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회화산책』....

2011. 4. 30. 17:41미술/내 맘대로 그림 읽기

 

 

 

요즘 제가 중국 그림 몇 개 소개했잖습니까?

출처는 이 책이었습니다.

작년에 정선의 그림을 공부하면서 무척 궁금해 했습니다.

<박연폭포> <인왕재색도>

비슷한 화풍과 솜씨를 볼 수 있는 작품이 윗대에 단 하나라도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없었습니다.

마치 정선이 하늘에서 뚝 떼어가지고 온 것 같아요.

그때 <박연폭포>에서 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선 그림의 뿌리가 일본그림이 아닌가, 중국을 통해서 서양화를 본 것이 아닌가,

그런 의심까지도 해보고 그랬습니다.

작품 <박연폭포>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런 의구심을 아주 버린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 중국의 그림을 보니까

<인왕재색도>는 중국그림에서 배운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마침 적당한 귀절을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한번 옮겨보죠.

 

 

 

사방이 꽉 막힌 공간에 갇힌 듯 답답할 때 누군가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준다면 얼마나 기쁠까.

갈 길을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목적지가 저 쪽이라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고마울까.

어떤 일을 하든, 어느 길을 가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가 있다.

그 때 내가 갈 길을 알려주고 문을 열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멘토(mentor)라고 한다.

멘토는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가 빠져 나온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지금 막 코너에 몰려 어쩔 줄 몰라하는 후배를 이끌어 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멘토는 스승이자 선배이며 조언자이자 안내자다.

멘토는 나와 같은 시공간에 있으면서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는 사람도 있지만

때로는 몇 백 년 전에 살다 간 발자취만 남긴 사람도 있다.

그럴 경우 멘토의 지시는 글이나 그림, 탑이나 조각 속에 숨겨져 있다.

자신이 맞딱뜨린 문제를 풀 지 못해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몇 백 년 전에 살았던 멘토의 작품 속에서 해답을 찾게 되면

그들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스승과 제자가 된다.

이 때 멘토는 위패 스승이고 멘티는 위패제자가 된다.

위패(位牌)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 절이나 사당에 모셔놓은 나무 조각이니

위패제자는 스승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이 가르침을 받았다는 뜻이다.

중국 회화사에서 가장 개성적인 그림을 그린 작가로 손꼽히는 왕몽과 심주, 곤잔의 그림을 통해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글. 조정육 행복한 그림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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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중국의 역대 회화를 개관해봤는데,

역시나 짐작대로 대단하더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명함도 내밀 수준이 못 됩니다.

산수화는 말할 것도 없고, 난 그림,  매화 그림,  대나무 그림, 다 껨이 안되더군요.

그렇다고 해서 한숨 푹푹 내리 쉬고 들이 쉬고 할 거까지야 없겠지요.

그저 인정하고 우리 위치가 어디쯤인가 알면 된 거지요.

고향이 으리으리해서 찾아가는 겁니까. 내 뿌리이기에 정겹고, 추억 더듬으러 가는 거지요.

하지만, 제발 역사나 문화 같은 거에 대해서 말할 때, 침소봉대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무슨 애국이라도 되는 양 하는데, 오히려 우리의 갈 길을 더디게 하는 우매한 짓이거든요.

가로 세로, 우리의 좌표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모두 개방적인 왕조들이었지요.

우리도 고려시대에 보면 아라비아 상인까지 들어와서 장사를 했다고 합니다.

남송과 고려는 대등한 관계였던 걸로 보입니다. 문화교류도 활발했고요.

그리고 문화수준을 서로가 인정을 했었어요. 고려 상감청자처럼요.

공예수준만 그랬겠어요? 틀림없이 고려의 회화수준도 비등했을 거거든요.

실제로 <수월관음도> 같은 작품을 보면 대단하잖습니까.

제가 이번에 중국 그림을 봤다고 했잖아요. 거기에도 <수월관음도> 같은 작품은 없습니다.

중국에서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꽃 피웠던 시절이 바로 송나라 때입니다.

그 송나라에 비해서 하나도 꿀릴 게 없었던 고려란 말이지요.

그런데 그림이 남아있질 않아요.

 

조선왕조가 못된 짓을 한 것은 아닌가 합니다.

왜 <수월관음도> 수준의 그림이 조선시대에는 없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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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회화 (펌)

 

회화는 공민왕 무덤의 벽화와 수락암동 옛 무덤의 사신도, 부석사 조사당의 천왕상과 보살상, 수덕사 벽화등과 일본 천초사에 있는 혜허의 「관음도」가 전해진다. 그 밖에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천산대렵도」가 있는데, 말을 탄 인물과 마른 나무, 풀 등 극도의 사실적인 필치는 웅대하고 품위있는 현세감을 느끼게 한다. 고려시대의 미술 중에서도 회화의 경우에는 인물과 산수는 물론 묵죽을 비롯한 문인화 계통의 그림등이 귀족, 화원, 선승등에 의해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회화는 실용적 목적 이외에 감상과 수양을 위한 수단이 되었으며, 또 산수화에서는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산천을 그리는 실경산수도 발전하였다.

송나라 휘종의 찬사를 받았던 이영의 「예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를 위시하여 이제현의 「기마강상도」, 필자 미상의「금강산도」 「진양산수도」 「송도팔경도」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이미 고려 전기에 한국적인 실경산수화가 발전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현재 이 시대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우수한 일반 회화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지금 전해지는 작품으로서 고려시대 회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것은 불교 회화이다.

이 작품들 중에서도 1286년 제작된 「아미타여래입상」, 동경 천초사 소장의 「양류관음상」, 서구방이 1323년에 그린 「수월관음보살도」등은 고려시대 불교회화의 높은 수준과 독특한 성격을 특히 잘 보여준다. 이러한 그림들은 한결같이 금빛과 채색이 찬란하고 의습과 문양이 정교하며 자태가 단아하여 고려적인 특색을 짙게 풍긴다. 이 시대에도 적지 않은 서가가 있었고, 도화원이 설치되어 상당수의 화가와 작품이 문집이나 사기에서 산견되지만 그들의 진적을 대하기는 힘들다. 서는 사경을 제외하고는 전무한 형편이고 다만 몇몇 석비의 비문 각자를 통하여 미루어 살펴볼 뿐이다. 유명한 서가로서 이환추·구족달· 장단열·이원부·석탄연·한윤 등을 들 수 있는데, 서풍은 전대에 이어 구양순체의 구양법이 유행하였으며, 후기에는 원의 조맹부체의 조법이 유행하였다. 회화 또한 진적이 매우 드무나, 서적에 비하면 유례가 많은 편이다.

화가로는 최사훈·정지상·이준이)·이영·이광필·정서·정홍진·석혜근·이암·공민왕 등을 들 수 있으나 그들의 화적을 대하기는 역시 어렵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 회화는 인물화, 불교회화, 유교회화, 자유화, 경적도, 고분벽화 등 다양하지만, 현존하는 화적은 안향과 원의 진감여필인 이제현의 영정, 해애필 세한삼우도 외에는 모두 불화와 고분벽화이며 그나마도 불화는 대부분이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일본에 건너간 불화는 70여 점에 달하며, 관경변도·미륵하생경변상도·아미타여래도·관음보살도·지장보살도·제보살도·오백나한도·사경변상도 등이 포함되어 이들을 통하여 화사하고 정교한 표현으로 화법이 뛰어났음은 물론, 불화의 세계를 통하여 고려인의 불교관도 알 수 있다.

고분벽화는 개성 수락동 고분, 명종 지릉, 공민왕 현릉, 철원 내문리 고분, 장단 법당방 고분, 거창 둔마리 고분, 안동 서삼동 고분 등에서 볼 수 있으며, 화제를 대별하면 주악도·사신도·십이지상·성수도 등이다. 화법은 전기에는 정교한 선을 주로 하고 색감도 명랑하나, 후기가 되면서 면을 주로 한 침울한 색감으로 변하는 듯하다. 특히 거창 고분 벽화에는 일렬로 선 5∼6인의 주악인물도가 그려져 있어, 그들이 가진 악기나 복장을 통하여 당시의 풍습을 짐작할 수 있고, 나아가 장례의식의 일단도 미루어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