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18. 18:40ㆍ음악/음악 이야기
인간의 위대함을 믿고 니체의 초인정신을 가지고 음악으로 세계를 바꾸려고 한 사람,
자신이 가장 위대하기에 선배들 중 베토벤만을 인정했던 사람, 바로 바그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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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부에 로비하는 데도 성공해서 자신의 오페라 전용극장 까지 만들었는데
이곳은 지금도 바그너 성지 순례자들로 붐빈다.
이 축제극장은 바이로이트에 세워졌으며 바그너의 오페라는 여기서만 공연해야 했다.
그 극장은 일반극장과 몇가지 면에서 다르게 설계되어 있다.
바그너는 공연장에서의 사교활동을 매우 싫어했다.
자신의 위대한 음악을 들으러 오는 관객들이 로비에서 수다떠는 모습을 참을 수 없었던 그는
극장을 설계하면서 아예 로비를 없애버렸다.
중간박수 금지 법칙도 등장했다.
악장과 악장 사이에 박수치지 말라는 규칙이다.
곡의 흐름이 깨지고 연주자에게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덕분에 공연장은 정숙해졌지만
관객들은 비싼 표 내고 들어가서 박수 칠 타이밍을 알아맞추기 위해 벌벌 떨게 되었다.
슈만이 보기에 리스트나 바그너는 너무 효과 위주의 음악을 추구했고,
심지어 객석에 그들이 고용한 박수부대를 심어놓고 반응을 조작한다는 설까지 들려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박수치는 역할을 맡았고, 또 어떤 사람은 감동을 받아 훌쩍거리는 역할을 맡았으며,
연주가 끝나면 기립박수를 치는 일은 기본이었다.
옆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면 자연히 영향받기 마련인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브람스는 점잖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브람스의 라이벌로 비춰지는 것 자체를 매우 수치스럽게 여겼고,
가는 곳마다 브람스의 음악을 비난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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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펌)
글 쓴이 : buffaloblues
바그너는..젊은 시절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혈기왕성한 젊은이었습니다.
그의 작품활동 시기 중 초기와 전기..즉..리엔치, 유령선(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까지만 하더라도
다른 오페라 작곡가들과 동급으로 취급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작품인 '로엔그린'에서 바이에른의 젊은 국왕인 루드비히 2세로부터 열광적인 총애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루드비히 2세의 바그너에 대한 끊임없는 지원이 시작됩니다.
바그너가 국민적인 관심을 받기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발표할때쯔음인데요...
그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음악은..당시에 충격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작품을 처음 작곡하고나서 극장 주인에게 연주를 의뢰했을때,
극장 주인이 이 작품은 도저히 연주될 수가 없을 정도로 난해하다며 대관을 거절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실제 이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자 그 음악적 충격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트리스탄'에 중독되었고,
당시 독일의 많은 젊은이들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비운의 사랑에 감화(?)되어
연인끼리 자살을 하는 그런 세태도 나타났다니..당시 그 작품의 파장은 대단한 것이었나봅니다.
곧이어 '뉘른베르그의 마이스트징어'와 4부작 '니벨룽의 반지'가 발표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바그너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잘 아시는 니체도 당시 열렬한 바그너 신봉자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독일인들이 바그너를 찬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그너의 음악은 기존의 음악관을 완전히 뒤흔들정도로 새롭고, 그리고 자극적이었습니다.
당시 독일의 음악계의 지존은 슈만-브람스-요아힘 이 라인을 필두로하는 '절대음악'지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바그너 음악은 요상하고, 귀를 자극하는 저속한 음악이었고..구조적으로도 불완전한 괴상한 음악이었습니다.
그래서, 바그너 지지 세력과 기존의 반바그너 세력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이 싸움은 단순한 음악가들간의 싸움이 아니라 식자들은 신문에서 서로 논박을 하고,
서민들은 술집에서 이 주제로 말다툼을 할 정도였습니다.
마치 몇년전에 HOT와 제키 팬들간의 싸움이라고 하면 비슷할까요? ^^; 그 싸움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지요.
바그너의 음악은 다분히 민족적이고 계몽적입니다.
음악은 음악자체로서 가치가있다고 여기는 절대음악론자-반바그너파-에게 음악을 계몽의 도구로 사용하는 바그너는
저속하기 이를데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그너의 음악은 혁신적이고 혁명적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극은 지극히 게르만 민족적이고 계몽적이었습니다.
바그너의 음악은 게르만 민족의 민족성을 자극했습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당시 시대상입니다.
산업혁명기였고 제국주의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영국, 프랑스는 산업혁명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하고 있었고,
동시에 강력한 군대로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을 말할 것도 없었구요. 당시 3류 국가로 취급받던 러시아조차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앞서 나가고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서유럽 국가가 몇개 있었습니다. 바로 독일과 이탈리아입니다.
지금은 독일, 이탈리아..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당시는 여러 작은 국가로 분할되어 있었고..
기록을 보면 게르만 민족은 당시 '민족성'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당시 독일인들은 산업혁명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자원, 자본이 부족했는데..그 이유를 유태인들의 담합으로 봤습니다.
유태인들이 자본과 자원을 가지고 독일인들을 착취한다고 여겼던거죠.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그것이 틀린말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독일내에서 유태인들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다시 바그너로 돌아가서 바그너의 몇몇 작품(니벨룽의 반지, 뉘른베르그의 마이스터징어)에서는
당시 유태인을 비하하는 듯한 대본, 연출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 작품자체의 '민족의식의 고양'과 더불어 당시의 세태를 잘 풍자합니다.
즉, 독일 민중들의 당시 시대정신과 잘 맞아떨어진거죠.
그래서, 독일민중은 바그너에게 열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독일에 바그너가 있었다면, 이탈리아에는 베르디가 있었죠.
이 두 작곡가의 작품들이 당시 두 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에 섰었다는 것은 아주 시사하는 바가 큰 것입니다.
당시의 시대정신, 민족주의와 부합했다는 것입니다.
바그너의 작품에는 그런 민족주의적인 것, 그리고 유태인에 대한 비난 뿐만 아니라..당시 정치세태를 풍자하기도 합니다.
니벨룽의 반지에서 탐욕스런 난장이 '니벨룽'족은 당시 독일인들이 무대위의 '니벨룽'들을 보면
'아 저건 유태인들을 나타내는 것이로군' 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작품에는 신들이 나오고, 그리고 거인족들이 나오고, 인간이 나옵니다.
이 종족들은 당시 신분계급을 묘사하고 있는데..
4부작 니벨룽의 반지의 마지막 편 '신들의 황혼'에서는 신들이 몰락을 하고..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가지게 됩니다.
즉, 왕정이 몰락하고 민중들의 세상이 올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작품은 게르만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성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니체를 필두로 한 당시 젊은 지식인들, 민중들은 그래서 바그너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니체는 나중에 바그너에게 등을 돌리게 됩니다만..그건 논점을 벗으나므로.)
바그너의 작품은 그 이후 독일을 비롯한 전 유럽에서 끊임없이 연주됩니다.
바그너의 임종을 전후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바그너에게 흠뻑 빠진 젊은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바그너와 히틀러는 개인적인 교분이 없었습니다. 만난적도 없었죠.
하지만 히틀러의 바그너에 대한 숭배는 대단했습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가장 먼저한 일 중의 하나가 바그너의 미망인 코지마 바그너(리스트의 딸이기도 하죠)와 그의 가족을 찾아가서
그들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히틀러 집단이 유태인을 학살한 이유는 단순한 인종차별에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위에 잠깐 언급되었지만..게르만 민족이 가지고 있던 유태인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시작됩니다.
히틀러는 유태인은 그에 대한 응당한 댓가를 치뤄야한다고 생각했고, 그 댓가는 죽음이었습니다.
히틀러는 극우, 즉 지독한 민족주의자입니다.
자신이 민족의 선지자라고 믿었으며, 국민들을 그렇게 세뇌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용하기로 한 것이 바그너의 음악이었습니다.
히틀러와 그의 측근들은 선동의 대가들이었습니다.
게르만 민족성을 자극하는 - 동시에 아주 육감적이기까지한 - 바그너 음악을 히틀러의 연설,
히틀러의 가두 행진에 확성기로 온 도시에 울리게 하였습니다.
히틀러가 차를 타고 가두 행진을 할때 차들을 피라미드 대형으로 만들어서 자신이 그 중심에 섰다고 합니다.
그리고, 배경음으로 그 경건한 바그너의 '순례자의 선율(탄호이저 서곡)'을 틀었습니다.
그것을 본 독일인은 히틀러가 순례자이며 자신을 구원해줄 선지자로 믿기 시작합니다.
바그너는 히틀러에게 철저히 이용당합니다.
당시 바그너의 아들은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 작품 전용 극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지금도 역시 운영중이죠),
히틀러는 전쟁 와중에서도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음악이 끊이지 않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습니다.
휴가를 나온 장병들은 바이로이트에 들러서 바그너의 작품을 감상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강력하게 권장받았다고도 합니다.
당시 독일 국민에게 바그너의 음악은...일종의 우리나라의 애국가와 같은 것이지 않았겠느냐..라고 추측해봅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히틀러는 사망합니다(그렇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 제 3제국은 멸망하고 세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유럽인들에게..그리고 특히 유태인들에게 바그너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의 음악 연주가 실질적으로 금지되어있습니다.
(몇년전에 주빈 메타가 이스라엘에서 바그너 음악을 연주하려다가 혼쭐이 났었죠.)
제 3제국을 도왔다는 혐의로 바이로이트 극장도 문을 닫게 되었고,
역시 바그너를 연주하던 지휘자, 연주자들도 연합국의 이름으로 활동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극장도 다시 문을 열고, 많은 연주자들은 사면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다시 바그너의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고..
오히려 이제 바그너의 음악은 단순히 독일민족의 음악이 아닌 세계인의 음악으로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바이로이트 극장은 현재 바그너의 자손이 계속 운영하고 있는데..
최근 제작, 연주되는 '마이스터징어' '니벨룽의 반지'에서는 원래 대본에 지시된 연출을 완전히 수정하여
유태인들과의 화해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매년 여름에 바이로이트에서 개최되고 있는 바이로이트 축제(바그너 음악 축제)는 유럽의 3대 음악 축제중에서 하나가 되었고,
'니벨룽의 반지'의 경우 이미 10년치가 예매가 끝난 상태입니다.
현재 독일 국민들이 바그너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진..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추측컨데..'아리랑'을 떠올려 보면 비슷할 것 같습니다.
일제 시대때 항일투쟁하던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아리랑'이 당시의 자신의 슬픈 마음을 달래주는
그러면서 투쟁을 의미하는 그런 노래였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아리랑'은 '아리랑'일 뿐입니다.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을 아리랑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그 가락에서 느꼈던 그 감정을 지금 우리도 과연 느끼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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