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당 장일순 - 서화

2009. 12. 4. 11:02책 · 펌글 · 자료/ 인물

 출처: 장일순 수묵전(그림마당 민 1991) / 유홍준(영남대 교수) / 팜플렛 발문

 

 

 

 

 

 

무위당 장일순 인위가 아닌 무위의 서화

 

재야서가 · 문인화가


무위당 장일순(无爲堂 張壹淳)의 글씨와 그림은 그 말의 참뜻이 유지되는 한에서 재야서가(在野書家)의 글씨이며,

우리 시대의 마지막 문인화가(文人畵家)의 회화세계이다.

그리고 그 예술이 목표로 하는 바의 미적 이상은 일격(逸格)의 예술이다.

 

 

 

 

 

 

 

 

 

 

 

 

 

 

 

그러나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이 분화 또는 파편화되어버리는 근대사회로 들어오기 이전,

아직 총체적인 것, 근원적인 것, 세상에 통용되는 교양적인 것의 가치가 존중받던 시절에는 미술 또한 직업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사대부(지식인)는 자신의 교양과 학문을 드높이고, 간직하고 싶은 정서를 발하는 유효한 수단으로

거문고를 타고 그림을 그렸다.

특히 당시 지식인의 삶속에서 지필묵(紙筆墨)은 오늘날의 만년필이나 볼펜처럼 필수불가결한 것이었고,

글씨를 쓰는 필법(筆法)은 그림, 그중에서도 난초와 대나무 그림 같은 사군자의 묘법(描法)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여가를 틈타 희묵(戱墨), 농묵(弄墨), 완묵(玩墨)하곤 하였다.

그러한 문인을 사람들은 여기화가(餘技畵家)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취미와 여기로 그림을 그리는 데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기술을 앞세우는 직업화가인 화원(畵員)의 그림과는 다른 높은 정신적 차원의 예술세계가 있음을 보여주었고

그것이 문인화의 본령이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근대사회로 들어오게 되면 문인화가들의 그런 기백과 자부심은 찾아볼 길이 없게 되고,

지필묵은 만년필로 대체되면서 종래의 문인화풍이란 한낱 겉껍질만 남은 상투화된 형식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지금도 각종 문화센터에서는 '문인화반(文人畵班)'이라는 이름으로 사군자를 가르치고 있지만,

가르치는 사람이나 수강하는 사람이나 문인화의 정신은 제쳐놓고 그 형태만 따르고 있는 실정이니

그것을 전통계승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나는 무위당의 서화에 문인화의 참뜻이 서려 있다고 한 것이다.

 

 

 

 

 

 

 

 

 

 

 

문인화의 참뜻이란 그것을 단순히 기법의 능숙 여부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문인의 정신과 기품이 살아 있는가 아닌가를 묻는 데 있다.

그래서 19세기 중엽, 문인화풍이 매너리즘화되어가는 세태에 대하여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진원소(陳元素)·승백정(僧白丁)·석도(石濤)로부터 정판교(鄭板橋)·전택석(錢澤石)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오로지 난초를 잘 그렸고

그 인품(人品) 또한 고고하고 빼어났으니, 화품(畵品)도 그 인품에 따라 상하를 정할 것이지 (인품을 빼어버린) 화품만으로 논한다는 것은

불가하다.

 

 


인품과 화품


무위당은 그의 그림이나 글씨에 찍는 머릿도장으로 "원주인(原州人)"이라는 문자도장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분명 원주사람이다. 그는 원주에서 태어나 원주에서 자랐고 줄곧 원주에서 살아왔다.

원주를 떠난 적이 있다면 오직 한번 서울대학교 미학과 제1회 입학생으로 대학생활을 하던 시절이다.

대학 3학년 때 6·25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이내 원주로 돌아온 이후 줄곧 여기를 떠나지 않았다.

 

 

 

 

 

 

 

 

 

 

 

 

 

 

 

 

원주에서 그는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린 교육운동·사회운동을 착실히 전개해나갔다.

원주 대성학원을 설립하면서 청년교육에 앞장섰고, 밝음신용협동조합을 만드는 산파역이 되어 원주에서 신용협동조합이 뿌리내리고

고리대금업을 축축하는데도 성공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지역사회의 일꾼이자 지도자로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1961년 5·16군사꾸데따가 일어나면서 사회의 지도급 인사가 무더기로 구속될 때 그도 감옥으로 끌려갔다.

갖은 회유와 유혹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지켰고 그 아픔을 감내하고는 원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여전히 원주사람으로 살아갔다.

1970년대, 지금 생각하면 그저 캄캄해서 앞이 막막했던 유신시절, 그는 이제까지 살아오던 방식대로 그곳에 뿌리내린 자연인으로

살아가면서 지학순 주교의 천주교 원주교구, 그리고 당시 뜻있는 젊은이들이 주도하던 가톨릭농민회의 일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고

후견하였다. 시인 김지하가 원주로 내려와 그에게 깊은 감화를 받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리하여 70년대 유신독재에 대항하는 첫 불꽃이 원주에서 일어났던 것을 사람들은 무위당과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1974년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어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을 때 학생운동은 인혁당 배후조종을 받은 것으로 조작되는 엄청난 정치적 음모가

있었다.

이때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이 그 배후인물로 부각됨으로써 민청학련은 불온집단이 아니라 양심세력의 결집이었음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의 추이에서 지학순 주교가 양심선언을 하고 수사기관에 출두하는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은 무위당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무위당의 인품과 사회적 실천은 그런 것이었다.

자신이 한 일을 크게 드러내는 법이 없으며, 그렇다고 그가 유창한 논리를 펴거나 세상을 경륜하는 지혜를 내세운 일은 없었다.

오직 자연의 순리, 일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자세에서 사물과 일을 대했고 인간관계를 유지해왔다.

서울의 이름 높은 지식인에서 원주의 구두닦이 소년까지 폭넓은 인적 유대를 갖고 있는 것은 오직 그의 인품 덕분이다.

 

 

 

 

 

그의 사회운동에는 언제나 하나의 정신이 유지되었다.

그는 항상 참된 인간적 가치와 그것의 사회적 실천을 인생 지고의 가치로 삼아왔다.

그는 인간이 자연 속의 한 동물이고, 뭇 동물 속에서의 인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원했다.

인간은 동물이기에 속일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자연의 속성이 있고,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에 지켜야 할 덕성이 있다는 사실,

그래서 오늘의 인간이 개조해나갈 자연의 모습과, 인간이 파괴한 자연의 원상복구를 동시에 주장해왔다.

이런 정신을 그는 고전에서 찾았고 노장철학, 선가의 가르침을 익히고,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의 사상과 세계관에 깊은 감화를

받기도 했다.

 

 

 


 

 

 

 

 

 

 

 

 

 

 

 

 

  

 

무위당의 창작자세


무위당이 글씨를 쓰고 난초를 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초의 일이었다.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보안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요시찰인물이 되었을 때

그는 붓을 잡고 "먹장난[戱墨]"을 시작했다.

반은 감시자의 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고 반은 자신의 정서적 욕구에서였다.

 

 

 

 

 

 

 

 

 

 

 

 

무위당이 그때 처음으로 붓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할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아가면서 글씨를 배웠다.

밖에 나가 무작정 뛰노는 것이 한없이 즐거웠던 5, 6세 어린 시절에 붓을 잡고 신문지 전체가 먹으로 가득차도록 획을 긋고

또 그어야 했던 호된 훈련과정이 훗날 그의 예술세계를 만들어가는 기본이 되었던 것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붓을 잡는 것은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할아버지인 여운 장경호(旅雲 張慶浩)는 그 자신이 글씨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당시 관동지방의 이름난 서화가인 차강 박기정(此江 朴基正)과 절친한 사이였다.

차강은 오늘날에는 그 이름이 잊혀진 채 그저 강릉의 묵객(墨客)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당대의 문사이자 지사였다.

한일합방이 되자 의병에 참여했고 끝내 '서화협회(書畵協會)'에조차 참여를 거부하면서 자신의 뜻을 지켰던 분이다.

무위당의 서화는 이러한 차강의 훈도 아래 이루어졌던 것이다.

 

 

 


 

 

무위당이 처음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 낙관을 할 때 사용한 호는 청강(淸江)이었다.

혼탁한 세상속에서 맑은 강물이란 얼마나 뜻깊고 아름다운가 하는 마음에서 붙인 자호(自號)라 한다.

힘겹게 살아가면서 맑은 강을 만나면 거기에 잠시 앉아 쉬어보자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주로 원주에서, 한번은 춘천에서 열었으니 모두 강원도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원주 봉산동 키 큰 측백나무 울타리가 둘러쳐 있는 집에 찾아오는 손님, 뜻을 같이하고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글씨와 그림을 선물로 주곤 하였다.

거기에 반드시 그 인물이 지켜야 할 경구와 격언 또는 시구를 적어주곤 하였다.


 깊은 골 난초는 사람이 없다 하여 그 향기를 그치지 않는다

幽蘭不以無人息其香 

넓고 활달한 이 나라 이 강산

飄逸此江山 

맑게 비운 마음 淸虛

 

 

 

 

 

 

 

 

 

 

 

 

 

 

 

 

 

 

 

 

그리고 그림을 받는 사람의 이름 뒤에는 아형(雅兄), 학형(學兄)이라는 표현보다는 도반(道伴)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벗이라는 뜻이다.

무위당의 이런 창작자세는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80년대 말 수많은 재야단체들이 '기금마련전'을 너나없이 열다시피 했을 때 무위당은 한번도 출품을 거절한 일없이,

오히려 부탁한 것보다도 더 많은 작품을 보내주곤 했다. 그리고는 사례비를 받은 일이 없다.

그때 그가 내게 했던 말은 "만약 이 그림을 그리면 얼마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어오면, 그날로 나는 붓을 꺾을 것"이라고 했다.

1988년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은 '한살림운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위당의 이런 창작자세를 나는 무한대로 존경한다.

지금 세상에 이런 분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고 그 옛날이라고 몇이나 있었겠는가 싶다.

나는 청나라 때 문인화가인 정판교의 글을 읽다가 꼭 무위당의 창작자세에 들어맞는 구절을 만나게 되었다.

 

 

 


 

무릇 내가 난초를 그리고, 대나무를 그리고, 돌을 그리는 것은, 세상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을 위로하는 데 쓰고자 함이지,

그것을 갖고 편안한 세상사람들과 즐기고자 함이 아니다.

[凡吾畵蘭畵竹畵石 用以慰天下之勞人 非以供天下之安享人也]

 

 


무위당의 글씨와 그림


무위당의 글씨 또한 직업적인 서가의 그것과 길을 달리하는 면이 있다. 그것은 정통서법을 벗어났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서예계의 사정에 구애됨이 없이 글의 내용과 서체 모두에서 이 시대에 필요한 정서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뜻에서 나는 그 말의 참뜻이 유지되는 한에서 재야서가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다.

 

 

 

 

 

 

 

 

 

 

무위당의 글씨는 예서체(隸書體)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예서체는 잘 짜여진 구조의 멋과 삐침과 파임이라는 힘을 자랑한다.

그리고 또한 초서나 행서와 달리 형태가 간명하여 "무지렁이도 알아볼 수 있는 민중적 서체"라는 일면도 지니고 있다.

이런 예서체를 선생은 아주 소탈한 맛으로 전환시키면서 부드럽고 편안한 글씨,

그러나 힘과 균형이 들어있는 독자적인 서체로 발전시켰다.

서법의 생명력이라 할 골기(骨氣)를 유지하면서 유연하고도 자연스러움이 풍기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무위당이 어떻게 이처럼 독자적인 서체를 지닐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붓을 다룬 오랜 연륜, 그의 삶과 인품, 언뜻 떠오른 것은 거기에서 연유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나는 그 해답을 3년 전에 얻어낼 수 있었다.

 

 

 

 

 

 

 

 

 

 

무위당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요즈음 길거리에서 군고구마 장수 아저씨가 서툰 솜씨이지만 삶의 필요에 의해 나무판자 위에

정성스레 쓴 '군고구마'라는 글씨 속에서 이 시대 글씨의 한 이상(理想)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인생이 거짓없이 녹아들어 있는 글씨,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무심(無心)과 무위(無爲)의 철리(哲理)이다.

 "뛰어난 기교란 어수룩해 보이는 법"이라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서체이다. 그것이 무위당 글씨의 본질이고 특성인 것이다.


무위당의 난초는 참으로 독창적인 것이다.

그는 난초를 치면서 고귀한 멋이나 곱상한 생김새를 자랑하는 춘란(春蘭)이나 기품을 앞세운 건란(乾蘭)은 즐기지 않는다.

무위당의 난초는 한마디로 조선 난초이다. 잎이 짧고 넓적하면서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잡초 같은 난초를 좋아한다.

그것도 바람결에 잎을 날리면서도 꽃줄기만은 의연히 세우고 그 향기를 펼치는 풍란(風蘭)을 즐겨 그린다.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화제(畵題)를 붙인다.

 

 

 

 

 

 

 

 

 

 

 

 

 

 

 

 

 

 

 

 

 

무위당의 난초 그림에서는 맑은 품성과 강인한 생명력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믿음 ── 선생이 주창하는 생명사상과 정신을 표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 난초는 우리가 민중이라고 부르는 힘차고 건강하고 소탈한 심성의 인간상에 들어맞는 민초도(民草圖)로 전환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무위당은 만년에 들어 여기에 새로운 형식을 하나 더했다.

그것은 난초 그림에 사람의 얼굴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마치 선화(禪畵)처럼 스스럼없이 그은 몇 가닥의 붓자국으로 그린 간필법(簡筆法)의 난초들은 그대로가 사람의 얼굴이고 몸매가 된다.

웃는 얼굴, 생각하는 얼굴, 때로는 부처님의 모습까지 연상되는 무심(無心)의 경지이다.

 

무위당의 이 독자적인 얼굴 난초는 그가 문인화가로서 이 시대 미술에서뿐만 아니라 문인화의 오랜 역사적 전통의 맥락에서

언급될 만한 징표로 여겨진다.

그것은 결코 기법의 수련으로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그의 맑은 인품과 꿋꿋한 삶속에서 터득된 하나의 결실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쩌면 그가 창조적인 문인화의 세계를 보여준 마지막 화가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 하는 사람 ── 도반(道伴)으로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을 무한히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