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28. 09:01ㆍ미술/한국화 옛그림
<출처>
글 사진. http://cafe.daum.net/deepgreensea/997Z/831
(닉넴. 바다속퐁당)
조선후기 풍속화는 18세기 초반 사인화가였던 공재 윤두서와 관아재 조영석에 의해 시작되어
정조와 순조시대, 즉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등에 의해 전성기를 맞는다.
그 중 단원 김홍도, 긍재 김득신, 혜원 신윤복은
예술적으로도 성공적인 풍속화를 남기고 있고, 당시의 풍속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단원, 긍재, 혜원의 대표작을 꼽아보았다.
이로서 조선 후기 풍속화는 여기에서 거의 정리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걸작 풍속화들이다.
김홍도. 무동. 풍속화첩, 지본담채, 27 x 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속한 단연 최고의 작품은 이 무동, 춤추는 소년이다.
화면구성, 필력, 풍속화적 성격, 음악적 요소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이 작품을 걸작으로 만들고 있다.
간단하게 그려낸 듯한 그림치고는 그 값어치가 너무도 큰데, 실상 간단한 이 그림이 그려지기 까지,
김홍도가 거친 수련의 과정이라든가 생각의 발전 등이 범상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수년의 발전상들이 이 작은 그림 한 면에 담긴 것이다.
당시의 음악 풍속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그림이면서도, 난 음악을 잘 모르기에 붓질에 초점을 맞춰서 보려고 한다.
이 그림은 이 풍속화첩의 다른 그림들과 다르게 유달리도 좋은 붓질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무동이 백미이다. 무동을 그린 붓질은 강하고 힘이 있다.
그러면서도 옷자락은 자유롭게 휘날리고 있고, 굳센 흐름에 어느 하나 막힘이 없고, 무거움도 없고,
그야말로 활기차고 쾌활하다.
무동의 발부터 손끝까지, 글쎄 김홍도가 이 무동 하나를 그리기 위해 얼마나 수련했을까 싶을 정도로,
정형이 있을 수 없는 풍속도의 무동이 너무도 완벽하게 아름답다.
김홍도. 서당. 풍속화첩, 지본담채, 27 x 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원의 이 풍속화첩에서 해학미가 가장 넘치는 그림은 아마도 이 그림, 서당이다.
한 아이가 외울 것을 못외웠는지, 훈장 선생님 앞에 나와있다.
종아리 맞을 순서라서 바짓저고리소매를 푸는 건지, 아니면 한참 종아리를 후려맞고 바짓단을 묶는 건지,
다른 아이들은 낄낄대고 신이 났고,
훈장님도 이 상황이 우스워죽겠는데 억지로 참고 있는 모양새이다.
이는 당시의 번영하고 풍요로웠던 세태의 반영이다.
당시가 그만큼 살만하고 웃을만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조선의 영정조시대는 상당히 풍요로운 시대였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가 존재했었기에 이러한 그림이 탄생했지 싶다.
김득신. 귀시도. 지본담채, 27.5 x 33.5cm, 개인 소장.
풍속화는 그 시대의 풍속을 잘 이해해야 그림을 보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 조선의 풍속을 잘 모른다. 아마도 앞으로 많이 공부해야할 부분이지 싶다.
이 그림은 김득신이 그린 귀시도, 아마도 파장이 되고 집으로 돌아가는 행렬이다.
마소를 앞세우고 한무리의 사람들이 나무로 된 다리를 건너고 있다.
한여름인듯 수목은 물기를 머금었다.
등장인물은 모두 10사람, 앞에 말과 소를 끌고 가는 사람 두사람과 아들인 듯한 아이 한 명이 첫번째 일행,
두번째는 뭔가 열심히 대화중인 보부상 3명
세번째는 양반 복장을 한 두명
네 번째는 어머니와 아들인듯한, 화면상의 유일한 여인내,
어찌보면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도 화면 상에 아옹다옹 들어가 있다.
신분제의 파괴현상을 이런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일까?
아무튼 그 시대의 재미난 상황을 증언하는 다정한 재미난 그림이다.
김득신. 노상알현도. 지본수묵담채, 27 x 33cm, 북한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배경이 거의 생략되고 풀들이 바닥에 잔잔히 깔린 배경으로 이야기는 나타난다.
선비들이 즐겨탔다는 나귀,
다소 마른 농묵으로 그린 인상적인 나귀 위로 아마도 당시의 명망이 높은 선비 한분이 타고 있다.
갓의 넓이가 참 넓어, 당시의 지체높은 선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반듯한 자세, 얼굴에서 주는 하얗고 차분하면서 고고한 인상 또한 공부가 높은 선비를 표현하려고 했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 앞에 나귀를 모는 사람, 그리고 그 뒤에 짐꾼 이렇게 세 사람이 일행이다.
상민 부부가 길을 가고 있었다.
여인내의 젊은 모습으로 보아 결혼한지 얼마나 되었을까 싶은, 남자는 그에 비해 나이가 들어보인다.
아무튼 부부가 길을 가다가 이름 높던 선비를 만났다.
그 존경심에서 나온 것일까. 그저 신분차에서 나오는 귀찮은 치례일까.
남자는 허리는 120도나 굽혔다. 여자도 엉덩이를 빼고 인사를 드리고 있다.
귀시도 등 신분제의 파행을 보여주는 그림이 그려지던 때에,
또한 이러한 신분제의 삼엄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 같이 그려졌으니, 신분제가 참 복잡하던 시대였나보다.
덧붙이는 이야기로 나귀의 동세도 참 좋거니와 옷주름의 선들이 참 좋다.
김득신. 목동오수. 지본담채, 22.4 x 27cm, 간송미술관 소장.
목동은 소를 치다말고 버드나무 둥치에 기대 잠들고 말았다.
배를 내어놓고 다리를 꼰채 오수를 즐기고 있다.
그 자세의 편안함이야 들녘에서 낮잠을 자본 사람이야 알것이다.
18세기 중반까지 조선그림에 그려진 소가 대부분 남양물소라는 것을 생각할때
이 소의 뿔은 우리 토종소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소의 머쓱한 듯한 표정, 어찌보면 능글맞아 보이기도 하고, 소가 뜯기에 풀은 부드러워 보이고,
바람은 왼편에서 불어와 오른편으로 불어나가는 듯, 풀은 휘젓기고 있다.
반면 천장의 버드나무는 가지런하다.
화면의 오른편으로 새가 날아가고 있다.
신윤복. 주유청강. 견본담채, 28.2 x 35.6cm, 간송미술관 소장.
혜원전신첩이라는 이름의 화첩,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있고 1970년 국보로 지정되어 국보 135호인 30점의 작품,
이 화첩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혜원 신윤복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이 화첩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것은 말로 하기 힘든 것이다.
이 화첩에 속한 녹록치 않은 솜씨의 그림들은 신윤복을 평가하는데 무엇보다도 큰 비중을 차지할 뿐더러,
조선후기 풍속화의 발달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그 중요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화첩의 그림들은 아주 잘 어울어져있다.
무엇이 잘 어울어져있냐면, 낭만적이고 세련된 산수풍경과 멋드러진 인물들이 잘 어우러져있다.
이 화첩에 속한 그림들에 산수배경들은 단순할지라도 그림의 격조를 높이는 상당히 수준높고 세련미 있는 것들이다.
이 주유청강은 아마도 이 화첩의 대표작으로 꼽을만한 그림일텐데,
역시 간략화된듯 하면서도 상당히 세련된 산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소 단원의 영향이 느껴지는 수지법의 수목도 상당히 조형미를 갖추어 그림의 분위기를 배가시키고 있다.
그 아름다운 산수 속에서 배를 띄우고 물놀이를 하고 있다.
물결은 잔잔하다.
가채머리를 크게 하던 세명의 기생과 큰 갓을 쓴 사대부 인사 세명 그리고 노젓는 이와 퉁소를 부는 아이,
이렇게 구성되어있다.
진한 쪽빛 치마를 입은 여인은 물을 뜨고 있고, 젊은 사내는 그 여인을 감상하고 있다.
또 옅은 쪽빛을 입은 기생에게 젊은 사내는 담뱃대를 물려주며 뒤에서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그림을 풍류있게 하고 있는건,
배에 좌측으로 치우쳐 서있으면서 뒷짐을 지고서 생황 부는 기생을 바라보는 사내이다.
나이가 중년쯤 되보이는 이 사내는 지금 상중이다.
그럼에도 선유놀이를 한다는 것은, 당시의 풍속이 주자 말씀대로만은 돌아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아무튼 풍채가 고고한 중년의 양반내는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선유놀이를 즐기는데, 그 시선이 참 아름답다.
멀찌감치 서서, 생황소리에 감싸이는 뱃머리에 앉은 여인내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신윤복. 단오풍정. 풍속도첩,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 표모봉욕. 풍속화첩,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소장.
내가 그림을 제대로 읽는 건지 모르겠다.
스님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탕건이며 옷이며 나뒹굴고 있는게, 글쎄 무슨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아무튼 난 스님이라고 생각했다.
10대 후반의 어린 스님이 빨래터를 훔쳐보다가 그만 노부에게 걸려서 붙잡혀서 오는데,
노부가 때리는 매를 드센 힘으로 잡고 있다.
어쨌든 끌려나오고는 있는데, 빨래하던 여인은 무지 화가 났다는 표정이다.
자세도 그렇거니와, 몽둥이질 좀 당해보라는 자세다.
이 그림에서 돋보이는것은 산수이다.
신윤복의 좋다고 할만한 산수가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부벽준을 친 바위는 전반적으로 깔끔하다.
도회풍경을 주로 그린 신윤복이라 그런지 산수조차도 도회적인 느낌이 난달까.
뭔가 간단하면서도 깔끔하면서도 세련되고 마치 일종의 좀더 디자인된 산수를 보는 듯하다.
풀이 무성하고 아마도 한 여름인듯.
신윤복. 상춘야흥. 풍속화첩,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 쌍검대무. 풍속화첩,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 계변가화. 풍속화첩,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의 이 화첩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내들이 멋있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빨래터 그림은 한 명의 사내가 등장하는데, 아마도 무반의 자식인듯 활을 들고 어디론가 가는데,
그 옷을 입음새도 보통 세련된게 아니고, 풍채도 좋다.
떡벌어진 등어리를 화면 전면에 내놓고, 가는 길에 멈춰서서 또 멋있게 고개를 돌려 머리 손질을 하는 여인네를
바라보고 있다.
이 여인내는 가슴을 내놓고 있는 것으로 봐서 아들을 낳은 유부녀이다.
그럼에도 이 여인내는 사내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 싫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 위에 웃옷을 벗은 노부는 뭔가를 개고 있고 그 밑으로 아낙내는 방망이질을 하고 있다.
암석의 처리, 물가의 처리 등이 상당히 깔끔하고 아름답다.
신윤복. 정변야화. 풍속화첩,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소장.
어느 대갓집의 뒷녘, 초봄 꽃이 만발할 무렵에 달은 떴고 아낙내 둘이서 물을 깃다가 뭔가 상념에 빠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알 수 없고, 뒷문그리고 곁으로 난 돌담, 이웃집 양반네는 그녀들을 보고있다.
혜원전신첩의 각 화면들을 보면서 그 감각적임에 놀라게 된다.
글쎄 이 그림은 대체 누구를 위한 그림들이었을까. 어쩜 이리도 감각적일까?
달빛이 은은하고 꽃빛이 은은한 밑으로 풍만해진 바위도 감각적이고 물동이도 어여쁘다.
여인내의 생각하는 폼새도 못지않게 귀엽다.
다만 늑대처럼 어떤 아저씨가 등장해서 그림에 춘정을 가득 심어놓고 있다.
신윤복. 월하정인. 풍속화첩,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 씨름. 풍속화첩, 지본담채, 27 x 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 섭우도. 병진년화첩, 1796년, 지본담채, 26.7 x 31.6cm, 호암미술관 소장.
이 그림을 정확히 풍속화의 범주에 넣기에는 뭣한 면이 있다.
당시의 모습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특정한 풍속을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그림은 풍경이 주가 되어 한 계절의 풍경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풍속화에 관한 포스팅을 하면서 구지 이 그림을 넣은 것은, 달리 생각해볼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보다 시피 풍경이 주가 되고, 물이 넘친 홍수철에 목동이 소를 타고 물을 건너가고 있다.
비록 풍경이 주가 되었지만, 소를 타고 물을 건너는 목동의 모습,
그러한 장면은 지금 현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당시의 풍속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그림은 풍속이 주가 아니라 풍경이 주인 작품이다.
하변에 우점 등으로 우거진 수풀 그 위로 여백으로 표현된 물길, 그 위로 잠겨있는 나무들, 그 곁의 오리와 새들,
그 위를 소를 끌고 지나가는 목동의 모습,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름 풍경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그림에서 당시 풍속의 한 장면을 찾을 수 있다.
비록 생업 종사 장면은 아니지만, 당시의 사진이 없는 현실에서, 아, 당시에는 이러한 장면도 발생했었구나.
목동의 일과 중 한 장면을 이렇게 서정적으로 그려낸 김홍도의 솜씨가 놀랍구나. 이렇게 감탄할 수 있는 것이다.
김홍도. 성하부전도. 지본담채, 27 x 38.5cm, 호암미술관 소장.
단원이 말년에 보인 화경은 놀랍다.
무르익은 선들 밑에 완벽하게 포진된 여백과 구도를 만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물게 말년에 그려진 풍속화에서도 그러한 면을 볼 수 있는데,
이 호암미술관 소장의 성하부전도는 그러한 그림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구낙관이 있으므로 근 60이 다되어서 그린 말년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우상좌하의 타원형의 성벽을 놓고 그 좌우는 지웠다.
성벽에서는 수목이 자랐고, 하변 토파는 성벽을 따라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 사이 길로 두명의 봄짓장수가 끙끙대며 길을 가고 있다.
잘 짜여진 풍경 속에 풍속이 들어간 걸작그림이다.
김홍도. 호귀응렵도. 지본담채, 28 x 34.2cm, 간송미술관 소장.
단원 김홍도는 연풍현감시절, 가뭄이 심하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돌보지 아니하고 사냥을 다녔다는 이유로
연풍현감에서 해임되고 의금부로 압송된다.
한 학자께서는 이 그림을 보시고 이렇게 생각하셨다.
단원이 그 일이 억울하여, 나는 사냥을 하긴 하였으되 이렇게 조촐한 인원을 끌고 사냥하였다고,
가뭄에 고생하는 백성을 구휼하려고 그토록 노력하고, 가끔 지치고 힘들때 이렇게 사냥길에 나섰는데,
그로 인해 파직이라니, 라며 그림을 그리며 남에게 못한 소회를 토로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데, 수지법 등에서 연풍현감 이후의 맛이 난다는 것이다.
등장인물 여덟이 옹기종기 등장한 화면에는 약간의 쪽빛옷을 빼고는 색채를 거의 쓰지 않았다.
단원의 역사적 배경을 빼고보자면,
어느 지체높은 분의 사냥 장면으로 차양을 든 하인, 나귀인지 말인지를 이끄는 하인,
그리고 이방 하나와 간단한 식사꺼리를 머리에 얹은 아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수화적 요소와 풍속화적 요소가 어울어지면서도 보다 풍속에 중점을 둔 그림이다.
김득신. 야묘도추. 간송미술관 소장.
난 개인적으로 야묘도추라는 이름보다 파적이라는 이름을 좋아한다.
적막을 깬다라는 이름이 내 생각에는 그림의 분위기를 더 잘 표현한 듯 싶다.
고양이가 병아리를 훔친다는 내용을 설명하는 것보다 분위기를 단숨에 보여주는 듯한 제목이
보다 그림의 서정에 맞다고 할까.
적막을 깨듯, 그림엔 그냥 난리가 났다.
발단은 어미닭이 한눈판 틈을 타 들고양이가 병아리를 물어가면서 부터이다.
어미닭은 종종 걸음으로 고양이를 쫓아가고 있고 병아리들은 놀라서 그만 사분오열하고 말았다.
문제는 주인집 아저씨다. 고양이에 냅다 화를 내고 긴담뱃대를 뻗었으나 이미 늦은 듯 싶다.
그나저나 이 아저씨는 어쩔까나, 공중에 몸이 붕떠서, 천짜던 틀도 마당에 내던져 지고,
주인아주머니도 놀라 주인아저씨를 잡으려고 하나 이미 늦은 듯,
200년 전이지만 저 아저씨가 몸이 성했기를 바란다.
참 좋은 그림이다.
그림의 소재도 재밌으면서 긴박하게 표현해낸 그 능력이 예사롭지 않고, 의습선 등의 필력 또한 적잖이 좋다.
초봄인듯 나무에 스며드는 연한 꽃빛 또한 서정적인 화면을 다하고 있다.
김득신. 대장간. 지본담채, 27.2 x 22.8cm, 간송미술관 소장.
나이든 대장장이 곁으로 세명의 조수가 돕고 있다.
나이든 대장장이는 이것은 어떻게 해야한다 말하려는 찰나인듯 뭐라뭐라 하는 듯 하고,
웃통을 벗어버린 조수는 달구어진 철을 내리칠 찰나이다.
철을 고정시키고 있는 듬직한 조수는 표정이 재밌다.
그 조수 곁으로 더더욱 어려보이는 아이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당시에 대장간은 어떤 의미를 가진 공간이었을까?
이러한 질문을 하게 하는 것은 김홍도가 그린 대장간과 김득신이 그린 대장간 그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김득신의 대장간그림이 풍경이 그려져 있다는 점이나 그림 솜씨에 있어서 좀더 쏠쏠한 재미를 준다.
김득신. 강상회음. 지본담채, 27 x 22.4cm, 간송미술관 소장.
강가에서 고기를 잡아 모여 밥을 먹고 있다.
등장인물은 모두 여덟명.
잡아서 익힌 듯한 고기는 가운데 놓고, 그 주변에 넷이 빙둘러 밥을 먹고 있다.
고된 일 끝에 새참을 먹듯 아마 이들도 무슨 일인가 했을텐데, 무엇을 학고 생긴 점심의 여유일까,
낚시대는 높이 솟아 거기에는 새 네마리가 앉아있고 한마리는 날아가고 있다.
뒤에 인물 하나는 술병을 들고 술을 마시고 한 사람은 다리를 모으고 앉아서 먼데를 쳐다보고 있다.
나무 뒤에는 어린 아이가 그 밑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림 전반으로 다정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나무 등의 표현에서 다소 붓질이 짧은 미숙한 면을 보이는데,
아마 20대~30대 초의 젊은 시절의 그림이 아닌가 싶다.
이 화첩의 다른그림들도 아마 그 시기쯤에 그려진 것이리라 싶다.
그림 전면으로 풍경은 활기차기보다는 다정하다.
옹기종기 앉음새가 그렇다. 정이 넘치는 그림, 18세기 조선 민간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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