 모델의 전반적인 표정과 내면의 성격이나 심리 상태까지 꿰뚫는 깊은 관찰로서 표현하고 있다. 이 초상화는 미완성 이기는 하나 82년간의 고야의 생애를 통하여 가장 인간 본연의 자태를 추구한 고야다운 작품이라 하겠다.

 

 

 

 

 

 

聖베드로

 

고야가 조국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에 망명하기 직전에 그린 작품,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천국의 열쇠를 바위 위에 놓고 기도하는 성 베드로 상이다. 간결한 구도에 강력한 매스(흙덩어리)로써 조형된 성인상은 마치 움직 일 수 없는, 장엄하며 엄숙한 느낌을 갖게 한다. 성 베드로 상의 표정에서 애소(哀訴)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인간의 본질을 형상화한 까닭이 아니겠는가. 황토색, 청색, 흑색 등의 제한된 색감이 가진 상징성, 자연 보다도 정신력과 의지력으로서 긍정할 수 있는 화면의 리듬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엘그레코 작품의 사도상(使道像)의 세계와 비슷한 점이 있다.

 

 

 

 

 

 

두 마술사

 

검은 그림 시리즈 중에 가장 작은 작품. 귀머거리 집 2 층 살롱 벽에 그려진 작품이다. <스프를 먹는 2명의 노인>이라고도 불린다. 1828년의 목록에는 <2인의 마술사 >로 기재되어 있다. 노파가 스푼을 들고 웃음 짓고 있으며, 오른편의 해골 같은 노인은 두터운 책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 지식인을 조소하는 듯도 하고, 물질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인지도 모르며, 남녀나 부부 관계에 대하여 고야 특유의 비꼬는 관찰로 그려 낸 그림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음산하고 어떤 전율을 느끼게 하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고야의 심적 파동의 내면 세계를 표현한 것이리라. 그림의 색조도 어둠침침하고 검정색 바탕에 흰색과 황토색을 썼으며, 색감에서 오는 느낌이 음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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