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뜰 (2)

2011. 11. 16. 23:43이런 저런 내 얘기들/네 얘기 · 쟤 얘기

 

 

 

피병차 이곳으로 내려온지 벌써 수년이 되었다.
동네가 조용해서 차일피일 미루다 세월이 흘렀는데
어느날 엘리베타 벽에 붙어있는 게시물을 보고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멘트 공장을 더 이상 못 들어오게 주민들이 시위를 해야 한다는,
모든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게시물이었는데,
양평이라던가? 시멘트 공장에서 날리는 분진으로 줄줄이 쓰러지는 주민들의 사연과,
난치 발생으로 산천 경계 좋던 동네가 하루아침에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 사실이 사진과 함께 적혀있었다.

마음이 바빠진 나는, 아이 공부 문제도 있고, 또 익숙한 동네를 떠나기도 쉽지않아
주변에서 집을 찾기로 했는데
마침 십여 킬로 떨어진 곳에, 뒤편으로 야산이 있어 우선 공기가 상쾌한 단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

 


통고산에서 발원하여 왕피천을 휘돌아 바다로 향하던 시린 냇가 다리 위에서
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할머니를 기다리다 내려다 보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어떼가 수산강을 가득 채워
마치 하늘 가득 은하수가 쏟아져 흐르는 듯 했다.

친가와 외가가 지척이라
동네 아이들과 유년이 신났던 그곳은 보석같이 가슴이 박혀 지금도 나를 밝히고 있는데
입술이 파래지도록 냇가서 놀다 허기져 찾은 큰집 원두막에서
사촌들과 먹던 참외, 수박, 강냉이, 찐감자와 감자떡..

오천 여 평 드넓은 큰집의 울안엔 없는 것이 없었다.
단감 청도복숭아 살구 자두 능금 포도 고지배, 대추, 밤나무..
큰아부지가 뜰안에 정성들였던 꽃밭의 분꽃과 맨드라미, 채송화와 봉숭아는 소박했고
잠실에서는 뽕잎을 갉는 누에가 소나기 소리를 내곤 했다.
송화가루 날리는 뒷편 소나무 숲은 한여름에도 서늘했고
곡식을 저장하기 위해 파놓은 우물같은 쏘에 숨바꼭질하다 빠져 절망했던 기억도 있다.

한 곳에 뿌리내려 수 대가 이어 사는 곳,
비어도 빈 자리가 느껴지지 않고 기침소리가 들리는 듯 냄새마저 배어
단절없이 이어지고 함께 살아 가며
굴뚝 연기와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로 이웃을 확인하는,
무릇 집이란 의미가 그런 것일텐데
콘크리트 더미 위, 허공에 매달려 살고 있는 나는 뿌리없는 부초 같다.

 

 

..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버린 유년의 뜨락이지만
그곳은 지금도 방황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나를 밝히는 보석이 되어 내 안에서 빛나고 있는데
계약하기 전, 이리저리 살피며
상실이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왜 뿌리가 그토록 중요하고 소중한지를 생각했다.

허공에 매달려, 가치마저 흔들리며 살고 있는 나는
이리저리 떠돌며 뿌리내리지 못하여 온전한 삶을 담아내는 집을 찾을 때까지
유년의 꿈을 꿀 수가 없을 것 같은데
회색빛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 그마저 있을리 없는 아이에게 미안해서
정말 미안해서
마당있는 집을 하루빨리 장만해야겠다 생각하며
다행히 동 뒤편으로 고향집 냄새가 배어 두텁게 깔린 낙엽에 마음을 빼앗겨
계약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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