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
대원군(1820~1898)의 73세 때 작품
고균 김옥균 글씨
「대원군 난초 그림은 선이 피아노줄처럼 가늘고 팽팽한 게 특징이죠.
헌데 불행하게도 진품보다 위작이 많습니다.
워낙 인기가 많다보니 생전에도 위작이 많았다 해요.」
묵란도
석란도
운계시첩(雲階詩帖) / 石坡 李昰應(1820 - 1899) / 紙本水墨 30.9×20.6cm /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所藏
난초 그리기도 미인의 환심을 사기만큼 어렵다.
난 잎의 시작은 못대가리처럼, 끝은 쥐꼬리처럼, 가운데는 사마귀 배처럼 그린다.
잎이 교차하는 곳은 봉황 눈을 닮아야 하고 잎이 뻗어나갈 때는 세 번 붓 꺾임이 있어야 한다.
이럴지니 그림 속 난향인들 쉽사리 풍기겠는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난초는 홑잎이다.
봉긋하게 솟은 난 잎의 자락이 요염한데, 봉오리가 뱀 대가리마냥 혀를 날름거린다.
매우 고혹적인 병치다.
아래쪽 고개를 쳐든 풀은 지초다.
난초와 지초가 나란히 있으니 이른바 ‘지란지교’다.
벗과 벗의 도타운 사귐은 난초와 지초의 어울림과 같다.
그것도 모자라 대원군은 맨 아래에 공자 말씀을 덧붙인다.
‘착한 사람과 지내는 것은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 손철주(미술칼럼니스트)
이하응과 민영익 (펌)
민 영 익
이하응
난초그림의 쌍벽 대원군과 민영익의 난초 그림
대원군 이하응 (1820~1898년) 의 난초그림(墨蘭)은 가짜가 많기로 유명하다.
대원군의 그림 절반 이상이 가짜라는 것이 정설, 대원군의 난초는 그의 생전부터 가짜가 많았다.
당시 그의 난초 그림을 원하는 사람이 많아 그의 사랑방에 사람들을 앉혀놓고 대신 그리게한 다음
자신은 거기에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가짜가 많은 것은 대원군의 난초가 뛰어남을 뜻한다.
추사 김정희의 극찬이 이를 입증한다.
난초 그림은 19세기에 성행했고 그 중에도 대원군과 민영익(1860_1914)이 쌍벽을 이뤘다.
이들의 난초는 회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지만 그들의 화풍은 사뭇 대조적이다.
대원군의 난초는 섬뜩할 정도로 얘리하다면 민영익의 난초는 부드럽고 원만하다.
이 대조적인 화풍은 그들의 판이한 인생을 담고 있기에 더욱 흥미롭다.
대원군은 여백을 살리고 한 쪽에 한 떨기 春蘭을 즐겨 그렸다.
난은 섬세하고 동적이며 칼날처럼 예리하다. 특히 줄기는 가늘고 날카롭다.
뿌리는 굵고 힘차게 시작하지만 갑자기 가늘어지고 끝부분에 이르면 길고 예리하게 쭉 뻗어 나간다.
반면 민영익의 난초는 여백이 없다.
줄기는 가늘고 고르며 일정하고 끝부분이 뭉툭하다.
대원군의 난초는 힘차고 화풍은 그의 파란 만장한 인생 역정과 비슷하다.
처절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서 그의 야망과 숱한 좌절이 날카로움으로 표출된것이 아닐까?
해동거사(海東居士)란 낙관이 있는 난초는 실각한 후에 운현궁에 눌러 앉았던 1881년
줄기 하나에 울분이 꿈틀거린다.
한편 민영익은 다르다.
그의 왕실 외척으로 태어나 20대 초반에 미국 유럽을 돌며 서양 문물에 눈을 뜨고 요직을 두루 거치지만
야심보다는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던 인물이다.
중국에 유폐된 대원군의 귀국을 반대했던 점에서 드러난다.
그는 1894년 중국으로 망명 그곳의 문인 화가들과 함께 사군자를 그리며 말년을 보냈다.
"그의 중국생활은 국제조류에 뒤지지 않는 독특한 경지의 난초를 탄생시켰다."
구한말 격변기, 두 사람의 삶의 방식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리겠지만
한국 회화사에 난을 활짝 꽃 피웠다는 점에선 이론이 없으리라.
(펌)
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부작란도 不作蘭圖> 종이 바탕에 수묵. 55 x 31cm. 개인 소장
첫번째 발문 (위,왼쪽부터)
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漫香
난을 치지 않은 지 20년, 우연히 본성의 참 모습을 그렸네
문을 닫고 찾으며 또 찾은 곳, 이것이 유마의 불이선일쎄.
만약 어떤 사람이 억지로 요구하며 설명을 바란다면
또한 마땅히 비야이성의 유마거사의 말없음으로 사양하리라. 만향 씀.
두번째 발문 (중간,오른쪽부터)
以草?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知也
謳竟 又題
초서, 예서, 기이한 글자를 쓰는 법으로 썼으니
세상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으며, 어찌 좋아하랴?
구경이 다시 화제를 쓰다.
세번째 발문 (아래,왼쪽부터)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애초 달준을 위하여 아무렇게나 그렸으니, 단지 한번만 있을 수 있고 두번은 있을 수 없다.
선객노인 씀.
마지막 발문 (아래,왼쪽작은글씨)
吳小山見而豪奪 可笑
오규일(소산)이 보고 억지로 빼앗으니 우습구나!
몇 안되는 필선으로 한 포기의 난을 그렸다.
잘 그리려고 애쓴 흔적 없이 그저 붓 가는 대로 맡겨진 필선이 난의 모습으로 변해 있을 뿐이다.
난 주위의 여백에 추사 특유의 강건 활달하고 서권기 넘치는 필체로 쓴 화제가 가득하여
그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예 작품인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처럼 그림에 문학적인 요소을 가미하는 형식은
이미 당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王維)의 남종화적 그림들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난초를 그리지 않은지 20년, 우연히 하늘의 본성을 그려냈구나.
문을 닫고 깊이 깊이 찾아 드니, 이 경지가 바로 유마의 불이선(不二禪)일세.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마땅히비야리성(毘耶離城)에살던유마가아무 말도하지않았던것같이사절하겠다.”
이 화제를 통해서 우리는 추사가 자기의 난초 그림의 화의를 불이선(不二禪)에 견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불이(不二)’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제9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나온다.
특히‘불이’에 관한 문수보살과 유마거사 간의 문답은 승려가 아닌 선비들에게도 깊은 감동으로
받아들여졌던 대목이다.
유마가, “절대평등한경지에대해어떻게대립을떠나야그것을얻을수있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문수가대답하기를, “모든 것에 있어서 말도 없고, 설할 것도 없고, 나타낼 것도, 인식할 것도 없으니
일체의 문답을 떠나는 것이 절대 평등, 즉 불이(不二)의 경지에 들어가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문수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유마에게 물었다.
이때상황을경(經)에서는, “유마는오직침묵하여한마디도입을열지않았다.” 고 기록하고 있다.
(펌)
호생관 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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