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스님 (펌)

2011. 12. 9. 10:00책 · 펌글 · 자료/ 인물

 

 


 

 

 

 

한 사람이 있었다.
왕조가 몰락하던 혼돈의 시대
무너져 버린 禪의 법통을 일으켜 세운 구도자
그의 칼날이 한번 내려치면 산천초목이 울고
그의 법설이 한번 쏟아지면 마른땅에 강물이 흘렀다.
사나울 때는 짐승보다 무서웠고
선할 때는 부처보다 자비로웠고
구름속의 달처럼 자유롭던 禪의 나그네
그는 한 사람의 온전한 시인이었다.
두주불사 몽유의 세계에 빠졌으나
그의 언어는 맑고 향기로웠으며 언제나 명징했다. 



아홉 살에 청계사 불목하니로 들어와
스무살 시절, 교학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가
환속한 옛 스승을 찾아가던 길에서
삶과 죽음의 실체를 목격하고
언어의 유희를 폐하였으니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一念
칼끝을 세우고 정진하던 수개월
어느 날 행자가 지껄이는
콧구멍 없는 소 이야기를 듣고 홀연히 깨달았다.



이후 광풍처럼 몰아치며 한 세상을 주유했으니
숱한 기행과 일화는 거칠 것이 없었다.
천장암에서 일대사를 마친 후
연암산 제비바위에 앉아서 태평가를 부르고
그 노래를 알아주는 이 없다고 한탄하며
어머니를 위한 첫 법석에서 알몸을 들어냈다.
한 여인을 연모하여서  머슴살이 해촌만행을 한 후
거친 파도를 만나서 죽을뻔 했다고 웃어버린 사람 !
만취한 낯빛으로 단청불사를 했으며
지나가던 여인의 입속에 혀를 내밀었고
문둥이 여인을 품어 사랑을 알게 해주었으니
그 깊이를 알 수가 없고 
그 경계을 헤아릴 수가 없던 무애의 여정....



하지만 그가 선 자리는 언제나 한 곳
생멸하는 생각의 뿌리를 잠재우고
허무의 그림자마저 지워버린 채
허공에 뜬 달처럼 홀로 밝은 깨달음의 길이었다.
그 길에서 마조의 할과 덕산의 몽둥이가 되었으니
선의 검객이자  혁명가였다.
바람처럼 행장을 꾸려 호서와 삼남의 절집을 돌며
돌장승이 아이를 낳는 묘리를 설파했으니
수월과 만공, 혜월과 한암으로 이어지는 높은 봉우리들이
모두 그의 무릎아래에서 벼리어 졌다.



이윽고  때가 이르자
드높은 명성과 안락한 금강좌를 버리고
다시 소를 찾아서 진흙 속으로 화광동진 했다.
그가 가장 그리워했던 자리
봉두난발의 한낱 시인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곳이 어디인가
저 북방의 아득한 산촌, 복사꽃이 피는 마을
유관을 쓴 서당의 훈장이 되어 초동과 노닐다가
빈 거울 위에 임종게를 남긴 뒤
쓸쓸히 자취를 감추었으니
경허선사여 어디로 가셨나이까.
만상을 삼킨 한 마음의 주인이 되어
영영 세상을 버리셨나이까.
속진의 곡차와 아리따운 이야기들이 그리워
아직도 취하여 꽃속에 누워 계시는 것입니까.



삼가,
천장암 솔바람 소리에 그 길을 물어봅니다.

 

 

 

 

출처. moosimjae@hanmail.net 이형권

 

 

 

 

 

 

 

 

 

수덕사, 정혜사, 금선대, 전월사, 천장암, 매향리 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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