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피아노 3중주 '대공'

2009. 5. 8. 10:31음악/음악 이야기

 

 

 

벗에게 바친 장대한 연주

         '이별'이 아니라 '안녕'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문학사상사)에는 호시노라는 청년이 등장한다.

고등학교를 겨우 마친 화물 트럭 운전사에다 사장에게 혼날 것을 걱정하는 평범한 청년이다.

게다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 심성까지 갖췄다. 한마디로 단순하고 착하다.


 

 

 

 

어느날 그가 찻집에 들른다.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호시노는 왠지 그 소리가 마음에 들어 주인에게 묻는다.

“아저씨, 저게 무슨 음악이죠?”

“베토벤의 ‘대공 트리오’랍니다. 베토벤이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한 곡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키는 약간의 코믹한 설정을 곁들여 베토벤의 피아노 3중주 ‘대공’을 소설에 등장시킨다.

찻집 주인은 계속해서 말한다. “루돌프 대공은 열여섯살에 베토벤의 제자가 돼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베토벤을 깊이 존경하고 여러모로 도움을 줬지요.

베토벤은 마흔살 때 이 작품을 완성했는데, 이 곡을 끝으로 피아노 트리오에 두번 다시 손대지 않았습니다.”

지면상 원문을 좀 줄였다.

어쨌든 찻집 주인이 ‘대공’에 대한 설명을 백과사전식으로 늘어놓자, 호시노는 “알 것 같다”고 머리를 끄덕이며 찻집을 나선다.

그리고는 여관으로 돌아가,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나카타 노인에게 말한다.

 “베토벤은 (귀가 안 들렸는데도) 좌절하지 않았어. 그 뒤에도 작곡을 계속해 훌륭한 음악을 만든 거야.

 ‘대공 트리오’도 청각을 잃고 작곡한 거래.

그러니까 아저씨도 글을 모른다는 게 불편하고 고통스럽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

대략 이 정도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공’ 해설.

이만하면 ‘대공’에 관한 중요 사항들은 대체로 언급된 셈이다.

첫째, 대공과 베토벤의 우정. 루돌프 대공은 베토벤의 후원자이자 피아노 제자였으며, 무엇보다 진심어린 우정을 나눈 벗이었다.

1809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공격했을 때, 황실은 빈을 탈출해야 했고 대공도 그 대열에 있었다.

그때 베토벤이 진정으로 슬퍼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작곡했던 곡이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

베토벤이 자신의 음악 가운데 악장마다 부제를 붙인 것은 이 ‘고별’과 교향곡 6번 ‘전원’뿐이다.

 

베토벤은 ‘고별’(Lebewohl)을 프랑스 출판업자가 일상적 인사말인 ‘아듀’(Adieux)로 번역하자 화를 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대공은 내게 소중한 친구’라는 그의 뜻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둘째, 청각을 잃은 후 작곡한 마지막 피아노 3중주라는 점.

정확히 말해 마흔살의 베토벤은 완전히 귀가 멀진 않았다.

약간의 청력이 남아있던 그는 1814년 자신이 직접 피아노를 맡아 이 곡을 초연했다.

당연히 연주는 엉망이었을 터. 베토벤의 친구 루이 슈포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화려했던 비르투오조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포르테에서 어찌나 세게 건반을 두드렸는지, 피아노 현이 덜거덕거릴 정도였다.”

이것이 ‘피아니스트’ 베토벤의 마지막 연주였다.

베토벤은 그날 이후 다시는 공식적 연주회에서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는 피아노 3중주도 더 이상 작곡하지 않았다.

그는 ‘대공’이라는 곡에 이르러 ‘피아노 트리오’라는 장르로 하고 싶었던 말을 다했던 모양이다.

원래 피아노 트리오는 집안이나 살롱 같은 작은 공간에서 주로 연주됐던, 말하자면 여흥적 성격이 강했던 장르.

하지만 베토벤의 ‘대공’에 이르러 그런 관념은 여지없이 깨졌다.

이 곡은 피아노가 리드하는 1악장 첫주제부터 웅장하며, 그 규모는 마지막 4악장까지 흔들림없이 이어진다.

베토벤은 그렇게, 마흔살의 나이에 일찌감치 ‘거장적 완결성’의 경지에 올랐다.

소설 속 호시노의 말처럼 “대단하다”고 할밖에.

하루키가 소설에 등장시켰던 음반은 루빈슈타인, 하이페츠, 포이어만 트리오의 연주(사진).

이른바 ‘백만불 트리오’의 연주다. 코르토, 티보, 카잘스도 이에 비견되는 역사적 연주. 모두 모노 녹음이다.

58년 녹음된 오이스트라흐 트리오의 연주는 스테레오 녹음. 앞선 두 음반보다 좀더 나은 음질을 갖췄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전곡듣기)

 

 Ludwig van Beethoven Piano Sonata No. 26 in E flat major

'Les Adieux' Op. 81a

 - Wilhelm Backhaus, Piano  

 

 
"고별"은 심각한 의미의 "이별"이 아니라 단순히 "안녕" 이라는 의미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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