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 책 저 책 많이 봅니다. 장석주, 느림의 미학 ...

2010. 11. 20. 18:35책 · 펌글 · 자료/인문 · 철학 · 과학

 

 

 

 

 

장석주,『그 많은 느림은 다 어디로 갔을까』

 

 

 

1.

 

마침 배로 황허를 건너는데 빈 배가 다가와 내 배에 부딪친다면

아무리 성질이 급한 사람이라도 성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배에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소리치며 밀고 당기고 했을 것이다.

앞서는 노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노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람이 능히 자기를 비우고 세상에 노닐면 그 누가 해칠 것인가?

 

                                                                『장자』「산목」

 

 

 

 

 

2.

 

해박한 벗과 함께 있는 것은 기이한 책을 읽는 것과 같고,

운치 있는 벗과 마주함은 이름난 문인의 시문을 읽는 듯하며,

삼가고 신중한 벗을 대함은 성현의 경전을 읽는 것과 같고,

재치 있는 벗과 같이함은 전기소설을 읽는 것과 한 가지이다.

 

                                                       淸, 장조(1650-?)

 

 

 

 

 

3.

 

흔히 노자와 장자를 견주는데, 두 사람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노자가 도의 근원과 본질이 무엇인가에 천착한 사상가라면

장자는 앞선 사상가들의 생각을 끌어안으며 그것을 딛고 앞으로 나아간 사상가다.

즉 장자는 도의 본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롭게 노닐기 위해 변화와 초월을 강조한다.

시대의 법과 강령에 마음이 묶일때 마음은 생기와 신명을 잃고 타고난 실존에 굴복한다는 것이다.

분별지에 머문 마음은 변할 줄 모르는 굳은 마음이라서 반드시 시비를 따지게 된다.

선악, 미추, 우열, 귀천, 이로움과 해로움, 등을 분별하지 말고 뛰어넘어야 유유자적한 삶이 된다고 한다.

 

장자의 번역본은 수 백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오강남과 기세춘의 번역본을 추천할 만하다.

오강남은 경어체를 써서 정중한 느낌이 나게 하고 주관적 감정에 호소하는 반면에,

기세춘은 간결하고 간소한 서술체 어미를 써서 그 뜻이 주관화 되는 것을 경계한다.

오강남은 '가끔은 험구도 불사하는 재기발랄한 야인'의 이야기로 읽은 데 반해

기세춘은 '반문명 반체제적인 우화와 풍자와 반어'로 읽는다.

칠순 노인 기세춘은 "기왕의 <장자> 판본은 다 불살르라!"고 일갈한다.

 

 

 

 

 

 

4.

 

 

 

귀 떨어진 개다리소반 위에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한 그릇의 더운 밥을 먹기 위하여

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

몇 번이나 자신을 속였는가.

밥 한 그릇의 사슬에 매달려 있는 목숨

나는 굽히고 싶지 않은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발을 들여놓고

잡고 싶지 않은 손을 잡고

정작 해야 할 말을 숨겼으며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했으며

잡고 싶은 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왜 밥을 먹는가, 오늘

다시 생각하며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할 양심의 말들을

파기하고 또는 목구멍 속에 가두고

그 대가로 받았던 몇 번의 끼니에 대하여

부끄러워한다.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아아

나는 가롯 유다가 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한다. 밥 한 그릇에

나를 팔지 않기 위하여

 

                                  장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