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대산인

2011. 12. 17. 16:23미술/일본화·중국화·기타

 

 

 

 

 

최근 중국 어느 경매장에서 그림 한 점이 한화 약 150억 원에 달하는 높은 가격에 팔렸다.

청대 초기에 활동한 서화가인 팔대산인(八大山人, 1624~1703)의 '방예운림산수'(?倪雲林山水)가

지난달 26일 베이징에서 열린 경매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이목을 집중시켰다.

 

 

 

 

 

팔대산인(八大山人)

 

 

중국 회화사에서 가장 심비로운 인물 ‘주답(朱답)’, 흔히 사람들은 그를 팔대산인(1626~1705)이라고 불렀다.

그는 여러번 발광하였다고 한다. 문 앞에다 벙어리 '아(啞)' 자를 크게 써붙이고 말 한마디도 안하는가 하면

문득 크게 웃다가 또 하루종일 통곡하기도 했다.

주답이 승려로 있던 어느 밤에는 승복을 찢어 태우고 저잣거리로 돌아다니며 술을 마셨다.

그리고 취한 채 그림을 그렸다.

 

주답 팔대산인은 명나라 활실 가문에서 태어났다.

황실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작위와 봉록을 포기하고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첫번째 응시에서 무난히 1차시험을 통과하였다. 그러나 2차시험을 준비하던 중에 명나라가 붕괴하였다.

고향 창남이 청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되자 그는 산으로 숨어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팔팔조도(叭叭鳥圖)  화첩  종이에 수묵  31.8*27.9cm  일본 개인

 

 

 

 

 

 










 

 


 

 

 

팔대산인의 새는 아예 다리가 보이지 않거나 보이더라도 기이하게 꼭 한쪽 다리밖에 없다.

<팔팔조도>처럼 한 다리로 서 있는 새는 팔대산인을 가르키는 상징이 되었다.

한 다리는 어느 다른 세상에 딛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남은 한 다리로나마 그의 새는 세산과 이어져 있으며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새는 불의 새가 아닌 물의 새인 것이다.

 

  

 

 

 

 

 

팔대산인은 중국 수묵화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간결함'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

일 획 속에 만 획을 담고자 했던 석도 화론이 진정한 실현이었으며,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나니, 성기지만 잃어버리는 것은 없다’는 노자의 자연관의 미학적 실현이었다.

그리하여 형상은 간단하지만 ‘형상 밖의 형상, 그림 밖의 그림’을 우리에게 펼쳐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팔대산인의 지상에서의 삶은 가난했다.

그는 고독과 번뇌때문에 술을 마셨고, 마실 술이 떨어지면 서첩과 그림을 들고 가서 술과 바꾸었다.

누군가 술을 주면 단번에 많은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미천한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손쉽게얻을 수 있었지만, 권세가들은 만금을 내놓아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권세가들은 농부나 날품팔이에게 그의 그림을 되사야 했었다.

 

 

 

 

 

 

 

 

 

 

 

팔대산인은 흔히 동기창을 계승한 전통주의자인 4王(왕시민, 왕감, 왕원기, 왕휘)과는 달리

철저히 개성을 추구한 4僧(석도, 석계, 홍인, 팔대산인)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와 동기창과의 관계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는 동기창이란 필터를 통해서 五代의 화가인 동원의 화법을 배운다.

따라서 그와 동기찬 사이에는 그림의 부분적인 형태상 사승관계가 있는 것이다.

 


 

 

 

 

 

             연지소금도(蓮池小禽圖)부분 /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 37.5*330.2cm  / 신시내티미술관

 

 

 

그러나 화의(畵意)는 명나라의 심주와 서위, 그리고 원나라의 예찬의 사의(寫意) 문인화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동기창의 형식을 변형시킨다.

4王이 동기창의 형식을 정형화시켜 그대로 이어받음으로써 매너리즘에 빠졌다면

팔대산인은 전통을 철저히 개성적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화면을 창조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래 동기창이 주장했던 바이다.

그런 면에서 진정한 동기창의 후계자인지도 모른다.

팔대산인이 창조한 비주류 회화는 훗날 양주팔괴, 오창석, 제백석 등으로 이어져 화단의 주류가 된다. 

 

글 출처. 이성희,『동양명화감상』p117~125

 

 

 

 

석창포도(石菖蒲圖) 화첩  종이에 수묵  30.3*30.3cm  프린스턴대학미술관

 

 

 

 

서과도(西瓜圖) 화첩  종이에 수묵  24.5*31.5cm  대북고궁박물원

 

 

 

 

             

                                 방동원산수도(倣董源山水圖)                                                                       방황대치착색산수도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였지만 만년에 주로 사용한 것은 '八大山人'이었다.

그런데 그림 속의 서명을 보면 마치 곡지(哭之) 혹은 소지(笑之)라고 쓰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인데,

그자신의 시구 가운데 '無?哭笑漫流傳(웃어도 울어도 영원히 멈출 수 없다'처럼

그의 가슴 속에 맺힌 한과 울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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