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明)나라 초기 작품인 당인(唐寅)의 <위저취어도(葦渚醉漁圖)>가 가장 제 마음에 듭니다.
이 <위저취어도(葦渚醉漁圖)>는 전에 한 번 올려놓은 적이 있었답니다.
어떤 게시물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그 때도 이 그림을 보면서 묘한 울림이 와 닿았었습니다.
'명화(名畵)'란 기꺼이 쌈짓돈을 지불하고라도, 내 집에 걸어두고 싶은 그림이다.' ....
바로 이 <위저취어도>가 제게 그렇습니다. 저에겐 '명화'로 보입니다.
왜냐고요? 어떤 점이 그렇게 좋냐구요?
글쎄요, 딱히 뭐라고 찝어서는 말을 못하겠군요.
明나라. 당인,<위저취어도>
왕야오팅이 쓴 『중국회화산책』에는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위저취어도>는 갈대밭 옆에 한 척의 거룻배가 떠 있고,
늙은 어부가 뱃머리에 기대어 잠자고 있는 그림이다.
그 위로 낚싯대가 세워져 있으며 잔잔한 물결과 밝은 달이 어른거린다.
화면은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어 웬지 적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화면 위에 큰 글씨로 제시가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강변에 낚싯대 꽂고 거룻배를 묶어두니 삼경의 달이 그 위에 걸려있네.
늙은 어부는 불러도 대답 없으니 깨었을 때는 도롱이의 그림자에 서리 내려 있겠네."
.
.
한시나 시조나 그림을 보면 거의가 대부분 "삼경(三更)"이더군요.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이조년-
'내 언제 무신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황진이-
이렇게 신윤복의 <월하정인도>에도 시제가 '月沈沈 夜三更'입니다.
삼경(三更)은 자시(子時)라는 말이랍니다. 밤 11시~1시, 딱 한밤중이죠.
초경은 밤 7시~9시. 이경, 삼경, 사경, 그리고 오경은 새벽3시~5시.
'삼경'이 문학적으로, 미술적으로, 음악적으로 매력이 있는 시간대입니까?
저는 좀 다릅니다.
과녁을 아주 정통을 맞추면 이러니 저러니 덧붙일 말이 없잖아요.
약간 엇비스듬히 과녁을 빗나가 맞아야 얘깃거리가 생기죠.^^.
그래도 "밤12시"보다는 낫네요.
이런걸보면 시간 개념에서도 동 서양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서양은 우리보다 2배 더 정확하게, 합리적으로 살고,
우리는 서양사람들보다 2배 여유 공간 있게 살고요. ㅎㅎㅎ
풍수하는 분들이 가지고 다니는 패철(나침반)을 보면 훨씬 세밀하긴 합니다.
저는 <위저취어도>를 처음 봤을 때 낮인 줄로 알았습니다.
'달'이 아니고 '해'로 보였단 겁니다.
제시(題詩)를 보고서야 알았는데, 여전히 의외다 싶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겠습니다만, 배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이 안 보이지요?
저도 못 봤습니다. 빈 배인줄로 알았습니다.
자, 이제 보이지요. 제가 방금 땡겨 찍었습니다.
턱을 괴고 졸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제시(題詩)가 좀 이상합니다.
"강변에 낚싯대 꽂고 거룻배를 묶어두니 삼경의 달이 그 위에 걸려있네.
늙은 어부는 불러도 대답 없으니 깨었을 때는 도롱이의 그림자에 서리 내려 있겠네."
밤 12시에 어부를 불를 일도 없겠거니와 서리가 내릴 정도라면 늦가을이란 얘긴데,
그 시각에 저러고 잠이 들 수 있습니까?
그림 제목이 '갈대 우거진 물가에 술취한 어부'라는 뜻이니 술 췌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어부가 한밤중에, 그것도 서리가 내리는 조각배에서 잠을 잔다는 설정은 안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뭐, 하여튼 밤이거나 낮이거나,
주제는 고요, 적막, 쓸쓸함, 외로움, 그런 것이겠죠.
은은하게 표현을 참 잘했습니다.
화가가 대단히 고단수인 것 같습니다.
화가라면 어딘가에 재주를 부리고도 싶고, 의도를 내비치려고 강조도 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이 그림에선 그런 구석이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냥 먼 발치로 뵈주기만 할 뿐이죠. 알아서 느껴라 이 말이네요.
어떻게 생각하면 작가가 오만하기까지 합니다.
다만, 어부의 존재가 자꾸만 감상에 방해가 되는군요. 사족으로 여겨집니다.
차라리 빈 배였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요.
이 작품이 뛰어난 점은 아래 그림, 양해의 <이백음행도(李白吟行圖)>와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붓질 열 번에 그린 그림이라니까 비교하기가 좀 그렇습니다만,
<이백음행도>는 화가 양해(梁楷)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습니까?
우리 미술평론가들이 즐겨 쓰는 표현으로, "드높은 정신세계" 어쩌구 하는.
한마디로 '고고하다'이거죠. "야, 이래도 안 고고하냐?"
지금 나한테 강요를 하고 있어요.
양해(宋), <李白吟行圖>
그렇다고해서 <이백음행도>가 수준이 쳐진다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역시 아주 빼어난 그림입니다. 구도며 기법이며 내공이 단단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 낙관 찍은 거 보세요! 오만방자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쳐흘러요.
지금 이거 천 년 전에 그린 그림입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그림에 이 비슷한 그림이 있었습니까?
서양화엔 또 어떻습니까?
그리고 이런 류의 그림은 양해의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그 이전 시대인 오대(五代) '석각'의 작품 <二祖調心圖>, 宋나라 '목계'가 그린 '감' 정물화 <육시도六枾圖>,
그밖에도 미불의 작품을 비롯해서 남종화니 문인화니 하는 그림들을 보면 생략법과 은유가 훨씬 더합니다.
서양화로 말하자면 인상주의, 상징주의, 입체파 그림이다, 라는 것입니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추사의 세한도가 나왔을 때 당시의 조선이나 청나라 지식인들이 열광을 했다잖습니까.
그런 것을 보면 그림감상하는 안목들이 그만큼 높고, 즐길 줄 아는 저변층이 넓었다는 얘기가 되거든요.
19세기에 서양 지식인들의 예술적 심미안 수준이 과연 그 정도 되었을까요? 의문입니다.
다시 당인(唐寅)의 <위저취어도(葦渚醉漁圖>로 돌아가서,
저런 구도의 풍경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낚시를 해보신 분들은 알 겁니다. 수없이 봐온 풍경이죠.
제가 예전에 낚시를 해봤기 때문에 이 그림이 자꾸만 낮으로 보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보름달이 뜬 밤이라도, 저런 정경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저 상태는 해 떨어지기 한 시간 전쯤이거든요. 가을이니까 오후 네 시로 보면 되겠습니다.
밤낚시 하려면 지금 밑밥을 막 뿌려줘야 할 때고요, 곧 입질이 들어올 시간입니다.
손맛 볼 것을 생각하면 자못 기대와 흥분이 고조되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지극(至極)히" 평화로움이 느껴지는 시간대이기도 합니다.
해질 무렵엔 희한하게 바람도 안 분답니다.
그때 느껴지는 평화로움은 ('평화'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네요.),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그 맛에 낚시를 다녔습니다.
제가 앞에서 '흔하디 흔한' 풍경이라고 했잖습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눈에 담아두질 않고 스쳐지나가는 풍경이기도 합니다.
화가는 바로 그 점을 노린 것 아닐까요?
미감(美感)만 특출나게 발달한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거의 득도에 이른 사람 같기도 해요.
조선시대 화가들이 산수화 그린 걸 보면, (문인화도 경치를 그렸다면 마찬가지죠)
금강산이나 인왕산이나, 굽이쳐 흐르는 경치 좋은 강과 함게 어우러진 산세라거나,
하다못해 그럴듯한 노송 밑이나, 너럭바위 위에나......
그런 절경 속에 동자 하나 데리고 들어가서는, 구름 한번 쳐다보고 술 한잔 찔꺽.....
"세월네야~ 네월네야~, 나 신선 됐당~~!!!"
이거 아닙니까?
즈네끼리는 그걸 안빈낙도(安貧樂道)라지요.
중국도 마찬가집니다. 황산, 여산, 아미산, 항산, 숭산, .... , 뭐 그렇습니다.
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과연 부귀와 공명을 헌신짝 보듯하고 자연과 합일 된 참모습입니까?
탱자탱자 노는 뒷돈은 누가 댄답니까? 가증스럽지요?
그런 점에서 바로 이 그림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억지가 안 보입니다. 어느 한 곳도 과장이나 위선이 없어요.
그야말로 자연과 인간이 합일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보여주는 그림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자면 나(我)라는 존재 자체도 잊어버려야 완성이 될 것 같은데.....
제가 앞에서 '빈 배'였으면 좋았겠다는 말은 그런 뜻이었습니다.
추사의 세한도(歲寒圖)가 왜 유명한지, 과연 그렇게 열광케 할 정도인지,
공부를 더 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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