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18. 18:11ㆍ미술/일본화·중국화·기타
출처 : 산곡 신기순 블로그에서
오위(吳偉), 북해진인상(北海眞人像)
明 / 족자 비단에 먹과 채색 / 158.4 x 93.2 cm /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오위는 대진(戴進)의 화법을 이어받은 절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자는 자영(子影). 호는 소선(小仙)이다.
헌종 연간에 인지전의 대조가 되었고. 효종으로부터 화장원(畵狀元)이란 인장을 하사받았다.
이 작품은 도교의 선인인 북해진인을 묘사한 것으로,
북해의 진인이 장생불로(長生不老)의 영약이라는 영지(靈芝)를 손에들고 역시 장수의 상징인 거북을 타고 있는 모습이다.
진인(眞人)이란 도가(道家)의 칭호 중의 하나로. 도(道)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은 선인을 말하며.
구름을 능가하고. 해와 달을 부리며. 천지와 같이 영원하다 라고 일컬어 진다.
오위의 인물화는 화풍이 매우 다양하며. 작품의 주제나 화제에 따라 그양식이 달라진다.
그의 다른 도석인물화는 대부분 거칠고 대담한 필치로 그려졌으나.
이 북해진인상은 가늘고 굵은 변화는 있으나 농담의 변화는 거의 없는 엷은 색조의 비교적 부드러운 필치로 묘사되었다.
화면 왼쪽에 소선 이라는 관지와 오위 라는 도장이 있고. 위쪽에는 심주가 해서로 쓴 여덟줄의 제찬이 있다.
장로(張路), 어부도(漁夫圖)
明 / 족자 비단에 수묵 / 138 x 69.2 cm / 소장 : 토오교오 호국사
후기 절파를 대표하는 화가인 장로는 하남 상부 출신으로. 자는 천치(天馳). 호는 평산(平山)이다.
인물화는 오위. 산수화는 대진의 화법을 배웠으며. 분방하고 거친 필법과 묵법을 구사하여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로 불리었다.
어부도는 장로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절벽 뒤쪽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작은 뱃머리 위에서 막 그물을 던지려 하는 어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화면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현애(懸崖)와 전경의 바위. 그곳에 자라는 나무와 수면이 배경을 이루면서
보는 이의 시선을 인물에게로 집중시킨다.
활달한 필치로 준을 사용하지 않은채 선염으로만 대담하게 묘사된 절벽과는 달리.
인물은 농담의 변화가 심하면서도 세밀하고 탄력있는 필선으로 묘사되어 순간적인 모습을 잘 포착하고 있다.
보는 이의 눈앞으로 다가오는 듯한 근경 위주의 비대칭형 구도. 대담하고 강렬한 묘사 등에서 절파의 특징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작가 : 주단(朱端) 제목 :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
明 / 족자 비단에 수묵 / 172 x 109 cm / 소장 : 토오교오 국립박물관
주단은 장로(張路)와 더불어 후기 절파를 대표하는 절강 해염 출신의 화가로. 자는 극정(克正)이다.
홍치 14년에 화원에 들어갔고. 정덕 연간에 인지전에 있으면서 일초도서(一樵圖書)의 도장을 하사받아
그후부터 호를 일초(一樵)라 하였다.
산수화는 마원(馬遠). 인물화는 성무(盛懋). 화조화는 여기(呂紀). 묵죽화는 하창(夏昶)의 화풍을 배웠다고 전한다.
이 작품은 눈 내린 강변에 배를 대고 있는 어부의 모습과 더불어. 쓸쓸하고 조용한 겨울 정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잔뜩 흐린 음침한 겨울 하늘의 색조가 그와 같은 분위기를 더욱 강조한다.
화면 왼쪽의 전경과 중경은 바위와 나무로. 오른쪽은 수면으로 채워졌으며.
원경은 낮은 산들의 화면을 가로지르며 차지하고 있다.
절벽위에서 옆으로 늘어지는 나뭇가지는 이곽파 양식의 특징으로 절파 화풍 구성요소의 또 한 가지를 보여준다.
보는 이의 시선을 수평선까지 끌어가는 공간감의 조성과 비교적 부드럽고 가벼운 필치는 주단 특유의 산수화 양식이다.
여문영(呂文英) 풍우산수도(風雨山水圖)
明 / 족자 비단에 수묵담채 / 169 x 104 cm / 소장 : 클리브랜드 미술관
여문영은 절강성 여수 사람으로 홍치 연간 인지전의 화가로 활약했다.
같은때 화조화가로 유명했던 여기(呂紀)를 대여(大呂), 여문영을 소여(小呂)라고도 한다.
그는 당시에 인물화로 이름났고 몇점의 인물화가 전해오고 있으나 여기에는 최근에 발견?산수화를 소개한다.
이 풍우산수도는 비교적 큰 그림으로 남송 산수화 양식을 따른 전형적인 후기 절파 산수화이다.
화면을 대각선으로 휩쓰는 거센 비바람의 표현. 대부벽준으로 묘사된 바위와 산봉우리. 강한 농담의 대비.
그리고 소나무와 건물들을 묘사한 강한 필선 등은 남송 화원화가 하규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그의 관서에 이어 일진청광(日進淸光)이란 도장이 찍혀 있는데
이는 홍치 황제의 측근에서 활약하던 화가들만이 쓸수 있었던 특전이라고 한다.
상희(商喜) 사선공수도(四仙拱壽圖)
明 / 족자 비단에 먹과 채색 / 98.3 x 143.8 cm /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상희는 명초의 궁정화가로. 자는 유길(惟吉)이다.
하북. 복양 사람인 그는 선종조에 궁정화가에게 부여되던 관직인 금의위지휘(錦衣衛指揮)를 받았다.
현존하는 그의 기년작으로 그의 활동시기를 1427에서 1441년 사이로 추정한다.
이 작품은 학을 타고 공중을 날아가는 남극선옹(南極仙翁)에게 이철괴(李鐵拐). 유해(劉海). 한산(寒山). 습득(拾得)이
파도위에서 축수를 보내고 있는 군선헌수도(群仙獻壽圖)에 속하는 도석인물화 이다.
道敎의 仙人과 禪佛敎의 유명한 인물이 같이 그려진 것에서 도교적. 불교적 주제가 혼합되어 사용된
당시 도석화의 양상을 알 수있다.
화면의 대부분을 채우는 수파(水波)는 규칙적이며 장식적으로 묘사되었고. 뚜렷한 선조(線條)의 옷주름. 억양된 자세.
강한 표현력을 지닌 얼굴의 세밀한 묘사는 원대의 도석인물화가인 안휘(顔輝)의 영향이 반영됐음을 보여준다.
임인발(任仁發) 구마도(九馬圖) 부분
元 / 두루마리 비단에 먹과 채색 / 31.2 x 354 cm / 소장 : 넬슨 갤러리
임인발은 송강 출신으로. 자는 자명(子明). 호는 월산(月山)이다.
그는 마화(馬畵)와 백묘인물화(白描人物畵)를 잘 그렸고. 또한 수리(水利)의 전문가로도 유명하여
관직이 도수용전부사(都水庸田副使)에 이르렀다.
산수화적 배경이 없이 아홉 마리의 말과 그들을 돌보는 마부들을 그린 이 작품은
임인발의 말그림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사실주의(寫實主義)적인 마화의 최고단계를 보여준다.
매우 세밀한 필선으로 말의털. 사람의 얼굴. 의복등을 정교하게 묘사하였고.
전아(典雅)한 색채를 얇게 여러 번 덧칠하는 방법으로 말 털의 질감과 윤택함을 표현해 내었다.
섬세한 필선과 색채가 완전히 융합되어 말의 형용(形容)과 더불어 기운(氣韻)까지 완벽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문징명(文徵明), 품차도(品茶圖)
明 / 족자 종이에 담채 / 88.3 x 25.2 cm /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문징명은 장주 사람으로. 초명(初名)은 벽(壁)이었으나. 자인 징명(澄明)으로 널리 불리었고. 호는 형산거사(衡山居士) 또는 정운생(停雲生)이라 하였다. 그는 심주의 수제자로서 16세기 오파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심주의 그림과 많은 차이점을 보여 그가 오파 양식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새 계절의 차맛을 본다는 뜻의 품차도는 문징명이 그의 스승이었던 심주의 무거운 필치를 탈피하여 새로운 양식을 보인 그림의 좋은 예이다. 중경에 위치한 조촐한 초가에는 친구의 방문을 받고 앉아있는 선비가 보이고, 그 옆의 별채에는 동자가 차를 준비하고 있고. 전경의 돌다리에는 또 하나의 손님이 초가를 향해 가는 모습이 눈에 띈다. 고목으로 둘러싸인 초가집과 그 배경으로 윤곽선만 보이는 먼 산의 깨끗한 느낌은 화가 자신이 영위하고 있는 생활의 세계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갈색. 녹색. 청회색의 단순하면서도 산뜻한 색조 역시 고고한 문인화가들의 기품을 반영한다. 화면의 윗부분에는 문징명 자신이 쓴 산중의 경치와 차를 읊은 칠언절구(七言絶句)에 이어 “가정(嘉靖) 신묘년에 친구의 방문을 받고 계절의 새 차를 맛본다.” 는 내용의 관지가 있다. 문징명은 그림뿐 아니라 서예가로서도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인물이다. 화가 자신의 낙관. 그리고 淸 황실의 수장인이 그림의 왼쪽 윗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작가 : 문징명(文徵明) 아호 : 형산거사(衡山居士).정운생(停雲生) 제목 : 방왕몽산수도(倣王蒙山水圖)
明 / 족자 종이에 수묵 / 133.9 x 35.7 cm /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문징명은 원 사대가 중 예찬. 과 왕몽의 양식을 가장 즐겨 채택하였다. 이 그림은 화면의 윗부분에 “1535년 단오절에 징명은 왕숙명(王蒙)의 필의를 모방하여 그리다(嘉靖乙未端陽日. 澄明倣王叔明筆疑作)” 라는 관서에 의하여 위와 같은 見㎱?얻게 되었다. 문징명은 이 그림에서, 왕몽 산수화가 가지는 빽빽이 들어찬 구도에 소용돌이 치는 듯한 동적인 형태와 질감의 표현을 충분히 반영시키고 있다. 그러나 왕몽은 한 화면에 문징명처럼 많은 요소를 집어 넣지는 않았다. 문징명은 가늘고 섬세한 필치로 화면의 아래부터 바위. 초옥. 나무. 폭포. 산봉우리 등의 구성요소를 반복적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려 세밀화(細密畵)와 같은 특수한 효과를 나타내었다. 또한 형태 하나하나는 입체감 있게 표현되었으나. 안개에 의한 대기원근법(大氣遠近法)이 전혀 적용되지 않아 모든 구성요소들이 표면에 밀착한 결과가 되었다. 결국 왕몽 그림의 크고 힘찬 동적인 느낌은 없어지고. 섬세하고 평면적인 새로운 양식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작가 : 왕시민(王時敏) 아호 : 연객(煙客).서려노인(西廬老人) 제목 : 송암정락도(松巖靜樂圖)
明 / 족자 비단에 설채 / 168 x 76.3 cm / 소장 : 대북 고궁박물원
해설 : 왕시민은 강소성의 태창 사람으로 자는 손지(遜之), 호는 연객(煙客) 또는 서려노인(西廬老人)이라 한다. 왕시민은 태상사소경(太常寺少卿)이라는 벼슬을 몇해 동안 하다가 명말 1630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후 세상을 마치는 날까지 은거하면서 시. 서. 화의 세계에서만 살았다.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을 주장한 동기창에게서 그림을 배워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원 사대화가의 하나인 황공망과 오대 때의 동원 과 거연을 배워 따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기창과 황공망의 회화사상권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했다. 왕시민은 현재 1백여점의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구중 12점이 황공망의 작품을 모방한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황공망의 그림을 배우고 따랐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송암정락도는 만년작으로서 그의 그림세계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작품이다. 청초 정통파 화가들의 대표이며. 장로격인 그가 새로운 정치체제를 거부하듯 화풍에서도 전통과 고법을 얼마나 지켰는가를 잘 보여주는 이 작품에는 송암정락(松巖靜樂) 신해추일(辛亥秋日) 서려노인(西廬老人) 왕시민(王時敏) 등의 화제. 간지. 관지가 쓰여있고. 도장도 찍혀있다. 이 작품의 구도와 산석법(山石法)등은 고법 그대로 이나 동기창의 추상성은 많이 사라졌고 시정도 풍부해 졌음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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