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푸루트 벵글러

2008. 11. 30. 11:46음악/음악 이야기

 

 


 

 히틀러 파시즘과 음악의 제사장 - 푸르트 벵글러

 


 며칠 전, 어느 일본 전자업체가 CD 생산을 중단하다고 밝혔다.

지난 1980년대 초에 탄생하여, 아날로그 문화의 상징이었던 LP를 몇몇 애호가들의 골치덩어리 유산으로 몰아 넣었던

디지털 시대의 총아 CD가 이제는 실물로 만져지지 않는 '디지털 파일'이라는 극단적인 디지털 문화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기술 발전의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우리 주변에서 축음기는 물론 LP를 가진 사람을 만나보기도 어렵다는

것에서 알 수 있는데, 그 진범(?)이었던 CD도 서서히 퇴락할 조짐을 맞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 발전의 '존속 살해' 과정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 할지라도 실은 그 몇몇 과정에서 소중한 기억들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다.

LP를 재생시켜 주는 턴테이블에 떨리는 마음으로 바늘을 올려놓고는 음악이 들리기 전에 소파에 재빨리 물러가서

심호흡 한번 하고는 이윽고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음악에 온전히 영육을 맡겨버리는 그런 제의적인 시간들이 CD의 리모트

콘트롤로 완전히 사라졌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떠한가.

LP가 CD로 바뀌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작업 가운데 하나는 저작권 시효가 소멸된 저 4,50년대의 역사적인 연주를 '복각'해낸

마이너 레이블의 수고에 의하여 몇 십만 원을 주고도 구할 수 없었던 옛 LP 초기 시절의 명반을 저렴한 비용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은 틀림없는 디지털 기술의 축복이었다.

여러 음반사들에서는 저마다 개발한 독자적인 기술로 잡음이 많은 옛 음원을 말갛게 재현하여 수집가들의 용돈을 축내게 했다.


 거기까지는 좋은 일인데, 잡음을 없앤다고 하는 것이, 그만 역사적인 어떤 '잡음'까지도 소거해버린 일이 있었다.

글쎄, 그것이 잡음이었을까, 싶은 그런 기억인데,

다름아니라 유럽 클래식 문화 유산의 적통자로 불렸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1951년 바이로이트 축제가극장의 무대에

올라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을 연주하는 음반 때문에 적어 본 것이다.

이 음반은 푸르트벵글러 개인에게도 큰 의미가 있지만 이 '9번 교향곡 합창' 연주에 있어 그 어떤 후대의 명연과 비교 자체를

거부하는 역사적인 명연으로 꼽힌다.

옛 LP 시절에는 지휘를 하기 위해 무대에 등장하는 푸르트벵글러의 발자국 소리가 '저벅, 저벅, 저벅......' 하는 그 소리가

들렸었다. 그런데 CD로 복각하면서, 이 '잡음'을 없애버린 것이다. 과연 그것을 '잡음'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 본격적인 얘기를 해보자.




 푸르트벵글러는 19세기 후반, 1886년 1월 25일에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고고학자인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가 문화예술이 아닌 다른 일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1920년대부터 전문 지휘자로 활동하였고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을 거쳐

1922년에 그 자신의 음악적 왕국이었던 베를린 필하모니를 맡았다.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음악 유산이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다.

지휘자의 시대, 실황 연주의 시대 그리고 음반 녹음의 시대가 클래식 문화의 전형이 되기 시작한 20세기 중엽에

그의 이름은 독일계 음악 유산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바그너, 브람스 등의 연주에도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지만 역시 푸르트벵글러의 본령은 베토벤이었다.

베토벤은 자신의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베토벤은 당대 서구 음악사의 모든 것은 자기 내부로 빨아들여 새로운 음악 양식을 토해냈다.

소나타 양식으로 요약되는 그의 음악은 현재까지도 서구 음악의 가장 완벽한 양식으로 불리고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위하여 작곡한 최초의 예술가였다.

베토벤의 시대에는 자기자신의 고난과 환희를 위해 작곡하는 것이 하나의 도전이고 모험이었다.

베토벤은 자기 내면을 위해 곡을 썼다.

그것은 곧 근대를 위해 곡을 쓰는 것이었으며 근대의 절정기에 다다른 유럽의 영혼을 위해 작곡을 하는 것이었다.

베토벤은 또한 지휘를 작곡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은 최초의 예술가적 지휘자였다. 그

것은 자기 작품은 자기가 해석하고 지휘해야 한다는 신념의 표현이었다.

제1바이올린 주자와 건반 주자들이 지휘를 담당했던 시기에 지휘자의 절대적인 권위를 세운 사람이 베토벤이었다.



 바로 그러한 베토벤을, 푸르트뱅글러는 모든 연주자들의 세포를 떨게 만드는 주술적인 해석과 장대한 조형미로 재현했다.

그에게 닥친 시련은 히틀러 파시즘이었다.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토스카니니 등 수많은 지휘자들이 히틀러를 피해 망명하였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히틀러 밑에 남았다. 히틀러는 그를 음악 책임자로 명하였다.

그는 히틀러 생일 축하 연주회에서 지휘를 하기도 했다.

아래 영상이 바로 그것으로 1942년 4월 20일의 연주다.

4월 20일은 히틀러의 생일이다. 





 이때의 실황 연주는 방송사에 의해 녹음으로 남았는데,

이것이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에 의해 모스크바로 옮겨졌다가 훗날 러시아의 국영 음반사인 멜로디야의 수장고에서

발견되어 오늘날 CD로 구해 들을 수가 있다.

아래 영상은 그 마지막 대목, 합창교향곡의 피날레 부분이다.

히틀러 파시즘의 최고 수뇌부들이 '하켄크로이츠' 깃발 아래에서 베토벤을 지휘하는 푸르트벵글러를 감상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든 히틀러에 가담했던 책임 인사들은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사회 활동이 중단되었다.

푸르트벵글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히틀러 시대의 행적 때문에 공식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다가 사회 전체적으로 복권 운동이 벌어지면서 푸르트뱅글러에게도 부활의 노래가 들려왔다.

그의 복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히틀러 치하에서 쉼 없이 활동하였고 특히 히틀러를 위한 수많은 무대에 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그가 망명을 떠나지 않고 베를린에 남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의 저명한 권능에 의하여

많은 유태인 연주자들이 생존할 수 있었고 독일 음악의 전통도 끊어지지 않았다는 근거를 제시했다.




 독일 사회는 우선 시인 고트프리트 벤부터 복권시켰다.

히틀러의 광기가 치솟아오를 무렵에 소설가 토마스 만이 ‘정신적으로 증오해 마땅한 무리에 동조함으로써

당신은 얼마나 많은 동료를 잃었는가’ 하고 비판을 했지만

당시 고트프리트 벤은 ‘내 힘이 다하는 데까지 나의 민족을 위해 정당한 길을 가겠다’고 응수했다.

그에게는 '민족'이 절대적 가치였고 히틀러는 저 비스마르크 철혈 시대부터 주창되어온 게르만 민족주의의 화신이었다.

벤은 "인생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드넓은 평야, 대지, 소박한 언어, 다시 말해 오로지 민족만이 존재하는 순간이 있다"며

히틀러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랬던 그도 고뇌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뒤늦게야 자신이 생각하는 민족에 대한 추념과 히틀러가 거의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몰래 시를 썼다. 그 시를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이른바 발표되지 않은 '서랍 속의 시'가 전후에 발견됨으로써 고트프리트 벤의 복권 절차를 이뤄질 수 있었다.

고트프리트 벤은 1948년에 게오르그 뷔히너 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과정은 독일인들이 몇몇 상징적인 인물들을 복권시킴으로써

그 자신들의 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지우려는 집단의식이기도 했다.

 

  지금은 CD로 구해들을 수 있지만 예전에는 LP로 들어야 했다.

그때 그 LP에는 무대에 오르는 푸르트벵글러의 발자국 소리가 실려 있었다.

CD로 복각하면서 그 '잡음'이 사라졌다. 아쉬운 일이다.

아래 영상은 푸르트벵글러가 전후인 1948에 영국 런던에서 브람스 교향곡 4번을 지휘하는 장면이다.

푸르트벵글러는 폐렴과 간염으로 고생하다가 1954년의 오늘, 11월 30일에 바덴바덴 근처의 요양소에서

68살로 문제적인 삶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베를린 필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에리히 클라이버, 한스 크나퍼츠부쉬 등의 반대 의사에도 불구하고

야심만만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게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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