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마리 앙투아네트 최후의 초상>

2012. 2. 24. 10:57미술/내 맘대로 그림 읽기

 

 

 

‘머리는 짧게 깎고 손은 뒤로 묶인 채 짐마차에 실려 단두대로 끌려가는,

한때는 '로코코의 장미'였던 이의 깜짝 놀랄 만한 모습.

이 그림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영고성쇠의 낙차를 느껴서가 아니라

그림을 그린 이의 악의가 날카롭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비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정체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꾸었고

생애 내내 동료를 배신하며 권력자에 아첨한 화가였다.

이 앙투아네트를 그린 1793년 무렵, 국왕을 처형하는 쪽에 표를 던진 그는

왕비였던 마리 앙트와네트에 대한 증오 또한 숨기지 않았다.

능숙한 필치로 교묘하게 그려진 앙투아네트의 모습은 일견 스냅사진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한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지만,

악의로 일그러진 다비드의 눈에만 이렇게 보였을 뿐이지도 모를 일이다.’

 

- 나가노 교코,『무서운 그림 2』(아래 설명글도 동일함.)

 

 

 

 

 

자크 루이 다비드, 「마리 앙투아네트 최후의 초상」 (1793)

종이에 펜과 잉크. 파리국립도서관

 

 

 

열 달 전 루이 16세는 형장으로 갈 때 커튼으로 창문을 가린 궁정마차를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마리 앙투아네트는 양손을 뒤로 묶인 채 죽은 동물을 운반하는 짐마차에 실려서는 

눈요깃거리가 되어 이리저리 빙빙 돌아서 콩코드 광장에 마련된 단두대로 끌려가는 중이다.

손을 묶은 매듭의 끝은 사형집행인이 쥐고 있고 그 곁에는 평복을 입은 신부가 따라붙어 있다.

그녀를 조롱하는 배우가 있었느가 하면 침을 뱉는 여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

그림에는 주변의 소란스러운 모습은 모두 생략되어 있다.

대충 그린 스케치라고는 하지만 숙달된 솜씨에 의해 결점은 거리낌 없이 과장되어 있다.

고독한 모습, 가면 같은 표정, 자신을 둘러싼 어떤 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는 듯한 모습에서 오히려

주위의 떠들석함이 더 강하게 전해져온다. /

여자라면 어느 누구도 이런 모습으로 그려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결코 후세에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

초라한 모자는 그렇다쳐도 머리칼의 매무새는 무참하다.

단두대의 날이 목을 자르는데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목덜미보다 훨씬 위쪽에서 가위질 했다.

아랫 입술이 튀어나온데다 양끝이 처진 모양으로 다문 입매의 삐뚤어짐은 심뽀가 고약한 인상을 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전형적인 미녀는 아니었으되, 호리호리한 체형에 투명한 피부 덕분에

호화로운 의상이 잘 어울렸고, 보석을 고르는 안목도 뛰어났다.

그리고 행동거지의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로코코의 리더로 지목되었었다. /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비드의 손에서 굴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만다.

어떻게 하면 마라를 예수로,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치켜세울까를 잘 알고 있고 그런 테크닉도 뛰어났던 다비드다.

어떻게하면 예전에 왕비였던 이를 능멸할 수 있을지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슈테판 츠바이크는 역사소설『마리 앙투아네트』에서 추악한 변절자 다비드에게 경멸의 욕설을 퍼부었다.

"이 못된 종놈아!" /

애초에는 알랑거리던 궁정화가들의 아름답게 그려왔던 앙투와네트의 모습을

다비드 자신이 단 한 장의 스케치로 분쇄해버리겠다는 의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완성된 그림에는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는 대단한 여성이 담겨 있음에 당황하지 않았을까?

상처를 입히려던 자신의 악의만이 클로즈업 되었음에 놀라지 않았을까?

 

 

 

 

 

저는 이 그림이 단순한 스케치인 걸로만 봤는데, 자체로 완성된 작품이었군요.

다비드가 교활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긴 합니다만 재주는 비상한 놈입니다.

'단 한 장의 스케치로 분쇄해버리겠다는', 오만함이 결코 虛言이 아니거든요.

재주와 사람 됨됨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 참 딜레마입니다.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이 다비드 경우처럼 인간성은 '못된 종놈'이지만 미술적 재능만큼은 독보적이예요.

허니, 이런 놈들의 작품은 도대체 어떻게 평가하고 거둬야 하는 겁니까?

아무리 개망나니 같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작품만 보자면 너무도 아까운데, 

어떻게 쓰레기통에 다 던져 없앨 수가 있겠냔 말이죠. 정말로 딜레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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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다비드는 화산재 속에 묻혀 있던 고대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늄의 유적이 새로 발굴되어 예술양식의 복고풍을 부추기기 시작한 해에 태어났다. 규모는 작았지만 유망한 직물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1757년에 결투를 하다가 죽었고 다비드는 그뒤 2명의 삼촌 밑에서 자랐는데 그리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비드는 고전문학을 공부하고 그림을 배운 뒤 역사화가인 조제프 마리 비앵의 화실에 들어갔다. 비앵은 18세기초에 유행했던 경쾌한 정취와 에로티시즘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지만 차츰 성장하는 그리스 로마 양식으로 기울고 있었다. 천부적 재능을 보이던 다비드는 18세 때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공식 미전에서 4번이나 떨어지고 자살까지 시도하는 등 실의에 빠져 수년을 보낸 뒤 1774년 마침내 정부가 이탈리아 체재 경비를 제공할 뿐 아니라 프랑스 안에서도 화가로서의 지위가 보장되는 정부 장학금인 로마 대상을 받았다. 수상작인 〈안티오쿠스와 스트라토니케〉는 당시 그의 가족의 친구였던 화가 프랑수아 부셰의 매력적인 로코코 양식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탈리아에서는 어두운 색조를 특징으로 하는 17세기의 볼로냐 유파, 차분하고 고전주의적인 니콜라 푸생, 극적이고 사실주의적인 카라바조를 비롯하여 여러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다비드는 이 3가지 양식을 모두 받아들였지만 카라바조 추종자들의 강렬한 빛과 그림자의 표현양식을 가장 좋아했다.

그는 프랑스를 떠날 때 "고대예술은 활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나를 유혹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얼마 동안은 그 예언대로 따라가는 것 같았으나 독일의 화가 안톤 라파엘 멩그스와 예술사가 요한 요아힘 빈켈만 등이 로마에서 발전시킨 신고전주의 이론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780년 파리로 돌아온 다비드는 〈자비를 기원하는 벨리사리우스 Bélisaire demandant l'aumône〉를 완성하여 전시했는데, 이 작품에서 고대에 대한 우아하고 감상적인 접근과 푸생을 연상시키는 생생한 기법을 결합시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784년 뛰어난 기량으로 비애감을 표현한 〈헥토르를 애도하는 안드로마케〉로 왕립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아내와 화실 조수들을 데리고 주문받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그 그림은 원래 피에르 코르네유가 쓴 〈호라티우스〉의 파리 공연에서 처음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이나 결국 완성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희곡에 나오는 어떤 사건과도 상관이 없었다. 이 그림의 주제는 호라티우스 집안의 3형제가 알바와의 전쟁에서 로마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아버지에게 맹세하는 엄숙한 순간으로서 작품 전체에 극기심과 확고한 용기가 넘쳐 흐르고 있다. 뚜렷한 윤곽, 꾸밈없는 네모난 공간, 차분한 색조, 프리즈식 구도, 선명한 조명 등의 회화적 처리 방법은 그 주제와 더불어 꾸밈이 없는 비(非)로코코 양식이다.

이 작품은 로마에 있는 다비드의 화실에서 처음 전시되었는데 그가 프랑스로 돌아온 뒤 1785년에 공식 파리 살롱전에 출품되어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오랫동안 우아한 곡선과 상류층 부인의 거실 같은 주제에 탐닉해 있던 유럽의 중독증세를 치료해줄 예술적 부활의 선언으로 간주되었다(신고전주의라는 용어는 당시에 사용되지 않음). 원래 의도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결국 이 작품은 퇴폐적인 귀족계급의 타락을 끝장내고 로마 공화국의 특성인 엄격하고 애국적인 도덕심으로 되돌아가자는 선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다비드는 문화적 영웅이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그를 구세주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1787년 그는 도덕의식을 높이는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8년에는 그보다는 덜 도덕적이지만 고고학적으로 흥미로운 〈파리스와 헬레네〉, 그리고 1789년에는 자기희생의 교훈을 주제로 한 〈브루투스에게 그의 아들의 시체를 가져오는 호위병들을 그려 더욱 명성을 높였다. 반역자인 아들들에게 죽음을 선고한 로마의 애국적 집정관을 그린 이 그림은 공개되었을 무렵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뜻밖에도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그림은 또한 로마의 일상생활을 정확하게 재구성함으로써 또 하나의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이 작품 덕분에 다비드는 프랑스 패션에 오랫동안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었다. 최신식 가정에서는 그가 그린 로마 시대 가구와 똑같은 것들을 갖추어놓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로마식으로 머리를 짧게 잘랐고 여자들은 브루투스의 딸들이 입었던 드레스와 그 시대의 머리 모양을 흉내냈다. 나중에는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 여성들이 젖가슴을 드러내는 얇은 사비니 드레스마저 모방하게 되었다.

 

 

혁명 초기에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급진적 자코뱅파의 일원으로서 정치에 정력적으로 참여하는 예술가의 본보기가 되었다. 1792년에는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1793년까지 그는 예술위원회 위원으로서 사실상 프랑스 예술의 독재자였고 그때문에 '붓을 든 로베스피에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국민공회에서 다음과 같은 도덕적이고 미학적인 설교를 했다. "예술가는 철학자여야 한다. 노련한 조각가 소크라테스, 훌륭한 음악가 장 자크 루소, 숭고한 철학적 교훈을 화폭에 옮긴 불멸의 화가 푸생이야말로 천재적 예술가에겐 이성의 횃불만이 안내자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충분한 증거이다."

 

아마 이성의 횃불이 안내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로마 대상을 받지 못해 수없이 좌절했던 그 쓰라린 기억 때문에 그는 왕립 아카데미를 폐지했을 뿐 아니라 예술가를 양성하고 그들을 후원하는 구체제를 대부분 폐지시켰다. 왕립 아카데미는 예술 코뮌이라는 기구로 잠시 바뀌었다가 민중공화국예술협회라는 단체로 다시 바뀌었으며, 다비드가 실각한 뒤인 1795년에는 최종적으로 프랑스 학술원과 국립미술학교를 결합한 단체로 바뀌어 19세기 전반에 걸쳐 프랑스 예술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지도자인 다비드는 예술가로서 혁명의 선전물을 제작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기념 메달을 만들었고 각 지방에 오벨리스크를 세웠으며 국민 축제와 정부가 주최하는 희생자들의 장엄한 장례식을 기획했다. 이 시기에 그가 그리려 했던 그림 가운데 일부는 영원히 미완성 작품으로 남았다. 그중 하나인 〈조제프 바라〉는 왕당파의 총에 맞아 죽은 북치는 소년에게 바친 그림이었고, 밑그림만 그린 〈테니스 코트의 서약은 1789년 삼부회의 제3신분회(평민)가 새로운 헌법을 채택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기로 맹세한 순간을 기념하는 작품이었다.

살해당한 국민공회 의원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르펠르티에 드 생 파르고의 죽음〉은 다비드 스스로 자신의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지만 파괴되고 말았다. 그결과 자코뱅당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마라의 죽음〉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혁명 지도자 마라가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당한 직후인 1793년에 그린 것이다. '혁명의 피에타'라고도 불린 이 작품은 다비드의 걸작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순수한 감정의 힘에 의해 신고전주의가 어떻게 비극적인 사실주의로 바뀔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본보기로 꼽힌다.

 

 

1794년 친구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로 보내진 뒤 다비드는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그는 자신을 아주 서투르게 변호했고 앞으로는 "인간이 아니라 원칙"에 따를 작정이라고 우물거리는 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1794년에 4개월 동안 투옥되었고 이듬해에도 체포되어 2개월 동안 갇혀 있었지만 두 번 다 그리 불편하지 않은 파리의 뤽상부르 궁전에 갇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감옥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2년 전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그와 이혼한 아내가 고난을 겪고 있는 그의 곁으로 돌아와 영원히 재결합한 사실도 그에게 위안이 되었다.

 

첫번째로 감옥에 갇혔을 때는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며 유일한 풍경화 〈뤽상부르 공원의 풍경〉을 그렸고 파리의 다른 건물에 잠시 구금되어 있을 때는 〈자화상〉을 그렸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이 〈자화상〉에서 그는 46세인 자신을 낭만적으로 헝클어진 머리에 갈색 눈동자, 당혹스러우면서도 공격적인 표정을 한 젊은이의 모습으로 그려놓았다. 그는 어른이 된 뒤 뺨에 종양이 생겨서 줄곧 고통을 받았고 그때문에 말을 잘하지 못했고 얼굴 모습도 약간 비뚤어졌다고 한다.

 

그는 갇혀 있는 동안에도 루브르에 있는 3개의 화실을 계속 가지고 있었고 1795년 사면을 받은 뒤에는 혁명적 정치에 헌신할 때만큼 정력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열중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그린 뒤부터 워털루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의 기간은 결국 유럽 전역에서 몰려온 수백명의 젊은 화가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에 바쳤다. 이들 중에는 프랑수아 제라르 남작, 앙투안 장 그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같은 미래의 거장들도 있었다.

그는 그림의 기본은 윤곽이라는 것을 전제로 가르쳤기 때문에 19세기 유럽의 전통적 그림이 데생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의 탓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비드 자신은 그의 작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풍부한 색채의 효과에 반드시 적대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1860년에 이르러서야 그는 '근대 모든 유파의 아버지'라고 하는 외젠 들라크루아 못지않은 색채화가였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신고전주의는 초상화를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모델들은 대체로 고대조각과 같은 보편성이 부족했고 나체로 포즈를 취하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비드는 화가생활을 시작한 이후 줄곧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의 초상화는 심리적 개성과 튼튼한 신체가 특징이다.

그러나 다비드는 단순히 그림선생과 초상화가로 일생을 마칠 사람이 아니었다. 1799년 새로운 대작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로 다시 화려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다비드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의 세련되지 못한 로마 양식에서 벗어나 좀더 우아한 그리스 양식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그린 의도라고 말했고 이 그림에 나타난 인물들의 우아함은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그는 또한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았던 10년 세월이 지난 뒤 프랑스인들의 화해를 호소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아마 벌거벗은 고대 전사들일 것이다. 그는 이제 붓을 든 로베스피에르가 아니라 '상퀼로트(sans-culottes:'반바지를 입지 않은'의 뜻으로 급진적 공화주의자를 나타냄)의 라파엘로'로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칭찬하고 그 그림에 나타나 있는 다비드의 재능을 이용하면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다비드는 정치적 공직을 맡지 않은 채 2번째로 정부의 공식 화가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통령 정부에서, 1804년부터는 제국의 공식 화가로 일했다.

좌익인 자코뱅주의자에서 우익인 보나파르트주의자로 변신한 저명인사는 다비드만은 아니었지만 그는 항상 역사적 영웅을 숭배했던 것이 분명하다. 나폴레옹 시대에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작품은 1805~07년에 그린 대작 〈대관식〉이다. 이따금 〈조제핀 황후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나폴레옹〉이라는 제목으로 부르기도 하는 이 작품에는 신고전주의 대신 옛 프랑스 왕국의 공식 초상화 기법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분위기(노골적으로 모방한 경우도 많음)를 혼합한 양식이 나타나 있다.

뒤이어 1810년에는 〈독수리를 날려보내는 나폴레옹〉이라는 대작을 완성했고 1812년에 그린 〈서재에 있는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을 선전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음에도 인물의 성격을 날카롭게 포착한 초상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다비드는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했다. 평생 큰 사건의 흥분과 긴장 속에서 살아 온 그는, 그런 것들과 완전히 단절되자 옛날의 넘치던 활력을 거의 다 잃고 말았다. 말년에 그는 〈겐트의 세 여인〉이라는 뛰어난 초상화를 완성했는데 아마 벨기에에서 제자로 삼은 프랑수아 조제프 나베즈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은 것 같다.

 

 

R.D. McMullen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