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얄팍한 책입니다. 그림 해설서가 아니고 그림 위주의 여행기(수필)입니다.
첫장을 여니, Gerard David가 그린 <캄비세스왕의 재판> 그림이 나옵니다.
처음 보는 섬뜩한 그림이었습니다.
블로그에 소개해보려고 이미지 사진을 찾다가 바로 이 책의 독후감을 쓴 걸 발견했습니다.
잘섰더군요. 옮겨보겠습니다. 글 양이 많아서 서 너 대목은 줄였습니다.
그 전에 저자 소개부터 합니다. 잘 알려진 분입니다.
서경식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 대학교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소년의 눈물'로 1995년 일본에세이스트클럽상을,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2009년 현재 도쿄케이자이 대학교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06년부터 2008년 3월까지 2년 동안 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로 '조국'에서의 '생활'을 체험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저자이자 서승·서준식의 동생으로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그 밖에 지은 책으로'청춘의 사신',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공저),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교양, 모든 것의 시작'(공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시대를 건너는 법', '만남―서경식 김상봉 대담',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등이 있다.
캄비세스왕의 재판 Gerard David / 벨기에 브리쥐 '흐루닝헤 미술관'
(전략)
그 남자는 누이동생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행은 어쩌다 보니 미술 순례가 되어버렸어요. 그는 수많은 미술작품들을 봤습니다.
그 중에서 남자가 제일 먼저 언급한 작품은 헤라르트 다비드(460 경~1523)가 그린 <캄비세스왕의 재판>이었지요.
벨기에의 브뤼주라는 도시에 있는 흐루닝헤 미술관에서 본 것이었습니다.
캄비세스의 난행 중에는 그런 것도 있었답니다.
그가 이집트를 점령했을 당시 뇌물을 받고 부정한 재판을 진행한 현지 재판관에게 벌을 내렸는데 (당연한 일인가요?),
그때 캄비세스가 내린 벌은 ‘생피박리형(生皮剝離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생피박리, 말 그대로 산 사람의 살가죽을 얇게 벗겨내는 것이죠.
그래서 뇌물을 받고 그 뇌물을 준 사람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 재판관은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졌습니다.
캄비세스는 그런 다음 그 재판관의 아들을 그의 후임으로 임명했죠.
아들이 앉는 의자에는 그의 아버지한테서 벗겨낸 살가죽을 깔개로 깔도록 했습니다.
재판관의 아들은 아버지의 피가 묻어있는 살가죽을 깔고 앉아 재판을 진행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헤라르트 다비드는 그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두 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재판관이 생리박피형에 처해지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캄비세스왕의 재판Ⅰ)과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살가죽을 깔고 앉아 신임 재판관으로 임명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캄비세스왕의 재판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헤라르트 다비드는 소재만 거기서 따왔을 뿐 그림의 시공간적 배경은 1498년의 브뤼주로 설정을 했답니다.
왜냐하면 그 그림은 시청에 걸 목적으로 그에게 청탁된 것이었기에,
그는 고대에 있었던 이야기를 1498년의 벨기에로 가져와 당시의 ‘모든 판사와 시참사(市參事)들’에게
부패와 결탁하지 말 것을 촉구해야 했던 것이죠.
남자가 언급한 건 그 중에서도 <캄비세스왕의 재판Ⅰ>이었습니다.
남자는 그 그림을 보며 우선 ‘흐르는 피 한 방울까지도 놓치지 않고 그려내려고 하는,
가열한 사실정신(事實精神)에 압도당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또한 ‘당시 한자동맹의 자치상업도시로서 번영을 구가하던 브뤼주 시민들의 각박하고 가열한 합리정신’이자
‘북방 르네쌍스의 정신적 풍경’이라고도 해석하죠.
그런 생각을 하며 그 그림을 감상하던 남자의 눈에 어느 순간 처형대 위에 누워있는 재판관의 발목이 들어왔습니다.
형리(刑吏) 한 명이 마치 ‘양말을 벗겨내듯’ 그 재판관 발목의 살갗을 벗겨내고 있었는데
그 장면에서 그만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졌던 것이죠.
남자의 아버지는 암에 걸려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어머니 역시 그보다 세 해 앞서 암으로 돌아가셨구요.
두 분 모두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회한을 풀지 못하신 채였습니다.
남자의 이야기를 하려면 그 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군요.
그러니 또 잠깐만 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재일교포 1세대인 남자의 부모님은 둘째아들과 셋째아들을 고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더랬습니다.
그 아들들은 어느 해 방학에 평양을 방문했었죠.
그것이 ‘또 하나의 조국’에 대해 잘 앎으로써 민족적 자각을 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한 것이었든 단순한 호기심에서였든 간에
그로 말미암아 그 아들 두 명이 창졸간에 ‘형제 간첩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1971년, 둘째아들은 스물다섯, 셋째아들은 스물두 살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둘째아들 서승은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 20년형으로 차례차례 ‘감형’됐습니다.
셋째아들 서준식은 징역 7년과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죠.
존 레논의 ‘Imagine'이 발표된 게 1971년이었던가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간다고 상상해보라는, 국가도 없고 전쟁도 없는 그런 세상을 상상해보라는 그 노래가 발표된
그때에 형제는 감옥살이를 시작해야 했고, 감옥살이가 시작되자마자 사상전향을 강요하는 무자비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내게 사향쥐와 밍크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지요.
사향쥐와 밍크는 인간이 놓은 덫에 걸리면 자기 다리를 잘라서라도 자유를 찾아 도망친다고 하셨습니까?
형제는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더는 무자비한 고문을 견딜 수가 없어서. 마치 자기 다리를 잘라서라도 끝끝내 도망치고야 마는 사향쥐와 밍크처럼
형제는 목숨을 끊어서라도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내면의 자유’를 조종하려는 고문에서 해방되고자 했습니다.
둘째아들 서승은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그 안에 있는 난로의 기름을 자신의 몸에다 끼얹었죠.
그리고는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당신도 알고 있듯이 온몸에 ‘흉측한’ 화상을 입게 됐습니다.
셋째아들 서준식은 손목을 그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걸 ‘운명’이라고 부르는 걸까요?
셋째아들이 자살을 시도한 날은 마침 날이 몹시 추워서, 그 아들은 손목을 그은 뒤 손을 가슴에 얹고 옹송그린 채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동맥에서 흘러나온 피가 셔츠에 엉겨붙어 있었습니다.
그 덕에, 날이 추웠던 덕에, 그래서 두 손을 가슴에 올려놓고 곱사등이처럼 옹송그리고 잔 덕에
동맥의 피는 흘러나오다가 도중에 응고되어 살아남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걸 운명이라 부르는 것이겠지요.
그는 그 기묘한 상황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분명히 감지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속죄양으로 점지된 자신의 운명을.
청죽처럼 푸르디푸른 나이의 아들 두 명이 고국의 감옥에 갇히게 되자,
남자의 어머니는 막내딸과 함께 현해탄을 오가며 옥바라지에 나섰다고 합니다.
남자가 함께 유럽여행을 떠난 누이는 바로 어머니와 함께 현해탄을 오가던 그 막내딸이었어요.
(중략)
브뤼주에 있는 미술관에서 <캄비세스왕의 재판>을 본 이후 여행의 배후에는 늘 가족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게 됩니다.
그 그림에서 남자는 처형대 위에 누워있는 재판관의 발목을 보며 투병 중이던 아버지가 ‘여기가 나른하구나’라고 중얼거리던
모습을 떠올렸었죠.
그때부터 미켈란젤로의 <반항하는 노예> 조각상 앞에서는 그 노예처럼 묶여있는 두 형들이 자연스레 떠올랐고
어느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는 단정한 수도사들의 방에서 형들이 갇혀있는 0.72평의 공간이 연상돼 가슴이 답답해져오는 걸
느끼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의 형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요?
물론 그들은 ‘여전히’ 갇혀 있었습니다.
20년형을 선고받은 둘째형은 물론 만기가 지난 셋째형까지도, 여전히.
셋째형 서준식은 7년의 감옥살이로 평양에 다녀온 ‘죗값’을 다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안전법의 족쇄에 묶여
10년을 더 갇혀 있어야 했어요. ‘재범의 우려’가 있다는 그에게 보안감호처분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는 전향서 한 장만 쓰면 금방이라도 풀려날 수가 있었지요. 하지만 서준식은 전향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안감호처분 갱신 결정 무효 확인 청구소송’에서 그의 변호를 맡고 있던 이돈명 변호사가
법정에서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딱 한 마디 진술을 하라는 것도 거부를 했습니다.
전향서를 쓰라는 것도 아니요, 다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선언만 하라는 것뿐이었는데,
그는 완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던 것입니다.
국가가 인간의 내면을 간섭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요.
그러면서 그는 <서준식의 옥중서한>이라는 책으로 묶여 나온,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감옥 안에서 알게 된 예수가 힘없고 서럽고 배고픈 민중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었듯이
사랑에 새로이 눈뜨게 된 자기 또한 그 사랑에 충실하겠다는 뜻이었지요.
그때 그가 그 사랑에 충실하는 방법은 속죄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짓누르는 사회안전법 폐지를 위한 제단에 바쳐질 속죄양.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친척집에 맡겨진 고아소녀 스털링은 밤마다 양들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했었습니다.
양들은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지요.
그 양들이 내는 슬픈 울음소리에 밤마다 시달리던 고아소녀 스털링은 마침내 그 중에서 가장 어린 새끼 양 한 마리를 안고
도망을 치게 됩니다.
남자의 셋째형은 그때 새끼 양 한 마리를 안고 절실하게 어두운 밤길을 헉헉대며 달리던 어린 스털링의 심정이었을까요?
하지만 자기 다리를 잘라서라도 자유를 찾아 도망치려던 사향쥐와 밍크가 숱하게 다시 인간의 손에 잡혀서 향을 쥐어 짜이고
털이 벗겨지는 것처럼 스털링 또한 잡히고 말았어요.
그리고는 절도범으로 몰려 고아원에 보내져야 했습니다.
그러니 사랑, 참 좋은 말입니다. 아름다운 말이기도 하지요.
그 사랑으로,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형들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에 항의하며 50일 넘게 단식을 하고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단식을 하면서 최대한 버틸 수 있는 게 며칠 동안이던가요?
사랑도 좋지만,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새끼 양을 안고 달아나던 어린 스털링이 잡혔듯이,
그러다 형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 그 생각이 유럽의 미술관을 순례하는 남자의 가슴속을 묵직하게 흔들어놓곤 했습니다.
또 고흐의 그림 앞에서는 고흐를 ‘생활인’으로 뒷바라지해야 했던 고흐의 동생 테오와 자신의 입장이 겹치기도 했죠.
당신도 그 남자가 쓴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 꼭 고흐와 테오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중략)
그 남자의 이야기도 이제는 옛날 일이 되었습니다.
그의 두 형은 각각 20년, 17년의 형을 산 뒤 모두 출소를 했으니까요.
남자가 쓴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내가 처음 읽었던 것도 거의 15년 전 무렵입니다.
(후략)
여기서 가져온 글입니다.
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글쓴이가 서운해 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쓴이 /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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