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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펌글 · 자료/문학

未堂 - 高銀

 

 

 

송하선, 미당평전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1980년 5월이 지나갔다. 이미 未堂은 8할 이상이 부정되었다.

1983년 내가 세상에 돌아왔을 때 어느 회합에서 그와 마주치게 되었다.

10년 가까이 만나지 않은 처지였다.

"왜 안 오시는가, 꼭 와, 오란 말이여"라고 그가 말했다.

그때 내 입에서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한마디 대꾸가 튀어나왔다.

"선생님 떠나시면 가겠습니다."

한동안 그는 내 하반신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나도 돌아섰다. 그는 1915년 생이고 나는 1933년 생이었다.

 

- 高銀, 창작과 비평 (p1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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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지식인이란 교활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특히 시인의 경우(일부이긴 하지만) 자신에게 닥치는 생명위협의 순간에는 잠시 비껴 서 있다가,

이름을 드날릴 순간이 오면 칩거하던 동굴에서 재빠르게 뛰쳐나와 얼굴을 내려는,

교활한 면모를 보이는 사람이 있으니 하는 말이다.

그러한 현상을 일제시대는 젖혀두고라도, 6.25 공산치하건  4.19학생의거건  5.16뒤 유신치하건,

상황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물론 80년 광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6.25 때 피난 갔던 文士들의 일화는 많이 남아있지만,

공산치하에서 오직 민주이념으로 저항했다는 문인의 일화는 들은 일이 없다.

4.19 때 불길 속에 뛰어들어 산화한 학생은 있었지만,

그 불길의 현장에서 이슬로 사라진 시인의 이름을 들은 적은 없다.

5.16 뒤에도 김지하의「五賊」만이 기억에 있을 뿐, 생과 사의 갈림길에 맞닿아 있었던 문인은 기억에 없다.

80년 광주의 현장엔 보이지 않았던 문인들이 칼날이 지나간 뒤에 얼굴 내려 하던 문인은 소흘찮게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 탓이로 소이다' 가 아니라더라도 우리 모두가 죄인일 수도 있다.

물론, 그때 그때마다 현장에 뛰어들었어야 했다는 말은 아니다.

사건의 현장에는 없었는데 마치 자신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기라도 한 듯이,

생색내려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무당도 진짜 신들린 무당은 칼날 위를 걸을 수 있을 때, 그를 진짜 신들린 무당이라 부를 수 있다.

명석이 깔려야만 굿을 하고 멍석이 깔리지 않으면 굿을 못하는 무당은 사이비 무당이다.

 

마찬가지로 사건의 현장에서 비켜 서 있다가,

어느 정도 저항할 만한,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을 만한 분위기가 조성됐을 때,

저항시를 지껄여대는 모습은 뜻있는 이들을 슬프게 한다.

저항시를 쓰지 말라는 얘기는 절대로 아니다.

저항시다운 저항시를 쓰려면,

민중의 앞장에서 등불이 되는 시를 써야 하고 칼날을 무릅쓰고 썼을 때 그 의미가 두드러질 것이라는 말이다.

굿 뒤에 병풍치는 격은 곤란하다는 얘기다.

 

미당의 '보신책'을 질타하던 고은씨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 했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없다.

물론 80년 광주의 현장에 그가 앞장 서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일도 없다.

김대중 사건에 연루되어 잠시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

 "1983년 내가 세상에 돌아왔을 때"라고 거드름을 피운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가 민주투쟁의 대열에 서 있었고

"민족 전체의 詩인 통일"을 말하며 통일지향적 입장에 있었던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정도의 이력서로 스승을 밟고 튀어보려는 얄팍한 행보는,

눈을 뜨고 바라보는 대다수 국민들의 박수를 받을 수는 없다.

 

필자의 고향 마을에 불이 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불이 난 집 안방에 갓난아이가 있는 걸 뒤 늦게 알았다.

동네 사람들이 불길을 잡으려고 몰려왔지만, 갓난아이 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순간,

그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 갓난아이를 보듬고 나온 사람은 뜻밖에도

미천하기 짝이 없는 평소 천덕꾸러기요, 병신 취급당하던 머슴살이하던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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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미당 담론』을 접하면서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사진)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사이에 끼어 있던 한 시인의 그림이었다.

물론 그것은 통일지향적인 그의 문학적 행보와 동궤同軌의 행동이요, 사진이랄 수 있지만,

그래도 어쩐지 동행한 여러 사람들을 젖히고 두 정치인 사이에 끼어 있던 모습은

바람직스럽게 비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왜 한 사람의 시인이 거기 끼어 있어야 하는가?

시인은 본래 野人이요, 自由人으로 서 있을 때 아름다운 법이다.

특히 거기 끼어 있던 고은씨 스스로도 "왜 문학이 권력에 종속되는가.

왜 시와 시인이 시대에 대한 저항적 자아를 성립시키지 못 하는가"라고 흥분하고 있는 것과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자신의 말대로 "현실의 여러 과녁으로부터 저만치 소개되어 있기보다, 돌아쳐 맞서는 산짐승의 태세"도 좋은 말이다.

'행동하는 지성' 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러나 그 '행동'은 시인에게 있어 언어로서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시인이 정치 일선에 나서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돌아쳐 맞서는 산짐승의 태세"를 말한 분이,

유독 두 정치인 사이에서 축배를 들던 모습은 결코 어울리는 장면은 아니었다.

아마 모르긴 모르되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미당의 '원죄'처럼 그 사진은 그에게 따라다닐 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서는 그동안의 김정일의 행적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될 일이다.

만약 먼 훗날, 통일 조국의 역사가 바로 설 때에, 김정일의 행적이 비판을 받는다면,

그래서 거기 두 정치인 사이에 끼어 와인잔을 부딪치는 장면이 문제가 된다면 어찌하겠는가.

자기 자신의 행보는 언제 어디서나 정당화되고, 그래서 정치적 행보도 정당화되고,

스승인 미당의 정치적 실수만은 비판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가능하지 않다.

 

한편, 거기 세 분 중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통일지향적 행보에 대해서는,

국민적 관심과 박수를 받은 일이므로 여기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한 때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苦行을 같이 하기도 했던 그의 투쟁(?)이나,

"민족 전체의 詩인 통일"이라던 그의 통일지향적 신념을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민주화 투쟁의 대열에 동참했던 일은 아름답고 정당했지만,

일단 대통령이 되고 권좌에 오른 뒤의 김대통령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은,

또 다른 '용비어전가'나 '어용시인'이 탄생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자기 성찰 없이 권력의 춤에서만 안주"했다고 미당을 꼬집은 분이,

"권력의 품"에 들어가 나란히 비행기에 오르는 모습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영원히 '野人' 이기를 희망하는 것이고,

나의 행동은 정의이고 남의 행동은 불의라는 말도 성립될 수 없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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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미당의 시를 놓고 '삶의현장에서 비껴선 정신주의'라는 비판의 소리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비판을 받고 있는 그는(미당은)

'시란 모름지기 예술적인 표현에 도달하려는 노력의 절정'인 것이라며,

이른바 '민중시'에는 '하나의 예술품을 만든다는 정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고 못박기도 한다.

또 '영생관(永遠주의)'에 대해서도 '현실도피'라는 말로 비판의 강도를 높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도 미당은 '현실에서 쓰러지지 않고 다음 세대를 넉넉히 기르면서,

영원에서 끈질기게 안 멸망하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대응하기도 했다.

 

"때때로 신세 한탄이 될때, 그때 난을 보면 힘이 돼.

나무와 같이 크지도, 인간들처럼 으스대지도 않는 한낱 풀이지만

대단히 점잖고, 사철 내내 푸르른 모습에선 절개와 끈기를 볼 수 있거든.

글쓰는 나에게는 더없이 고상한 친구지.

(중략)

직선으로만 갈 수야 있나?

그렇다고 지조를 굽히란 말은 결코 아니지.

적당히 굽을줄 아는 風流, 바로 동양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생명의 사는 힘이거든." 

 

- 한국일보 「명사에게 듣는다.」

 

  

  

 

그러나 그는,

사회의식 · 역사의식 · 정치의식 면에서는 낙제생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앞의 장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나라 역사와 함께 영원히' 남을 문학 업적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정말 문외한이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정말 물정 모르는(?) 천진스런 삶을 살았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물정 모르는' 삶의 반증으로 나타난 것이 '親日詩'를 남기는 등의 실수를 저지른 일이다.

이는, 그가 천상 시인일 수밖에 없었고, 그의 말대로 '소처럼 미련한 탓'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시대의식이 성숙되지 못한 탓이었다고 볼수밖에 없다.

 

그는 1943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최재서催載瑞(문학평론가, 친일파)가 경영하던 '인문평론사'에서

일본잡지 《국민문학》을 편집했으며, 이 과정에서 시 4편, 수필 3편, 평론 1편 등을 발표한 바 있다.

그리고 1944년 12월 9일 《매일신보》에 게재한 '마쓰이 오장 송가' 등을 포함,

이른바 '친일시' 계열의 글을 씀으로써, 그의 일생에 흠결을 남기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나온 그의 시집 『화사집』(1941년 간행)의 어디에도 '친일시'는 들어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열다섯 권의 시집 어디에도 '친일시' 는 없다.

이는 '친일시'가 미당시의 본령(本領)이 아니라는 뜻이다.

본령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실수를 自認한 방증(傍證)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기나긴 인생을 살면서 '실수'는 누구인들 없겠는가?

더구나 일제하의 질곡 속을 건넌 우리 민족의 누구인들 '실수'가 없겠는가.

정말 세계사에 그 유례가 없는 혹독한 탄압 속에서,

입에 풀칠하고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단 말인가?

흔히 '친일'하지 않은 일제시대 저항 시인으로 한용운이나 이육사를 예로 들지만,

한용운은 대처자자(帶妻子者)가 아닌 승려였고,

이육사는 만주 등지로 유랑하며 세계정세를 알았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리라.

 

하지만 필자는「『미당담론』에 대한 담론」이라는 글에서

"미당의 '친일시'나 '80년대의 실수'를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실수는 어디까지나 실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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