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임종게’ 60편을 풀이해 엮었다'

2013. 7. 1. 08:32책 · 펌글 · 자료/종교

 

 

▲ 모든 것을 사랑하며 간다

…박노자·에를링 키텔센 풀어 엮음 | 책과함께 | 272쪽 | 1만5000원


‘인문학’이라는 용어의 범람을 무릅쓰고 표현하자면, 이 책은 ‘죽음의 인문학’이라고 할 만하다. 한·중·일 고승들의 임종게(臨終偈) 60편을 풀이해 엮었다. 풀이한 이는 “자본주의 후기 시대의 사회주의자”라고 스스로 밝히는 박노자(40·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다. 그는 불교적 전통만을 포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의 한국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임종게의 문구들을 살피고 있다. 아울러 노르웨이의 시인 에를링 키텔센과의 대담을 함께 엮었다. 키텔센은 스칸디나비아 신화 등 자국 문화의 전통 속에서 불교를 바라보면서 박노자의 풀이에 응대한다.

일단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박노자의 관점과 설명은 이렇다. 죽음은 개인의식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공포 또는 번민의 대상이 되는 경향이 짙다. 개인의식이 등장하기 전이었던 계급분화 이전의 원시사회, 또 개인의식이 아직 미미했던 초기 계급사회에서의 죽음이란 “조상들이 사는 곳으로의 회귀”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등 고대국가가 성장하면서 ‘사후 심판’의 상상력이 등장한다. 다시 말해 비관적인 죽음관은 계급사회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해왔다는 얘기다. 그렇게 점점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으로 죽음을 인식하게 된 인간을 종교가 위무했음은 물론이다. 도덕적이기만 하면, 신의 가르침을 잘 따르기만 하면 내세가 지금보다 오히려 행복할 것이라는 약속과 믿음이 전파됐다.

 

엮은이 박노자가 60편의 임종게에서 주목하는 것은 “복종을 전제로 하는 사후 안락의 세계관과 본질적으로 다른 삶과 죽음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죽음을 앞둔 순간의 임종게만이 아니라 깨달음의 순간에 튀어나오는 오도송(悟道頌)에도 존재한다. 박노자의 표현에 따르면 오도송은 “나와 만물을 상대화하는 데 성공한 순간의 희열”이다. 물론 그 ‘상대화의 깨달음’은 죽음 직전에 보다 선명하다. 그래서 임종게란 “죽는 순간에 이해되는, 나와 세계의 진상(眞相)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읊는 시(詩)”다.

박노자는 임종게의 ‘전복성’에 눈길을 던진다. “세계에 대한 고정관념의 전복, 나와 세계의 상대화를 통한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그가 읽어낸 임종게 60편의 핵심이다. 예컨대 고려 시대의 선승 혜심(慧諶)은 죽음을 “고통 없는 열반의 커다란 고요함”으로 받아들인다.

박노자는 그 임종게에서 “무덤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외려 반기는 모습”을 찾아낸다. 중국 원명 교체기의 선승 세우(世愚)는 “태어남은 본래 태어남이 아니니, 죽음 또한 본래는 죽음이 아니네. 두 손을 뿌리치고 문득 돌아가니, 하늘엔 둥근 달 외로이 떠 있네”라고 노래했다. 박노자는 기근과 전쟁의 시대를 살다 간 그 선승의 임종게를 이렇게 읽어낸다. “나는 어차피 ‘나’가 아니다. 나는 이미 잡는 손을 뿌리친 채 떠나고 없다. 남은 것은 하늘에 뜬 둥근 달뿐이다.” 아울러 거기에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해석을 덧붙인다. “정치적 혼란기에 멀쩡한 정신을 갖고 살려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 즉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을 잊는다면 모든 것에 휘말릴 테니.”

박노자는 임종게가 전복적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로 ‘문학성’을 꼽는다. 훈계투의 문장들보다는 고정관념을 깨트려 ‘깨침’을 더 빨리 오게끔 하는 것, 그것이 또한 임종게들이 보여주는 전복성의 또 다른 측면이다. 예컨대 한국의 선승 혜림(1912~1978)은 “나무 사람 고개에서 옥피리 부니, 돌 여자가 시냇가서 춤을 추노라”라는, 메타포가 가득한 게송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박노자는 “무기물인 나무나 돌이 인간이 되어 즐거워한다는 것은, 생사를 초탈한 사람이 죽는 순간에 느끼는 절제된 환희심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또 이렇게 덧붙인다. “대체로 임종게는 이렇다. 자극적이라고 할 만큼 전복적이다.”

그가 바라보는 임종게는 동시에 겸손하다. “생의 한계를 훨훨 벗어난 선사들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하심(下心), 즉 오만을 없애고 마음을 비운 채 부족함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임종게는 “삶과 죽음의 순환 속에서 한 개체의 자리가 얼마나 미미한지”를 보여준다. <벽암록>이라는 걸출한 저서를 편찬한 중국 송나라 때의 임제종 고승 극근(克勤)은 “아무것도 해놓은 것 없거니, 임종게를 남길 이유가 없네. 오직 인연에 따를 뿐이니, 모두들 잘 있게!”라고 마지막으로 읊었다.

박노자는 그 노래에서 “유기물이 어느 순간 무기물로 변해버리는 이 자연의 섭리 앞에서 한 개체의 가장 위대한 깨달음, 가장 눈부신 업적마저도 한 줌의 재일 뿐이라는 깨달음”을 읽어낸다. 그것은 “개체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면서 자신을 낮추는 모습,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남은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박노자가 60편의 임종게에서 궁극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진보적 심성, 곧 타자 지향성”이다. “죽어가는 몸을 통해 궁극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자비심”이야말로 “마음 속에 담겨 있는 타자 지향성, 타자들을 무조건 배려하고 싶은 피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진정한 진보가 있으려면 개개인의 자비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이 결국 박노자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인 것으로 보인다. 미국 듀크대 종교학과의 김환수 교수는 책 추천사에서 “수행자들의 임종게에 비판적이면서도 인간적으로 접근”하며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타자를 배제하는 척박한 우리 삶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지혜의 경책(警策)으로 제시한다”고 평했다.

문학수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