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모

2010. 3. 20. 10:29책 · 펌글 · 자료/ 인물

 

 

 

 

 

 

 

진달래야 진달래야 어느 꽃이 진달래지

내 사랑의 진달네게 너만 홀로 진달래랴  

진달래 나는 진달래 임의 짐은 내 질래

 

진달래에 안진 나비 봄 보기에 날 다 지니

앉인 나비 갈 데 없슴 지는 꽃도 웃는고야

안질 꿈 늦게 깨니 어제 진 달 내 돋아

 

진달래서 핀 꽃인데 안 질라고 피운다 맙

피울 덴 아니 울고 질 데 바 웃음 한가지니

임 땜에 한갓 진달래 봄 앞차질 하이셔

 


다석(多夕) 류영모(1890~1981)는 수녀들 사이에 ‘진달래 할아버지’라고 불렸다.

그가 일제시대에 잡지 ‘성서조선’에 썼던 ‘진달래야’라는 시조 때문이다.

그는 봄이면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를 보면서 늘 궁금해 했다.

왜 하필 꽃 이름이 진달래일까. 한문으로 진달래를 이르는 말은 촉혼, 두견화 등 70여 가지나 되는데.

우리말에 녹아있는 깊은 뜻을 남다르게 풀이하는 데 뛰어났던 그에게 꽃 이름 진달래는 두 해 봄동안 숙제였다.

그러다 어느 봄날 무릎을 탁 쳤다.

“꽃이라는 것은 피자고 하는 것이고, 피었으면 시들지 않겠다고 할 거고,

시들지 않는 동안이 길고 길어지이다라고 할 테지.

그런데 뒤집혀서 지려고 한다, 첫 출발부터 지려고 한다 이거요.”

거기에 깨달음이 들어 있었다.

진달래는 잘 피어서 지려고 하는 꽃, 즉 지려고 피는 꽃이다.

‘삶’은 무엇인가. ‘(불)사르다’의 명사형이다.

사람이 왜 이 세상에 나왔는가. 잘 살자고? 아니다. 그는 이런 생각을 깨야 한다고 했다.

그걸 철저히 깬 것이 진달래다.

사람 역시 ‘죽으려고’ 나왔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달래는 중의적이다.

반드시 죽게 마련인 삶을 뜻하기도 하지만 일제 강점 하 조선민족도 뜻한다.

일제 경찰은 ‘성서조선’을 내는 사람들의 사상을 의심하고 필자, 구독자들을 잡아다 조사한 적이 있다.

류영모가 쓴 시조들이 몇 편 되었지만 다른 것은 한 구절 한 구절 무슨 뜻이냐고 캐물어도 ‘진달래야’만은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훗날 류영모는 이를 떠올리며 무척 통쾌했던 듯하다.

이 놈들이 이건 모르는구나.

‘안진(앉은) 나비’는 ‘이긴 나비’ 즉 일제이고, ‘진달래’는 ‘떨어지는 꽃’ 즉 조선민족이다.

그런데 지는 꽃이 진짜 무서운 꽃 아니냐는 거다.

꽃이 떨어지고 나면 이제 나비는 어디 갈 데도 없으면서 이겼다고 우긴다.

그는 으스대는 나비 꼴이 우스워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또한 해는 일본을, 달은 조선을 상징한다.

진달래가 내년 봄에 다시 피듯, 오늘 해가 지면 어제 넘어간 달이 다시 떠오른다.

그래서 ‘어제 진 달 내돋아’이다.(고딕은 기자 강조)

이 시조의 뜻을 단번에 알아본 이는 조선인 중에도 많지 않았다. 함석헌이 그중 하나다.

류영모는 함석헌의 스승이다. 청출어람에 가려서인지 정작 류영모의 사상은 많이 주목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이 책은 류영모가 81세 때인 1971년 광주에 있는 금욕 수도 공동체 동광원(東光園)에서

수사, 수녀들에게 했던 일주일간의 특강 녹음 테이프를 그의 제자 박영호가 정리한 것이다.

이 강의를 한 지 3년 뒤 류영모가 절언·절필했으니 마지막 강의인 셈이다.

2000년까지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행히 동광원 역대원장들이 고스란히 보존해 뒀다.

함석헌과 류영모의 인지도 차이가 일정 부분 함석헌은 유신독재 하에서 대사회적 발언을 많이 했지만,

류영모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이 강의를 들을수록 류영모의 사상이 대사회적 발언보다 한 차원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삶에 밀착해 있어서 감탄이 절로 나오게 된다.

그에게 삶은 일종의 기적이었다.

세상 일 다 잊고 잠을 몇 시간 잔 뒤 아침에 깨어나는 것이 기적 아니냐는 거다.

그냥 영원히 잠들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그래서 하루를 일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고, 감사 기도도 올리며 일기도 쓰게 되는 거다.

잠에서 깨어 일어서는 것이 독립이고, 덤으로 갖게 된 자신의 하루를 잘 쓰는 것이 자유이다.

독립과 자유를 바탕으로 우리가 할 일은 ‘얼나(참된 나)’를 찾는 것이다.

얼나는 ‘몸나(육신의 나)’, ‘제나(자아)’에 갇히지 않는 영성이다.

그는 기독교, 유교, 불교, 노장철학 등 모든 으뜸 가르침(宗敎)들이 표현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제나를 없애고 얼나를 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의 구원, 맹자의 진심(盡心), 장자의 좌망(坐忘), 석가의 해탈(解脫),

이 모두 진정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라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류영모는 16세 때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8년만에 교회 나가길 그만두었다.

동정녀 탄생, 예수의 육체부활, 예수의 심판 등을 믿으라는 ‘바울로의 교의 신앙’이 타율적 신앙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하느님 아들 노릇은 않고 예수의 이름을 팔아 복(福) 장사를 하는 ‘샤먼’들의 집합소로 보였다.

물론 그 비판은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 해당된다.

그 후 그는 자율적 기독교신앙을 강조하며 석가, 장자, 노자, 톨스토이, 간디의 사상을 두루 섭렵했다.

그래도 그의 말과 마음은 늘 기독교도들을 향해 있었다.

그가 기독교도들에게 강조한 덕목 중 하나는 겸손이었다.

짐승이요 거짓 나인 제나가 죽어야 하느님 아들이요 참 나인 얼나를 깨닫게 되는데,

제나가 살아있을 뿐 아니라 교만까지 부린다면 그건 어려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도들이 주역을 꼭 읽어야 한다고 했다.

점 치는 것을 비과학적이라고들 하지만 점을 치는 것은 어쩌면 가장 겸손한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일지 모른다.

주역의 겸괘(謙卦)는 “우리가 온 세상의 끄트머리에 한 점 찍힌 듯 만 듯한 존재라는 것,

석사·박사 똑똑한 사람이라도 하느님 나라 앞에서는 있는 둥 마는 둥 붙어 있는 한 점에 불과할 뿐”이라는 깨달음이다.

 

 


 

 

 

제 먹거리는 제가 장만해야 한다며 북한산 밑으로 이사해 직접 농사를 지었으며

남에게 시키지 않고 자기 밥상을 손수 마련했던 사람.

새벽마다 지구를 가랑이 밑에 깔고 우주 한 바퀴씩 돌면서 우주 산책을 하고

세계의 명산, 바다 이름과 높이 깊이까지 기억했던 사람.

‘기독교 사상가’란 말은 류영모를 담기에 작은 그릇이다.

기독교 사상을 그만큼 동양 사상에 녹여낸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고 ‘통섭적인 종교 사상가’로도 부족하다.

그가 남긴 시조 2254수는 국문학 사상 최다여서 그를 시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국문학자도 있다.

어쩌면 이런저런 호칭보다 ‘진리의 사람’이 그에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류영모가 있었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물론 종교인, 나아가 한국인, 세계인들에게 큰 축복이라 믿는다.

노파심에서 덧붙인다.

글머리에서 말한 진달래 이야기를 ‘패배주의’의 소산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류영모는 서울 수유리에 있는 4·19 학생 의거 기념탑 비문에 콱 박힌 ‘진달래’가 그의 진달래와 꼭 일치한다고 했다.

“1960년 4월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이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생각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되살아 피어나리라.”

 

강의육성 CD 포함 2만2000원

글쓴이 / 손제민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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