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21. 12:07ㆍ미술/일본화·중국화·기타
1. 심주
석전(石田) 심주(沈周), <수류화사(水流花謝)> 일명 <낙화시의도(落花詩意圖)>
심주(1427-1509), <여산고도> 1467년, 종이에 채색, 193.8×98.1cm, 대북고궁박물원
2. 왕몽
중국 원나라 왕몽(王蒙)의 작품인 ‘치천이거도’(稚川移居圖)가 670억원에 팔렸다.
지난 4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2011년 봄철 경매’에서 치천이거도가 670억원에 낙찰됐다고
홍콩의 명보와 신경보 등 중국언론이 6일 보도했다.
이 작품은 지난해 6월 같은 경매에서 730억원에 팔린 북송대의 황정견의 작품 ‘지주명’(砥柱銘)에 이어
두 번째로 비싼 중국 고서화로 기록됐다.
왕몽(1308-1385), <구구임옥도>원대, 1368년, 종이에 채색, 68.7×42.5cm, 대북고궁박물원
하산고은도 / 구구임옥도
왕몽은 조맹부의 외손자다. 어릴 때부터 외조부에게서 그림을 배웠으며 소장한 방대한 고서화를 볼 수 잇었다.
아버지 왕국기도 허다한 문인 명사들과 교류하였는데, 그 중에 도교의 도사들이 많았다.
이러한 것들은 어린 왕몽에게 영향을 미쳐 관직에 대한 욕망과 도교적 은둔에 대한 동경이 싹트고 잇었다.
홍건적의 난으로 어수선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황학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에 들어간다.
<하산고은도>는 은둔생활이 끝나갈 무렵에 그려진 그림이다.
전통적인 산수화와는 달리 여백을 거의두지않고 산을 복잡하게 디자인하는 왕몽의 산수화에서는
숨김과 들킴의 숨바꼭질 같은 공간의 유희성이 감지된다.
<구구임옥도>의 절제되지 않는 주름의 선들을 보라.
안정된 구도의 질서를 넘어서 화면 밖으로 넘쳐흐르려는, 미로같이 얽힌 불안한 힘으로 진동한다.
서양 문화나 예술에서의 미궁은 지하세계이지만, 동양에서는 미궁을 가자면 계곡을 따라 산 속으로 들어간다.
왕몽이 펼쳐보인 복잡한 산들은 그 자신의 무의식의 미궁이다.
미로의 극치는 무(無)이다.
복잡한 선과 형태로 가득찬 왕몽의 그림보다 왕몽의 라이벌이었던 예찬의 텅 빈 화면이 오히려 더 깊은 미로인 것이다.
미로의 끝은 무(無)! 그것은 동아시아 식의 초월이다.
그러나 예찬의 초월보다는 왕몽의 안타까운 욕망의 진동이 자꾸만 우리를돌아보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 이성희,《동양명화감상》에서 발췌.
명대의 화론
명대는 중국이 근대화하는 시기와 직접 접속되는 시대로서 중요한 성장·변혁기였다.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여 왕권이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정치는 안정되고 상공업이 번성하였다.
이러한 번성으로 도시가 번창하고 문화와 예술이 발달하였다.
명이 존속한 270여 년 간은 궁정회화와 문인화 모두가 상당한 발전을 이룬 시기로
명대의 회화는 말기에 이르기까지 원대 회화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화원제가 정비되지 않았던 명대 초기에(제1기) 화단은 그리 두드러지지 못했다.
절파
절파의 시조 '대진'이 저장성(절강성) 첸탕 출신이었으므로 절파라 이름 붙였다.
절파에는 직업적 화가가 많았으며 화기도 탁월하였다.
필묵은 웅건하다고 할 수 있으나 뛰어난 필치의 표현과잉으로 오히려 부산스럽고 딱딱한 작품이 되어
당시의 문인화가들로 부터 격렬한 반발을 받기도 했다.
대진
남송의 마원 하규의 원체화를 숭상했던 대진.
남송의 원체수화를 배워 출발하였으니 점차 독자적인 화법으로 산수화에 뛰어난 솜씨를 나타냈으며
그외에도 신상, 인물, 동식물등에 정미함과 신밀함을 보였다.
절파의 회화는 저장 지방 형식에 특유의 거친 수묵화법에,
이성, 궈시의 화풍과 원대의 남종화풍등이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져 필묵의 기운이 거칠고 호방하다.
대표작 [삼모고려도] [계변은사도]
오위
15세기후반부터 16세기초의 절파 또는 화원을 대표하는 산수 인물화가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전흔에게 양육. 금릉에서 화가로 입신하여 헌종의 화원에 들어가 인지전대조가 되었으나,
헌종이 죽자 집으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시간을 궁정밖에서 활동하며 그림을 팔아 생계유지.
자유분방하고 구속받지 않으면서 하층 민중과 벗하기를 즐겼던 성격은 자신의 작품 속에 잘 스며있다.
기세가 웅장하고 필치가 분방하였다.
대표작[어락도]
오파
오파는 문인화가들로서 자신들의 문인화를 통해 각자의 표현양식과 원4대가와 같은 전대 화가들의 풍격을 계승했다.
이는 보다 보수적인 성격을 같는 동시대의 화파인 절파 화가들과 대조된다.
오파라는 이름은 이들이 장쑤성 쑤저우 지역에 있는 오현애서 활동했기때문에 붙여졌고,
명대 중기 오현지역은 경제가 발전하면서 문화생활에 활기가 생겨나 기존의 문인화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풍격을 추구할 여유가 있었다.
이들그림은 대중보다는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을 위한 것이었다.
심주
강남의 서화에 정통한 문인 가계에서 태어났다.
재능이 있었지만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83세의 고령으로 죽을 때까지 장수를 누리면서
시서화에 몰두하며 예술가로서의 일생을 보냈다.
예절 바르고 단정한 성격에 학식도 깊어 석전선생이라 불렸다.
남종화의 시조가 되었다.
대표작[장려원조도=조해망도] : 작가 심주 자신을 그린것으로 이해된다. 시서화에 능함이 보인다.
[사생책 중 해하] : 산수뿐만아니라 동색물을 대상으로 해서 사생을 자주 하였다. 게와 새우를 몰골법으로 표현해놓았다.
[여산고도] : 스승인 진관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그림.
주의를 많이 기울여 정성스럽게 그렸고 그만큼 뛰어난 작품이 되었다.
왕몽을 모델로 한 작품이 많다.
문징명
심주의 제자. 강한 유교적 가충을 지닌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을 많이 만났다.
시문은 오관에게, 서는 이응정에게 배우고, 재능이 있어 시화삼절이라 칭하였다.
전서, 해서, 예서, 초서에 모두 능했다.
회화 예술과 덕행에서 모두 당시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고 그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매우 많아 그 업적이 지대하다.
[고목한천도] : 빈공간이 거의 없다. 80세에 그렸지만 힘과 기운이 넘치고 거친붓으로 그림.
[혜산다회도]
명대 말기
명말에 이르러 중국회화는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오파의 문인산수화는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구태의연한 화풍으로 흘러,
갈수록 조약하고 기계적인 반복을 되풀이하여 쇠퇴해 갔다.
이러한 때 동기창은 오파 화풍의 청산과 문인화 중흥이라는 기치를 들고 새로운 길을 열었으며
원대 문인화의 전통을 학습하는 것을 중시했다.
동원, 거연, 예찬, 황공망의 화법을 배워 그들의 필묵 형식을 종합했고,
문인의 심미 취향과 개인의 정서를 표현함으로써 평담, 천진, 유아하여 사기가 풍부하였다.
그는 중국의 회화를 남종화와 북종화로 2분하면서
왕유, 동원과 거연, 북송의 미불 원4대가로 이어지는 남종화를 정통으로 삼아,
이후 문인화의 양식방향을 결정할 만큼 중국 회화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명말 회화의 중심지가 소주에서 송강으로 옮겨진 것은 바로 동기창 때문이다.
막시룡, 진계유, 조좌, 황성모, 이유방, 정가추 등이 송강파의 중심인물들인데
이들은 교유관계가 긴밀하여 서로의 예술을 감상하고 비평하면서 문인화의 예술이론을 발전시켰으며,
동기창의 회화사상도 이런 방식을 통해 공유되었다.
송강파 화가들도 오파와 마찬가지로 주로 원대 회화의 정신과 양식을 계승하고 이를 미학적 판단기준으로 삼았다.
동기창
1631년 옛 자리로 복귀하여 3년 후 태자태보가 되었다가 사임하였다.
관리로서도 명성이 높았으나 문명도 높아 시인, 서가, 문인화가로서 널리 알려졌고,
감식, 감장, 임모 등에도 업적을 남겼다.
명나라 말 제일의 인물이었으므로 당시의 화단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고
화풍이나 소론은 후세 오파 문인화가에게 결정적 감화를 주었다.
막시룡
14세에 군의 제생에 보임되고 다시 공생이 되었으나 임관의 길을 택하지 않고 평민으로 생애를 마쳤다.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고 서화에 능했으며
그가 제창한 남북이종론은 뒤에 상남폄북론이 되어 남종화의 우위를 결정짓는 근본이 되었다.
화설, 막정한유고등 저서를 집필했다.
Ⅰ왕리의 <화산도서>
의술가, 산수화가.
마원, 하규로 옛것을 배웠으나 화산에 가게되어 자연을 유람하여 얻은 깨달음이 더 크다.
"나는 마음을 배웠고, 마음은 눈을 배웠으며, 눈은 화산을 배웠다" - 자연의 숭고미에 감탄하여 자연을 스승삼음.
"그림이 비록 형상을 그리는 것이기는 하나 뜻을 가장 중시하기 때문에
뜻이 족하지 않으면 이를 일러 형상이 아니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것이다"
형상을 묘사해야 그림의 뜻이 나온다.
뜻도 중시하지만 형상을 인정하고 있다.
"따를 수 있는 것을 따르는 것도 따르는 것이겠지만 어길수 있는 것을 어기는 것은 또한 따르는 것이다.
....."이치(자연)에 따르는것이다.
Ⅱ절파와 이개선의 <중록화품>
유일하게 거친 화법인 절파를 찬양한 이개선. 오파를 낮게 보았다.
"송의 화원에 들어간 고수들도 혹 미칠 수 없고 원에서부터 지금까지는 어느 누구도 비교될 수 없다"
- 대진을 극찬. 비유로 비평한것이 특징이다.
육요를 언급. 신묘한필법/ 맑은 필법/ 노숙한필법/굳센필법/ 살아있는 필법/ 윤택한 필법
극단적으로 치우친 절파 장로를 비판.
Ⅲ서위의 회화이론
1. 사물을 빌려 정을 표현한다. (상징성)
서위의 제시, 제발로 그림에 대한 생각과 내용을 추려냄. 화론서가 아님.
자신이 대나무 매화에 맞지 영화롭고 부귀한 모란은 맞지않아.
2. 기운(feel)을 중시하고 기왕의 화법에 구애받지 않는다.
전통을 계승할때 그사람의 마음을 바탕으로. 바탕위에 나의 화법으로.
명대엔 구도를 중시하였다.
3. 용묵의 우열은 생동의 여부에 있다.
생동에 맞게 형식이 따라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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